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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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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원 애기 배리 너무 짠하고 귀여움... 티비 볼 나이에 엄마가 모아둔 클래식 히어로 만화책 보는 것도 존나 너드같고 귀여움...



3.

다섯 시간 후, 이번에 모두가 모인 것은 의무실이었다. 생각보다 클락 팀이 빠르게 찾아낸 덕에 복잡한 일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워치타워로 잡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원하던 답변은 어느 정도 얻어낸 모양이었다. 사이보그가 믹시즈피틀릭의 예상 위치를 추적하고, 클락이 믹시즈피틀릭을 꼬여냈다. 예상했던 대로 숨을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음만 먹으면 진실의 올가미 정도야 얼마든지 소용없게 만들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상관없다는 듯 팔을 내밀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할이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다른 시간대에서 온 게 아니라는 거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래.”


클락이 믹시즈피틀릭과의 만남을 모두 기록한 장치를 브루스에게 내밀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박쥐 모양의 까만 금속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 떨어졌다.


“자기 말로는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더군. 리그원 중 하나를 무력화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대.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뭘 걸고 넘어졌는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데. 마법 거는 것만 해주면 된다고 했대.”
“그 믹시즈피틀릭이? 상대가 누군데?”
“그건 말해주지 않았어.”
“다시 되돌릴 방법은? 이름 거꾸로 말하는 거에도 협조하던가?” 브루스가 장치를 컴퓨터에 꽂아 넣으며 물었다.


다이애나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상대방도 알고 있어서, 혼자 하지 못하게 했나봐. 다른 사람의 마법하고 섞여서 이름만 가지고는 풀리지 않을 거라고 했어. 혹시 몰라서 직접 시켜봤는데도 보시다시피 그대로야.” 그녀가 아직 잠에 빠져있는 배리를 향해 손짓했다. 몸에 연결된 모니터는 안정된 바이탈을 나타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가벼운 안정제를 맞춰놓은 상태였다. 커다란 기계들 사이에서 작은 몸이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할이 이를 갈았다.


“그럼 뭐야? 이대로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 그냥 두면 알아서 돌아올 거라고 했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기분 내키는 대로 도와주겠대. 상대방한테는 이제 관심 없다는데.”
“그냥 돌아온다고? 얼마나 걸리는데?”
“음... 6개월?”
“6개월이라고?!”


할이 소리쳤다. 6개월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플래시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가 대단한 히어로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민간인 배리 앨런의 삶부터 시작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절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할은 배리를 6개월 동안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아주, 아주 싫었다. 11살의 배리 앨런도 나쁘지는 않지만, 친한 친구가 한 순간에 말도 붙이지 못 할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의 눈이 침대에 누워 곤히 자는 앳된 얼굴로 향했다. 6개월. 다시 만나려면 반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믹시즈피틀릭과는 내가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우선, 존과 내가 알아낸 정보와 교차해서 판독하면, 시간 여행이나 차원 이동은 아닌 게 맞는 것 같군. 시간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스피드포스가 있고, 차원을 넘어온 흔적은 없어. 혹시 몰라서 저스티스 리그 다크에도 협조를 요청했는데 답변은 같아.”

브루스가 말하는 동안 뒤의 화면에 자타나와 콘스탄틴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신감정을 할 수 있었어?” 클락이 존에게 물었다.
“가능하더군요. 보통 스피드스터는 뇌 속의 정보가 지나치게 많고 빠르기 때문에 잘못 접근하면 정신감정을 시도하는 쪽이 위험할 수 있어 어렵습니다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스피드포스와의 연결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머릿속의 정보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플래시가 맞습니다.”


브루스가 말을 이어 받았다. “말하자면, 단기 기억 상실증 같은 거지. 다만 몸이 같이 어려졌을 뿐.”
“이제 어떡해?”


모두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서렸다. 6개월이라는 말에 손 놓고 있을 작정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짧은 기간 안에 해결되지 않을 일인 것임은 분명했다. 우선 아무것도 모르는 열 한 살짜리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가장 급했고, 그 다음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배리 앨런의 행선지를 어떻게 꾸밀 것인지도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스피드포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난감했다. 안녕, 너는 사실 서른 살이고 기억을 잃었단다. 몸이 어려진 건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란다. 갑자기 마법 같은 힘이 생긴 건 유감이구나.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아무리 어리다 한들, 어디까지 납득시킬 수 있을까? 브루스가 먼저 말문을 텄다.


“우선 아이가 깨어나면 먼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도록 하지.”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 건데? 아마 노라 앨런이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고 싶어 할 텐데.”
“시간 여행이 아니니, 말해준다고 해서 패러독스가 생길 일은 없어.”
“시간의 꼬임은 없겠지만 어린 아이에게 설명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샨의 말이 맞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참 지난 과거지만 눈앞의 아이에게는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다. 이미 끝난 지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라고 말해본들 아 그래요, 하고 깔끔하게 갈무리 될 일은 아니었다. 서른 살의 배리 앨런도 아직 가슴에 채 다 묻지 못한 일이다. 아이에게 어디까지 기대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앞으로 몇 달이나 같이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면,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감정적인 문제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니, 사실대로 말해주는 수밖에 없지. 숨기는 게 더 문제가 되잖아. 아이들은 생각보다 그런 거에 민감해. 나도 존에게 항상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는걸.”
“아버지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걸요. 플래시라면 범인이 누군지 알고 싶어 할 거예요.”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 말에 방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프로페서 줌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감추는 것이 최선이었다. 브루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가족과 관계가 없는 다른 범인이 잡힌 걸로 하지. 적당히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놓도록 하고.”
“자료는 제가 만들게요. 센트럴 시티 출신의 적당한 무기수를 찾아두면 될 것 같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스피드포스는 어떻게 하죠?”


리그원들이 생각에 잠겼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은 배리 앨런도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 시간여행을 하려고 애를 썼다가 모든 게 틀어졌었다. 그런데 경험도 적고 나이도 어린 배리 앨런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거라면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클락이 리그용 커뮤니케이터가 아닌 개인용 휴대폰을 꺼냈다. 주소록을 뒤적거리더니 한 사람의 번호를 띄워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에는 제이 개릭의 웃는 모습이 있었다.


“어차피 당분간 센트럴 시티를 맡아야 하잖아. 거긴 돌아가면서 한다고 하더라도 키스톤 시티까지 우리만으로 커버하기는 어려우니까. 제이한테 상황 설명을 하고, 배리의 상태도 확인해달라고 하자. 내가 연락해둘게.”
“괜찮은 생각이네요.”
“월리는?” 다이애나가 물었다.
“당분간 타이탄 일로 바빠서 이쪽으로는 못 올 것 같다고 하더군. 나이트윙도 마찬가지고. 얼마 전에 연락 받았어.”
“나이트윙이 그런 걸로 너한테 연락도 하냐?”
“업무상 협조 요청 하는 김에 하는 근황 보고야.”


배트맨이 할에게 짜증 부리듯 툴툴거렸지만 썩 기분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늘 주변 사람을 밀어내는 척 하면서, 정작 아들들에게 연락이 오면 내심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걸 알고 있어서 나이트윙이 가끔씩 연락을 던져오는 건지도 몰랐다. 딕은... 참 착한 아이야... 할이 생각했다.


클락이 1대 플래시와 통화를 하며 의무실 문을 나가는 그 때에, 침대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얀 이불 밑에서 몸이 조금씩 뒤척이더니 잠시 후에 몽롱하게 잠긴 두 눈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리 위에서 심박을 나타내는 기계를 한 번 보다가, 팔에 붙어 있는 전극을 보고는, 상체가 벌떡 일어났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다이애나가 미처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몸에서 노란 번개가 일며 아이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확하게는, 달려 나가려고 했다. 침대 밖으로 뛰어내린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해서 반대편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쳐 튕겨 나오고 말았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까지 0.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할이 재빠르게 다가가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이를 안아 올렸다.


“배리, 진정해. 괜찮아?”
“시, 신발이-”


신발 밑창에 불이 붙어 있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할이 반지로 소화기를 만들어 불을 껐다. 배리가 겁에 질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할이 아이를 단단하게 받쳐 안고 목 뒷덜미를 가볍게 눌러 자신의 어깨에 묻었다.


“놔, 놔 주세요-”
“가만히 있어. 다치게 하려는 게 아냐. 방금 부딪쳐서 큰 일 날 뻔 했잖아.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풀어줄게.”


약간의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만 힘을 주고 속으로 하나 둘 초를 셌다. 이십 초 남짓 지나자 버둥대던 몸이 곧 잠잠해졌다. 말을 잘 듣는 편이군, 할이 생각했다. 우는 조카들을 진정시킬 때에는 십 분이 지나도록 붙잡고 있어야 했었다.


배리가 할의 어깨를 약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까보다 조금 더 정신이 든 표정이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이 방금 누워있던 침대를 보더니 부딪친 충격 때문에 물건이 흐트러져 있는 반대편의 벽을 내려다봤다.


“...방금 저 침대에 있지 않았어요?”
“맞아. 그리고 벽에 부딪쳤어.”
“하지만 아프지 않은데요.”
“그렇겠지. 그게 이제 우리가 설명해주려고 하는 거거든.”


할이 차분하게 말했다. 당황해서 공황 상태에 빠지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배리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자극이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깔았다. 배리는 말을 잃고 잠시 그대로 할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아이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 나머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존은 잠시 의무실 밖으로 나갔고, 할은 배리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기회를 얻었다. 지친 눈 아래로 어두운 색이 드리워있었다.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 눈 밑 그늘이 보이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빠르게 얼굴 주변과 상체 부근을 살폈다. 다행히 충돌로 인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메타휴먼이란.

“...죄송해요. 문제를 일으키려던 건 아니었어요.”


브루스와 다이애나가 시선을 교환했다. 아이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제는 한없이 엉킨 실타래를 천천히 풀 인내심과 시간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 전에, 할은 배리가 사과부터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울고, 떼를 쓰고, 좀 더 막무가내로 지내도 괜찮은 나이였다. 심지어 깨어나니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과 있게 되었다면 얼마든지 뛰고 소리 질러도 허용범위 안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과부터 하는 애가 됐는지. 할이 배리의 무게 중심을 왼쪽 팔로 옮기고는 반대편 손으로 배리의 이마에 흘러내려온 머리를 살짝 넘겨주었다.


“사과는 안 해도 돼. 충분히 놀라고 이해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인 거 알아. 알겠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너에게 해줄 말이 아주 많고, 대부분은 믿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물어보는 말에는 최대한 대답해주려고 노력할거야.” 할이 손을 뻗어 배리가 볼 수 있도록 흐트러진 침대와 벽을 가리켰다. “그 중 하나는 네가 진정하지 않으면 방금 벌어진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거고. 그러니 내가 너를 침대에 내려주면 가급적 가만히 앉아있도록 노력해봐. 네가 다치길 원하지 않으니까. 약속하면 내려줄게.”


배리가 뭔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금방 나왔다. “알겠어요.”


다이애나가 침대를 가볍게 정돈했다. 할이 배리의 눈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등과 다리 뒤를 받쳐 천천히 매트 위에 내려놓았다. 불안정해보였던 눈빛이 사라져있었다. 몇 번인가 몸을 뒤척이더니 다리를 모아 자리를 잡았다. 밑창이 그을린 신발을 하나씩 빼서 손에 들고 잠깐 브루스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이들의 감이란. 이 작은 방 안에서 그새 누가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우선, 큰 것들을 먼저 얘기해줄 테니까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도록 하렴.”

브루스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웠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배트맨은 어린 아이에게 유독 물러지는 데가 있었다. 그의 평소 성격을 감안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 전에,” 브루스가 카울을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내 이름은 브루스 웨인이고, 아까는 무섭게 해서 미안하구나. 네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었어.”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히어로 일 때문에 비밀인 거죠? 알아요.”

“아까도 그 얘길 하던데, 어떤 걸 본 거니?”
다이애나가 물었다. 아이는 대답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 플래시라는 영웅이 나오는 만화책이 있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허... 플래시라.”
“저 때 읽은 책이면 제이가 나오는 게 맞을걸.”
“제이가 뭐에요?”


할의 말에 배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름까지는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가명이거나. 하긴, 아무리 만화책이라고 한들 본명을 그대로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플래시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생각보다 설명이 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브루스가 근처에 있는 보조의자를 끌어다 아이의 근처에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 플래시가 실제로 있는 영웅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만난 이후 처음으로,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짜에요?”
“그럼.” 브루스가 미소 지었다. “네가 방금 그와 같은 능력을 쓰지 않았니.”


배리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마치 빠르게 이동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열심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만화책에서는 이렇게 보이지 않았는데요. 번개도 없었고요.”
“...작가 연출력의 차이 아냐? 그 시절 만화에 번개 효과가 있었겠어?”
“할, 조용히 해...”

다이애나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야. 신음 소리가 났다. 브루스는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만화와 현실에는 차이가 있지. 사실 그래서 우리가 그 영웅을 지금 여기로 불렀단다. 우리는 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너를 도와주기가 어렵거든.”

곧 자기가 만화책에서 보던 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힘이 된 듯 했다. 완전히 밝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아이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반면 브루스의 표정은 다시 조금 굳었다.


“그래서, 그가 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너에 대한 얘기를 해주려고 한다.”

작은 노트북만한 크기의 타블렛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배리가 긴장해서 조금 몸을 멀리 하려고 하다가 안심하라는 듯한 할의 손짓에 다시 멈췄다. 몇 번의 터치에 타블렛에는 배리 앨런의 신상 정보와 사진이 떠올랐다.


“우리는 네가 누군지 안단다. 너도 우리가 누군지 알아. 너는 열한 살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기는 네가 기억하는 시점에서 약 이십 년이 지난 뒤야. 우리가 아는 너는 서른 살이니까. 우리는 너의 친구고, 나쁜 악당이 너를 공격했는데, 그게 널 어리게 만들고 기억을 지운 것 같아. 여기까지 이해했니?”
“제가 시간여행을 한 건가요? 타임머신 처럼요?”
“타임머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조금요. 책에서 읽었어요.”
“어떤 책이지?”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이요.”


브루스가 놀란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꽤 어려운 책인데.”


예상했던 반응과는 다르게 기가 죽은 것처럼 어깨를 내렸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할이 마음 속 노트에 그 반응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은 아니야. 기억상실에 가까워. 우리가 알기로는 네가 능력을 얻은 시점은 네가 스물다섯 살 때거든. 하지만 너는 지금 힘을 가지고 있잖니. 물론 이것만 가지고 판단한 것은 아니야. 네가 시간 여행을 한 게 아니라는 증거도 있어.”
“제가 기억을 찾는다고 해서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네요.”


그 질문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스가 잠시 멤버들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짧게 대답했다. “그렇지.”

돌아오는 반응은 작은 끄덕임이 전부였다.


“우리가 알기로는 너는 이 상태로 6개월 정도 있어야 하지만, 네가 스피드스터이기 때문에- 너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들을 스피드스터라고 한단다. 너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어. 단순히 달리기가 빠른 것만이 능력이 아니야.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빨라질 거야. 그래서 기대하기로는, 6개월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노력하마.”


배트맨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말을 가장 짧은 시간에 한 기록적인 순간이 아닐까? 할이 배리의 얼굴을 살폈다. 아주 수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걸 애써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현 시점에서 필요한 얘기는 한 것 같구나.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렴.”
“제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럼 그렇지. 모두의 머리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십 년이 지났다는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금 배리의 머릿속에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브루스가 말을 고르는 사이에 다이애나가 침대의 빈자리에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야, 네 어머니는,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을 떠나셨지. 맞니?”
“...네.” 메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아빠가... 그랬다고 했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그 말에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목소리가 커졌다. 다이애나를 향해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풀이에 가까웠다.


“모르겠어요. 아무도 저한테 말해주지 않아요. 아빠를 어딘가로 데려가서 질문한다고 했어요. 얘기하고 싶다고 했는데 얼굴도 보면 안 된대요. 일주일 됐어요.”

그러더니 잠시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아빠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물어보기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자 할의 머리가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울렸다. 배리는 지금 단순히 아빠가 보고 싶은 아이인 게 아니었다. 정말로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아빠가 지금 감옥에 있나요? 였을 것이고, 조금 더 자세하게는, 아빠가 범인이 맞나요? 였을 것이다.


팔찌를 찬 손이 아이의 어깨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감쌌다. “네 아버지는 지금 집에 계신단다. 너와 같이 살고 계시지는 않지만, 다른 집에서 지내고 계셔.”


배리가 거의 참기 힘든 것을 뱉어내듯이 말했다. “왜 집에 계신 거예요?”
“무슨 뜻이지?” 브루스가 물었다.
“살인죄는 최소형량이 그렇게 낮지 않잖아요.”


작은 몸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제법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브루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는 네 명의 로빈을 키워낸 자경단원 치고는 어린 아이들의 상처에 무엇보다도 민감했다. 쓴 맛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니?”
“알아봤어요.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 있었어요.”


그렇다면 말이 된다. 헨리 앨런은 폴빌 마을 출신 내과의사로, 종종 경찰과 협력해서 수사에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그의 서재에 범죄와 관련된 자료가 많은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여상한 투로 말했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아이의 기분을 대신했다. 위로가 서툰 배트맨을 대신하여 원더우먼이 왜소한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작은 친구야, 너는 네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아빠는 범인이 아니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요.”


서른 살의 배리 앨런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세세하게 다 털어놓지는 않았다. 열한 살의 배리가 지냈을 최근의 일주일은 아무도 몰랐던 일주일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이미 죽고 없는 엄마와, 끌려가서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아빠, 제대로 챙겨주는 사람이 누군가는 있었을까?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아이는 체념을 빠르게 배웠다. 다이애나가 배리의 손을 꼭 쥐었다.


“놀라지 말고 들으렴. ...네 아버지는 범인이 아니란다.”


그 말에는 확실하게 반응이 있었다. 배리의 목이 거의 채찍처럼 돌아갔다. 쏟아질 듯 커진 눈에 반쯤 의심이 서려 있었다.


“정말이에요?”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진실이라고 헤라 신께 맹세하마. 이런 걸로 거짓말 하지는 않아.”

“그럼 누가- 누가 그랬어요?” 목소리가 불쌍할 만큼 떨렸다.


브루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커뮤니케이터를 살짝 꺼내어 확인했다. 사이보그로부터 꾸며낸 자료가 업데이트 되었는지 보고 받은 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망토를 갈무리했다. 다시 침대 위에 있는 타블렛을 몇 번 터치해서 화면에 얼굴을 띄웠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회색 머리의 백인이었다. 이름도, 출신지도 적혀 있었지만 아마 진실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이 사람이란다. 아마 너는 모를 거야. 너희 집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거든. 특별한 이유 없이 연쇄 살인을 저질렀어. 현재는 다른 도시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 무기징역이 무슨 뜻인지 아니?”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는 거요.”
“맞아.”


파란 눈이 멍하게 한동안 화면 위를 머물렀다.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물줄기가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곧 헐떡거림으로 바뀌었다. 처음으로 열한 살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할이 망설임 없이 다가가 배리를 안아 올렸다. 작은 두 팔이 할의 목 주변을 감싸 안았다. 어깨 부근의 수트가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한참 이어졌다. 브루스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기징역, 살인죄의 형량,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 까지 얼마나 뒤지고 또 뒤졌을까. 부모가 떠난 뒤 뭔가에 집착하는 그 기분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할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시 훌쩍임으로 잦아들 즈음 의무실 문이 열렸다. 클락과 제이가 활기차게 걸어 들어왔다. 분위기를 읽은 클락이 먼저 자리에 멈춰 서고, 이어서 제이가 클락을 제치고 앞서 나오더니 탐탁지 않은 얼굴로 팔짱을 꼈다. 슈퍼맨의 동공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몰라 어설프게 움직였다. 어두운 어른 둘에, 우는 아이 하나, 달래는 사람 하나. 오는 길에 대략적으로 들은 내용까지 하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다이애나가 멋쩍게 미소 지으며 다가가자 제이가 자세를 풀고 마주 안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너희는 정말 아이 다루는 데에는 소질이 없구나. 내가 올 때까지 좀 기다릴 순 없었니? 그렇게 오래 걸렸을 리는 없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에 배리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발갛게 부은 눈가가 안쓰러워 할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번개가 그려진 빨간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날개가 달린 양철 모자를 쓴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마치 만화책을 찢고 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파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뜨였다.


“...플래시?”
“그래, 내가 바로 플래시란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지.” 나이 든 히어로가 웃으며 배리에게로 다가갔다. “뭐, 적어도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은 네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니까.”


제이가 손을 뻗자 아이가 홀린 듯이 몸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할이 몸을 추슬러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아이들을 돌봐온 사람답게 받아드는 몸짓이 익숙했다.


“제- 제가요?”
“그래. 너도 플래시고, 나도 플래시지. 이런, 너 정말 가볍구나.”
“제가 플래시에요?”

배리가 눈을 끔뻑거렸다. 제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으니 놀라지 말렴. 저 사람들이 아직도 그 얘기를 안 해준 거니? 울릴 시간이 있었으면 그 정도는 말하기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가 눈을 흘기듯 장난스럽게 세 명을 바라보았다. 질책하는 시선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들 눈을 피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들 같았다. 심지어 그 배트맨마저도 약간 움츠러들었다. 수십 년을 일선에서 뛰어온 영웅 앞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잘해주셨어요.”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그랬겠지. 좋은 사람들이니까.” 제이가 미소를 지었다. 배리 앨런은 어려도 배리 앨런이군. “자, 내가 너를-”


말을 잇기도 전에 의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존이 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냄새로 봐서는 뭔가 패스트푸드 같았다. 튀겨진 감자 냄새가 의무실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배리의 몸이 약간 들썩이자 제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스피드스터와 어린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아는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있다는 걸 마침내 알게 돼서 참 다행이구만.”


할이 얼굴을 가렸다. 맞다. 또 하나의 플래시 팩트. 빠른 신진대사. 귀에 박히도록 들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도 잡아먹을 나이에 한참을 달린 걸로도 모자라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으니,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존이 미소 지으며 봉투를 제이에게 건넸다. 제이가 빈손으로 배리를 잡고 침대가로 이끌어 신발을 신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힘을 조절하는 법을 간단하게 가르치는 동안에, 너희 다섯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상의하는 게 좋겠구나. 물론 애 배부터 채워야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 남기고는 떠난 자리에는 민망한 침묵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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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링 약 할배리

코믹스에서는 디씨발놈들 때문에 제이는 기억이 사라진 채로 복구됐지만... 그냥 리버스 전 설정으로 간다
플가 연대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ㅠㅠ
스피드포스로 이어진 플 패밀리 다시 내놔 새끼들아

나는 브루스가 (로빈이 아닌) 애들 앞에서는 한없이 상냥해질거라는 헤드캐논이 있음


왜 점점 길어지는거같지...
2021.07.10 23: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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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배리야ㅠㅠㅠㅠㅠㅠ 엄마한테 그런 일 없었을 때 플래시 만화책 좋아하면서 읽었을 모습이랑 일 터진 후 이해도 잘 안 갈 헨리의 서재 책을 꾸역꾸역 읽었을 모습이 넘 상상가서 슬프다ㅠㅠㅠ 중간에 배리가 기억을 찾는다고해도 자기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겠네요 묻는건 무슨 의미일까ㅠ 부모님 잃은지 일주일 된 열 한살의 배리가 있던 곳이 어딜까.. 암만 상상해도 좋은 건 안 떠올라서 슬퍼ㅠㅠㅠㅠ 어린애들한테 다정한 브루스 진짜 좋다 다른 저리들도 다정하고ㅠㅠ 글구 제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이 등장한 거 넘 좋음ㅠㅠㅠㅠㅠㅠ
[Code: e50b]
2021.07.12 03: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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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야ㅠㅠㅠㅠ
[Code: 9daa]
2021.07.25 01: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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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히어로 그룹(?)끼리의 연대가 느껴지는게 너무 좋닼ㅋㅋㅋㅋㅋㅋ 아 배리ㅠㅠㅠㅠ 아직 어린데 아이고ㅠㅠㅠㅠ배리야ㅠㅠㅠㅠ
[Code: 2c0f]
2022.09.06 01: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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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배리를 대하는 리그즈 너무 따수워서 눈물남.... 사과부터 하는 애기배리 너무 안쓰러워ㅠㅠ 그걸 마음에 안들어하는 할도 개좋다 패닉해서 버둥거리는 배리를 꼭 끌어안아서 진정시키는 할ㅠㅠㅠ
[Code: 58e8]
2022.09.06 01: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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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랑 배리 만나는것도 너무 좋아요 센세... 센세는 천재댜....
[Code: 58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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