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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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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동생의 머리가 좀 식었을 거라고 판단한 강염리가 간식거리를 가져가서 말을 붙였다.
강징은 여전히 이마에 골이 패인 상태였지만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몇 마디 퉁명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강염리는 이미 상세한 내막을 다 알고 왔지만, 금광요가 왜 고소 남씨의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몸이 회복되는 사람들부터 안전한 곳을 물색해서 천천히 내보내려고 해. 온낭자가 잘 돌보고 있어.”
“...”
“온공자가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온공자가 잘못된다면 온낭자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
“그만 됐어요, 누님.”
강징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그것이 듣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라는 걸 아는 강염리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강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징은 잔뜩 화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미 다들 집안에 들어앉았는데 새삼 두들겨 패서 내쫓을 기운도 없었다.
남망기와 위무선은 하루이틀쯤 지난 후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정탐하러 가 보기로 했고, 온정은 쉬라는 말도 듣지 않고 아픈 사람들과 온녕의 곁에 찰떡같이 붙어 있었다.
그 날 오후가 되어서야 강징은 예를 갖추어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몇 시진 전쯤의 일이었다.
금광요는 강염리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위무선처럼 안심하지는 못했다. 그는 강염리나 위무선이 괜찮다고 판단했으면 진짜로 괜찮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강징의 분노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청당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근처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편이 왜 부엌에 있느냐고!”
강징이 위무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곁에 있던 강염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아선의 방에 갖다놓으려다가 깜박 잊고 부엌에 둔 거야.”
“누님이 그걸 왜요?”
“네가 멋대로 수편을 탁자 위에 갖다 놓으니까 사저가 가져간 거잖아.”
“너한테 준 거잖아! 그런데 그 자리에 그냥 내버리고 간 거야?”
“너 진짜 끈질기다.”
위무선이 피곤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사고 친 일도 있고 하여 가급적 강징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그는 사정없이 뜯어댔다.
“내가 너보고 뭐라도 하래? 하루종일 놀고, 먹고, 술만 퍼마시고. 그러는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리도 사람을 미치게 해? 그래, 세상 대단하신 위공자, 위대인께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위무선, 그렇게 잘났으면 운몽 강씨도 네가 책임져! 그럼 나한테 욕먹을 일도 없겠지!”
거기까지만 듣고 금광요는 되돌아 나왔다.
그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강징은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무선의 금단이 강징에게로 옮아갔다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위무선의 금단은 그것대로 없고, 강징의 금단은 다른 이유로 되살아났단 말인가?
어쨌든 지금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금광요는 강징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강염리가 자리를 마련했고 강징이 나타났다.
남망기, 위무선, 금광요, 그리고 마지못해 끌려온 온정까지 도착한 뒤 강징은 형식적이나마 결례에 대한 사죄를 했다. 온정은 그냥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망기 역시 그랬다. 금광요만이 부드럽게 만류하며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위무선은 아침부터 강징과 다툰 터라 중재를 잘 하는 금광요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내일 망기와 위공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기도 근처를 둘러보고 올 겁니다.”
금광요가 말했다.
그리고 이미 들었던 대로, 몸이 회복이 되는 사람들부터 드문드문, 조금씩 나누어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난릉 금씨의 감독하에서 온가의 포로 수십명을 탈취했다는 건 듣기만 하면 거창한 일이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자리를 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금광요는 몸을 돌려 무슨 말이라도 할 듯 위무선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의 팔을 짚었다. 의자는 검고, 위무선의 옷도 검었으니 헛짚을 만한 일이었다.
그가 짧게 사과하며 손을 떼는데, 갑자기 안색을 달리하더니 이번에는 위무선의 옷 밖으로 드러난 손목을 꽉 쥐었다. 그는 대뜸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위무선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온정의 안색까지 싹 바뀌었다.
위무선이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금광요는 놓아주지 않았다.
위무선이 진정을 사용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선문 사람들은 그의 가까이에 서는 것조차 피했다. 누군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막 나가려던 강징까지 돌아보았다.
그 때 금광요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위무선의 명백한 눈빛을 무시하고 똑똑하게 내뱉았다.
“위 공자, 당신 왜... 영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실제로 잡고 있는 손아귀를 통과하는 느낌이 그러했다. 위무선의 몸에는 정말로 금단이 없었다. 이렇게 정확히 맥을 잡아 보면 금광요와 같은 수련을 받지 못한 이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금광요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순순히 위무선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것을 바람처럼 쫓아온 강징이 건네받았다. 금광요와는 전연 다른 인정사정 없는 손아귀가 그대로 위무선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강징의 눈빛이 새파래지는 순간에는 뻔뻔한 위무선조차도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이게 뭐... 너, 금단을 어떻게 한 거야!”
위무선은 너무 갑작스러워 당장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절대로 진실을 들키지 않겠다는 각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거칠게 굴면 강징은 그 두 배, 세 배로 날뛸 테니 난장판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내 사정이야.”
“사정이라니, 무슨 사정?!”
“...”
“왜 말 안했어?”
거친 말투에 걱정과 후회스러워하는 기색이 스며들자 대뜸 자극을 받은 듯, 위무선이 사나워진 목소리로 외쳤다.
“없으면 없는 거지, 이미 없어진 걸 말하면 뭐해! 이제 나 검을 못 쓰는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 잔소리하지 마!”
위무선은 일부러 화를 내는 척하며 홱 뛰쳐나갔다. 강징은 너무도 충격이 커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강염리도 당황했고, 온정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지만 강징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스러워 위무선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금광요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금단이 손상됐다면 모를까, 저렇게 깨끗하게 사라질 순 없는 일인데. -온축류가 위공자에게 손을 댔다는 말도 못 들어보았고.”
이 말에 온정과 강징이 함께 움찔했다.
강징은 온축류에게 맞아서 금단을 파괴당한 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금단과 위무선의 금단을 연결시키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타인의 금단을 옮기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래도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위무선은 대체 언제부터 금단이 없었던 거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포산산인에게 위무선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포산산인에게서 잃어버린 금단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위무선을 제외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우두커니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들처럼 절박하게 궁금하지는 않은 금광요는 남망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망기 역시 못을 박은 듯이 얼어붙은 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금광요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뭘 하고 있느냐.”
“...”
“위무선이 왜 금단을 잃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그래도 남망기가 움직이지 않자, 금광요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따라가 보거라!”
남망기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무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그도 강징과 마찬가지로,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는 줄도 모르고 내내 다그쳐 왔던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따라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거운 발걸음을 떼는데, 금광요가 옷소매를 잡고 걱정스레 경고했다.
“잘 생각해 보고,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말거라.”
남망기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오 밖으로 나간 위무선을 찾으려 하자 남망기는 이 곳 지리를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위무선이 자신을 끌고 다녔던 곳을 빠짐없이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호수 쪽으로 탁 트인 절벽 위에서 위무선을 찾아내었다.
남망기는 위무선이 저를 보면 혐오감을 드러낼 줄 알았지만 그는 단지 기가 죽은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강징 그녀석이 절대로 알게 하면 안 되었는데.”
위무선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
“그 자식 이번에는 정말로 내 피를 말려 죽이고 말 거야. 이제 어떡하지? 도망갈까?”
“나랑 운심부지처로 가.”
남망기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아버리곤 금광요가 했던 경고가 떠올라서 입을 다물었다.
위무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남망기를 노려보았다.
“남잠. 너 또 시작이야?”
“...”
“너, 너도 이제 내게 금단이 없다는 걸 알았잖아. 네가 싫어하는 방법이라 해도 이게 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란 말이야! 그런데 기어이 막겠다고? 내가 얼마나 비참해지든 바른 길만 걸으면 된다는 거야? 그놈의 원칙, 원칙, 원칙! 남잠, 너는 네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알기나 해?”
남망기는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속가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금단이 없어진다는 건, 선문 사람들에게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남망기는 자신의 소신에 변함이 없었고, 위무선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제는 금단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음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신 차려, 위영. 이제부터는 사소한 부적 한 장도 쓰면 안돼.”
“뭐라고?! 남잠, 기어이 나랑 싸우자는 거지! 너 그렇게 내가 못마땅해?”
위무선은 강징에게 들킨 일 때문에 마음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거기다 남망기까지 숨통을 조여 대니, 독이 올라서 진정을 움켜쥐고 발을 굴렀다.
남망기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위무선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별안간 앞으로 나서며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왜... 왜 이래?!”
남망기가 확인해 보아도, 펄펄거리는 정기와 열기는 전해져 오지만 영력은 한 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몸이었다.
금광요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망기가 손을 놓아주자 위무선은 자신이 몸부림을 친 만큼 사정없이 조였던 손목을 주무르면서 불평을 해댔다. 이제까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오늘은 모두가 돌아가면서 제 몸을 떡주무르듯 하는구나 하고.
남망기는 물끄러미 위무선을 바라보다가, 금광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궁금해.”
“뭐?”
“금단이 왜 없어진 거지?”
“뭐...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남망기는 핀잔을 듣고도 묵묵하게 쳐다보기만 했지만, 왠지 위무선은 그를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 남망기는 이상한 것 같았다. 연화오에 술병을 안고 온 일부터, 뭐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그리고 또 화가 났다.
“아니, 속상한 건 나야! 근데 왜 네가 상처받은 것처럼 굴어!”
남망기는 위무선이 소리를 질러도 날뛰어도 시종일관 가만히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니 결국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위무선이 제풀에 꺾인 듯 절벽 끝으로 가더니 다 사라져가는 노을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이렇게 남망기와 해 지는 것을 볼 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 어째 자신의 인생은 자꾸만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무는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해질녘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한 박자 늦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위무선의 입가에 마지못한 듯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남망기를 돌아본 위무선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 나 금단이 없어. 들키고 말았네.”
남망기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자.”
위무선이 훗 하고 웃으며 걸어왔다. 그리고 남망기를 지나쳐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한동안 연화오 안에서는 기묘한 시간이 흘러갔다.
우선은 남망기와 위무선이 궁기도 근방에 잠입하여 낌새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들이 알아낸 정보는 금광요의 예측과 별다르지 않았다.
금자훈은 포로들이 싸그리 없어졌다는 보고를 받고는 눈이 뒤집혀서 즉각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난장강 앞에 이르렀을 때 예상대로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는 고작 포로 50여명을 되찾으려고 난장강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자신이 데리고 있는 수사들로는 무리였는데, 지원을 요청하려면 먼저 포로들이 하룻밤 새 다 사라져버렸다는 사건을 금광선에게 보고해야 했다. 감독관인 수사들 중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다면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 있는 대로 사람을 끌어모았겠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깨끗하게 털린 건 망신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금자훈은 대체 어느 놈이 이렇게 골탕을 먹였는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감독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외엔 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연화오에는 온정과 온녕, 그리고 그들과 매우 가까운 친지들 몇 명이 남았다. 그마저도 며칠 후에는 선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지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동안 강징은 몇 번이나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어진 이유를 물었지만 위무선이 화만 내자 나중에는 말도 붙이지 않게 되었다.
강징은 나름대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패검이든 사술이든 술을 마시는 것이든, 뭐든지 얘기하는 걸 꺼리고 위무선마저 피했다.
그는 위무선이 자신을 곤란하게 하거나 약을 올릴 때는 지치지도 않고 달려들었지만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자서 앓았다.
한편으로 위무선은 새삼 두려워진 마음에 온정과 온녕에게 절대 강징에게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그로서는 차라리 강징이 화를 내는 게 참아주기 쉬울 텐데, 저렇게 풀이 죽어 있는 꼴이 너무 싫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보다 더 심하게 밖으로 나돌았다.
만약 이런 때에 남망기마저 속을 긁어 주었다면 정말로 절교를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완력으로라도 위무선을 운심부지처로 끌고 갈 것 같던 남망기가 의외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음술 얘기도, 검 얘기도 금단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위무선이 어딜 가든 둘도 없는 친우처럼 따라다녔고, 위무선이 아무 소리나 지껄이다 못해 헛소리까지 해도, 심지어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려도 조용히 받아주었다.
그러니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앙금이 싹 가셔버렸고, 심지어는 그가 돌아갈 날이 아쉽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근래 위무선의 기분이란 게 바람 앞의 등불이라 오늘도 별 것도 아닌 일로 틀어지고 말았다.
이 날도 위무선은 아침부터 사람을 피해 남망기를 밖으로 끌고 나가던 참이었다.
원래라면 일어나기 이른 시간이었지만, 남망기가 잠들고 나면 고적해져서 따라서 자버리고 하다 보니 어이없게도 그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기상하게 되었다.
“연무장에 가?”
뜰을 지나다가 강징과 마주친 위무선이 물었다.
“음.”
잠시 발을 멈추었던 강징이 이내 눈을 내리깔더니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습관처럼 연화호를 따라 걸어내려갔다.
어제만 해도 위무선은 기분이 꽤 좋았는데, 단지 강징과 눈빛 한 번을 나눈 것만으로 다 망치고 말았다.
한참 동안 물가를 걷던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노기띤 목소리로 내뱉았다.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지, 정말 못 봐주겠네. 분통이 터져.”
“...그렇군.”
남망기가 얘기를 잘 들어주긴 하지만 너무 말이 없다고 위무선이 생떼를 쓴 후로는 짧은 대답을 꼬박꼬박 했다.
계속해서 분노를 털어놓으려던 위무선이 문득 돌아보았다. 남망기가 꿋꿋하게 인내하며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남잠.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이 위무선이 여지껏 너처럼 좋은 사람을 몰라봤네.”
“내가, 네 친구라고?”
“그래. 아니야?”
“...”
어쩌다가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포근해질 참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남망기가 갑자기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는 얼굴에는 이렇다할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가볍게 콧숨을 내쉬는 것이 아무래도 부정의 뜻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에 기분이 들쑥날쑥하던 위무선은 막 감동하려던 것도 잊고 바로 마음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끝장을 내자. 남잠, 넌 사람이 옛날부터, 대체 왜 그래?”
“...뭐가.”
“난 네가 나를 만나러 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도와주고. 그래서 조금은 날 좋아하나 싶었더니, 친구도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온 건데? 아니면 친구라는 존재가 너에게 있어 뭐 엄청 대단한 거라도 되는 거야?”
위무선이 씩씩대며 따지고 들자 남망기는 당황해서 변명을 할 듯 입술이 달삭거렸다.
위무선은 잠시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망기는 이빨을 질끈 물며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굳게 맞물린 턱뼈의 선이 강조되며, 눈빛마저 한 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위무선은 너무도 약이 올라서 무섭게 노려보았다.
“난 경망스러워서 네 친구는 못 되겠다 이거지? 알았어, 그만둬!”
“위영!”
남망기가 불렀지만 위무선은 홱 돌아서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단호하게 딛는 걸음이 한발짝 멀어질 때마다 선을 긋는 듯 쌀쌀한 느낌이었다.
남망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위무선이 토라져서 속상한 게 아니었다.
화가 난 것을 있는 대로 티를 내며 걸어가는 뒷모습은 저와 키가 비슷한 씩씩한 남자의 것이었지만, 남망기의 눈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남망기가 연화오로 돌아왔을 때 금광요는 이제 일이 다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식사를 하라고 권한 강염리가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남망기는 그간 못했던 인사를 올렸다.
“형장,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형제간에 무슨 소리냐. 그럴 필요 없다. 그런데 위공자는?”
남망기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화가 났습니다.”
금광요는 그렇게 말하는 남망기의 얼굴에서 자신이 예상한 느낌을 찾을 수 있는지 살펴 보았다. 하지만 남망기는 풀이 죽은 것도 아니고 애가 타는 느낌도 아니고, 단지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에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금광요는 딱 한 마디만 더 해주기로 했다.
“망기,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단다.”
“...?”
“위공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절대 듣지 않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 사람이, 문제거리를 일으킬 때마다 항상 그 원인은 본인이 아니라 엉뚱한 데 있단 말이야.”
남망기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금광요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느냐? 그는 너무 심하게 남을 도우려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정말로 그랬다.
굳이 친한 사람을 도운 것까지 꼽지 않아도 그의 곁에 있는 동안 숱하게 보아왔다.
일면식밖에 없는 소녀를 구하겠다고 인두에 지져지고, 괜히 혼자 남아 도륙현무 같은 괴물을 상대하고. 선문 백가를 적으로 돌릴 지도 모르는데 서슴없이 온녕을 구하려 했다.
금광요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가 그렇듯 건방지고 경망스럽지만 않았어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을 거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일까?
“알겠느냐? 저런 인간은 쫓아가는 게 아니라 저 쪽에서 쫓아오도록 만들어야 해.”
남망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금광요도 입을 다물었다.
이해했든 말았든, 남망기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건 금광요가 더 잘 알았다.
정말 이 한 쌍은 답이 없는 것 같았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다음 날 아침, 동생의 머리가 좀 식었을 거라고 판단한 강염리가 간식거리를 가져가서 말을 붙였다.
강징은 여전히 이마에 골이 패인 상태였지만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몇 마디 퉁명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강염리는 이미 상세한 내막을 다 알고 왔지만, 금광요가 왜 고소 남씨의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몸이 회복되는 사람들부터 안전한 곳을 물색해서 천천히 내보내려고 해. 온낭자가 잘 돌보고 있어.”
“...”
“온공자가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온공자가 잘못된다면 온낭자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
“그만 됐어요, 누님.”
강징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그것이 듣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라는 걸 아는 강염리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강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징은 잔뜩 화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미 다들 집안에 들어앉았는데 새삼 두들겨 패서 내쫓을 기운도 없었다.
남망기와 위무선은 하루이틀쯤 지난 후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정탐하러 가 보기로 했고, 온정은 쉬라는 말도 듣지 않고 아픈 사람들과 온녕의 곁에 찰떡같이 붙어 있었다.
그 날 오후가 되어서야 강징은 예를 갖추어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몇 시진 전쯤의 일이었다.
금광요는 강염리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위무선처럼 안심하지는 못했다. 그는 강염리나 위무선이 괜찮다고 판단했으면 진짜로 괜찮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강징의 분노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청당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근처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편이 왜 부엌에 있느냐고!”
강징이 위무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곁에 있던 강염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아선의 방에 갖다놓으려다가 깜박 잊고 부엌에 둔 거야.”
“누님이 그걸 왜요?”
“네가 멋대로 수편을 탁자 위에 갖다 놓으니까 사저가 가져간 거잖아.”
“너한테 준 거잖아! 그런데 그 자리에 그냥 내버리고 간 거야?”
“너 진짜 끈질기다.”
위무선이 피곤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사고 친 일도 있고 하여 가급적 강징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그는 사정없이 뜯어댔다.
“내가 너보고 뭐라도 하래? 하루종일 놀고, 먹고, 술만 퍼마시고. 그러는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리도 사람을 미치게 해? 그래, 세상 대단하신 위공자, 위대인께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위무선, 그렇게 잘났으면 운몽 강씨도 네가 책임져! 그럼 나한테 욕먹을 일도 없겠지!”
거기까지만 듣고 금광요는 되돌아 나왔다.
그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강징은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무선의 금단이 강징에게로 옮아갔다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위무선의 금단은 그것대로 없고, 강징의 금단은 다른 이유로 되살아났단 말인가?
어쨌든 지금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금광요는 강징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강염리가 자리를 마련했고 강징이 나타났다.
남망기, 위무선, 금광요, 그리고 마지못해 끌려온 온정까지 도착한 뒤 강징은 형식적이나마 결례에 대한 사죄를 했다. 온정은 그냥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남망기 역시 그랬다. 금광요만이 부드럽게 만류하며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위무선은 아침부터 강징과 다툰 터라 중재를 잘 하는 금광요가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내일 망기와 위공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기도 근처를 둘러보고 올 겁니다.”
금광요가 말했다.
그리고 이미 들었던 대로, 몸이 회복이 되는 사람들부터 드문드문, 조금씩 나누어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난릉 금씨의 감독하에서 온가의 포로 수십명을 탈취했다는 건 듣기만 하면 거창한 일이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자리를 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금광요는 몸을 돌려 무슨 말이라도 할 듯 위무선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의 팔을 짚었다. 의자는 검고, 위무선의 옷도 검었으니 헛짚을 만한 일이었다.
그가 짧게 사과하며 손을 떼는데, 갑자기 안색을 달리하더니 이번에는 위무선의 옷 밖으로 드러난 손목을 꽉 쥐었다. 그는 대뜸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위무선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온정의 안색까지 싹 바뀌었다.
위무선이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금광요는 놓아주지 않았다.
위무선이 진정을 사용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선문 사람들은 그의 가까이에 서는 것조차 피했다. 누군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막 나가려던 강징까지 돌아보았다.
그 때 금광요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위무선의 명백한 눈빛을 무시하고 똑똑하게 내뱉았다.
“위 공자, 당신 왜... 영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실제로 잡고 있는 손아귀를 통과하는 느낌이 그러했다. 위무선의 몸에는 정말로 금단이 없었다. 이렇게 정확히 맥을 잡아 보면 금광요와 같은 수련을 받지 못한 이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금광요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순순히 위무선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것을 바람처럼 쫓아온 강징이 건네받았다. 금광요와는 전연 다른 인정사정 없는 손아귀가 그대로 위무선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강징의 눈빛이 새파래지는 순간에는 뻔뻔한 위무선조차도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이게 뭐... 너, 금단을 어떻게 한 거야!”
위무선은 너무 갑작스러워 당장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절대로 진실을 들키지 않겠다는 각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거칠게 굴면 강징은 그 두 배, 세 배로 날뛸 테니 난장판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내 사정이야.”
“사정이라니, 무슨 사정?!”
“...”
“왜 말 안했어?”
거친 말투에 걱정과 후회스러워하는 기색이 스며들자 대뜸 자극을 받은 듯, 위무선이 사나워진 목소리로 외쳤다.
“없으면 없는 거지, 이미 없어진 걸 말하면 뭐해! 이제 나 검을 못 쓰는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 잔소리하지 마!”
위무선은 일부러 화를 내는 척하며 홱 뛰쳐나갔다. 강징은 너무도 충격이 커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강염리도 당황했고, 온정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지만 강징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스러워 위무선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금광요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금단이 손상됐다면 모를까, 저렇게 깨끗하게 사라질 순 없는 일인데. -온축류가 위공자에게 손을 댔다는 말도 못 들어보았고.”
이 말에 온정과 강징이 함께 움찔했다.
강징은 온축류에게 맞아서 금단을 파괴당한 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금단과 위무선의 금단을 연결시키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타인의 금단을 옮기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래도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위무선은 대체 언제부터 금단이 없었던 거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포산산인에게 위무선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포산산인에게서 잃어버린 금단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위무선을 제외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우두커니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들처럼 절박하게 궁금하지는 않은 금광요는 남망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망기 역시 못을 박은 듯이 얼어붙은 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금광요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뭘 하고 있느냐.”
“...”
“위무선이 왜 금단을 잃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그래도 남망기가 움직이지 않자, 금광요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따라가 보거라!”
남망기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무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그도 강징과 마찬가지로,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는 줄도 모르고 내내 다그쳐 왔던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따라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거운 발걸음을 떼는데, 금광요가 옷소매를 잡고 걱정스레 경고했다.
“잘 생각해 보고,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말거라.”
남망기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오 밖으로 나간 위무선을 찾으려 하자 남망기는 이 곳 지리를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위무선이 자신을 끌고 다녔던 곳을 빠짐없이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호수 쪽으로 탁 트인 절벽 위에서 위무선을 찾아내었다.
남망기는 위무선이 저를 보면 혐오감을 드러낼 줄 알았지만 그는 단지 기가 죽은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강징 그녀석이 절대로 알게 하면 안 되었는데.”
위무선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
“그 자식 이번에는 정말로 내 피를 말려 죽이고 말 거야. 이제 어떡하지? 도망갈까?”
“나랑 운심부지처로 가.”
남망기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아버리곤 금광요가 했던 경고가 떠올라서 입을 다물었다.
위무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남망기를 노려보았다.
“남잠. 너 또 시작이야?”
“...”
“너, 너도 이제 내게 금단이 없다는 걸 알았잖아. 네가 싫어하는 방법이라 해도 이게 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란 말이야! 그런데 기어이 막겠다고? 내가 얼마나 비참해지든 바른 길만 걸으면 된다는 거야? 그놈의 원칙, 원칙, 원칙! 남잠, 너는 네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알기나 해?”
남망기는 가볍게 이마를 찌푸렸다.
속가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금단이 없어진다는 건, 선문 사람들에게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남망기는 자신의 소신에 변함이 없었고, 위무선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제는 금단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음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신 차려, 위영. 이제부터는 사소한 부적 한 장도 쓰면 안돼.”
“뭐라고?! 남잠, 기어이 나랑 싸우자는 거지! 너 그렇게 내가 못마땅해?”
위무선은 강징에게 들킨 일 때문에 마음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거기다 남망기까지 숨통을 조여 대니, 독이 올라서 진정을 움켜쥐고 발을 굴렀다.
남망기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위무선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별안간 앞으로 나서며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왜... 왜 이래?!”
남망기가 확인해 보아도, 펄펄거리는 정기와 열기는 전해져 오지만 영력은 한 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몸이었다.
금광요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망기가 손을 놓아주자 위무선은 자신이 몸부림을 친 만큼 사정없이 조였던 손목을 주무르면서 불평을 해댔다. 이제까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오늘은 모두가 돌아가면서 제 몸을 떡주무르듯 하는구나 하고.
남망기는 물끄러미 위무선을 바라보다가, 금광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궁금해.”
“뭐?”
“금단이 왜 없어진 거지?”
“뭐...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남망기는 핀잔을 듣고도 묵묵하게 쳐다보기만 했지만, 왠지 위무선은 그를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 남망기는 이상한 것 같았다. 연화오에 술병을 안고 온 일부터, 뭐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그리고 또 화가 났다.
“아니, 속상한 건 나야! 근데 왜 네가 상처받은 것처럼 굴어!”
남망기는 위무선이 소리를 질러도 날뛰어도 시종일관 가만히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내니 결국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위무선이 제풀에 꺾인 듯 절벽 끝으로 가더니 다 사라져가는 노을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이렇게 남망기와 해 지는 것을 볼 때만 해도 참 좋았는데. 어째 자신의 인생은 자꾸만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무는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해질녘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한 박자 늦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위무선의 입가에 마지못한 듯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남망기를 돌아본 위무선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 나 금단이 없어. 들키고 말았네.”
남망기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자.”
위무선이 훗 하고 웃으며 걸어왔다. 그리고 남망기를 지나쳐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한동안 연화오 안에서는 기묘한 시간이 흘러갔다.
우선은 남망기와 위무선이 궁기도 근방에 잠입하여 낌새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그들이 알아낸 정보는 금광요의 예측과 별다르지 않았다.
금자훈은 포로들이 싸그리 없어졌다는 보고를 받고는 눈이 뒤집혀서 즉각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난장강 앞에 이르렀을 때 예상대로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는 고작 포로 50여명을 되찾으려고 난장강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자신이 데리고 있는 수사들로는 무리였는데, 지원을 요청하려면 먼저 포로들이 하룻밤 새 다 사라져버렸다는 사건을 금광선에게 보고해야 했다. 감독관인 수사들 중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다면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 있는 대로 사람을 끌어모았겠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깨끗하게 털린 건 망신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금자훈은 대체 어느 놈이 이렇게 골탕을 먹였는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감독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외엔 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연화오에는 온정과 온녕, 그리고 그들과 매우 가까운 친지들 몇 명이 남았다. 그마저도 며칠 후에는 선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지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동안 강징은 몇 번이나 위무선에게 금단이 없어진 이유를 물었지만 위무선이 화만 내자 나중에는 말도 붙이지 않게 되었다.
강징은 나름대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패검이든 사술이든 술을 마시는 것이든, 뭐든지 얘기하는 걸 꺼리고 위무선마저 피했다.
그는 위무선이 자신을 곤란하게 하거나 약을 올릴 때는 지치지도 않고 달려들었지만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자서 앓았다.
한편으로 위무선은 새삼 두려워진 마음에 온정과 온녕에게 절대 강징에게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그로서는 차라리 강징이 화를 내는 게 참아주기 쉬울 텐데, 저렇게 풀이 죽어 있는 꼴이 너무 싫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보다 더 심하게 밖으로 나돌았다.
만약 이런 때에 남망기마저 속을 긁어 주었다면 정말로 절교를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완력으로라도 위무선을 운심부지처로 끌고 갈 것 같던 남망기가 의외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음술 얘기도, 검 얘기도 금단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위무선이 어딜 가든 둘도 없는 친우처럼 따라다녔고, 위무선이 아무 소리나 지껄이다 못해 헛소리까지 해도, 심지어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려도 조용히 받아주었다.
그러니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앙금이 싹 가셔버렸고, 심지어는 그가 돌아갈 날이 아쉽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근래 위무선의 기분이란 게 바람 앞의 등불이라 오늘도 별 것도 아닌 일로 틀어지고 말았다.
이 날도 위무선은 아침부터 사람을 피해 남망기를 밖으로 끌고 나가던 참이었다.
원래라면 일어나기 이른 시간이었지만, 남망기가 잠들고 나면 고적해져서 따라서 자버리고 하다 보니 어이없게도 그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기상하게 되었다.
“연무장에 가?”
뜰을 지나다가 강징과 마주친 위무선이 물었다.
“음.”
잠시 발을 멈추었던 강징이 이내 눈을 내리깔더니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습관처럼 연화호를 따라 걸어내려갔다.
어제만 해도 위무선은 기분이 꽤 좋았는데, 단지 강징과 눈빛 한 번을 나눈 것만으로 다 망치고 말았다.
한참 동안 물가를 걷던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노기띤 목소리로 내뱉았다.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지, 정말 못 봐주겠네. 분통이 터져.”
“...그렇군.”
남망기가 얘기를 잘 들어주긴 하지만 너무 말이 없다고 위무선이 생떼를 쓴 후로는 짧은 대답을 꼬박꼬박 했다.
계속해서 분노를 털어놓으려던 위무선이 문득 돌아보았다. 남망기가 꿋꿋하게 인내하며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남잠.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이 위무선이 여지껏 너처럼 좋은 사람을 몰라봤네.”
“내가, 네 친구라고?”
“그래. 아니야?”
“...”
어쩌다가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포근해질 참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남망기가 갑자기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는 얼굴에는 이렇다할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가볍게 콧숨을 내쉬는 것이 아무래도 부정의 뜻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에 기분이 들쑥날쑥하던 위무선은 막 감동하려던 것도 잊고 바로 마음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끝장을 내자. 남잠, 넌 사람이 옛날부터, 대체 왜 그래?”
“...뭐가.”
“난 네가 나를 만나러 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도와주고. 그래서 조금은 날 좋아하나 싶었더니, 친구도 아니라면 대체 뭐하러 온 건데? 아니면 친구라는 존재가 너에게 있어 뭐 엄청 대단한 거라도 되는 거야?”
위무선이 씩씩대며 따지고 들자 남망기는 당황해서 변명을 할 듯 입술이 달삭거렸다.
위무선은 잠시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망기는 이빨을 질끈 물며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굳게 맞물린 턱뼈의 선이 강조되며, 눈빛마저 한 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위무선은 너무도 약이 올라서 무섭게 노려보았다.
“난 경망스러워서 네 친구는 못 되겠다 이거지? 알았어, 그만둬!”
“위영!”
남망기가 불렀지만 위무선은 홱 돌아서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단호하게 딛는 걸음이 한발짝 멀어질 때마다 선을 긋는 듯 쌀쌀한 느낌이었다.
남망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위무선이 토라져서 속상한 게 아니었다.
화가 난 것을 있는 대로 티를 내며 걸어가는 뒷모습은 저와 키가 비슷한 씩씩한 남자의 것이었지만, 남망기의 눈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남망기가 연화오로 돌아왔을 때 금광요는 이제 일이 다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식사를 하라고 권한 강염리가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남망기는 그간 못했던 인사를 올렸다.
“형장,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형제간에 무슨 소리냐. 그럴 필요 없다. 그런데 위공자는?”
남망기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화가 났습니다.”
금광요는 그렇게 말하는 남망기의 얼굴에서 자신이 예상한 느낌을 찾을 수 있는지 살펴 보았다. 하지만 남망기는 풀이 죽은 것도 아니고 애가 타는 느낌도 아니고, 단지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에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금광요는 딱 한 마디만 더 해주기로 했다.
“망기,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단다.”
“...?”
“위공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절대 듣지 않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 사람이, 문제거리를 일으킬 때마다 항상 그 원인은 본인이 아니라 엉뚱한 데 있단 말이야.”
남망기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금광요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느냐? 그는 너무 심하게 남을 도우려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정말로 그랬다.
굳이 친한 사람을 도운 것까지 꼽지 않아도 그의 곁에 있는 동안 숱하게 보아왔다.
일면식밖에 없는 소녀를 구하겠다고 인두에 지져지고, 괜히 혼자 남아 도륙현무 같은 괴물을 상대하고. 선문 백가를 적으로 돌릴 지도 모르는데 서슴없이 온녕을 구하려 했다.
금광요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가 그렇듯 건방지고 경망스럽지만 않았어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을 거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일까?
“알겠느냐? 저런 인간은 쫓아가는 게 아니라 저 쪽에서 쫓아오도록 만들어야 해.”
남망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금광요도 입을 다물었다.
이해했든 말았든, 남망기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건 금광요가 더 잘 알았다.
정말 이 한 쌍은 답이 없는 것 같았다.
희신광요 망기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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