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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 션웨이쿤룬 웨이란 주일룡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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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평화로운 낮, 낮잠에 빠져있던 쿤룬은 품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꼼지락거리는 것을 꼭 껴안으며 몸을 웅크리자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와중에 그 소리가 사랑스러워서,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나른함에 몸을 맡겨 잠들려고 하니, 이번에는 제법 고집스러운 손길이 쿤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가…… 샤오웨이, 또 내 단잠을 방해하는 게야?"


낮게 웃은 쿤룬이 품 안의 무언가― 션웨이의 콧방울을 톡 두드렸다. 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는 귀찮음이나 불쾌함 없이 애정만이 가득했다. 쿤룬과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은 션웨이가 한 손으로 쿤룬의 소맷자락을 잡고, 냉큼 문 쪽으로 기어갔다.


"이 겁 없는 녀석아, 혼자 어딜 가려고."


작지만 재빠른 움직임에 웃음을 터뜨린 쿤룬이 얼른 션웨이를 품 안에 가뒀다. 션웨이는 쿤룬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곧장 이리저리 꼼질거렸다. 그러면서도 소매를 놓지 않는 자그만 손이 쿤룬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아가, 또 밖에 나가고 싶으냐? 이미 아침에도 나갔다 왔는데?"


결국, 몸을 일으켜 앉은 쿤룬이 션웨이의 뺨을 꾹 누르며 물었다. 그 손길이 답답하지도 않은지, 션웨이는 순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렇게나 눌리는 얼굴이 마냥 사랑스럽고 예뻤다. 킥킥 웃으며 말랑한 얼굴을 조물조물하니, 잠시 가만히 있는 듯하던 션웨이가 다시 쿤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기어다니더니 곤륜산 전체를 네 앞마당으로 삼을 작정이구나."


그 손을 풀어 잘게 입 맞춘 쿤룬이 장난스레 한탄했다. 션웨이가 곤륜산에 온 지 석 달, 포대기에 싸여 내리 잠만 자던 아이는 이제 몸을 감싼 천에서 벗어나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벌써 말귀가 트였는지, 고갯짓을 비롯한 여러 몸짓으로 열심히 제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기어다니고 나름 소통도 할 줄 알게 된 션웨이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히 쿤룬 자체였고, 다른 하나는 쿤룬과 함께하는 외출이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아이는 정말 쉴 새 없이 쿤룬을 졸라 곤륜산을 돌아다녔다. 여태 얌전히 잠만 잔 것이 이날을 위해서였나 싶은 정도였다.


"오냐, 지금 나간다, 나가."


그때, 션웨이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쿤룬의 가슴팍을 두드려 보챘다.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여준 쿤룬이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가 심통 나면 또 이 귀여운 얼굴을 꼭꼭 숨길 거지?"


션웨이가 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부지런한 생활에 도통 익숙하지 않은 쿤룬이 잠에서 깨지 못한 날이 있었다. 쿤룬을 워낙 좋아하는 션웨이는 혼자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제대로 골이 나 하루 종일 쿤룬을 피해 다녔다. 근처에 있으면서 막상 다가가려고 하면 저만치 멀어져 버리는 게 얼마나 애타던지. 저를 피해 다칭의 뒤에 숨었을 때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다칭은 자지러지도록 웃으며 쿤룬을 놀렸다. 아무튼, 쿤룬은 꼬박 하루를 더 써서야 겨우 션웨이의 화를 풀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낮잠을 자다가도 션웨이가 바르작거리면 바로 눈이 뜨이더랬다.


"요 영악한 녀석. 벌써 사람 약점을 쥐락펴락하면서 제멋대로 굴다니."


쿤룬이 통통한 배를 간지럽히자, 션웨이는 하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까르르 웃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웃음소리가 남은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래, 아이가 저와 함께 있고 싶다는데 그깟 잠이 대수일까. 기분 좋게 웃은 쿤룬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로 열흘째네."


그러기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말했다.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노곤함을 즐기던 다칭이었다.


"뭐가?"


쿤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가 낮잠을 포기한 거 말이야."

"그걸 세고 있었냐?"

"하늘이 두 쪽 나도 낮잠은 꼭 자던 녀석이 애 하나 들였다고 달라졌는데 당연히 세지."


쿤룬이 황당해서 물으면, 다칭은 놀리는 투로 대꾸했다. 저 얄미운 녀석. 헛웃음을 흘린 쿤룬이 션웨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잔디밭 위를 빠르게 기어간 션웨이가 다칭에게 매달리듯이 안겼다. 작은 두 손이 다칭의 볼을 마구 주물렀다.


"그래, 그래. 아침에도 봤지만, 나도 반갑다."


다칭은 익숙하게 션웨이의 손길에 짜부라지며 아이의 뺨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은 쿤룬이 마당으로 내려와 걸음을 뗐다. 션웨이를 등에 업다시피 한 다칭이 옆에 나란히 걸었다.


"이러고 또 석 달 뒤면 걸어 다닌단 말이지?"

"걸어 다닐 뿐이냐, 말도 할걸."

"얼마나 쏘다니고 떠들지 눈에 훤하군."


션웨이가 제 위에서 실컷 움직이든 말든, 검은 고양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킬킬 웃었다. 걷지 못하는 지금도 어디든 돌아다니려 안달이고, 말하지 못하는 지금도 서툰 손짓발짓에 고갯짓까지 하는 녀석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재잘거리고 뛰어다닐까. 곤륜산에 어린아이라고는 열 손가락에 꼽으니, 다칭은 션웨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요즘이 퍽 즐거웠다.

 
∞ ∞ ∞


"참, 맞다."


션웨이를 매달고 아이가 이끄는 대로 거닐길 한참, 다칭이 대뜸 탄성을 내뱉었다. 냇가의 커다란 납작 바위에 올라앉은 쿤룬이 그를 쳐다봤다. 다칭은 바로 말하지 않고, 바위 위로 폴짝 뛰어올라 쿤룬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션웨이가 쿤룬 쪽으로 팔을 뻗었다. 쿤룬은 아이를 안아 들며 다칭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뭘 말하려는 건지 몰라도, 몸을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퍽 신중해 보였다.

꼬리를 두어 번 휙휙 흔든 다칭이 입을 열었다.


"아까 들은 소식인데, 새벽 사이에 새끼 적룡이 죽었대."

"적룡이?"


뜻밖의 소식에 쿤룬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새끼라고 해도 적룡이다. 더군다나 번식에 큰 뜻이 없는 이들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그 아이 자체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의미였다. 어린 용의 부모가 아이를 절대 혼자 둘 리 없건만,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죽었단 말인가. 누가 작정하고 사냥한 게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쿤룬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 짓인지 밝혀졌어?"

"밝혀지다 못해 바로 잡혔지. 강시 군주래."

"강시 군주가?"


그놈이 갑자기 왜? 쿤룬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옛날에나 위세를 떨쳤지, 지금 강시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숨죽여 사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강시 군주는 포악하고 탐욕이 많지만 그만큼 약삭빠르기도 해서, 이렇게 무턱대고 사고를 칠 멍청이는 아니었다.


"나도 그놈이 어쩌자고 그런 대담한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무슨 배짱으로 용족을 건드렸담."


다칭은 제 앞발을 핥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와 달리,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 쿤룬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적룡이라고는 하나 일단 용을 노린 사건이다. 강시 군주가 혼자 저지른 짓인가? 공범이 있진 않을까? 몰래 도망치면 어쩌지? 적룡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용을 노리면? 무수한 만에 하나가 심장을 틀어쥐고 목을 조였다.


"누구한테 들은 거야?"


쿤룬이 약간 숨 가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겠어, 의낙이지. 반 시진 전쯤에 알려주고 갔어."


여의낙은 곤륜산의 화족 수장으로, 곤륜산 아이들 중 가장 외부 소식이 빠른 자였다. 산천초목은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이어져 있고, 그것에서 태어난 화족 역시 서로 어느 정도 이어져 있으니, 여의낙도 자연히 바깥일에 귀가 튼 것이었다. 그 아이가 알려줬다면 분명하겠지. 여의낙은 곤륜산과 바깥의 대소사를 전하는 중책을 맡은 아이니, 사실 여부는 의심할 필요 없었다.


"다른 소식은 없고?"

"응. 아, 명계에 가둬버린다는 말도 나왔다더라."


명계라……. 쿤룬은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거리며 눈을 감았다. 품에 안은 션웨이를 토닥이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안해졌다. 일부러 션웨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수만 년을 쥐 죽은 듯 살았으면서 왜 하필 지금, 그것도 용을 해쳤단 말인가. 대담한 동시에 신중한 녀석이 그런 무모한 짓을 감행한 이유가 뭐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강시 군주가 명계에 처박히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아니, 본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시각각 가라앉는 쿤룬을 유심히 보던 다칭이 말했다.


"범인까지 잡혔으니 다 끝난 일이야. 뭐, 당분간 강시들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우리가 강시랑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애들이 먼저 곤륜산 밖으로 나가서 사방팔방 들쑤시는 게 아니고서야 그림자도 구경 못 해."

"……."

"걱정하지 마, 쿤룬. 심각한 일이면 내가 지금 말하겠어? 의낙한테 듣자마자 너를 깨웠겠지."


다칭은 일부러 평소보다 느린 말투로 쿤룬을 달랬다.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뜬 쿤룬이 심호흡하듯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고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차츰 걷혔다.


"그래……. 다른 아이들에게도 일러둬야겠군."


이내, 콧대를 지그시 누른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의낙이 알려줬겠지만, 한 번 더 주의 줘서 나쁠 건 없지."


어딘가 지친 얼굴로 말하는 동안, 쿤룬의 시선은 션웨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션웨이 역시 가만히 쿤룬을 올려보는 것이, 마치 그의 기분을 눈치채고 걱정하는 듯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고 조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기특하기는. 설핏 웃은 쿤룬이 션웨이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 사이, 관찰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고양이가 별안간 눈을 예리하게 빛냈다.


"자, 이제 솔직하게 털어놔 봐."


단호한 목소리가 쿤룬의 주의를 끌었다. 털어놓으라니, 뭘? 고개를 돌린 쿤룬이 영문을 몰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션웨이 일이면 너답지 않게 유난이냔 말이야."

"그게 무슨―"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하긴, 지난 석 달간 네 행동을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하겠지만."


당황한 쿤룬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다칭이 칼같이 받아쳤다. 쿤룬은 뜬금없는 추궁에 말문이 막힌 듯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우리가 평생 붙어 다녔어도 내가 네 모든 걸 알진 못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흔들린 적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어. 너는 이 세상이 당장 내일 무너져 내린대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놈이잖아."

"나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눈은 깜빡할걸……."

"헛소리하지 말고."


다칭은 코웃음치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쿤룬을 째려봤다.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도록 굴린 쿤룬이 마지못해 다시 검은 고양이를 봤다.


"하늘이 두 쪽 날 때도 잠이나 자던 놈을 옆에서 지켜본 게 누구라고 생각해? 이건 진짜 내 앞발을 걸고 단언할 수 있어. 너는 천성이 느긋하고 태평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마냥 웃을 녀석이야. 인정하지?"

"……."

"그런 놈이 왜 션웨이 일에는 네 목숨이 달린 것보다 더 초조하게 구는데? 수상하다고."


쿤룬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괜스레 션웨이를 꼭 안았다. 션웨이와 관련되면 사소한 것 하나도 제 마음에 불을 지피고 비를 내리니, 항상 같이 다니는 다칭이 그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물론 자중하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운명이 엮인 이상, 그 마음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행동과 언사를 조심한다고 해도 눈빛에 사랑이 담겨 감출 수 없었다.


"적룡 소식을 전하기 전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 봤어. 아니나 다를까, 지금 너 좀 봐. 있는 대로 동요하면서 네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해 애먹잖아."


그래서 바로 말하지 않았구나. 좀처럼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뜸 들이던 다칭을 떠올린 쿤룬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뭐야? 뭘 숨기는 건데?"


다칭의 두툼한 꼬리가 납작 바위를 찰싹 때렸다. 쿤룬은 눈썹 언저리를 문지르며 대답을 망설였다.

지난 석 달, 다칭은 쿤룬이 무척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손바닥 뒤집듯 정신없이 변덕을 부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다가도 돌아서면 슬퍼하고, 느긋해 보이다가도 찰나에 내리꽂힌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해 씨근거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웃고 한숨 쉬기를 반복했다. 희로애락이 엉망으로 뒤엉킨 사람 같았다.

종잡을 수 없는 이변의 시작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션웨이. 쿤룬은 그 아이를 만나고부터 이상해졌다. 타고나길 쿤룬은 모든 생명을 어여삐 여기니, 처음에는 그런 마음에서 션웨이를 아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니더라는 거다. 곤륜산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과 션웨이를 사랑하는 것이 다르고, 다칭을 사랑하는 것과 션웨이를 사랑하는 것이 달랐다. 그렇게 여유롭고 이성적인 녀석이 션웨이의 일이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친 듯이 흔들렸다. 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만큼, 작은 일에 크게 상심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모르는 모습은 없다고 생각한 친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휘청거리자, 다칭은 도저히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래, 무서웠다. 쿤룬의 변화가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을 몰고 올까 봐 무서웠다.


"쿤룬. 너는 하늘 아래 유일하게 남은 신이야."


일그러졌던 얼굴을 서서히 푼 다칭이 말했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너는 천계의 누구보다도 자연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어. 네 모든 감정은 세상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지금이야 비를 내리거나 벼락을 몰고 오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네가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감정에 먹혔을 때도 고작 비나 벼락으로 그칠까?"


다칭은 제가 말하면서도 그날이 그려지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 순간순간의 흔들림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몰라. 그때 누가 너를 막을 수 있겠어? 신들이 인사계는 물론이고 선계에도 간섭하지 못하는 건 너도 알잖아."


노란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띠며 쿤룬을 올려봤다.


"물론 네가 일을 그르칠 리 없다고 믿어. 내가 아는 너는 천하 태평할지언정 무책임한 녀석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대로라면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

"완벽하지 못하다고 책망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 감정을 죽이면서 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말을 멈춘 다칭이 작게 한숨 쉬었다. 조용한 숨결은 오직 걱정만을 담은 채 흩어졌다.


"쿤룬. 내가 이 넓은 세상에 내 목숨보다…… 나의 이 하잘것없는 몸뚱이보다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너밖에 없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시선이 쿤룬을 향했다. 쿤룬의 모습을 새기는 것 같기도 하고, 쿤룬이 사라질까 봐 눈으로 붙잡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모를 만약이 두려운 이유는 하나야. 네가 다칠까봐. 그것뿐이라고."


다칭이 말을 맺으면서, 자연스레 정적이 찾아왔다. 쿤룬은 어느새 예의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평온한 얼굴로 다칭을 바라봤다. 초여름의 더운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알려주기 싫어서 숨긴 게 아니야."


길지 않은 고요를 깨고 쿤룬이 말을 꺼냈다.


"너한테는 최대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불안하지 않도록."

"……."

"그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스릴 수 있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영 쉽지 않더라고."


찡그리듯 웃은 쿤룬이 검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너를 더 불안하게 할 줄은 몰랐어. 미안해."


짧은 웃음소리가 사그라들고, 조곤조곤한 사과가 뒤를 이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았으면 해서, 내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계속 미룬 거야. 너를 따돌리거나 믿지 못한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줘."


어느새 머리에서 내려와 턱을 간질이는 손길에 미안함이 묻어났다. 다칭은 쿤룬을 더 재촉하거나 탓하지 않고, 그저 노란 눈을 깜빡이며 기다렸다. 오직 쿤룬에게만 보여주는, 쿤룬만을 위한 배려였다. 쿤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한동안 다칭의 얼굴을 쓰다듬던 쿤룬이 손을 거뒀다.


"션웨이와 각인됐어. 이 아이가 내 운명의 짝이야."


꿈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눈을 크게 뜬 다칭이 션웨이를 쳐다봤다. 계속 쿤룬만 뚫어지게 보는 션웨이를 한 번,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보는 쿤룬을 한 번, 다시 션웨이를 한 번……. 두 사람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본 끝에 눈을 내리깔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인생을 한순간에 바꿔버리는 것. 기분을 하늘 높이 끌어올리다가도 가차 없이 진흙탕에 처박아버리는 것. 매 순간 숨통이 트이고 막히기를 반복함에도 벗어날 수 없는 것. 그의 손에 죽는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모든 알 수 없는 기행을 당연하게 만들어주는 것. 각인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쿤룬에게 운명의 짝이라니. 신 중에서도 운명의 짝을 만난 이들이 몇몇 있지만, 뭐랄까……. 쿤룬은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삶이었다. 사랑은커녕 한평생 자연 속에서 뒹굴며 살 것 같던 녀석이 갑자기 운명의 짝을 만났단다. 게다가 상대는 갓 태어난 황룡이고. 어안이 벙벙했다.


"금여도 알고 있어?"


퍼뜩 고개를 든 다칭이 물었다.


"응, 션웨이를 데리고 온 다음 날 알려줬어."


쿤룬이 선뜻 대답했다. 다칭은 서운해하긴커녕 당연하게 납득하며 안심했다. 추금여는 쿤룬에 대해 진실만을 기록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졌으니, 온 세상이 모른대도 그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오히려 아직도 모르면 그게 더 문제였다. 그쪽으로는 꼬일 일이 없으니 다행이군.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아예 기록으로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나중에 속 시커먼 놈들이 안 설치지.


"아마…… 류선은 자기 반려와 각인된 것 같아."


동그란 머리를 좌우로 까닥이는 다칭을 물끄러미 보던 쿤룬이 말했다. 목소리에 스민 씁쓸함을 알아챈 다칭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랄지, 이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쿤룬이 황룡족 땅에 찾아갔던 날, 류선의 처절한 분노를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쿤룬도 션웨이와의 만남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짝인 부모를 갈라놓은 아이와 각인됐으니, 어디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겠지. 쿤룬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다칭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앞발을 들어 그의 무릎을 토닥였다. 희미하게 웃은 쿤룬이 복슬복슬한 발등을 살살 쓸었다.

다칭은 쿤룬에게 앞발을 맡긴 채 다른 생각에 빠졌다. 류선이 제 영혼의 짝을 죽이고 태어난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고 하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언젠가는 비로소 마음을 비우고 상처를 추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앞으로 꽤 오랫동안은 계속 아닐 것이다. 반드시 부모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왔을 때조차도…….


"용한테는 부모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금여가 이미 말했지?"

"말했지. 앞날이 고될 거라더군."


쓰게 웃은 쿤룬이 고개를 살며시 뒤로 젖혔다. 나뭇잎을 그대로 옮긴 듯 선명한 그림자가 하얀 얼굴에 드리웠다. 우거진 나무 틈에 물든 푸른색을 쫓는 눈동자가 마치 하늘을 방황하는 것 같았다.


"너무 사서 고민하지 말자."


그때, 쿤룬의 다리에 턱을 괸 다칭이 느긋한 투로 말했다. 흠칫 놀란 쿤룬이 그를 내려봤다.


"그때 가면 해결책이 있겠지. 아니면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도 되고."

"다칭……."

"불안을 느끼고 대비하려는 건 좋지만, 너무 치우치면 독이 될 뿐이야."


몸에 힘을 빼 완전히 쿤룬에게 기댄 다칭이 야옹거렸다. 신기하게도, 녹음에 둘러싸여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전부 괜찮을 것만 같았다. 비록 앞으로의 고난은 그대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참으로 다칭다운 위로였다.


"네 말이 맞아. 여유가 없으면 이 세상을 무슨 낙으로 살겠어."


마침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 쿤룬이 낮게 웃었다. 노곤하게 늘어진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션웨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어느새 곤히 잠든 채였다.


"션웨이……."


쿤룬은 고개를 숙여 션웨이와 이마를 맞댔다. 지금처럼 하나하나에 동요했다가는 분명 네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겠지. 다칭의 말이 맞았다. 감정에 휩쓸린 판단은 분명 끔찍한 끝을 낳을 테다.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지 못해 션웨이를 망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고 해도, 아이에게는 가장 좋은 것만 안겨주고 싶었다.


"너를 위해서라도 더 강해져야지."


다시는 오늘처럼 한심한 꼴을 보이지 않으리라. 네 앞에서만큼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쿤룬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며, 션웨이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가슴을 빠듯하게 채우는 애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했다.



 
2024.02.04 13:45
ㅇㅇ
모바일
센세 오셨다!!!!!!!!!!!!!!! 쿤룬한테 산책가자고 조르는 아기 션웨이 너무 귀엽잖아ㅋㅋㅋㅋ 삐져서 다칭 뒤에 숨었대ㅋㅋㅋ 낮잠도 포기하고 같이 나가는 쿤룬ㅋㅋ 다칭 등뒤에 태워서 같이 나가고 훈훈해ㅋㅋㅋㅋ
[Code: eefa]
2024.02.04 13:47
ㅇㅇ
모바일
각인된거 다칭한테 말했구나ㅠㅠㅠㅠ 쿤룬 션웨이 일이라면 걱정때문에 마구 흔들려ㅠㅠㅠ 그래도 다칭이 둘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ㅠㅠㅠㅠㅠㅠ 센세 존잼꿀잼 어나더ㅠㅠㅠㅠㅠㅠ
[Code: eefa]
2024.02.04 23:15
ㅇㅇ
모바일
센세다!!!!!!! 쿤룬이랑 션웨이 평화로운 거 너무 좋아ㅠㅠㅠㅠㅠㅠㅠ 나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다ㅠㅠㅠㅠㅠ 근데 션웨이 친부모 일도 그렇고 불안한 것도 있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든 둘이 잘 해결할 수 있겠지 센세 어나더어나더!!!!!
[Code: ab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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