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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22:14

8


ㅈㅇㅁㅇ



 

이제는 땅에 뭐가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높게 떠오른 비행기에서, 태웅은 뻑뻑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뜰 뿐이었다. 인생의 반을 잠으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서태웅이 등을 붙이고 기대어 앉았는데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건 매우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내내 연락 두절이었던 강백호와 더불어 어떤 오해를 만들었을지 모를 스캔들 기사까지 겹치는 바람에 잠들지 못했던 시간이 만 하루가 되어가고 있었음에도 그가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까닭은,

 

‘7주 됐어. 그래도 많이 큰 거야.’

 

서태웅은 가만히 떠올린다, 강백호가 들고 있던 초음파 사진을. 그 새카만 배경에, 강백호의 뱃속에 오롯이 존재하고 있던 아이의 존재를. 아직 얼떨떨하고 실감이 채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서태웅은 그 어떤 때보다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이런 기분과 설렘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어서, 조금 낯설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설렘을 또 언제 느껴봤더라.

스무 살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다. 미국으로 떠나 온지 이제 막 일 년 남짓한 때였을까, 태웅은 대학 리그에서 활약한 덕에 첫 시즌을 끝내고 곧바로 NBA와 입단 계약을 했다. NBA의 상비군적 존재들이라는 선수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건 여간 평범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이클 조던을 동경해오던 서태웅에겐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으나 그의 목적의식은 단 하나였다. 강백호와 함께 뛰는 것, 혼자 돋보이는 농구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팀플레이를 알게 해준 강백호와 함께 성장하고 싶은 것, 그것이 서태웅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NCAA에서 1년 여 만에 NBA 진출이라니, 너무 대단하세요. 설레시겠어요.’

 

그때 한 인터뷰어가 태웅에게 그렇게 말했다. 설레겠다고. 태웅은 그 말뜻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설렘이라는 단어에 이 감정이 부합하는가를. 기분은 좋으나 막연히 설레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야 서태웅은 제 실력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으니까. 설레는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다고 대답을 하면서, 서태웅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강백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늘 무한한 감정의 파도로 너울거리게 만드는 서태웅의 인생에 단 한 번 뿐일 사람.

 

…… …… …… ……!!’

 

과거의 회상에 젖어들며 자연스레 눈을 감았던 태웅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맹렬한 기억에 조용히 눈을 치켜떴다.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 같은 그 빨강머리가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서태웅은, 방파제로 둘러싸인 기다란 바닷길을 따라 몇 번이고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국가대표 소집 훈련을 가서도 달렸고, 학교가 끝난 뒤에도 달렸었다. 자전거가 없으면 없는 대로, 언제나 늘 지나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척 서태웅은 그렇게 강백호를 매일 찾아갔었다. 여긴 또 왜 왔냐며 화를 내도 내심 반가움이 서려있는 그 얼굴을 보기 위해 내달렸던 그 걸음걸음마다 담겨 있던 설렘이, 해변에서 함께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며 가졌던 그 부푼 기대감과 꿈들, 그 모든 것들이 서태웅에겐 기대와 설렘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타래들은 빙빙 돌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수많은 생각들의 결론은 결국, 강백호였다. 태웅은 또다시 우리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떠올린다. 태웅은 언제나 백호와의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여태 서태웅은 그저 서태웅이었고, 강백호는 그저 강백호였으며 그 둘 사이를 우리라고 불릴 만한 확실한 계기나 매개체가 없었다. 이제 개개인이 아닌 우리라고 묶을 수 있을 서태웅과 강백호의 관계가, 존재를 알게 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강백호 만큼이나 마음의 큰 방을 차지해버린 손바닥보다 더 작은 아이가 몹시도 설레었다.

 

, 여우. 넌 꿈이 뭐냐?’

 

모래사장으로 쉼 없이 파도가 부스러지는 해변,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저 너머의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재활이 끝날 무렵의 어느 날. 강백호는 태웅에게 난데없는 질문을 해왔었다. 그 질문을 들었던 태웅은 백호 쪽을 한 번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멍청이. 제 답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던 강백호는 이내 모래사장에 손장난을 치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넌 그냥 미국에 가는 게 꿈이냐? 가서 유명한 선수가 되는 거? 그건 그냥 되고 싶은 거잖아. 꿈 말이야, .’

 

되고 싶은 게 아닌 꿈이라. 서태웅은 그때까지 꿈이라는 것에 대해 유의미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가를 되짚어보았다. 마이클 조던 같은 선수가 되는 것, 그리고……. 태웅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석양이 만들어낸 노을에 부서지는 빨간 빛,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들, 그리고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대는 강백호의 얼굴을. 그 얼굴을 마주 보면서 태웅은 생각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제게 꿈이 생긴다면 그건 아마도……. 미처 뒷말까지 이어지지 못한 생각은 말로 튀어나오질 못했다. 대신에 강백호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멍청이 너는.’

이 천재는…….’

 

운을 띄운 강백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태웅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또 다시 돌렸던 고개.

 

멋진 가족을 만드는 거지.’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드는 것, 그게 강백호의 꿈이라 했다. 멋진 가족이라. 서태웅은 그 말에 강백호와 함께 하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했고, 강백호도 자신과 함께 있는 미래를 상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눈은 분명 머나먼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듯했다.

 

엄마, 아빠가 날 엄청 사랑해줬거든? 나도 그렇게 사랑해줄 거다.’

 

그 말과 함께 시원스레 웃던 강백호를 떠올리며 태웅은, 비로소 제 꿈에 대해 생각했다. 오로지 강백호와 함께 농구를 하고, 함께 하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서태웅의 인생에 뚜렷한 꿈이 한 가지 생겨났다. 태웅은 비행기 모드로 돌려놓은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리고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강백호, 나도 꿈이 생겼어.

 

메시지 입력창에 지금 당장 전송할 수 없는 한마디를 적어놓은 채로 태웅의 엄지가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나도 꿈이 생겼다고, 널 다시 만나게 되면 말 해야지.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게 내 꿈이라고. 그 생각까지 마친 뒤에야 태웅은 비로소 눈을 붙일 수 있었다.

 

 

* * *

 

 

강백호가 막연하게 꿈꾸던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는 언제나 서태웅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 저보다 몇 발짝 정도 앞서 나가 제 손을 끌어당기고야 마는 서태웅이 말이다. 하지만 보장되지 않는 것엔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강백호와 서태웅이 함께 꿈꿨던 미래라는 건 순전히 제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기에 어쩌면 백호는 더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늘 저를 놓지 않는 서태웅은 언제나 제게 확신을 주려 했다는 걸 백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던 탓은 그 혹시 모를 불확실성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반박 기사 날 거야.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고, 결혼할 예정이라고.’

 

공항에서 서태웅이 제게 한 말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서태웅과 함께 꿈꿨던 그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제가 없는 모습도 수없이 상상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흔한 커플링도 맞추지 않은 사이에,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약속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약속한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서태웅이 꺼낸 결혼이라는 단어는 더욱 특별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반박 기사를 확인한 뒤에는 더더욱.

 

농구선수 서태웅, “OOO와 사귀는 사이 아냐…… 만나는 사람 따로 있다.”

 

여배우 OOO와 열애 의혹에 휩싸였던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그는 소속사를 통해 “OOO와는 일면도 없는 사이이며 제 경기를 관람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사귀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밝힌 그는 현재 열애 상대가 누군지도 함께 밝혔다. 서태웅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현재 KBL에서 슈퍼 루키로 활약 중인 강백호 선수와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를 해왔으며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 제 마음에 콕콕 박혀 들어와 내내 괴롭혔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서태웅은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확신을 백호에게 주고 있었다. 그래서 백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제게 준 확신만큼 백호도 무언가를 해야 했다.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했으나 이제 두려울 것도 없었고, 불확실한 무언가도 없었다. 무서운 게 없을 때의 강백호는 한없이 강해진다. 백호는 저를 둘러싼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서 자신 있게 외쳤다.

 

저 출산 휴가 쓰려고 하는데요.”

 

이 모든 것들은 어차피 부딪혀봐야 알 수 있는 일들이니까, 강백호는 일단 부딪혀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 * *

 

 

백호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언젠가 현재 구단의 감독이 백호를 두고 그렇게 말을 했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영감님께 했던 말인데, 과연 오랫동안 수장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의 안목은 뭐가 달라도 다르긴 했다. 그의 말대로 정규 시즌 리바운드 1위에 빛나는 기록으로 신인상을 거머쥐며 모두를 놀라게 만든 괴물 신인 강백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놀라게 만들었다.

 

강백호, 지금 너 뭐라고…….”

출산 휴가 쓰려고요.”

 

잠시 얼이 빠져 적막만이 돌았던 장내가 한 순간에 술렁였다. 아니, 저래도 돼? 데뷔한 지 이제 갓 1년 밖에 안 된 신인이 대뜸 쉰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거기다 리바운드 1위를 달성한 강백호가 한 시즌 내지 두 시즌을 빠지게 된다는 건 전력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니까. 모두가 술렁일 때 감독만은 백호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는 통에 막무가내로 뻔뻔하기만 했었던 백호도 검지로 볼을 긁으며 머쓱해하던 찰나, 감독의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됐냐.”

“7주요.”

복귀는 언제 할 수 있는데?”

 

평소 불같은 성격이라 쉰다고 하면 대뜸 화부터 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에 백호의 한없이 비장했던 표정이 일순간 풀어졌다. 부딪혀보기로 했으나 위약금 물고 나가라고 하면 어쩌나 한 구석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서태웅에겐 위약금을 물어달라는 소리는 안 해도 되겠군.

 

잘 모르겠어요. 예정일은 내년 2월이에요.”

그럼 내후년 시즌에 가능하겠구만.”

 

이미 다음 시즌 강백호의 복귀 가능성에 대해 얼추 가늠을 하며 턱을 쓸던 감독이 입가를 쓸어내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백호를 향해 소리쳤다. , 인마! 그 소리에 훈련장에 있던 일동 모두 긴장했다. 감독의 반응에 긴장을 했던 건 백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뒷말을 기다리며 백호는 서태웅에게 물어내라 할 위약금의 액수를 세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이 이어서 한 말은 백호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고야 말았다.

 

강백호! 너 복귀하면 우승까지 할 수 있겠어? 자신 없으면 그냥 위약금 물고 나가던지.”

 

감독 또한 강백호가 빠지는 순간 큰 전력 손실이라는 걸 알지만 어쩌겠는가. 애가 생겼다는데 지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왕 낳겠다는 거 낳으라고 해야지. 물론 운동선수에게 공백이라는 건 치명적일 수 있다. 늘 끊임없는 훈련과 경기를 통한 실전감각을 익혀야 하는 게 운동선수이지만 강백호는 할 수 있겠지. 부상을 당한 뒤 그 힘든 재활도 이겨내고 복귀에 성공했으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악바리는 없거든. 감독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백호의 얼굴이 다시금 환해졌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 몸은 천재 바스켓맨 강백호니까!”

 

천재 바스켓맨 강백호는 그렇게 출산 휴가를 무사히 얻어낼 수 있었다.

 

 

* * *

 

 

강백호가 구단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으며 씩씩하게 출산 휴가를 받아내는 동안 서태웅도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에이전시의 직원이 태웅을 불렀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정말 다행이라며 신까지 찾아대는 직원의 말엔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제가 시간 안에 돌아온 게 신까지 찾을 이유라면, 그 신은 강백호가 되려나. 곰곰이 생각해보던 태웅은 어쩌면 맞는 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서태웅은 강백호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고, 팀이 그렇게 바라 마지않는 승리도 안겨줄 작정이었다. 절대 질 수 없다. 그야…….

 

꼭 이겨라. 지면 올 생각도 하지 마.’

 

경기 시작 직전에 나눈 통화에서 강백호는 꼭 이기고 오라는 신신당부를 전했다. 지면 한국에 발 붙일 생각도 말라는 경고에 서태웅은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길 생각이었다, 멍청아. 여유는 넉넉했고, 자신감은 차고 넘쳤다. 서태웅에게도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안에 떨 이유도 없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환호 소리, 경기장 위로 내리쬐는 조명, 주심의 휘슬 소리. 태웅은 팔목 보호대를 끼우며 코트 위로 걸어 나갔다.

 

그날 경기가 끝난 직후 한국의 스포츠 일간지에 태웅의 승리 소식이 대서특필 되었다.

 

시카고 불스가 미국 프로농구 8강 플레이오프 개막전에서 승리했다. 시카고 불스는 19(한국시간) 미국 일리노이 주 유나이티드센터에서 열린 NBA 8강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에서 34점을 쓸어 담으며 리바운드 8개를 걷어내고 어시스트 7개를 배달한 슈퍼 에이스서태웅의 활약으로 밀워키 벅스를 102-84로 꺾었다.

 

(후략)

 

 

* * *

 

 

계속 되는 시카고 불스의 연전연승, 슈퍼 에이스 서태웅의 미친 활약은 미국은 물론 한국 언론과 팬들까지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홈 경기장에서 열린 83차전에서 태웅은 40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그날 폭발적으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카메라에 붙은 방송사 로고를 보고는 평소 강백호가 자주 보던 방송사의 인터뷰를 수락했다. 기자는 그에게 이런 저력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고 물었고, 태웅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멍청이를 보러 가야 해서요.’

 

……멍청이요? 멍하게 되묻는 기자를 보고 태웅은 눈을 깜박였다. , 마이크를 향해 다시 몸을 살짝 숙였다. 그리고 정정했다.

 

강백호요.’

 

들으러 가야 하거든요, 심장 소리. 지면 오지 말라고 해서요. 서태웅에게 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존재하니 이기는 것뿐이라고, 서태웅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고로, 서태웅은 현재 한국, 산부인과에 있었다. 약속대로 우리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서. 얼마 전 미국으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던 그 꿈의 구체화가 될 시작점이 오늘이 되지 않을까, 태웅은 검사실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9주차니까 어엿한 태아가 되었네요. 심장 소리도 씩씩하구요.”

 

정말 말 그대로 씩씩했다. 크기를 가늠해보니 채 3센티도 되지 않는 작은 아기가 어떻게 이런 심장 소리를 가지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소리를 듣고 강백호는 서태웅과 농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구나. 못내 서운하고 화도 났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이런 심장 소리를 듣고도 누가 포기할 수 있겠는가. 특히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강백호라면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어때. 진짜 우렁차지?”

 

배를 걷고 누워있던 백호가 제가 다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코트 위의 강백호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지만 가족이 생긴 강백호는 이다지도 행복해할 수 있다는 걸 태웅은 새삼스레 깨달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 일정한 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에 제 심장도 덩달아 뛰는 것 같았다. 세차진 않지만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네가 생긴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초음파 영상을 바라보던 태웅은 고개를 돌려 백호와 눈을 맞추었다. 마주치는 시선에 말없이 오고가는 눈빛을 서로 읽었는지 백호는 태웅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이.

 

 

* *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백호는 초음파 사진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고, 태웅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출 때마다 백호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엔 좀처럼 떼지 못하던 눈을 태웅에게로 돌려 시선이 마주쳤는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리보 같지 않냐.”

……멍청이.”

 

한참을 골똘히 들여다보기에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역시 멍청이다웠다. 그 명백한 강백호스러움에 태웅은 고개를 돌리며 콧숨으로 웃었는데, 제가 그러거나 말거나 백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젤리 같아, 귀여워.”

 

귀여운 것에 한없이 약한 강백호는 벌써부터 뱃속의 아기에게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던 태웅은 그저 막연히 상상해본다. 상상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조금 변화될 우리의 모습을, 강백호가 꿈꾸던 그 모습들을. 그리고 강백호의 꿈이 곧 서태웅이 꿈이 된 지금, 태웅은 오른팔을 뻗어 백호의 손을 끌어당겨 맞잡았다.

 

, 뭐야?”

강백호.”

 

마침 걸린 신호 대기에 고개를 돌려 백호와 마주 보았다. 불러놓고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대체 무슨 일이냐며 재촉을 해오는 백호에게 태웅은 한참 뒤에야 운을 띄웠다.

 

네가 나한테 꿈이 뭐냐고 했잖아.”

. 그랬나?”

 

그날의 온도, 수평선 위로 떠올랐던 노을, 그날 불었던 바람, 공기의 냄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태웅과 달리 백호는 영 생각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허공으로 눈을 굴리다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얼굴로 태웅을 돌아보았다.

 

그랬어, 멍청이.”

이게 진짜……. 그래서 뭔데?”

 

저만 생생하게 기억하는 추억이라 해도 서운하지는 않다. 강백호는 원래 멍청이라서 그럴 수 있다. 내 세금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알려주면 된다.

 

꿈이 생겼어.”

무슨 꿈. 농구 슈퍼스타?”

……멍청이.”

 

강백호가 생각하는 서태웅의 꿈의 수준이란 건 그때나 지금이나 확실해서 웃길 정도였다. 그러나 태웅은 비웃는 대신 백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깍지를 껴 꽉 끌어안았다.

 

나도 너와 같아. 그래서 네가 없으면 안 돼.”

 

나도 멋진 가족을 만들고 싶어졌거든, 강백호 너랑.

 

 


슬램덩크 루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