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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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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끔찍한 경험을 하면 그 기억은 뇌세포를 태우고 들어가 진한 화인(火印)을 남긴다. 그 화인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서 아주 작은 계기로도 반복 재생을 설정해놓은 비디오처럼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불안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안에 갇혀 '생생하게'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 지랄맞은 현상에 본인이 해당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5년 전 사건으로부터 발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저명한 정신의학자께서는 [트라우마로 인한 신체적 발작] 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트라우마?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그 기억으로 인해 불안하지도 않고, 화도 나지 않고, 그렇다고 생생하게 체험을 해본 적도 없다. 굳이 선을 그어보자면 나는 트라우마를 주는 쪽에 가깝다. 그런 내가 받는 쪽에 서있는 것은 명백한 규칙 위반이다. 그런데도 주치의씨의 진단에 100퍼센트 부정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빌어먹을 발작과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날 형을 잃었다. 그것은 곧 첫 '가족'이자, 유일한 이해자를 잃었다는 뜻이다. 형을 떠올릴 때마다 식중독이라도 걸린 것처럼 뱃속이 울렁거리고, 불편하고, 답답했다.

이건 상실감이야.
평소 '청군'이라고 부르는 머릿속 낙관주의자의 속삭임을 들었다.
너는 네가 오랫동안 갖고있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잖아. 잃기는 했어도 잊을 수는 없어.

내 기억은 화인처럼 친절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총상에 가깝다. 마치 군대에서나 쓸법한, 무식하게 거대한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뇌 어딘가에 박혀서 빠질 생각을 안했다. 청군의 말이 옳았다. 잃기는 했어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규칙 위반자가 되기로 했다.

트라우마라는 거대한 틀 안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을 피하려고 용을 쓴다. 하지만 나는 규칙 위반자답게 그것을 좇아다닌다. 기억을 제대로 마주하고나야 안정감을 느낀다. '약 끊기'를 시작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발작이 오기 전에 찾아오는 환상이 끝나고 나면 내 기억도 자동재생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중독성 투약 중단] 보다는 [트라우마 중독] 일지도 모른다. 저명하신 주치의씨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기억은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영화를 상영할 때처럼 화면이 흔들릴 때도 있고 희뿌연 구름 같은게 시야를 방해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출연 배우들이 누구인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으니까. 피를 뒤집어쓴 나. 바닥에 널브러진 형. 다수의 시체. 그 외 기타 등등.

여기서 불만이랄까,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기억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어떤 소년이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소년의 얼굴은 하얗고 깨끗했다. 거기…누가 있나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내가 언제 내던져버렸는지 모를 칼이 소년의 발치에 채였다. 나는 들켰다는 두려움에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만지지마. 보지마. 나를, 이 곳을 제발 보지마. 그냥 아무것도 하지마.
악귀같은 모습을 한 나도, 살풍경한 현장도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소년의 검은 눈동자는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의 어딘가에 머무른 채 나를 똑바로 붙잡고 있었다.
바람대로 아무것도 하지않고 그저 내 손아귀에 붙들려만 있던 소년은 천천히 내 손 위로 제 것을 겹쳤다. 나는 복종하는 신도처럼 그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 뒤돌아 도망쳐버렸다.
이걸로 재생 종료.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런 분위기의 인물은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은 커녕 엑스트라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의 해묵은 기억 속에서 그 소년만큼은 흐릿하지도, 가려지지도 않은 채 뚜렷하게 남아있는걸까.


'어차피 다시 만나지도 못할텐데'


멍하니 걸으며 생각했다. 아버지와 통화를 끝내고 집 근처에 있는 해상공원에서부터 만족스러울 만큼 전속력으로 달린 참이었다. 직선거리로 몇키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흔히들 하는 말로 '벌떡증'. 내 식으로 말하면 힘이 남아 돈 나머지 근육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 때마다 방에서 뛰쳐나가 벌이는 '개병'이었다. 종종 야밤에도 뛴다는 점에서 지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무리가 없겠다.

원래대로였다면 예고된 발작을 아버지 몰래 시작하고 끝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리고 지금쯤 나는 길고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을텐데, 아버지의 방해로 그러질 못해서 개병이 도져버린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새벽에 뛰쳐나가 꽤 오랜 시간을 달려서 그런지 길가에 사람이 북적였다.
 이런 곳에서 보통 나는 하얀 천에 튀어버린 빨간 물감처럼 눈에 띈다. 있으면 안되는 존재에게 보내오는 시선은 차갑고, 잔인하다.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빨간 물감과 같다. 얼른 지워내야할 그런 것.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부외자 취급이 엿같아서 나는 반항하는 심정으로 더더욱 하얀 천의 '영역'을 벗어났다. 어깻죽지에서 시작해서 손등까지 길게 덮은 문신이 그랬고, 저승사자처럼 시커먼 옷차림이 그랬다. 여기저기 긁히고 대충 매꿔놓은 바람구멍도 꽤 한 몫을 했다.

부외자 취급이 익숙하다고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혈기를 발산해서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몸이 딱 햇살에 올라탄 공기처럼 가벼웠다. 집까지 훨훨 날아갈 수 있겠다 싶을만큼 기분이 좋았다. 바람을 타고 날아든 시선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텐데.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리를 벗어나고자 몸을 돌렸을 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꺄악!!!]


귀를 찢는 소리.


"세상에, 소매치기인가?"
"사람이 쓰러졌잖아요, 이걸 어째..."


늙은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시체에 꼬이는 파리들처럼 모여든 인파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낼 생각은 없었는데, 귀를 찢어버리는 듯한 소리가 듣기가 싫었다. 내 귀를 잘라낼 수는 없으니 비명의 원인을 제거할 수 밖에. 보통 이런 상황에서 범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정도의 소란을 일으킨 걸로 보아 초짜가 저지른 짓일테고, 아마 첫 도둑질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했겠지. 와글와글 모인 파리들 가운데 가장 숨이 빠르지만, 침착한 녀석. 그게 범인이다.


"어이"


나는 오락실 입간판 뒤에 숨어있던 꼬맹이의 후드를 잡아챘다. 우악스런 손길에 꼬맹이가 목이 졸린 듯한 숨소리를 냈다. 예상대로다. 꼬맹이가 내쉬는 숨이 갓태어난 쥐새끼의 그것처럼 재빨랐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에서 또다른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게 듣기싫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나는 울컥 치솟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내 놔."
"....느,네?"
"그거 네 거 아니잖아. 내 놔."
"무,무슨 소리를... 이거 제꺼에요"


웃기지도 않은 거짓말에 코웃음이 절로나왔다. 말 없이 꼬맹이의 손에 들린 노란 가방을 쳐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그 입을 찢어놔야하나. 아무래도 발칙한 파리가 내 뜻을 알아챈 모양이다. 가방을 그대로 바닥에 흘린 채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짧은 숨을 토해냈다. 비명이 사라지자 이번엔 이명이 찾아왔다. 가지가지하네 진짜.


"저기..."


이명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들려서는 안될 목소리가.


"당신이 찾아준건가요..?"


뇌 어딘가에 처박혀서 빠지지 않는 총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눈동자를, 나는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거라고, 딱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할지..."


이건 꿈이야. 아직 깨어나지 않은거야. 청군이 말했다.
현실에서 이따위 일이 일어날리가 없잖아.
기억의 어딘가에서만 존재하던 그 소년을,
환상의 끝자락에서만 등장하던 그 눈동자를 이렇게 갑자기 마주할 수 있을리가 없어.



과연 청군의 말대로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나는 깊게 박혀있는 말뚝을 뽑는 심정으로 몸을 움직였다. 멱살을 잡힌 것처럼 소년을 향해 꾸역꾸역 전진했다. 가방을 건네받는 소년은 내 기억보다 아주 조금 더 자라있었다.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의 모습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가 느껴졌다. 교복은 벗었지만 앳된 티를 채 벗지못한 얼굴은 내 기억과 똑같았다. 맑고 하얗고 또 깨끗했다.


"그...별거 아닙니다."


대답은 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뇌를 전력으로 움직이느라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다. 온 신경이 소년에게 집중되어서 어느틈엔가 이명도 들리지 않았다.


“어?”

해사하게 웃고있던 얼굴 위에 별안간 곤란함이 떠올랐다. 소년이 빈 손을 허공에 몇번 휘저었다.

"...괜찮아요?"

물어놓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질문 자체가 너무 나답지 않아서 어색했다.


"그게... 지팡이를 들고있었는데 떨어트렸나봐요."
"..."
“.. 혹시 그 주변에 하얀색 지팡이가 떨어져있나요? ”

나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소년으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하얀 지팡이가 떨어져있었다. 다만 깔끔하게 반으로 부러져있다는게 문제였다.


“.. 부러졌네요.”
"네에??"


하얀색 지팡이라면, 소년의 눈에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유를 한 스푼 풀어놓은 듯 탁한 눈빛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그 사실을 뒷받침 했다. 어쩌면 이 소년은 ‘진짜’ 그 날 아무것도 못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건 이 소년과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헤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인 것처럼. 딱 그렇게.

안되지. '백군'이라고 부르는 현실주의자가 입을 열었다.
상황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호도하면 안되지.
확인해야지.
정말 '그' 날에도 눈이 안보였는지.
아니라면 어디까지 알고있는지 알아내야지.



"그..하얀색 지팡이라는건, 눈이..?"

한개에서 두개가 되어버린 지팡이를 손에 쥐고있던 소년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이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이럴 때 혼자는 좀 어렵네요"

아. 정말로 눈이 보이지 않는구나. 나도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토해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여태 은인의 성함도 모르고 있었네요”
“..예?”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안돼. 청군과 백군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사- 아니, 쿄스케..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까지 알려주는건 위험부담이 크다.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럼 쿄스케씨. 저는 마츠다 히데아키라고 해요.”

해묵은 기억 속 소년과 똑같은 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이 정말 현실인가?

“오늘은 정말 폐를 끼쳤습니다. 언젠가 은혜를 꼭 갚을 수 있게 해주세요."
"....잠깐..."
"그럼 전 이만..."


소년, 아니 히데아키가 몸을 돌려 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제법 크게 갈라진 길 틈 사이로 발이 빠진 것이눈에 띄었다. 나는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히데아키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품 속의 작은 몸을 타고 간질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며 허락하는 것처럼.


"...역시 지팡이가 없으면 위험하네요."
"아...."
"괜찮으면 집까지 데려다 줄까요?"


지랄하네. 백군과 청군이 말했다. 나는 애써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히데아키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히데아키 등장까지는 빼고싶어서 분량조절실패ㅋ큐ㅠㅠ
카소 짤은 히데아키가 아니지만 뭔가 저런 화사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며 썼기때문에ㅇㅇㅇ
양부한테 가스라이팅 당하느라 감정에 무지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쿄스케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내 손의 한계만 체험하는 기분....
읽어주는 붕들 코맙코맙



쿄스케히데아키 마치아카
2023.01.29 19:18
ㅇㅇ
헠헠 개도라방스 내센세랑 동접했다..!!! 선추박고 무릎꿇고 경건하게 읽어야지!!
[Code: fb37]
2023.01.29 19: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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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대작이다 트라우마 쫓아다니면서 스스로 괴로운건지 짜릿한건지 여튼 극한으로 몰고가는게 존나 쿄스케 그 자체다싶고 히데아키랑 처음 만났을때 자기도 모르게 젠틀해지는것도 존좋ㅠㅠㅠㅜㅠㅠㅠㅠ
[Code: be36]
2023.01.29 19: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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핰핰 쿄스케 ㅌㅌㅌㅌ 이제 히데아키랑 만났다!!
[Code: 518d]
2023.01.29 19: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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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필력 진짜 감탄밖에 안나와.. 청군백군이 쿄스케의 다른 자아인가 뭐 그런건가? 도둑잡을때 기존쎔인거 존나쎅씨하고 아무튼 너무 조타ㅠㅠㅠㅠㅠㅠ
[Code: f6b6]
2023.01.29 23: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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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가 있어서 행복한 주말이야ㅠㅠㅠ 쿄스케 본인 트라우마 한가운데 있던 히데아키랑 만났으니까 앞으로 갈길이 구만리네요 센세...?
[Code: 25df]
2023.01.30 01: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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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스케 서사가 뭔가 쓸쓸한데 존나 복잡하고 어려워서 더 궁금해 ㅠㅠㅠ 센세 어디 모셔놓고 맨날 글만 쓰게 하고싶다 레알루😭
[Code: 2fb8]
2023.01.30 1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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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 센세 어느 방향에 계시죠? 들리세요? 제 안의 청군 백군 적군 흑군 황군이 오방으로 센세를 행해 기립박수 치고 있어요
[Code: 1c47]
2023.02.03 03: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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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맛있다고 밖에 표현을 할 수 없는걸까....하아.... 개맛도리다진짜
[Code: 6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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