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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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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느 동화책을 뒤져도
담배 피우는 왕자님은 못 찾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음악에 열광하는 악마도.
이 동화, 동심 파괴가 너무 심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미남 두 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헉, 뭐야. 미남이라고? 숨을 짧게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꼭 미어캣 두 마리 같았다. 옷장 문이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전보다 약해진 빗소리가 지붕을 타고 툭툭 떨어졌다. 꿈이 아니었다. 입을 벌리고 몸을 더듬자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원래 입고 있던 면 티셔츠의 촉감이 느껴졌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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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우리가 아는 공주 맞아? 입고 있던 드레스도 사라졌는데.”
“공주가 아니라기엔 너무 닮았는걸.”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에 호기심과 의아함, 두려움이 마구 섞여 있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바닥에 처량하게 버려진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 뒤표지에는 분명 이렇게 써 있었다. ‘데이먼 왕자와 이름 모를 공주의 오싹하고도 영원한 사랑♡ 어린이 친구들, 할로윈을 뜨겁게 불태워 보세요!’ 내 양옆에 무릎 굽히고 앉아 있는 미남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데이먼 알반과 리암 갤러거. 왕자와 악마. 양손을 간절히 모으며 말했다.

“일단, 저기요. 두 분 다 침착하게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말도 안 된다고 마법 사용하시면 안 돼요.”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왕자와 악마의 표정이 볼만했다. 끝에 가서는 다 걔한테 청혼하겠다던 네 잘못이야! 악마가 왕자의 멱살을 (또) 잡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어릴 적 빌었던 소원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신세의 두 사람이 지낼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 우리 집.

이리하여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왕자, 악마와 함께하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왕자와 악마는 많이 이상했다. 고풍스러운 말투와 복장은 현대인처럼 바뀌었고 특히 악마인 리암은 비속어도 거침없이 했다. 막장이 가미된 호러 동화책이었어도 주 독자층이 어린이와 청소년인지라 비속어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현실로 튀어나오는 과정에서 무언가 오류가 생긴 모양이었다. 어릴 적 내가 이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실체를 목격했다면 기함을 했을 것이다.

공주 타령도 잠시뿐이었다. 머리 맞대고 돌아갈 방법 찾던 것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마법까지 잃었는데 발악해 봤자 뭐 하겠어? 공주는 괜찮을 거야. 강한 인간이니까. 피자 한 조각 입에 물며 말하던 리암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내 예상보다 더 빠르게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현대의 다양한 신문물을 접한 데이먼과 리암은 매일매일 축제를 벌였다. 데이먼은 아빠가 두고 간 옛 기타에 관심을 가지더니 어느 순간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리암은 OTT 한 번 틀어 준 뒤로 소파에 누워 영화, 드라마, 다큐 시청하기에 바빴다. 어느 날엔 비틀즈 다큐만 주구장창 보기에 물었더니 너도 비틀즈 알아? 뽀킹. 인간 주제에 존나 멋있어! 화면에 시선 둔 채로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하나 터졌다.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던 나에게 리암이 물었다. 허니, 심심해 뒈지겠어. 오늘 너 일하는 거 구경하러 갈래. 감자칩을 먹고 있던 데이먼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예쁜 파란색 눈동자에 지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일 방해하면 안 돼. 입 닫고 손님인 척하고 있어. 고개 위아래로 막 끄덕이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조그맣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귀엽다고 웃는 게 아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서점 한구석에는 손님들이 책을 읽다 갈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작은 휴식 공간이 있었다. 평소처럼 손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휴식 공간에 돌아와 보니 데이먼과 리암이 나란히 앉아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있었다. 앞에는 남성 손님 한 분이 앉아 있었는데 이미 입에 담배를 꼬나문 상태였다. 하하 웃고 있는 게 분위기 좋아 보였다. 테이블 위에 담배갑과 라이터가 올라가 있었다.

어질해진 마음에 눈 크게 뜨고 서 있있다. 얼마 안 가 데이먼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옆에 앉아 있던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뽀오얀 연기 후 내뱉으며 천상의 맛이라도 맛본 듯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성큼성큼 다가가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책을 탁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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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허니.”

데이먼이 아는 척을 했다. 나 보자마자 예쁘게 호선을 그리는 눈매 애써 무시하고 손가락에 끼웠던 담배 억지로 빼냈다. 그랬더니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린다. 으하하, 뭐야? 뺏기는 거 존나 웃겨... 너털웃음 치는 악마 입 손으로 막은 뒤 똑같이 담배를 빼앗아 갔다. 사탕 뜯긴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눈 두 쌍 무시하고 남성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님. 담배는 서점 밖에서 피워 주시겠어요? 다른 손님분께 피해가 갈 수도 있어서요.”

나긋나긋하게 말하자마자 고개 푹 숙이고 아, 죄송합니다. 하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님이 서점을 나가자마자 웃음기 지우고 뒤를 돌았다. 데이먼? 리암? 나직이 이름을 부르니 어깨를 움찔거렸다.

“담배는 누가 줬어?”

테이블 바닥에 짓이겨 불 끈 담배 두 개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앞으로 내밀었다. 리암이 휘파람 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럼 그렇지. 데이먼? 파란색 눈동자가 조그맣게 일렁였다. 왕자님? 대답해 주시겠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먼은 누군가 자신을 ‘왕자’라 부르는 걸 꺼렸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왕자란 호칭을 썼다는 건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데이먼이 한참 눈을 깜빡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 앞에 있던 남자가 줬어. 하얀 막대기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게 궁금해서 달라고 했거든. 뭐냐고 물어보니까 담배라고 하던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처음 맛본 담배는 어땠어?”
“황홀했어.”
“황홀했지. 그것도 존나게!”

데이먼과 리암이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한숨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세상 어느 동화책을 뒤져도 담배 피우는 왕자님은 못 찾을 것이다. 담배 피우는 악마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속세의 달콤한 유혹에 이 순진한 왕자와 악마가 물드는 건 아닐지 심히 걱정되었다. 빨간 딱지 붙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라면 모를까, 어린이들이 보는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담배라니. 동심 파괴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

한 번 맛본 뒤로 데이먼과 리암은 나 몰래 담배를 태웠다. 퇴근길에 집 앞 가로등 아래서 사이 좋게 담배 꼬나물고 있는 모습 발견했을 땐 그대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급하게 담배 빼내어 뒤로 숨겼는데 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솔솔 흘러나왔다. 냄새 다 빠질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마. 허니이, 제발. 쪼옴 살려 주라. 어울리지도 않는 혀 짧은 소리에 미간 주름만 깊어졌다.

기어코 내 옷까지 배인 담배 냄새에 화가 폭발한 날이었다. 오늘은 네가 세탁해, 데이먼. 제대로 안 해 놓으면 기타 일주일 압수야. 아랫입술 꾹 깨물며 고개 끄덕이는 것이 억울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리암에게 너도 똑같다고 말해 주자 바로 표정을 굳혔다. 어릴 적 가지고 있던 환상이 점점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이었다. 수백 번도 넘게 책장을 펼치고 넘겼다. 엄마가 질리지도 않냐며 직접 다른 동화책 꺼내 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왕자 데이먼과 악마 리암이 현실로 넘어온 순간부터 결말 부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부분만 누군가 일부러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새하얬다. 난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데이먼에게 티셔츠 건네주던 것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살짝 열린 방문이 보였다. 왜? 묻는 목소리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기억이 안 난다니, 말도 안 돼.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망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 못 참고 결국 이불을 걷어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옷장 문을 살며시 열었다. 곱게 닫혀 있는 상자가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다 무릎을 꿇고 상자를 열었다. 가장 위에 가지런히 놓아진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번개를 맞고 있는 나무. 그 아래 서 있는 왕자와 공주. 조심스럽게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덥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땀이 차는 느낌이 들어 손을 마구 문질렀다. 숨을 내쉬며 책을 펼치자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옛날 옛적에,
데이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잘생긴 왕자님이 살고 있었어요.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 내 심장 소리만 뚜렷하게 들렸다. 이야기가 뒤로 넘어갈수록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알아내려고 하지 마, 허니.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날, 상자를 열라고 외쳤던 목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괜한 오기가 생긴 나는 외침을 무시하고 또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동화책 주변에 바람이 일었다. 책장이 무섭게 뒤로 휘날렸다. 그렇게 몇 초, 눈 깜짝할 사이 바람이 멈추었다. 나는 눈 동그랗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동화책의 결말 부분이 지저분히 찢겨나가 있었다.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의 마무리. 기억도, 실체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허니. 무슨 일이야?”
“야밤에 소리는 왜 질러? 깜짝 놀라 뒈지는 줄 알았네.”

데이먼과 리암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말을 꺼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조용히 바닥에 있는 동화책만 노려보고 있으니 나머지 둘도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 저거 우리 책이잖아. 근데 왜 찢겨 있냐? 기분 좆같게. 리암이 발걸음을 옮겨 동화책을 집으려던 순간이었다. 손이 닿기 직전에 묵직한 쿵 소리를 내며 책이 덮였다. 정적이 흘렀다. 또다시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경고했잖아. 아직 때가 아니라고.
착하지, 달링. 내 말 들어.


낯설었던 목소리가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 무서웠다. 기분 좋게 휘파람 부는 소리가 방을 맴돌았다.
 

* * *

옛날 옛적에,
데이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잘생긴 왕자님이 살고 있었어요.
남들보다 조금 자유분방했던 왕자님은 어느 날,
오래된 금빛 호수에 갔다가
나무에 기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했어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왕자님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어요.

“대답해 드릴 수 없어요. 저주를 받게 되실 거예요.”
소녀가 망설이며 대답했어요.

“저주라고요? 그거 흥미롭군요.”
왕자님은 눈을 반짝이며 소녀 옆에 앉았어요.
사실 왕자님은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어요.
한 나라의 왕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숭배하고,
싫어하고,
가면을 쓰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거든요.

왕자님은 너무 외로웠어요.
옆에 앉아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였죠.
두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왕자님은 굳게 믿었답니다.

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면서도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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