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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3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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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학을 온 지 1달이 다 돼 가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뛰어난 관찰실력을 통해 같은 반 아이들의 성격이나 그들의 연애사를 알게 되었고 학교생활에도 많이 적응했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때까지 적응하지 못하겠다고 장담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하복은 아직 입으면 안 될 거야. 그러니까 다음 주에도 춘추복을 입고 오도록 해. 음, 아닌가? 아무튼 그리고..."


담임의 저 말투였다. 담임은 말을 참 두리뭉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할 때도 추측투성이 말투를 썼는데 그건 담임이 부드러운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효과로 최대한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보름은 담임이 하는 말을 들으면 한숨이 나왔었다. 그로부터 보름쯤 더 지나자 욕이 나왔다. 문득 사람을 좋아하고 낙천적이던 친구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염세주의자가 된 게 떠올랐다. 아르바이트는 관둘 수나 있지. 이 교실은 쉽게 벗어나기 힘든 편의점이었고 담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찾아 "담배 한 갑 주세요. 그림 예쁜 거로요. 음, 두 갑 주세요. 아니다. 그냥 됐어요. 저기요, 왜 한 갑 안 줘요?" 따위로 최소 5분씩 보내는 단골손님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반 아이들은 담임이 하는 말에 인상 쓰거나 비웃지 않고 묵묵하게 듣고 있었다. 심지어 브랫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을 착하다고 한 네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눈엔 성자들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담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교실을 훑어보다가 더 질문할 게 있냐고 물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적에 싸인 교실을 조금 당황한 눈으로 보더니 그럼 이만, 하고 떠났다.





며칠 뒤, 한 주의 시작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등교하고 있는데 한 달째 변함없던 등굣길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하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던 것이다. 담임은 이번 주에도 춘추복을 입고 오라고 했었다. '음, 아닌가? 음, 아닌가? 음, 아닌가?' 그 순간 맹하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고, 또 욕이 나왔다. 저 앞에 패트릭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아침에는 쌀쌀한데 담임 생각에 열이라도 받은 건지 긴 팔 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학생주임이 패트릭을 매섭게 불러 세웠다. 학생주임은 제모를 철저하게 하고 교복을 단정하게 입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소매를 조금 걷어 올리는 걸 보고 도둑이라도 본 것처럼 달려와서는 "그따위로 입을 거면 하복을 입어!"라고 소리치며 벌점까지 줄 기세였는데, 등교 중이던 네이트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학생주임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 반 담임선생님께서 이번 주까진 춘추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생주임은 씩씩거리던 표정을 지우고 네이트의 흠 잡을 것 없이 완벽한 옷차림을 훑어보다가 "아주 좋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으니까 다시 확인하세요."라고 말하고는 새침하게 노려보고 떠났다. 등굣길엔 여전히 춘추복을 입은 학생이 더 많아 보였다. 하지만 입어야만 해서 입은 것과 입고 싶어서 입은 것은 매우 달랐다. 아침부터 무책임한 담임의 영향력을 느껴서 짜증이 났다.


교실에서 만난 브랫은 웬일인지 벌써 하복을 입고 있었다. 네이트가 알려줬나 생각했는데, 가방만 내려두고 교무실에 다녀오겠다며 황급히 나간 네이트를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내 의아한 표정을 본 브랫이 "이 세상에 믿을 놈은 없어. 특히 담임은 더더욱 아니지."라고 말하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짧아진 소매 때문에 보이는 브랫 팔뚝에 상처가 있었다. 어디에 긁힌 듯한 상처는 새빨개서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어쩌다가 다쳤냐고 물으니 고양이가 할퀴었다고 했다. 그동안 브랫의 모든 것을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고양이를 키운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었다. 


"집에 고양이가 있었어?"
"아직. 근데 데려오고 싶은 고양이가 있어."


나는 언젠가부터 브랫의 말들이 매우 은유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고양이를 좋아하고 잘 아는 길고양이도 있었다. 이 세상에 고양이는 많다! 주변에 어미가 있는지 확인해봤냐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보며, 그 고양이는 자기 집에서 가족이랑 살고 있단다. 자꾸 고양이가 아닌 어떤 사람이 떠오르는 걸 무시했다. "가족이랑 살고 있는데 데려오면 납치 아니야?" 브랫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상처를 쓰다듬으면서 내 상상력에 기름을 부었다. 


"그래서 계속 꼬드기는 중이지. 울음소리가 예쁜 고양이인데 안아 보려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잠시 후, 브랫이 꼬드기는 중인 고양이가 종이 뭉치를 들고 교실로 돌아왔다. 그걸 들고 바로 내 자리로 와서 한 장 나눠주었다. 춘추복 및 하복 혼용 기간에 대한 가정 통신문, 작성일자는 '지난주'였다. '음, 아닌가? 음, 아닌가? 음, 아닌가?' 나는 또, 또 욕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학교에 전학을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늘 담임보다 더 나를 챙겨준 네이트는 전학생인 내가 하복 준비를 미처 못 했을까 봐 걱정이 됐나 보다. 내가 편의점 사장이라면 이 아르바이트생의 시급을 파격적으로 올려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동료 아르바이트생이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하복을 입을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네이트는 교복 혼용 기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담임이 말한 대로 기간이 바뀐 줄 알았다고 했다. 다른 반에 믿을 만한 정보원을 두어야겠다며 한숨 쉬는 네이트를 보고, 브랫이 하복 셔츠를 펄럭이면서 말했다. 


"여기 반장의 믿음직한 일꾼이 있는데."
"너는 혼자서 정보 독점하니까 좋아?"
"어제 담임 말 믿지 말고 내 말 믿으라고 말했잖아."
"네 말이나 담임 말이나 거기서 거기지."
"나는 진실한 사람이야."
"웃기지 마. 한 번도 지킨 적 없으면서."
"네가 지킬 수 없게 만들었잖아."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했고 조금 전 기름을 들이부은 내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이 방화범들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제일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어제 만났어?" 네이트가 어제 브랫 집에 놀러 가서 게임을 했다고 말했다. 아아, 주말엔 좀 놀 수도 있지! 게임 재미있지! 나는 이성이라는 이름의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내 머릿속 상상 열차 기관사가 말했다. '그래, 사랑도 게임이지. 물론 육체적 사랑을 말하는 거란다. 열차 출발합니다.' 기관사는 제멋대로 문을 닫고 야옹야옹 울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브랫은 주말에 시간 있으면 같이 놀자고 네이트를 집으로 초대했다. 만화책을 보고 과자를 먹으면서 놀다가 브랫이 같이 게임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네이트는 게임을 잘 안 해봐서 어떤 게 재미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브랫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봤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내가 천천히 방법을 알려줄게, 오늘은 레이싱 게임 하자. '...불안한데?' 그들은 게임을 시작했다. 브랫은 네이트에게 속력을 맞추었고 서로의 숨결 같은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달렸다. 넓은 방처럼, 폭이 넓은 도로에서 부드럽게 달리던 그들의 차는 조금씩 속력을 냈다. 눈을 바라보며 질주하던 그들은, 서로의 커브 길을 손에 움켜쥐자 여유를 잃기 시작했다. 차체가 벽에 부딪혔고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브랫의 차가 네이트의 차를 좀 더 좁고, 푹신한 도로로 안내했다. 여기는 안전해. '아니! 제일 위험해 보여!' 혼자서 달리기엔 충분했지만 두 차가 들어서자 도로가 가득 찼다. 브랫의 차가 익숙하게 리드하려 했지만, 아직 길이 낯선 네이트의 차는 도로에 놓인 플래카드 뒤로 숨으려 했다. 브랫의 차가 그건 반칙이라며 빼앗아 도로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도로에 남은 것은 오직 두 차뿐. 차들은 조금씩 부딪혔다. 네이트의 사이드미러가 브랫의 사이드미러를 긁었다. 몇 차례 더 강하게 충돌하며 부딪혔다. 거센 속력과 연이은 충돌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네이트의 차는 결국, 전복되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어!' 그 위로 브랫의 차가 올라탔다. 네이트가 오늘 게임은 여기까지 하자고 말했다. 벌써 지친 거야? 네이트, 내가 주유해줄게. '안 돼! 안 돼!!' 브랫의 승차감 테스트가 이어졌다. 내 차를 왜 네가 테스트해? 그야 내가 탈 거니까... 설마 다른 새끼 태울 생각이었어? 브랫이 거칠게 네이트의 핸들을 잡았다. 아닌 거 알잖아, 이 자리는 너밖에 탈 수 없어. 네이트의 눈에 거짓이 없는 것을 본 브랫은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아직 내리고 싶지 않아, 네이트. 조금만 더 널 드라이브 하게 해줘. 우리 오늘 완주하는 거야.


나는 말없이 머리를 책상에 박았다. 코 앞에서 둘을 볼 면목 없었기 때문이다. 네이트는 내가 담임 때문에 충격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등을 도닥여주다가, 담임에게 헛소리 듣기 전에 가정 통신문을 배부해서 충격을 완화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네이트가 "아!" 했다. 고개를 드니 네이트의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종이에 손을 베었나 보다. 브랫이 휴지를 꺼내 네이트의 손을 감싸면서 말했다.


"누구 밴드 없어?"


교실에 막 들어온 브라이언이 가방을 열어 상처 연고와 크기별 밴드 뭉치를 줬다. 감싸고 있던 휴지를 떼자 다행히도 상처가 깊어 보이진 않았다. 피는 금방 멈추겠지만 상처 부위가 손가락 끝 쪽이라 아물 때까지 자주 건드릴 것 같았다. 가정 통신문을 나눠줄 때보다 덤덤해 보이는 네이트와 다르게 브랫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새끼는 도움이 안 돼."
"나 혼자 다친 건데 뭐. 이리 줘."


브랫은 네이트의 말을 무시하면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다쳤다는 말에 바라보던 아이들은 큰 상처 같지 않아 보이자 다시 저마다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브라이언도 자리로 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둘 사이를 아는 사람 역시 나뿐이라 생각했다. '네이트와 입 맞춘 사람이 브랫이 아닐까?' 하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나서 조금 편해진 점이 있다면 키가 큰 학생을 볼 때마다 '쟤야? 어? 쟤 아닐까?' 하면서 과부하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의심의 화살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한 곳으로만 날아가면 되기 때문에 둘을 바라보는 건 조금 불편해졌다. 


교실에서 아이들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들기 가장 쉬운 방법은 야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고 브랫과 네이트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이 혈기 왕성한 청춘들이 만나서 간지럽게 눈을 마주치고 손끝만 슬쩍 잡으면서 어쩌다 가끔 입만 맞추는 사이는 아닐 것이다. 구석진 곳이긴 했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과감한 행동을 몇 번이나 한 것을 보면 단둘이 있을 땐 어디까지 갈지 안 봐도 뻔했다. 둘이 조금만 가까워져도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하필 브랫은 내 짝이라 그가 하는 말을 내 오른쪽 귀가 직통으로 듣게 됐다. "어제 존나 좋았어."라는 말은, 날씨를 말하는 것이거나 기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브랫과 네이트의 존나 좋은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얼마 전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고 "뭐가? 어떻게 좋았는데?"라고 떠봤다면, 이제는 "와, 좋았나 보다."라고 말하며 앞만 보고 앉아있을 때가 더 많다. 그를 자극하는 것은 곧 나를 자극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켜본다는 걸 들켜서 괜히 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나의 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둘은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화가 얼마나 났는지 팔뚝까지 화가 난 하복 차림의 브랫과 손목까지 단추를 반듯하게 잠근 춘추복 차림의 네이트, 삐죽 솟은 브랫의 곧은 머리카락과 굽실거리는 네이트의 머리카락. 그리고 시인처럼 말하는 브랫과 아나운서처럼 말하는 네이트의 말투까지. 외형과 성격이 참 다르지만, 잘 어울렸다. 밴드를 붙이고 들뜨는 곳은 없는지 살피던 브랫이 네이트의 검지를 꼭 감쌌다. 혹시라도 피가 새어 나오진 않게 잘 붙였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손을 잡아 장난스럽게 호오 불었다. "야, 됐어." 웃으며 네이트가 브랫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자 브랫은 네이트의 머리를 헝클이는 것으로 응수했다.  


"네 팔에도 연고 바르자."
"안 아파."


이번에는 네이트가 브랫의 말을 무시하면서 연고를 살살 발라줬다. 귀엽고 잘 어울렸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보다가 브랫에게 재수 없게 웃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다.





다음은 체육 시간이다. 넥타이를 풀고 조끼를 벗는데 하복 차림이었던 브랫은 벌써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아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시선을 따라가지 않아도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겠다. 브랫이 일어서서 네이트에게 다가갔다.


"도와줄게."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네이트가 다친 손가락은 하나이고, 종이에 살짝 베인 수준이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푸는 데 상처 나지 않은 건강한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다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네이트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커플 중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 브랫이 네이트의 조끼를 잡고 들어 올려 벗기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나의 상상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네이트가 조끼를 받아들고 브랫을 밀어내면서 물러서자 브랫이 네이트의 넥타이를 잡고 잡아당겼다. 나는 자리에서 번쩍 뛰어올랐다. 밀어내기 전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이후에는 차라리 내 상상 속이 더 나았다. 내 머릿속의 브랫이 거칠고 빠르게 셔츠 단추를 뜯었다면, 눈앞의 진짜 브랫은 아주 부드럽고 느렸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네이트의 넥타이를 푼 다음, 셔츠의 제일 위 첫 번째 단추부터 풀어 내려갔다. 장난스러운 척도 안 했다. 손짓이 너무 느려서 지켜보는 내 몸이 꼬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셔츠 손목의 단추까지 다 푼 브랫의 손이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교실에서 소세지빵은 안 돼!!' 만약 네이트가 브랫을 거세게 밀치지 않았다면 내가 뛰어가서 브랫의 등짝을 쳤을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이던 숨을 진정시키자, 왜 저 모습을 아이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교실에 만만치 않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옷만 입은 레예즈의 몸을 아이들이 둘러싸고 밀착 취재 중이었다. 가슴, 팔뚝, 허벅지의 맨살을 주물럭거리기까지 하면서 열성적으로 "무슨 운동해? 얼마나 자주 해? 식단 관리는?" 묻는 중인데 알콩달콩 탈의 쇼가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맨몸의_남성을_다수의_남자들이_감탄사를_내뱉으며_만지는' 영상과 '손을_다친_친구를_도와주는_학생' 영상이 있으면 어느 쪽의 조회수가 더 높을까? 전자가 훨씬 더 높지 않을까. 레예즈에게 이목이 쏠린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게는 후자가 더 관능적이었다.





체육 선생님께서 자유시간을 줬다. 경험에 의하면 나에게는 자유가 아닐 것이다. 얼마 전, 반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며칠 앓았다. 전학생이 겉돌까 봐 나에게 자꾸 패스해줬는데 그런 친절은 바라지 않았다. 공을 잡은 나에게 뛰어오는 버팔로 무리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경험해봐야 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부딪혀서 운동장을 구르다가 이대로 집까지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축구공2가 되어 같이 굴러다니다가 운동장 계단에 앉았다. 나 하나쯤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잘들 뛰어다닌다. 애처로워 보였는지 더 붙잡지도 않았다. 


그늘을 찾아 축구 경기를 슬픈 눈으로 관람 중일 때 네이트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반장이라고 챙겨줘서 고마운데, 아까 네이트에게 부딪혀서 데굴데굴 구른 게 3번은 된다. 네이트는 보기와 달리 호전적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축구를 바라봤다. 그때 브랫이 멋진 수비를 해냈다. 환호성이 터졌고 나도 박수를 보냈다. 브랫은 키가 커서 둔할 것 같았지만 날렵하게 잘 뛰어다녔다. 네이트는 그런 브랫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네이트가 브랫을 바라보는 것은 자주 봤지만, 브랫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갑자기 브랫 얘기를 꺼내는 건 네이트가 의심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브랫의 또 다른 호칭을 꺼내기로 했다.


"네이트, 네 여자 친구가 그렇게 핫하다며?"


네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다가 누구에게 들은 거냐 물었다. 브랫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네이트는 웃으면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브랫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남의 여자 친구를 핫하다고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하면서 브랫 쟤 좀 이상한 애라는 거다. 참나. 이들의 로맨스에 조금 더 놀아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 친구 어떤 점이 제일 좋아?" 


잠깐 고민하더니 착해서 좋단다. 한 달 전이었다면 네이트가 말한 착하다는 뜻을 의심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동안 내가 본 브랫은 배려심이 많은 친구였다. 네이트가 나를 반장으로서 크게 챙겨줬다면, 브랫은 나를 짝으로서 슬쩍 챙겨줬다. 고작 1개월짜리 짝에게도 그런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따뜻할 게 분명했다. 네이트의 여자 친구를 칭찬해 줘야겠다.


"브랫, 몸 존나 핫하지 않아?"


아. 나는 네이트의 이런 표정은 처음 봤다. 따스한 햇살 같은 미소를 띠고 브랫을 바라보던 표정을 지우더니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내가 축구공이었다면 당장 발로 찼을 것 같은 표정이다. 아차 했는지 바로 표정을 숨겼지만 나는 다 봤다! 왜 여자 친구가 핫하다는 말보다 브랫이 핫하다는 말에 더 기분 나빠하며 반응하는 건지 알기 싫어도 알게 됐다. 네이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은근히 해명했다. "볼 때마다 진짜 부럽다니까. 레예즈한테 운동 루틴 배워서 나도 관리 좀 해야겠어." 네이트는 나의 몸을 보다가 자기 몸을 봤다. 그러더니 자기도 제대로 운동을 안 한 지 꽤 돼서 같이 해야겠다는 거다. 아까 네이트에게 부딪혔을 때 바위에 갖다 박는 느낌이었다. 이 몸이 별로 일리가 없는데 네이트가 자신감 없어 보여서 위로해줬다.


"걱정하지 마, 네이트. 너도 존나 핫하니까."


이 말은 하면 안 됐다. 아니, 아까부터 핫하다는 말을 하면 축구공이 날아와 내 입을 막아줬어야 했다. 축구를 하던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빨리 공 던져!" 공?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다가 뒤를 돌아보니 브랫이 옆구리에 축구공을 끼고 나를 아주 살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나는 바로 어떤 상황인지 눈치챘다. 진정해 브랫, 나는 너희들의 은밀한 연애를 은밀하게 응원하는 선량한 사람일 뿐이야!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해명했지만 브랫은 표정을 풀지 않고 공을 발로 차서 운동장으로 보내고는 뒤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얼음처럼 굳어있는 내 어깨를 네이트가 웃으면서 두드렸다. 네이트는 내게 잠시 쉬고 있으라 하고 브랫을 따라가려다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브랫은 치즈 크래커를 좋아해."  





브랫과 네이트는 오해가 풀렸나 보다. 둘의 입술이 조금 전보다 붉고 촉촉해 보이는 것이, 오해가 아주 아주 잘 풀린 듯하다. 하지만 브랫과 나 사이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네이트가 브랫에게 "전학생 그 새끼가 자꾸 치근덕거린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브랫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봐도 대꾸를 안 하고, 수업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네이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쉬는 시간에 매점에 달려가 브랫이 좋아한다는 치즈 크래커를 사 왔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크래커를 최대한 맛있어 보이게 뜯어서 나와 브랫 책상 사이에 올려뒀다. 그리고 브랫쪽으로 10cm 정도 밀면서 신호를 보냈다. 이 미끼를 브랫이 물어줄지 궁금했다.


"너 여자친구 있냐?"


존경하는 콜버트 재판장님께서 나에게 최후의 변론을 할 기회를 주셨다. 이제 정말 말을 잘해야 했다. 더 이상의 은 없다. 없는 여자 친구를 만들어 내서 당장 위기를 모면했다가 나중에 앞뒤 안 맞는 말을 해서 더 꼬이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들킬 일,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말하자 브랫은 내게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마찬가지로 솔직하게 말했다. "청순한 스타일." 브랫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있었다. "아니, 지적인 스타일." 브랫의 표정이 풀릴 줄 몰라서 매우 곤란했다. "아니, 귀여운 스타일." 브랫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최대한 네이트와 멀어 보이는 쪽으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사실 난 섹시한 스타일이 좋아. 특히 가슴이 크면 좋겠어." 


브랫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씨발, 어쩌라는 거지? 나는 울고 싶었다. 이젠 물러설 곳 없다. 고개를 돌려 정답지 네이트를 바라봤다. 브랫의 눈에 네이트가 청순하고 지적이고 귀엽고 섹시할 수는 있어도... 가슴이 큰 건 아니지 않나? 브랫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오판했다, 네이트의 가슴은 컸나 보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어떤 스타일이든 나보다 키가 1cm라도 크면 싫어."


브랫의 표정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정답을 맞혔나 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두 장신의 성장판에 깊은 감사 인사를 드렸다. 크래커를 먹기 시작한 브랫을 보고 안도하며 똑같은 질문을 돌려줬다. "너는 여자친구 있냐?"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존나 핫해'는 네이트의 여자친구가 있냐는 내 질문에 브랫이 있다고 답하면서 덧붙인 말이었지 엄밀히 따져서 본인의 여자친구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대답은 간단했다. 있어. 


"어떤 스타일인데?"
"안 예쁜 데가 없어. 청순하고 지적이고 귀엽고 섹시하고 가슴 아..."


크래커를 먹다 말고 브랫은 황홀경에 빠졌다. 나는 차분하게 썩어가는 표정으로 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래. 축하한다."





브랫네잇 슼탘
2023.03.04 06:14
ㅇㅇ
모바일
전학생도 보통이 아닌게 더 웃김 ㅋㅋㅋㅋ [잠시 후, 브랫이 꼬드기는 중인 고양이가] 하고 당연히 네이트 고양이 취급하는거랑 브랫 표정 굳어가는거에 어쩌라는건지 하면서 정답 말해내고야마는 ㅋㅋㅋㅋㅋㅋㅋ 둘 염병천병 진짜 너무 좋아서 광대 아파 ㅠㅠㅠㅠ 커엽고 은밀한 고급식 비밀공개연애 더 보여주세요 ㅠㅠㅠㅠ
[Code: 1fc0]
2023.03.04 10:04
ㅇㅇ
아니 이거 왜 대사들하고 상황들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필력 미쳤다....담임부터 너무 웃긴데 전학생 머릿속 폭주긴관차인거 존나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머리가 좋네 나보다 키가 1cm라도 크면 싫어<<< 존웃 ㅋㅋㅋㅋㅋㅋ 부랫놈 진짜 ㅋㅋㅋㅋㅋ

'맨몸의_남성을_다수의_남자들이_감탄사를_내뱉으며_만지는' 영상과 '손을_다친_친구를_도와주는_학생' 영상이 있으면 어느 쪽의 조회수가 더 높을까?<<<< 나붕은 후자요.......

'교실에서 소세지빵은 안 돼!!'<<<< 미쳤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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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4 17:07
ㅇㅇ
"나는 진실한 사람이야."
"웃기지 마. 한 번도 지킨 적 없으면서."
"네가 지킬 수 없게 만들었잖아."

<<ㅋㅋㅋㅋㅋ 진짜 ㅋㅋㅋㅋㅋ 웃긴데 꼴려
[Code: 9800]
2023.03.06 07:16
ㅇㅇ
모바일
내센세가 어나더를 ㅠㅠㅠㅠㅠ
[Code: 5a42]
2023.03.21 10: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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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개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009b]
2023.03.21 10: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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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소세지빵은 안 돼!!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상력은 또 왜케 좋고 디테일한뎈ㅋㅋㅋㅋㅋㅋㅋㅋ 브랫네잇 염병천병도 개좋다 센세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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