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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 17:39
1편 / 2편 / 3편 / 4편



"누구냐."

적막을 깨트린 건 적비성이었다. 평소처럼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이연화는 무슨 뜻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아비가 누구냐고 물었다."

적비성은 묘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회임을 한 탓에 수련을 하지 못 하게 된 게 화가 난 걸까. 왜 네가 화를 내느냐고 가볍게 대꾸하려던 이연화의 입이 스륵 닫혔다. 어쩐지 엄한 아버지 앞에서 혼전임신을 한 것이 들통나 혼이 나고 있는 양갓집 규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됐다. 대신 그 녀석은 답을 알고 있겠지."
"자, 잠깐만! 안 돼!!!"

묵묵부답이던 이연화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적비성은 주저하지 않고 경공을 써서 날아오르려고 했고, 이연화는 급한대로 적비성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이대로 아비가 '그 녀석'에게 가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혼비백산한 이연화의 모습을 보며, 적비성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분노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그 애송이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지금 내가 그 녀석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적비성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정파의 적 금원맹주이자 중원의 대마두인 적비성이었지만, 이연화에게는 말 없고 융통성 없고 무공바보에 제멋대로이긴 해도 결정적일 땐 자신의 편에 서 주는 친우 아비였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서 있는 건 잔인하기로 소문난 적맹주였다. 벽차지독을 해독했다지만 내력은 이전의 1/10 수준인 자신이 온힘을 다해 막는다 한들 비풍백양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적비성을 막을 수 있을까.  

"..그 녀석은 몰라."
"그건 이유가 아니군."

모른다고 해서 책임이 없지 않았다. 적비성이 몸을 돌리자 이연화가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  

"그, 그냥 하룻밤이었을 뿐이야! 둘 다 실수였고.."
"둘 중 하나만 실수였겠지."

적비성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인간사와 감정에 익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방다병 그 애송이가 이연화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를 만큼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방다병이 무결하고 순진무구한 청년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이연화라면 몰라도, 그 녀석이 실수였을 리가 없었다. 

적비성이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연화는 결국 검을 빼들었다. 가지 마. 절대 보내지 않겠어. 

"왜 막아서는 거냐."
"아이의 아비를 죽게 내버려둘 순 없잖아!"
"그럼 그 아이를 낳을 생각인가."
"그..그건..!"

이연화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못 하고 있던 터였다. 집 안 서랍에는 아직도 아이를 지우는 약이 들어있었고. 아직 아이를 낳을 것인지부터 낳게 된다면 어디서 어떻게 기를 것인지 어떠한 대책도 세운 것이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벽차지독에 중독되어 10년을 버리더니, 이제는 애나 키우면서 남은 인생을 버릴 작정인가. 정말 과거의 경지에 오를 생각이 조금도 없는 거냐." 
"무공에는 더 이상 미련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아이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상이 시절엔 혼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형이 있었고, 사형이 있었고, 사부와 사모가 있었고. 자신을 따르는 사고문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는 이연화가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이연화는 홀로 걸어왔다. 외로웠지만 도저히 사람에게 정을 줄 수가 없었다. 연화루에 허락된 것은 불여우 하나뿐이었다.  

그 연화루에 어느 순간부터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들이닥치는 이들이 생겼다. 방다병은 몇 번을 버리고 가고 다시 돌아왔고. 적비성은 기억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뻔뻔하게 연화루의 주인 행세를 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연화는 어쩌면 다시 사람들 속에서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연화의 마음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다. 쉽게 어딘가에 얽힐 수가 없었고, 그래서 쉽게 사라질 수 있었다. 몇달 전 불발된 야반도주 시도 역시 그랬다.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사실 내심 알고 있었다.  한번도 상상한적조차 없고,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아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 그래도.. 나한테 생긴 가족이잖아."

이 아이는, 아직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이 아이는 정말 온전히 자신의 가족이 될 존재였다. 

모든것을 잃고 죽고 싶었던 10년 전, 그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중독된 몸으로 구차한 삶을 살았던 건 오로지 사형의 시신만이라도 찾아 묻어주기 위해서였다. 사형이 자신의 마지막 가족이라고 여겼기에 그랬다. 그리고 십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후 이연화에게 다시 가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애송이한테는 언제 알릴 셈이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건."
"적당한 때를 봐서 도망가겠다는 이야기군."

속을 단번에 간파당한 이연화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적비성은 생각보다 이연화를 더 잘 알았다. 이연화는 방다병에게 짐이 되느니 주저없이 사라지는 걸 택할 위인이었다. 방다병이 안다면 피를 토할 노릇이겠지만, 이연화가 방다병에게 아비 역할을 할 기회를 줄 리 없었다. 

"기어코 애를 낳고 키우겠다는 거냐"
"아 자꾸 묻지마 나도 혼란스러우니까!"

당장이라도 방다병의 목을 베러 갈 것 같던  적비성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진 듯 보였다. 한숨과 함께 내뱉은 그 말에는 마치 철없는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의 그것이 묻어나는 것 같아 이연화는 기가 찼다. 아니 자기가 아비지 내 아비야?

"약마"
"네, 존상"
"이연화의 상태는 어떻지"

두 고수의 다툼 사이에서 숨죽여 있던 약마가 갑작스런 호명에 진땀을 흘렸다. 사실 약마는 이연화를 보고 속으로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중이었다. 

양인이 음인이 되다니, 벽차지독을 만들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었다. 최고의 맹독이다보니 음인으로 발현이고 나발이고 진행되기 전에 다 죽어버렸으니 알 수 있었을 리가. 그런데  양주만으로 독을 다스리며 생명을 연장하자 음인으로 발현을 해, 그것도 임신까지 가능하다고. 심지어 그 이를 이렇게 가까이서 진맥하다니.. 금원맹 간부이기 이전에 뼛속까지 광의이자 약물 연구자인 약마에게는 지금 다섯 손가락에 들만한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다만 지금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존상 앞에서 너무 신이 난 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곤혹스러운 뿐.

"아,네.. 벽차지독은 해독이 됐사오나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몸의 기운이 쇠합니다. 게다가 본디 음인이 아니었고 음기로 인해 음인이 된 지라 사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이리 임신까지 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래서?"
"원래부터 불안정한 아기집에 태아가 자리잡아서 조금 위태로운 상태이긴 합니다."

약마가 애써 말끝을 흐렸다. 존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난감했다. 두 사람의 대화 맥락을 보면 존상은 이 회임이 못마땅하신 듯 한데.. 설마, 이 회임을 중단하라는 명을 내리시려는 건가.. 약마는 행여 희귀한 연구대상을 잃게 될까 속이 바싹 타들어갔다. 벽차지독에 중독된 채 수년을 견딜 수 있는 양인 고수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어찌해야 하나" 
"무엇을 어찌한다는 말씀이신지.."
"무탈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약마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존상의 의지가 해하는 쪽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적비성의 의도를 이해한 이연화의 눈 역시 커졌다.  

"태아가 일정 크기로 자랄 때까지는 당분간이라도 산모가 무리하지 말고 절대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현재는 몸에 이상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회임 초기라 어떤 변수가 있을 지 모르기에.. 그, 몸을 보하는 탕약도 드시는 게 좋고.. "

약마는 적비성에게 아뢰고 있었으나 고개는 이연화가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세상 어느 곳에 있는 명의를 찾아간들 벽차지독 제작자이자 세상 약과 독을 가장 잘 다루는 약마만큼 제대로 이야기해줄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어찌하다보니 이연화의 사정도 모두 다 알고 있어 관하몽보다도 더 마음이 편안하기도 했다. 관하몽보다 비밀 보장도 잘 되겠지.

약마가 일러주는 이야기를 새기고 있던 이연화는 순간 적비성을 돌아봤다.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속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이며 방다병을 없애버릴 기세더니만 왜 마음이 움직였을까. 

"약마, 당분간 근처에서 머물면서 이연화의 상태를 살펴라."
"네, 존상!"

이게 웬 떡인가. 회임한 이연화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에 약마는 존상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지 않도록 애썼다. 

"아비.."
"너 좋으라고 그러는 거 아니다. 몸 관리를 잘 해야 다시 수련할 수 있을거 아니냐. 이 빚은 꼭 대결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이연화는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찡해져오는 눈가를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몰라도, 화를 거두고 자신의 뒤를 보아주겠다는 그 말에 감정이 북받쳤다. 회임한 음인은 감정 조절이 힘들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때문일까.. 좀 전까지 죽을 기세로 검을 들고 막아섰건만 지금은 한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아비는 적일 땐 가장 두려운 존재지만, 내 편일 때 가장 든든한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방소보에게는.."
"장담은 못 한다. 내 눈에 띄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그래."

아비에게 거기까지 바랄 순 없겠지. 곧 적비성과 약마가 이연화의 처소를 떠났다. 한바탕 소동이 이렇게 마무리되고, 홀로 남은 이연화는 한숨을 돌렸다. 아이야, 시작부터 참 쉬운 게 없구나. 아무래도 자신 탓인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 현재까지 이연화는 뭔가 평범하고 수월하게 지내기가 참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너도 어미 복이 없구나, 참. 

이연화는 처소 안 서랍장에서 저자거리 의원에게서 받아온 약첩을 꺼냈다. 그리곤 처소 뒤편에 묻었다. 이건,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붕생에 치여서
자주 오고 싶은데 빨리 오기가 힘들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