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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 션웨이쿤룬 웨이란 주일룡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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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룬! 쿤룬, 어서 일어나보세요!"


이른 아침부터 바깥이 시끌시끌하다 했더니, 우당탕거리는 소음과 함께 활기찬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쿤룬이 반짝 눈을 뜨면, 어린 소년이 맑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 빠지듯 웃은 쿤룬이 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웃음을 터뜨린 아이가 쿤룬을 마주 안으며 품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무더웠던 여름이 때를 맞춰 물러나면서 가을이 찾아오고 있을 즘, 곤륜산의 아기 황룡은 쿤룬의 허벅지 근처까지 자라났다. 모두의 예상대로, 걷고 말하기 시작한 션웨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집 밖을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황룡의 핏줄답게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운이 넘쳐 매일 드넓은 곤륜산의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 덕에 아이는 이제 곤륜산이라면 모르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션웨이는 황룡으로서 본능적인 호승심에 불타오르면서도 결코 다른 아이들과 거칠게 힘을 겨루지 않았다. 마치 곤륜산이 쿤룬 그 자체임을 아는 것처럼, 팔씨름이나 달음박질 따위로 끓어 넘치는 호승심을 해소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곤륜산의 아이들이 션웨이와 가까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을 만큼 기운이 넘치는 동시에 선을 지킬 줄 아니,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곤륜산 아이들과 어울리는 션웨이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쿤룬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다. 따로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무엇 하나 해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그저 예뻤다. 어쩌면 쿤룬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배우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이루 말하지 못할 만족감이 차올랐다. 새하얀 백지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임으로써 얻는 쾌감은 생전 겪어보지 못한 것이어서, 천하의 쿤룬마저 기대심에 부풀어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만들었다.

쿤룬은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션웨이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하얀 손가락 사이로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그 사이, 따스한 품에 안겨 노닥거리는가 싶던 션웨이가 쿤룬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쿤룬, 빨리, 빨리요. 빨리 일어나요."

"이러다 숨넘어가겠구나. 내 작은 아가께서 뭐가 이리도 급하실까?"


품에 안겨 버둥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운지, 웃음을 터뜨린 쿤룬이 아이를 껴안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션웨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잠시간 쿤룬과 마주 웃던 션웨이는 퍼뜩 제가 쿤룬을 찾은 이유를 떠올렸다.


"쿤룬, 쿤룬, 제게도 신기한 재주가 생겼어요!"


몸을 뒤로 확 젖힌 아이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넘어가려는 아이의 등을 받쳐준 쿤룬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재주라니?"

"이것 보세요!"


쿤룬이 고개를 까닥이며 되묻자, 션웨이는 얼른 제 양손을 펼쳐 보였다. 자그만 손 위에 옅은 푸른색 빛줄기 두 개가 서로 휘감듯 솟아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하더니, 얼음 결정 여러 개가 빛줄기의 안팎에서 춤을 추듯 돌아다녔다.


"쿤룬과 같이 있으니 저도 쿤룬을 닮는가 봐요."


션웨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우리가 서로 닮는 모양이야."


마냥 천진난만한 션웨이를 지그시 보던 쿤룬이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제가 눌러놓았던 신력이 서서히 피어나는 것뿐이지만, 들뜬 션웨이를 보니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겠지 싶었다. 설핏 웃은 쿤룬이 션웨이의 보드라운 뺨을 양손에 가득 담았다.


"샤오웨이, 내 사랑스러운 아가. 나와 닮는 게 그렇게나 좋니?"

"그럼요!"


션웨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쿤룬을 닮고 싶어 하는 아이가 이 찬란한 빛줄기를 기꺼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곤륜산에서 자신만이 아무런 재주도 없다는 생각에 은근한 외로움을 느끼던 참이라 더욱 그랬다. 다른 아이들은 숨 쉬듯이 모습을 바꾸고 꽃을 피우는데, 왜 저는 아무것도 못 하는지. 쿤룬이 신력을 눌러놓았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알 턱 없는 션웨이는 알게 모르게 시무룩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쿤룬과 더 가까워졌고, 아이들과 비슷한 재주가 생겼으니까.

그런 아이를 모르지 않는 쿤룬이 애정 어린 얼굴로 션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걸 알려주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나 보구나."

"맞아요. 쿤룬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어요."


션웨이가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쿤룬은 새삼 아이가 지나치게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해서, 평생 이 얼굴만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만 곁에 있으면 당장 하늘이 무너지든 땅이 꺼지든,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울컥 차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한 쿤룬이 션웨이를 세게 껴안으며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얼결에 쿤룬과 나란히 누운 션웨이가 꼬물꼬물 움직여 고개를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이 작은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션웨이의 가슴에 찌르르한 울림이 퍼졌다. 아이는 홀린 듯 멍한 얼굴로 하염없이 쿤룬을 바라봤다. 조그만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에 쿤룬이 미소 짓자,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놀란 션웨이가 파드득 쿤룬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가가 붉었다.


"아가, 어찌 그러니?"


쿤룬이 션웨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쿤룬이…… 쿤룬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쿤룬만 간신히 들을 정도였지만, 그 안에 녹아내린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 눈에는 내가 아름답느냐?"

"네, 아름다워요. 너무 예뻐서 저만 보고 싶어요……."


쿤룬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으면, 션웨이는 잔뜩 쑥스러워하면서도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놨다. 아이는 애초에 거짓말이 서툴거니와 쿤룬에게는 무엇 하나 숨기는 법이 없었다. 종종 이렇게 직설적인 고백이 돌아올 때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귀여운 녀석. 쿤룬의 웃음소리에 션웨이는 귓바퀴를 더욱 붉히며 몸을 웅크렸다.


"션웨이, 내 얼굴이 보고 싶다면서 왜 자꾸 숨어? 어서 고개를 들어보렴. 나도 네 예쁜 얼굴 좀 보자."


쿤룬이 션웨이의 뺨을 간질이며 장난스레 재촉했다. 입술을 비죽거린 션웨이가 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참, 놀리지 마세요."

"놀리기는 누가? 이토록 고운 얼굴을 곱다고 칭찬하는데 어찌 농이라고 해?"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쿤룬보다 곱지는 않을 거예요."


션웨이가 쿤룬의 손길을 피해 낑낑대며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쿤룬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와중에 이런 달콤한 말이라니. 바로 직전까지도 태연하게 아이를 놀렸으면서, 갑자기 그 한마디에 말문이 턱 막혔다. 까만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에 꽃물이 든 듯 붉은빛이 퍼졌다.


"아가, 션웨이."


괜스레 입술을 잘근거린 쿤룬이 션웨이를 불렀다.


"샤오웨이, 나를 봐주겠니, 응? 고개를 들어다오. 정말로 네 얼굴이 보고 싶단다."


낮은 목소리가 션웨이의 귓가를 지나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온몸을 단단히 옭아매는 동시에 마음이 저절로 동하는 다정한 채근이었다. 늘 그렇듯, 션웨이는 쿤룬을 이길 수 없었다. 백기를 든 션웨이가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살그머니 마주 본 얼굴이 이제 갓 개화한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니, 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쿤룬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이렇게 웃을 때는 특히나 더 눈부셔서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화려한 꽃이나 장신구, 보석 따위도 쿤룬의 앞에서는 빛을 잃어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을, 그 아름다움에 내 심장이 이리도 요동치는 것을 당신은 알아줄까.

션웨이가 몽환적인 얼굴로 쿤룬을 보니, 쿤룬은 아이의 눈가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에 션웨이가 눈을 잘게 깜빡였다. 팔랑팔랑 바쁘게 움직이는 속눈썹이 예쁘기도 하다. 오직 자신만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쿤룬이 아이의 이마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션웨이는 천천히 다가와 달콤한 애정을 선사하고 떨어지는 발간 입술에 또 온 마음을 사로잡혔다.


"쿤룬, 쿤룬……."


작은 가슴에 빠듯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션웨이가 쿤룬을 찾았다. 이제 막 숨을 튼 생명처럼 가쁘고 여린 목소리였다.


"아가, 나는 여기 있어. 항상 네 곁에 있지 않니."


쿤룬은 팔을 한껏 벌려 저를 끌어안는 션웨이에게 기꺼이 품을 내주며, 느긋한 손길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션웨이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쿤룬의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쿤룬. 쿤룬, 나의 쿤룬."

"그래, 샤오웨이. 너의 쿤룬이란다. 도망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쿤룬, 당신이 좋아요.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파……."


작은 아이가 온몸으로 사랑을 전하려 애쓰니 그것을 어찌 귀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리 없이 웃은 쿤룬이 션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몽실몽실한 구름 몇 점을 품은 새파란 하늘과 높이 떠오른 태양, 천장에 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의 향기, 이따금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가을의 문턱에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와 부둥켜안고 누워있으니, 이곳이 지상낙원이었다.

 
∞ ∞ ∞


그렇게 한참 동안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은 낮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션웨이는 쿤룬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친구들과 어울려 저 멀리 뛰어나갔다. 한참이나 작은 몸으로 어쩜 저렇게 쏜살같이 뛰어다닐까. 제 다리보다 짧은 녀석이 몸놀림은 야무지기 그지 없으니 참 신기했다.

쿤룬은 금세 멀어지는 션웨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툇마루에 앉았다.


"그러다가 입이 귀에 걸리겠어."


어디선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다칭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잠시 멈칫한 쿤룬이 찡그리듯 웃으며 다칭을 쓰다듬었다.


"그 정도는 아닐걸."


머쓱한 목소리가 뒤늦게 대꾸했다. 다칭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참 민망했다.


"아니긴, 누가 봐도 그 정도인데."


그리고 다칭은 다칭대로, 항상 여유롭고 태연자약하던 쿤룬이 다른 것도 아닌 사랑에 휘둘리는 것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나 놀라고 걱정됐지, 지금은 평화로운 소란을 마음 놓고 즐겼다. 역시 오랜 세월을 살려면 이런 일이 하나씩은 있어야 살만하지. 다칭은 저와 영 눈을 맞추지 못하는 쿤룬을 보며 킥킥 웃었다.


"남의 사랑을 매번 그렇게 놀리다니, 이 심보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쿤룬이 다칭의 토실한 얼굴을 잡아 늘이며 투덜거렸다.


"갓난아기를 데려와서 홀랑 잡아먹을 생각만 가득한 파렴치한보다는 덜 고약하지."


다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쳤다. 평온한 얼굴과 달리 거침없는 발언에 쿤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 너 무슨 말을…… 이, 이 정신 나간 고양이가!"


입술을 달싹이던 쿤룬은 드물게 말을 더듬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깔깔대며 웃은 다칭이 무거운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나무 위로 올라갔다.


"당장 안 내려와?"

"왜, 그렇게나 찔려?"

"시끄러워! 그런 말을 하다니, 너야말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마당으로 나온 쿤룬이 성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붉어진 얼굴은 화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내가 뭘? 위대하신 곤륜군께서 얼굴에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시는데, 당신의 지기지우가 어찌 그것을 못 알아보겠습니까?"


저 망할 고양이가. 놀리거나 비꼴 때만 극존칭을 쓰는 다칭을 아는 쿤룬이 이마를 짚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 안 하는 건데……."

"내가 틀린 말 했나? 션웨이랑 각인까지 된 마당에 무얼 더 숨겨?"


쿤룬의 혼잣말을 용케 들은 다칭이 얄미운 목소리로 약 올렸다. 쿤룬은 유난히 반짝이는 듯한 노란 눈동자를 못마땅하게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더 화내봤자 다칭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내가 원수를 뒀지. 고개를 저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상으로 향했다. 그러자 쪼르르 내려온 다칭이 쿤룬의 다리에 올라앉았다. 쿤룬은 혀를 차면서도 다칭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편하게 자리를 잡은 검은 고양이가 쿤룬을 올려봤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 쓰는 게 많았다고? 그냥 평소처럼 뻔뻔하게 굴어."


놀리는 것과 별개로, 다칭은 쿤룬이 왜 이렇게까지 울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운명이 이어졌는데 거리낄 것이 뭐가 있느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션웨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됐다고."

"네가 나이를 따진다고?"


미간을 좁힌 쿤룬이 대꾸하자, 다칭은 그보다 더 황당해서 되물었다.


"저 위에 나이 차이가 수십만 년인데 해로하는 자들 천지야. 네가 제일 잘 알면서 웬 나이 타령을 해?"


나이 차이가 대수인가, 족보 꼬이든 말든 잘 먹고 잘사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애초에 천계에 그런 걸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다칭의 말마따나,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쿤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흔들리는 눈빛이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션웨이는, 그 애는……. 내가 그 어린아이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을 리 없잖아."

"나중에 션웨이가 다 자라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쿤룬은 꼭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다칭은 연달아 정곡을 찔렀다. 쿤룬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흐린 눈빛을 눈꺼풀 안으로 감춘 쿤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허공 어딘가를 봤다. 차분한 얼굴에 깊은 번뇌가 내려앉았다.

매사에 막힘없이 흐르던 녀석이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헤매다니. 다칭은 괴로움이 스민 두 눈을 마주하고서야 쿤룬이 왜 이렇게 방황하는지 깨달았다. 각인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쿤룬에게 사랑이란 한평생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뿐이었으니, 그 틀을 깰 방법을 몰랐다.

각인되어 운명의 짝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분명 값지고 귀한 일이다. 단순히 마음이 통하는 것이 아닌, 영혼이 묶여 온전한 하나가 되는 기쁨을 어느 누가 마다할까. 운명의 짝을 만난 이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서로 각인된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짧은 틈을 가르고 몰려드는 경이로움과 환희, 마침내 자신이 완전해진 듯한 충족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는 열렬한 사랑……. 각인은 평생 겪어보지 못할 아름답고 찬란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름 지어주고 키워주는 걸로 만족할 사랑이었으면 애초에 각인되지도 않았겠지."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다칭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상념을 떨치지 못한 쿤룬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쿤룬. 각인이란 그렇게 순수하고 깨끗한 일이 아니야. 숭고할지언정 결코 순결하지는 않지."

"……."

"네가 션웨이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은 지극히 당연해. 이상하거나 잘못된 건 없어."


쿤룬은 그제야 고개를 숙여 다칭을 봤다. 언뜻 보기에 담담한 얼굴이지만, 다칭은 그 안에 숨긴 갈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 바보야."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을 맺은 다칭이 쿤룬의 배에 머리를 누르듯이 비볐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쿤룬이 다칭을 감싸안고, 허리를 숙여 부드러운 털에 이마를 기댔다.


"참나……. 누가 보면 네가 신인 줄 알겠다."


희미하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제법 고뇌가 가신 듯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몸을 늘어뜨린 검은 고양이가 짧게 울며 쿤룬의 손등을 핥았다.

 
∞ ∞ ∞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오후, 쿤룬은 션웨이와 함께 어느 호수로 향했다. 이미 곤륜산의 곳곳을 익힌 션웨이가 아직 와 보지 못한 곳이었다. 얕고 넓은 호수는 물이 어찌나 맑은지, 사이를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까지 전부 보일 정도였다. 호숫가에 멈춰 선 쿤룬이 안아 들고 있던 션웨이를 내려놓았다. 곧장 쿤룬의 옆에 붙어 옷깃을 쥔 션웨이가 쿤룬을 올려봤다. 커다란 눈이 호기심과 기대를 가득 담아 반짝였다.


"쿤룬, 여기는 어디예요?"


몸을 들썩이던 션웨이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곳은 쿤룬의 집 다음으로 그의 기운이 가득해서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내가 자주 찾는 곳이란다. 봄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예쁘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에 둘러싸여 예쁘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예쁘고, 겨울에는 새하얀 눈꽃이 내려앉아 예쁜 곳이지."


쿤룬은 션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성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여긴 꼭 쿤룬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아요."


고개를 주억거린 션웨이가 말갛게 웃었다.


"귀엽기는."


션웨이를 따라 웃은 쿤룬이 아이의 콧방울을 톡 두드렸다. 그러더니만 별안간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다. 당황한 션웨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흰 손이 아이의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발을 감싸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벗겨내자 금세 작고 하얀 발이 드러났다. 쿤룬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션웨이의 발등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뒤이어 제 바짓단을 걷고 신을 벗은 뒤, 소매를 대충 올려 물에 손을 담갔다. 다행히 아직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쿤룬이 편하게 앉으며 호수에 발을 담갔다.

어리둥절해서 멀뚱히 눈을 깜빡이던 션웨이가 쿤룬을 따라 물에 발을 집어넣었다. 원체 몸이 찬 아이에게 호수의 물은 퍽 미적지근했다. 하지만 션웨이는 쿤룬과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좋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여긴 나 혼자 오던 곳이란다."


이따금 물에 담근 발을 까닥이면서 가을바람을 즐기고 있으면, 쿤룬이 말을 꺼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션웨이가 쿤룬을 쳐다봤다.


"혼자요? 다칭은요?"

"다칭도 데려오지 않아. 혼자 있고 싶을 때 찾는 곳이니까."

"아……. 그런데 제가 이곳에 와도 되나요?"


션웨이는 쿤룬과 처음 하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했지만, 이런 좋은 장소를 다칭보다도 먼저 알게 되니 눈치가 보였다. 다칭은 쿤룬이랑 엄청나게 오래 지냈는걸. 다칭도 못 온 곳을 내가 와도 될까? 어쩔 줄 몰라서 애꿎은 옷자락만 잡아 늘렸다. 그러자 아이의 머리에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당연하지. 앞으로는 너와 이곳에 올 거니까."

"네?"

"션웨이, 내 아가."


깜짝 놀란 목소리가 되묻는 순간, 쿤룬이 션웨이를 불렀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눈이 아이를 향했다.


"이제부터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네가 함께할 것이고, 네가 가고자 하는 곳에 내가 함께할 것이다."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던 션웨이는 점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입을 벌리며 헛숨을 삼켰다. 얼굴을 붉힌 아이가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언제나 쿤룬의 곁에 있는 게 당연하긴 했으나, 이렇게 확언을 듣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어 바라보기만 하던 낙원이 스스로 문을 열고 자리 한 쪽을 내준 듯 너무나도 과분했다.


"제가, 제가 그래도 될까요……?"


션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쿤룬은 션웨이의 발간 뺨을 살살 문질렀다.


"당연하지. 왜, 싫으니?"

"아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좋아요, 정말 좋아요."


꿈을 꾸듯 아스라한 목소리가 겨우 대답하니, 동시에 쿤룬이 파안했다. 그것은 션웨이가 보았던 쿤룬의 미소 중 가장 해사하고 가장 찬란하며,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션웨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쿤룬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쿤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호수로 들어갔다.

션웨이가 얼른 고개를 돌려 쿤룬의 움직임을 쫓았다. 쿤룬은 발목이 조금 잠기는 깊이에서 멈췄다. 그대로 뒷짐을 지는가 싶던 그가 허리를 숙여 물에 손을 담갔다. 다음 순간, 션웨이의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어깨를 움츠린 션웨이가 눈을 잘게 깜빡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쿤룬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션웨이는 영문을 몰라 마냥 쿤룬을 바라봤다. 그러자 쿤룬은 다시 허리를 숙였고, 또다시 션웨이의 얼굴로 물방울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은 션웨이가 물기를 털어내며 눈을 동그랗게 깜빡였다.

투명한 물 안에 선 쿤룬은 지극히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말간 웃음을 지었다. 머뭇거리던 션웨이가 조심히 호수에 손을 담가 물을 튀겼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물방울은 쿤룬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픽 웃은 쿤룬이 한쪽 다리를 살짝 들더니 가볍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허공으로 흩뿌려진 물줄기가 션웨이의 몸을 흠뻑 적셨다.


"다 젖어버렸구나. 이를 어째."


한결같이 다정한 목소리는 걱정은커녕 장난기가 가득했다. 션웨이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에 손을 넣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한 손짓으로 물을 쳐올리자 이번에는 쿤룬의 정강이까지 물이 튀었다. 그러자 마치 답을 주듯 처음과같이 간지러운 물방울이 션웨이의 얼굴에 닿았다.

이제는 쿤룬을 따라 미소 지은 션웨이가 물 안에 완전히 들어갔다. 곧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크고 작은 물보라가 쉴 새 없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산란하는 물이 햇살을 받아 별처럼 반짝였다. 션웨이는 열심히 물을 쳐올리면서도 쿤룬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쿤룬!"


서로를 향해 물을 끼얹길 한참, 쿤룬이 별안간 물속에 털썩 주저앉았다. 쿤룬이 다쳤다고 생각한 션웨이가 허둥지둥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션웨이의 예상과 달리, 쿤룬은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이를 바라봤다. 하얀 얼굴이 물에 젖어 반짝였다. 어깨를 타고 늘어진 머리카락은 투명한 물속에서 흐트러져, 아직 가라앉지 않은 물결을 따라 살랑거렸다.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션웨이는 걱정도 잊고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샤오웨이."

"네, 쿤룬……."


문득 들려오는 부름에 션웨이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션웨이의 얼굴을 물들인 홍조가 선명하니, 소리내어 웃은 쿤룬이 아이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나는 앞으로 평생을 너와 함께할 작정이란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입술을 손등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댄 쿤룬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꼬리가 사르르 휘었다.


"쿤, 쿤룬이 좋다면…… 저도 좋아요."


션웨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미처 추스르지 못하고 급히 말했다. 그 순간, 쿤룬은 온몸을 휘감는 소유욕을 이기지 못해 션웨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을 울리는 고동이 자신의 것인지 션웨이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걸로도 좋았다.

숭고할지언정 결코 순결하지는 않은 것이 각인이라……. 다칭의 말을 떠올린 쿤룬이 션웨이의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래, 그것도 좋지. 원래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아니던가. 쿤룬은 자신이 훗날 아무리 낯선 감정에 휘둘린다 해도 션웨이가 함께한다면 견딜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2024.02.07 11:2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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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오셨다!!!!!!!!! 쿤룬보고 얼굴 붉히는 소년 션웨이 너무 귀엽다ㅠㅠㅠ 그걸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쿤룬도 너무 좋아ㅠㅠㅠㅠ 다칭 말하는거 웃겨ㅋㅋㅋ 갓난아기를 데려와서 홀랑 잡아먹을 생각만 가득한 파렴치한이래ㅋㅋㅋㅋ 쿤룬이 자기 감정을 확실히 인정했어 쿤룬이 중간중간 소유욕 드러내는거 존좋 자신만의 공간에 션웨이 데려갔어ㅠㅠㅠ 션웨이랑 쿤룬 천년만년 함께해ㅠㅠㅠㅠ
[Code: 630c]
2024.02.07 11: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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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항상 고마워 사랑해ㅠㅠㅠㅠ 센세 덕분에 행복하다ㅠㅠㅠㅠㅠㅠ
[Code: 630c]
2024.02.07 16: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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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다 센세다!!!!!!!!! 센세 너무너무 코맙고 사랑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29af]
2024.02.07 16:1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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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거 읽으면서 내가 내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어ㅠㅠㅠㅠ 션웨이도 쿤룬도 너무 사랑스럽고 좋아서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췄으면 하지만 또 션웨이가 얼른얼른 컸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어쩌나 싶은데ㅠㅠㅠㅠㅠ 그저 센세글만 핥는다ㅠㅠㅠㅠㅠ 센세 내가 또 기다리고 있을게 어나더어나더!!!!!
[Code: 29af]
2024.02.14 13: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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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이런 소중하고 따땃한 무순을...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압도적 감사합니다....평생 함께해요 센세
[Code: 7174]
2024.03.09 10: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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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나 계속 기다리고 있어.. 센세가 너무 보고싶다 기다릴게 돌아와ㅜㅜ
[Code: 8d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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