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0950927
view 2827
2023.05.04 18:03




7



 

맘 속 가장 깊은 비밀을 후련히 털어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서태웅의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좀 전까지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과 설움이 한 데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서태웅과 화해를 하고 나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다 보니 부끄러움이 서서히 몰려오는 중이었다. 타고난 천성이 밝은 백호는 힘이 들어도 남에게 티를 잘 내지 않았다. 입으로야 우는 소리는 해도 정말 슬프거나 우울할 때물론 강백호에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에는 제 그런 모습을 보일 바에야 혼자 틀어박히는 게 낫다 여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펑펑 운 것도 모자라 그것도 서태웅 앞에서 그렇게 오열을 하다니. 서로 못 볼 꼴 다 보인 사이래도 서태웅과는 연인이기 이전에 잘 통하는 동료이자 반드시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었다. 거기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겠는가. 처음 서태웅을 미국에 보냈을 때에도 청승맞아 보일까봐 억지로 눈물을 삼켰는데, 그 앞에서 애처럼 엉엉 울고야 말았으니 강백호 자존심에 깨나 금이 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멍청아, 다 울었어?”

, 울긴 누가 울었다 그래!”

 

한참의 정적을 깬 것은 서태웅이었다. 흐느낌을 멈춘 채 이대로 아무 일도 없던 척 고개를 들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꿈지럭거리고 있는 걸 눈치 채고 먼저 물어봐준 것이었다. 백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울긴 누가 울었다 그래, 괜히 부끄러워 툴툴댔지만 사실 서태웅이 평소처럼 먼저 말을 걸어줘 내심 고마웠다. 덕분에 어색함 없이 고개를 떼어내자 곧바로 서태웅의 손이 올라와 양 볼을 쥐어챘다. 이건 또 뭐야, 백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말랐어.”

 

꽤 다정하게 다가온 손길은 이내 백호의 푹 꺼진 볼을 쥐고선 양 옆으로 죽 늘였다. , 어하냐오, 볼을 늘여 다물어지지 못하는 입에선 새는 발음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태섭이나 대만이었으면 바보 같다며 낄낄대고 웃었을 장면을, 서태웅은 그저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에 한층 깊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지은 죄가 있어 서태웅의 그 표정이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오히려 미안했기 때문이다. 혼자 저 밑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느라 그 먼 곳에서 절 걱정했을 서태웅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는 게 미안했다. 아 씨……, 백호는 제 볼에 달라붙은 태웅의 손을 붙잡아 떼어냈다.

 

마르긴 누가 말랐다 그래! 그러는 너는 다크 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다!”

 

네 몰골도 말이 아니니 괜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라는 뜻으로 꺼낸 말이었건만, 백호는 제가 지은 원죄의 무게를 여전히 가늠하지 못했다. 서태웅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못 잤어. 잘 수가 없었어.”

참나, 그 잠 귀신이 왜 잠을 못 자냐.”

네가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을까 봐.”

…….”

 

서태웅의 한마디, 한마디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 솔직히 이건 반칙 아닌가, 백호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무슨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냐며 발끈하고 싶었으나 반박을 하지 못한 것은, 그의 말마따나 강백호는 서태웅과 맞닥뜨리기 직전까지도 스스로를 좀먹는 생각에 잔뜩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백호는 서태웅이란 존재가 제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을 해본다. 그 무겁고 불안했던 마음이 한 순간에 고요해지다니 이러나저러나 서태웅은 강백호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제 얘기해줘.”

? 뭐를?”

 

골몰한 상념에 빠져 든 백호를 깨운 건 또다시 태웅이었다. 그는 소파로 백호를 잡아 끈 뒤에 다짜고짜 얘기를 해달라 했다. 무슨 얘기, 우리 얘기 다 한 거 아니었나? 진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백호에게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아까 실랑이를 하다 떨어뜨린 것을 어느새 주워온 것이었다. 제게 내밀어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가만히 받아들었다.

 

휴가 때 생긴 거야?”

……, 그렇다더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손에 쥔 사진의 표면을 다른 손으로 소중하게 쓸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태웅을 바라보았다.

 

“7주 됐어. 그래도 많이 큰 거야.”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생겼구나, 물끄러미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백호는 다시금 변화하게 될 관계에 대해 떠올려본다. 이 아이가 아직은 우리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모르겠으나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겠지. 나랑 함께 할 거냐, 서태웅? 백호는 태웅의 팔목을 붙잡았다. 저를 향하는 눈동자, 그리고 맞닿은 시선.

 

, 낳을 거다.”

.”

 

강백호의 인생에 있어 농구만큼 중요한 건 없다. 그러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아이를 낳으려 했던 이유는, 가족이 생긴다는 기쁨만은 아니었다. 아이의 반은 서태웅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붙잡고 있던 서태웅의 팔목을 더욱 힘주어 잡으면서, 백호는 말했다.

 

그러니까 나 책임져라.”

당연하지, 멍청이.”

 

서태웅에게서 되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그랬듯, 무던하고 덤덤했으나 백호는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해진 이 순간을.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팔목을 쥐고 있던 손을 위로 옮겨갔다. 살짝 미지근한 체온의 손을 맞잡고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 이내 서로의 손바닥을 뜨겁게 끌어안았다.

 

나 복귀 늦어질 수도 있어.”

상관없어.”

 

처음 농구를 시작할 때에 그 얄밉기만 했던 서태웅 녀석과 이런 사이가 되리라고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그 새삼스러움에 감탄하며 백호는 태웅에게 경고했다. 내년 2월 중순이 예정일이니 아마 2년은 못 뛸 수 있다. 그리고 기량이 이전처럼 돌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 사실을 백호는 이미 인지하고 받아들였으나 태웅은 아직 모르니 알려줘야 했다. 백호의 경고에 태웅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더 늦어지면, 늦어지더라도. 백호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포기는 안 할 건데.”

그럼 됐어.”

 

제 걱정은 오로지 그거 하나라는 듯 태웅은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무 힘들어서 포기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옆에서 잔소리 할 거다.”

 

일전에도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뉘앙스는 전혀 달랐다. 강백호 사전에 포기가 어디 있어, 그 지옥 같던 재활도 거뜬히 견뎌낸 백호였다. 그저 반응이 어떤가 궁금해서 넌지시 던져본 질문에 되돌아온 답은 너무 서태웅다웠다. 고등학교 때 같네, 선연히 떠오르는 그때의 모습들에 백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천재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지.”

멍청이.”

 

저도 퍽 웃긴지 콧숨으로 실소를 터뜨린 태웅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여우야.”

 

속눈썹이 풍성히 뻗어있는 눈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눈앞의 강백호에게 온전히 집중한다. 나 아직 못한 말이 있는데,

 

……우리 키스하자.”

 

사실은 나도 네가 필요하다고, 네가 없는 시간 동안 많이 외로웠다고,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으나 아직 남은 부끄럼이 백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사랑한다는 한마디보다 제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더 부끄러운 걸. 그 말 대신 백호는 태웅에게 제 입술을 살포시 얹었다.

 

 

* * *

 

 

생각지도 못하게 이뤄진 재회와 화해, 그리고 예정에 없던 미래 약속까지 한 것은 좋았으나 둘에겐 현실 세계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서태웅에겐 플레이오프 개막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었고, 꺼뒀던 휴대폰을 켜자마자 에이전시와 팀에서 오는 연락에 불이라도 붙는 줄 알았다. 잠시 멀리 가 있었던 현실 감각이 돌아온 것도 그때였는데, 강백호는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패닉 했다.

 

서태웅, 너 진짜 미쳤냐! 플레이오프 개막이 바로 코앞인데 여길 오면 어떻게 하냐!”

 

지난 몇 년간 침체기에 빠져있던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것은 명실상부 서태웅의 공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슈퍼 루키에서 슈퍼 에이스로 등극한 서태웅은 코트 위를 거의 날아다니며 팀을 파죽지세 연승을 거두게 만들었는데, 그런 그가 개막전에 결장 위기라니. 백호는 제 빨강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 서태웅에게 어서 비행 편을 알아보라 재촉했다. 그에 반해 서태웅은 아주 느긋하고 태평한 얼굴이었다.

 

같이 미국 가.”

……어엉?”

 

서태웅은 아주 태평한 얼굴로 곧잘 폭탄을 던지는 재주가 있었다. 대체 저게 뭔 소리람?

 

나랑 같이 가자고.”

무슨 소리야!”

 

같이 가자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백호는 완전하게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언젠가가 될 미래, 그리고 그의 바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님 지금 당장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는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백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돌아갈 것까지 미리 끊어뒀어. 개막전에는 안 늦을 거야.”

, 그러냐.”

 

서태웅이 언제부터 이렇게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인 인간이었는지 백호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운동선수인 만큼 계획적이긴 하겠으나 주도면밀한 것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놈인데. 미국 물을 먹더니 변한 건가? 백호는 순수하게 의문했다. 어쨌든 개막전엔 늦지 않게 갈 예정이라니 다행이긴 했다.

 

혹시 몰라서 두 장 끊어뒀어. 말 안 들으면 끌고 가려고.”

……?”

 

여차하면 저를 끌고 갈 생각까지 했다는 서태웅의 말에 강백호는 이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서태웅 이 자식, 완전 미친놈이라는 걸.

 

그러니까 미국 가.”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떠날 날을 앞뒀던 고3의 서태웅은 미국에 함께 가자는 소리를 내뱉어놓고 제가 답을 주지 않던 시간 동안 전혀 재촉하거나 운을 띄우는 일도 없었건만. 지금 눈앞에 있는 스물 셋의 서태웅은 꼭 한마디만 내뱉도록 설계된 로봇 같았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서태웅이 미국에 끌고 가려는 이유를 아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못 가.”

그럼 언제 올 건데.”

아직 아무한테도 못 알렸어. 대만 군한테도, 팀에도.”

 

백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같은 구단인 대만에게도 미처 알리지 못했고, 팀에게도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도대체 어떻게 포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 계약금 물어 달라 그러면 어떡하지. 서태웅이 책임진다 했으니까 내달라 할까.

 

양호열은 알잖아.”

 

이미 울면서 계약금을 물고 있는 제 모습을 떠올리는 와중에 서태웅이 뜬금없이 호열이 얘기를 꺼낸다. 그 갑작스럽고도 난데없는 이름에 백호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호열이 얘기가 왜 나와. 어쨌든 호열이는 아무나가 아니잖아.”

나 말고는 다 아무나야.”

초딩 새끼, 네가 애냐?”

 

서태웅이 도대체 왜 양호열을 그렇게 경계하는지 백호는 진심으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양호열은 백호에게 평생에 걸친 친구이며,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과도 마찬가지인 걸. 그러나 예전부터 백호가 웃으며 다가가는 모든 이에게 질투를 해오던 서태웅이었기에 백호는 깊게 생각 않고 혀를 찰 뿐이었다. 으이구, 저 애새끼.

 

, 아무튼 지금 당장은 못 가.”

그럼 약속해.”

 

내 연락 꼬박꼬박 받겠다고. 태웅이 백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참나, 이제 다 털어놨는데 못 받을 건 또 뭐람. 백호는 흔쾌히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 * *

 

 

지난 번 서태웅을 배웅하러 왔을 땐 적어도 반 년 동안은 이곳을 다시 찾게 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백호는 두 달 만에 다시 공항에 서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예매해둔 표를 찾아 돌아온 태웅과는 이제 다시 짧은 작별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작별의 순간인데, 이번은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전까진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무거운 마음을 가진 채로 서태웅을 보내야 했는데, 서로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이전보다는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이렇게 산뜻하게도 보낼 수 있었구나. 백호는 스스로의 변화에 내심 놀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태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라.”

 

담백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백호에게 다가선 태웅이 푹 눌러쓴 모자를 벗겨낸 뒤 짧게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술렁대는 주변에 뒤늦게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붉혔다.

 

, , 뭐야!”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곳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제 빨강머리를 누가 볼 세라 뺏긴 모자를 낚아채 다시 푹 눌러 썼다. 서태웅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딱히 숨긴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떳떳이 밝힌 적도 없었기에 공공장소에서의 스킨십은 삼가는 편이었다. 거기다 서태웅은 바로 며칠 전 백호가 아닌 다른 여배우와 스캔들이 났던 참이었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하건만, 백호가 얼굴이 머리색만큼 벌게지거나 말거나 태웅은 그저 태평했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폭탄을 던진다.

 

반박 기사 날 거야. 너랑 사귀고 있다고 말했어, 에이전시에.”

……어엉?”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고, 결혼할 예정이라고.”

 

서태웅은 언제나 이렇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버린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백호의 머릿속이 일순간 정지 됐다. , 결혼……?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던진 건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 급이었는데, 정작 서태웅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멍해진 백호에게로 다가온 태웅은 다시 모자를 벗겨냈다.

 

그러니까 안 숨겨도 된다고, 멍청아.”

……누웃.”

 

결혼이라니. 언젠가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서태웅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막연히 해봤지만 직접적인 단어로 들으니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것도 서태웅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벌게진 얼굴로 모자를 슬며시 뺏어 드는 백호의 손을 붙든 태웅과 눈이 마주쳤다. .

 

병원 갈 때 올게.”

……오긴 뭘 오냐, 오지 마.”

 

아직 이렇다 할 자세한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플레이오프가 끝나기 전까지는 아마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었다. 산부인과에 방문할 때마다 남편과 손을 잡고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서태웅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어쩌겠는가. 예상치 못한 일엔 언제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해심 넓은 천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지 말라 퉁명스레 대답하니 내내 태평한 얼굴 위로 불만이 살짝 떠오르는 게 보였다.

 

올 거야.”

 

저 고집쟁이가, 내내 수줍음에 얼떨떨했던 기분을 잊은 채로 태웅에게 소리쳤다.

 

돈이 남아 도냐? 병원 갈 때마다 오면 여기 오는 비행기 표 값은 꽁이냐?”

 

내년엔 연봉이 두 배로 오를 거라는 이 NBA의 슈퍼에이스는 돈이 아주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온다 그러면 도대체 비행기 값만 얼만가. 덩치도 문짝만 해서는 이코노미에는 몸을 구겨 넣을 수도 없는 주제에 돈이 우스운 소리를 아주 잘도 한다. 그러나 백호는 이어진 태웅의 말에 다시 말을 잇지 못 했는데,

 

나도 듣고 싶어. 아기 심장 소리.”

…….”

그러니까 올 거야.”

 

이런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쳐낼 수 있단 말인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백호에게 태웅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멍청아, 연락 받아.”

, 알겠어. 얼른 가.”

 

이제는 정말 작별의 시간이었다. 들고 온 짐도 없이 맨 몸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왔던 서태웅이 뒤를 돌아 출국장으로 향한다. 널찍한 등짝이 점차 작아져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백호는 한참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다시 만나자, 여우야.

 

 

* * *

 

 

스캔들이 터진 뒤 처음 나가는 훈련장이었다. 더플백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채로 훈련장에 들어선 백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먼저 나와 훈련을 하고 있던 대만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지난 산왕전 때의 강백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책 없는 자신감에 차 있는 동시에 지성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 대만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녀석 서태웅이랑 화해했구나.

 

강백호! 서태웅이랑 화해했어?”

, . 그랬지. 근데 대만 군 있잖아.”

 

말을 붙여보니 확실히 원래의 강백호 텐션으로 돌아온 게 느껴져 대만은 안도했다. 어차피 제가 아니었어도 알게 될 스캔들 기사인 건 맞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대만이었다. 다행이라며 어깨를 툭툭 치는 대만에게 백호가 새삼스레 말을 시작한다.

 

오냐, 뭔데 그래? 오늘 형이 밥 사줄까?”

아니, 밥은 다음에 사줘. 나 요즘 입덧해서 못 먹어.”

입덧……?”

 

입덧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대만은 강백호가 제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하지 못했다. 강백호가 뭔 입덧을 해, 그거 애 가진 사람들이 하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놀란 토끼눈이 된 대만이 입을 틀어막자 백호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 임신했다. 7주째래. ? 감독님 왔다. 잠깐만!”

 

, 임신이라고? 듣고서도 상황 파악이 미처 되지 않은 대만을 그 자리에 두고 백호는 훈련장에 들어서는 감독을 향해 돌아섰다. 감독님! 씩씩하게 다가서는 강백호의 뒷모습을 대만은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집을 나간 대만의 넋은 이후에도 곧바로 돌아오질 못했는데, 이어진 강백호의 폭탄 발언 때문이었다.

 

저 출산 휴가 쓰려고 하는데요.”

 

훈련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강백호의 목소리에 그곳에 있던 수십 쌍의 눈이 모두 한 곳으로 향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슬램덩크 루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