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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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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동화책을 좋아했다. 멋진 왕자님과 예쁜 공주님, 영원한 사랑, 고난이 닥쳐도 결국 얻는 해피 엔딩.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아름다웠다. 엄마가 읽어 주는 동화책을 자장가로 삼으며, 언제나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꿈꿨다.

공주, 내 사랑! 제발 나의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리다.

엄마가 꾸며낸 낮은 목소리에 웃음꽃 피우며 잠에 들기를 몇 년. 백설공주의 빨간 머리띠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동경하기를 몇 년. 부모님 간신히 졸라 생일날 얻은 공주 드레스가 점점 작아지고 동화책 펼치는 횟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때.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공주가 아니구나. 왕자와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구나.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은 허구일 뿐이구나. 펑펑 울며 커다란 상자에 공주 드레스 4벌, 티아라 3개, 신데렐라 DVD, 가장 아끼고 아끼던 동화책 2권을 넣었다.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 두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나 이제 동화책 안 읽을 거야. 왕자든 공주든 뭐든 다 싫어!

눈물로 흐트러진 거울 속 나는 열네 살이었다. 머리가 커지고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을 보니 현실이 보였다. 열네 살이나 먹고서 왕자님 타령을 하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친구가 콜라 들이키며 말했다. 백마 탄 왕자는 이 세상에 없어, 허니 비. 주위를 둘러 봐. 저기 저 남자애들? 왕자가 아니라 괴물이잖아. 동화 속 왕자와 공주 괴롭히는 괴물. 로망이라곤 하나도 없어. 동화는 다 판타지일 뿐이야. 맞는 말이었다. 내가 꿈꾸던 동화 속 왕자는 현실에 없었다.

그 이후로 몇 년이 더 흘렀다. 어엿한 성인이 된 나는 현실에 찌든 직장인이 되었다. 동화 찾던 어릴 적 버릇 쉽게 버리지 못해 반쯤 허구 세계에 걸친 서점 직원이 되었지만 아쉬울 것 없었다. 오후 6시 30분. 일이 벌어진 그날도 클로즈 시간에 맞추어 서점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섰다. 가을로 접어 든 거리에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이 아름다웠다. 빨간색 가디건 틈새로 쌀쌀한 가을 바람이 들어와 옷깃을 여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오랜만에 아껴 둔 와인을 마시자.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 조용히 주문을 걸었다.

현관문 열기 직전에 둥그런 트리 장식을 한 앞집이 보였다.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려면 아직 두세 달이 남았지만, 쌀쌀한 바람에 마음 설레이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디건, 가방 전부 벗어 소파에 대충 걸쳐 놓고 ‘멋진 인생’ DVD를 꺼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보는 고전 영화였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천사를 만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흑백으로 가득 찬 화면에 새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조지 앞에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강에 몸을 던져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언제 봐도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다. 웃음 띠우며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문이 살짝 열린 방이 눈에 들어왔다. 어?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화면에 시선을 돌렸겠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무언가에 팍 꽂힌 듯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문 열린 틈새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지가 천사를 강에서 끌고 나오는 장면이 보였다.

끼익.

늘 듣던 익숙한 소리가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곤 했다. 느릿느릿한 손길로 방문을 열자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옷장 틈새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눈에 담겼다. 저건 뭐지?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일었던 호기심이 다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발짝, 두 발짝 발걸음을 옮겨 옷장 앞에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 번에 쭈욱 내뱉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열자.

빛이 새어 나오는 옷장 문을 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자든 공주든 뭐든 다 싫어! 어릴 적 구석에 처박아 둔 뒤로 눈길 하나 주지 않았던 상자 틈새가 반짝거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손끝이 떨렸다.

어서 상자를 열어! 어서!

못된 마녀가 조종이라도 하는 것마냥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자를 열으라는 외침이 들렸다. 무시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덜덜 떨며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성이 없었다. 다 풀어 버린 리본을 바닥에 내려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요란해서 내 것이 이닌 것 같있다. 몇 초, 몇십 초, 몇 분이 지나고 두근대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상자의 윗부분을 잡았다. 서서히 굳게 닫혀 있던 상자가 열렸다. 여름날 오후의 쨍쨍한 햇볕처럼 강렬한 빛에 눈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상자를 전부 열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달린 등의 불이 꺼졌다 켰다를 반복했다. 방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쯤 열어 두었던 방문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나 지금 공포 영화 안에 들어와 있나? 설마 요즘 유행하는 빙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양손으로 머리카락만 쥐었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알 수 있었다. 어두워졌던 방이 펑! 소리를 내며 다시 밝아졌다. 여기가 어디야? 낯선 남자의 나긋나긋한 저음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지. 잘난 왕자 새끼야.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에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 소리의 출처는 바로 내 앞이었다.

어? 잠깐만. 남자라고? 바로 내 앞에서? 내 앞에 있는 건 옷장인데?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다리에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아니겠지.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을 부정하며 천천히 고개를 위로 올렸다. 몸이 덜덜 떨렸다. 옷장 끝까지 닿은 시선.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내가 본 다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금발과 흑발. 두 사람 다 겨우 구겨넣은 옷처럼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방에 있는 옷장보다 큰 키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두 명 다 카테고리는 달라도 수려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언뜻 봐도 미소년이었다.

“야, 야. 잠깐만. 내 머리카락 원래 브루넷인데 왜 이렇게 시꺼매? 응? 네 머리는 왜 그대로고? 존나 찰랑찰랑하네?”
“멱살은 놓고 얘기해. 비꼬지도 말고... 이상한 점이 지금 한두 가지야?”
“악마 새끼라고 지금 차별하는 거야? 누군지 몰라도 잡히기만 해 봐라. 씨팔... 영영 못 깨어나게 만들어 주마.”

그들은 바닥에 주저 앉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서로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살벌한 말다툼(이라기엔 한 명의 일방적인 시비)을 하는 데 바빠 보였다. 옷장에 구겨진 상태로 멱살 붙잡고 있는 모습이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입만 떡 벌리고 둘이서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귀에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

“이제 곧 있으면 무도회 시작할 시간인데... 마녀의 소행인가? 아니면 리암 네 짓이야?”
“내가 방금 한 말 또 흘려들었지? 내 짓이면 여기 있겠냐? 머리카락 색깔은 또 왜 바꾸고? 존나 멍청하긴... 나도 몰라. 데이먼.”
“왕자라고 안 부르네?”
“그렇게 부르면 싫어할 거면서. 왜? 너도 꼴에 왕자라 이거냐? 데이먼 왕자님이라고 불러 주리?”

데이먼?
리암?

데이먼과 리암은 내가 어릴 적 가장 많이 읽었던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에 나오는 왕자와 악마의 이름이었다. 금발머리 왕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흑발머리 악마. 할로윈 시즌에 나왔던 한정판으로 악마, 마녀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천사까지 등장하는 호러 동화책이었다. 막장이 가미된 흥미진진한 스토리 덕분에 그 당시 어린이, 청소년, 심지어 어른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를 끌었었는데... 문득 남자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낡은 동화책이 눈에 보였다. 번개를 맞고 있는 나무 아래 서 있는 왕자와 공주. 수백 번도 더 눈에 담았던 표지였다. 세상에. 저거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잖아?

깨닫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쿵쿵 뛰었다. 순간 앓는 소리를 냈다.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두 쌍의 파란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눈이 마주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어디선가 팡파르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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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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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공주라고?”

마음껏 힘주어 꼬집은 볼이 얼얼했다.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들이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에 나오는 왕자 ‘데이먼 알반’과 악마 ‘리암 갤러거’라고? 근데 왜 나를 공주라고 부르는 건데? 불길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옷장 문에 달린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공주님의 잃어버린 하루’에 나오는 공주님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니. 저 사람들이 입은 옷은 캐주얼인데 왜 나는 드레스야? 지금 장난해?

망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 왕자님 ‘데이먼’과 악마 ‘리암’이 튀어나왔다. 잔잔한 기억 속 친구가 했던 말이 요동치며 흘러나왔다.

백마 탄 왕자는 이 세상에 없어, 허니 비. 주위를 둘러 봐. 저기 저 남자애들? 왕자가 아니라 괴물이잖아. 동화 속 왕자와 공주 괴롭히는 괴물. 로망이라곤 하나도 없어. 동화는 다 판타지일 뿐이야.

그때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을 이제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 봐. 만약에, 백마 탄 왕자가 동화책에서 튀어나왔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게다가... 악마까지 같이 달고 온 상태라면?

친구에게 지금 이 질문을 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봤을 것이다. 어서 옷장 문이 닫히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마 탄 왕자님이 제 앞에 나타나게 해 주세요. 꼭이요. 어릴 적 양손 모아 매일매일 빌었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는데 기쁘긴커녕 혼란스럽기만 했다. 옷장 바닥에 어지럽게 널부러진 드레스와 티아라, DVD, 동화책이 보였다. 아직 동심이 남아 있을 때. 유치한 상상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때. 순수하게 동화 속 공주님을 꿈꾸던, 그 시절의 나에게 보내 주지 그러셨어요? 왜 하필 지금인가요? 컴컴한 하늘에서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투둑. 한 방울씩 내리던 비가 순식간에 소나기로 변했다. 내 앞에는 여전히 왕자님과 악마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그대로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희미해지는 기억 사이로 당황한 채 나에게 달려오는 미남 두 명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아주 선명하게. 


블러 와싯 뎅먼너붕붕 리암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