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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 17:00
아직 동트기 전 이른 새벽, 창밖으로는 비가 내린다. 거무칙칙한 비구름 떼가 난릉 전체를 무거운 솜이불처럼 내리덮고 있었다. 장대비께서 마치 온 세상 사람의 발을 제자리에 잡아두려는 듯 지독하게도 쏟아져 내린다. 이 음울한 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외딴 정각亭閣에 홀로 앉아 망연하게 빗소리를 듣고 있는 소녀 금자봉이었다. 불면의 밤을 핑계로 잠이 잘 오는 탕약을 받아마시길 어언 며칠째. 흡사 죽을 날을 미리 받아둔 병자처럼 모든 식음을 전폐하고 잠에 들었다 깨어나기만을 반복하다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자신과 그의 꿈이 영원히 끊겼다는 걸.
두 번 다시 그 검은 꿈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금자봉의 고운 두 손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그림 한 점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황량한 꿈의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떠올랐던 기억. 불덩어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참혹한 전장에서 천벌을 내리듯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적들을 집어삼키던 검은 용. 그와 반대로 불씨 하나 닿지 않는 초록 봉우리에서 모든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던 약한 제 자신.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싸우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남을 위해서.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이름 하나 모르는 와중에 그 사실만이 선명하게 위로 떠오른다.
외딴 정각에서 곁에 시녀 한 명 없이 고독하게 사색에 빠진 금자봉에게 누군가 날선 눈을 던진다. 그는 이 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이었다. 평소 귀여운 호감형이던 얼굴은 오늘따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미간의 붉은 단사는 그가 어엿한 금가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신기하게도 이름에서 항렬자는 ‘자’가 아닌 ‘광’이었다. 제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의 이름은 금광요, 지난 야렵 대회에서 독화살을 쏜 범인이다.
정확하게 고쳐 말하자면, 누군가 그리 할 줄 모르고 제 몸을 선뜻 빌려주었다.
진범은 소년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독두꺼비 요괴.
금광요는 이 요괴 덕분에 맹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가 손끝에서 똑 떨어트리는 무색무취의 맹독은 특히 금광선의 정적에게 애용되었다. 그런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금광요는 독두꺼비 요괴에게 독을 빌려 쓰는 대가로 달에 한 번씩 몸의 주권을 내어주었다. 지난달 그때가 하필 야렵 대회 당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금광요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금자봉에게 화살을 겨누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몸을 한 번 넘겨주면 스스로 돌려줄 때까지 아무런 관여도 하지 못해, 금광요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낯선 감각이 손에 흉터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독두꺼비가 금자봉에게 어떤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 우연하게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손끝이 불에 덴 것같이 아릿했다. 한때 늪의 주인이었다던 독두꺼비가 어째서 불의 감각을 알고 있는지, 금광요로서는 좀체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두꺼비 요괴의 커다란 몸이 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사실. 그림 한 점을 두 손 가득히 쥐고 먹먹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를 한참 보고 있으니 또다시 손이 멋대로 아릿해진다.
금광요는 그게 성가셨다.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성가신 것이었다.
“아…… 광요.”
그리하여 금광요는 이 두꺼비 요괴에게 골탕을 먹이고자, 제 발로 순순히 금자봉 앞에 떳떳하게 섰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멀리에서 누가 보이길래.”
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습관처럼 짓는 웃음은 이제 달인이다. 우산을 접고 정각 안으로 들어온 그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기백 있고 도량이 넓어 보인다. 이 자리에서 감히 금광요의 행동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며칠 내내 약을 받아서 잤다고 들었어. 나온 걸 보니 몸은 이제 괜찮은가 봐? 자훈이 펄펄 뛰면서 걱정하더라. 네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 몇 번이나 막았는지 원.”
청산유수처럼 술술 건네 오는 안부 인사에도 사촌 금자봉은 묵묵부답이다. 부러 답하지 않으려 한다기보다, 안타깝게도 그럴 힘이 없어 보였다. 그새 안색이 더 창백해진 사촌 누이는 병색에도 불구하고 이에 지지 않는 고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오만방자한 쌍둥이 동생 금자훈과는 전혀 닮은 구석 없는 설부화용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도 답해주지 않는 사촌 누이에게 여우 털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어깨 위로 고이 둘러준다.
“자봉, 이대로 계속 머무를 거면 뭐라도 두르고 있어.”
또 손가락 끝이 불에 타듯이 아려왔으나, 꾹 참았다.
미쳤군, 단단히 미친 거야 네놈! 이 계집에게 줄 게 없어 그 귀한 여우 털 담요를 주다니!
독두꺼비 요괴의 분노에 찬 음성이 머릿속에서 아주 쨍쨍하게 울려퍼진다.
상관 마세요. 제 물건이니 제 마음대로 쓰겠습니다.
차라리 네 코앞에서 알랑거리던 진가의 여식에게나 줄 것이지, 그 많고 많은 계집 중에서 하필이면 이 계집에게 줘? 그것을 닮아 저주스러운 이 계집에게!
독두꺼비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전성기 같으면 이깟 배은망덕한 인간쯤이야 벌써 꿀꺽 삼켜버리고 남았다. 허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몸이 이미 오래전 싹 타버리고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 천벌같은 불길 속에서 영혼만이 어렵사리 남아 남에게 기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독두꺼비는 피부 밖으로 독이 뚝뚝 흐르던 제 몸을 개의치 않고 휘감아오던 어떤 요괴를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신 나간 나무 요괴는 제 몸과 함께 자신의 모든 걸 장작 삼아서 깡그리 불살라버렸다.
품속에 다른 무엇도 아닌 망월의 불을 숨겨 두었을 줄 과연 어느 누가 알았으랴!
너..... 후회할 게다. 다음번에 두고 보자구나. 내가 이 계집의 얼굴을 어떻게 헤집어 놓는지. 아주 장관일 게야.
허나 금광요는 독두꺼비의 도발에도 섣불리 넘어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벌레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리 하신다고요. 제게 주도권이 다시 넘어왔을 때 어떤 수모를 당하실지는 예상하시고 부러 도발하시는 겁니까?
수모라, 하하! 허풍 떠는군. 너와 난 이미 한 몸이거늘, 내가 수모를 겪어봤자 네 몸으로도 직접 겪어야 할 터!
금자봉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응시하고 있는 금광요의 눈은 돌 하나 떨어지지 않은 수면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다. 빗줄기는 전보다 더 맹렬하게 쏟아진다. 두 남녀는 한 공간에 같이 있음에도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깊이 하고 있었다.
제게 당신이 쓰기 편리하고 유용해서 영혼째로 남겨둔 것이지, 간만 빼먹고 버릴 수 있는 방법도 충분히 있다는 걸 고려하지는 않으시군요. 오갈 데 없는 당신께서 몹시 불쌍하여 그 자리에 남겨둔 것인데.
전부터 불만스럽게 울던 두꺼비 소리가 뚝 그친다.
당신께서도 잠에 드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 틈을 타 제가 여러 가지를 알아 보았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고려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몇 년간 당신의 덕을 본 건 맞지만 우리 관계는 오늘로 끝날 수 있습니다.
질척거리던 발소리까지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 늪의 독두꺼비와 말싸움하는 것도 이제 쉬이 받아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이었다. 끝낼 수 있었더라면 오래전에 능히 끝내고 남았을 터. 독두꺼비의 큰소리대로 이미 한 몸과 마찬가지인 그의 영혼을 분리할 방도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고개를 숙인 금광요는 곁눈질로 슬쩍 사촌 누이를 살펴보았다. 꽃같은 얼굴이 빗줄기에 젖어들었다. 그녀가 애써 고개를 정각 밖으로 빼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기 때문이다. 저 칙칙한 하늘 속에 무엇을 그리 찾아 헤매는 걸까. 그러나 금광요는 구태여 묻지 않는다. 금자봉도 그가 이른 시간에 여즉 깨어 있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이 금가에서 유일하게 서로 많은 것을 묻지 않는 사이였다. 금광요는 그저 우산을 펴 사촌 누이의 고운 얼굴이 비에 젖지 않도록 묵묵히 가리어준다.
사촌 누이는 그제서야 하늘에서 눈을 떨어트렸다.
아, 역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건 실수였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서도 다시 누리지 못할 테지.
두 번 다시 그 검은 꿈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금자봉의 고운 두 손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그림 한 점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황량한 꿈의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떠올랐던 기억. 불덩어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참혹한 전장에서 천벌을 내리듯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적들을 집어삼키던 검은 용. 그와 반대로 불씨 하나 닿지 않는 초록 봉우리에서 모든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던 약한 제 자신.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는 항상 싸우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남을 위해서.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이름 하나 모르는 와중에 그 사실만이 선명하게 위로 떠오른다.
외딴 정각에서 곁에 시녀 한 명 없이 고독하게 사색에 빠진 금자봉에게 누군가 날선 눈을 던진다. 그는 이 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이었다. 평소 귀여운 호감형이던 얼굴은 오늘따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미간의 붉은 단사는 그가 어엿한 금가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신기하게도 이름에서 항렬자는 ‘자’가 아닌 ‘광’이었다. 제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의 이름은 금광요, 지난 야렵 대회에서 독화살을 쏜 범인이다.
정확하게 고쳐 말하자면, 누군가 그리 할 줄 모르고 제 몸을 선뜻 빌려주었다.
진범은 소년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독두꺼비 요괴.
금광요는 이 요괴 덕분에 맹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가 손끝에서 똑 떨어트리는 무색무취의 맹독은 특히 금광선의 정적에게 애용되었다. 그런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금광요는 독두꺼비 요괴에게 독을 빌려 쓰는 대가로 달에 한 번씩 몸의 주권을 내어주었다. 지난달 그때가 하필 야렵 대회 당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금광요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금자봉에게 화살을 겨누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몸을 한 번 넘겨주면 스스로 돌려줄 때까지 아무런 관여도 하지 못해, 금광요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낯선 감각이 손에 흉터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독두꺼비가 금자봉에게 어떤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 우연하게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손끝이 불에 덴 것같이 아릿했다. 한때 늪의 주인이었다던 독두꺼비가 어째서 불의 감각을 알고 있는지, 금광요로서는 좀체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두꺼비 요괴의 커다란 몸이 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사실. 그림 한 점을 두 손 가득히 쥐고 먹먹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를 한참 보고 있으니 또다시 손이 멋대로 아릿해진다.
금광요는 그게 성가셨다.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성가신 것이었다.
“아…… 광요.”
그리하여 금광요는 이 두꺼비 요괴에게 골탕을 먹이고자, 제 발로 순순히 금자봉 앞에 떳떳하게 섰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멀리에서 누가 보이길래.”
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이었다. 습관처럼 짓는 웃음은 이제 달인이다. 우산을 접고 정각 안으로 들어온 그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기백 있고 도량이 넓어 보인다. 이 자리에서 감히 금광요의 행동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며칠 내내 약을 받아서 잤다고 들었어. 나온 걸 보니 몸은 이제 괜찮은가 봐? 자훈이 펄펄 뛰면서 걱정하더라. 네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 몇 번이나 막았는지 원.”
청산유수처럼 술술 건네 오는 안부 인사에도 사촌 금자봉은 묵묵부답이다. 부러 답하지 않으려 한다기보다, 안타깝게도 그럴 힘이 없어 보였다. 그새 안색이 더 창백해진 사촌 누이는 병색에도 불구하고 이에 지지 않는 고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오만방자한 쌍둥이 동생 금자훈과는 전혀 닮은 구석 없는 설부화용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도 답해주지 않는 사촌 누이에게 여우 털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어깨 위로 고이 둘러준다.
“자봉, 이대로 계속 머무를 거면 뭐라도 두르고 있어.”
또 손가락 끝이 불에 타듯이 아려왔으나, 꾹 참았다.
미쳤군, 단단히 미친 거야 네놈! 이 계집에게 줄 게 없어 그 귀한 여우 털 담요를 주다니!
독두꺼비 요괴의 분노에 찬 음성이 머릿속에서 아주 쨍쨍하게 울려퍼진다.
상관 마세요. 제 물건이니 제 마음대로 쓰겠습니다.
차라리 네 코앞에서 알랑거리던 진가의 여식에게나 줄 것이지, 그 많고 많은 계집 중에서 하필이면 이 계집에게 줘? 그것을 닮아 저주스러운 이 계집에게!
독두꺼비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전성기 같으면 이깟 배은망덕한 인간쯤이야 벌써 꿀꺽 삼켜버리고 남았다. 허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몸이 이미 오래전 싹 타버리고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 천벌같은 불길 속에서 영혼만이 어렵사리 남아 남에게 기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독두꺼비는 피부 밖으로 독이 뚝뚝 흐르던 제 몸을 개의치 않고 휘감아오던 어떤 요괴를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신 나간 나무 요괴는 제 몸과 함께 자신의 모든 걸 장작 삼아서 깡그리 불살라버렸다.
품속에 다른 무엇도 아닌 망월의 불을 숨겨 두었을 줄 과연 어느 누가 알았으랴!
너..... 후회할 게다. 다음번에 두고 보자구나. 내가 이 계집의 얼굴을 어떻게 헤집어 놓는지. 아주 장관일 게야.
허나 금광요는 독두꺼비의 도발에도 섣불리 넘어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벌레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리 하신다고요. 제게 주도권이 다시 넘어왔을 때 어떤 수모를 당하실지는 예상하시고 부러 도발하시는 겁니까?
수모라, 하하! 허풍 떠는군. 너와 난 이미 한 몸이거늘, 내가 수모를 겪어봤자 네 몸으로도 직접 겪어야 할 터!
금자봉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응시하고 있는 금광요의 눈은 돌 하나 떨어지지 않은 수면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다. 빗줄기는 전보다 더 맹렬하게 쏟아진다. 두 남녀는 한 공간에 같이 있음에도 각자 전혀 다른 생각을 깊이 하고 있었다.
제게 당신이 쓰기 편리하고 유용해서 영혼째로 남겨둔 것이지, 간만 빼먹고 버릴 수 있는 방법도 충분히 있다는 걸 고려하지는 않으시군요. 오갈 데 없는 당신께서 몹시 불쌍하여 그 자리에 남겨둔 것인데.
전부터 불만스럽게 울던 두꺼비 소리가 뚝 그친다.
당신께서도 잠에 드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 틈을 타 제가 여러 가지를 알아 보았다는 것, 이 두 가지를 고려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몇 년간 당신의 덕을 본 건 맞지만 우리 관계는 오늘로 끝날 수 있습니다.
질척거리던 발소리까지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 늪의 독두꺼비와 말싸움하는 것도 이제 쉬이 받아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이었다. 끝낼 수 있었더라면 오래전에 능히 끝내고 남았을 터. 독두꺼비의 큰소리대로 이미 한 몸과 마찬가지인 그의 영혼을 분리할 방도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고개를 숙인 금광요는 곁눈질로 슬쩍 사촌 누이를 살펴보았다. 꽃같은 얼굴이 빗줄기에 젖어들었다. 그녀가 애써 고개를 정각 밖으로 빼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기 때문이다. 저 칙칙한 하늘 속에 무엇을 그리 찾아 헤매는 걸까. 그러나 금광요는 구태여 묻지 않는다. 금자봉도 그가 이른 시간에 여즉 깨어 있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두 사람은 이 금가에서 유일하게 서로 많은 것을 묻지 않는 사이였다. 금광요는 그저 우산을 펴 사촌 누이의 고운 얼굴이 비에 젖지 않도록 묵묵히 가리어준다.
사촌 누이는 그제서야 하늘에서 눈을 떨어트렸다.
아, 역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건 실수였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서도 다시 누리지 못할 테지.
***
“일어났으니 받아먹은 약 값은 해야지.”
금광선은 그 말 한 마디로 아주 많은 걸 이야기했다. 거짓이어도 병세가 나은 지 고작 반나절 만에 금자봉은 은밀히 호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일은 대개 떳떳지 못한 행동을 지시하려는 작정이었다. 금자봉이 고개를 조아려 긍정의 뜻을 나타내자, 금광선은 곧 흡족하다는 듯 웃으면서 본론으로 재빠르게 들어간다.
“최근 들어 아리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듣자하니 자헌의 서신에 답서 한 장도 해주지 않고 만남도 거절해. 그런데 고작 하인 자식인 위무선과는 그렇게 잘 어울려 다닌다 해대니 네가 한번 알아보지 않겠느냐. 다른 이에게 시켰다가는 괜한 말들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어 너를 불렀다.”
아무리 어린 시절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고는 하나, 남녀 사이에 마음이 틀어지는 건 설령 하늘이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늘.
하지만 금자봉은 얌전히 동의하였다.
“예에, 숙부. 이 일은 부족한 제가 나서보도록 하지요. 아헌의 일은 곧 소녀의 일이기도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훈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소녀는 약재 제조에 필요한 희귀한 꽃을 찾으러 나선다는 핑계로 금가 지붕을 벗어나게 되었다. 강낭자와 위공자의 물밑 관계를 캐내 오라니. 과연 숙부답게 더럽고 치졸한 계획이었다. 그만큼 운몽의 강낭자가 금자헌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혼인 상대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난 강공자의 연회에서 마지막으로 본 강낭자의 얼굴을 겨우 떠올려본다.
단언컨대 웃고 있지는 않았다, 확실히.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어검하여 운몽에 도착한 금자봉은, 명목상 꽃을 찾아다니는 연기 정도는 며칠 몰입할 생각이었다. 소녀가 잡은 객잔은 부러 꽃 시장과 매우 가까웠다. 가장 높은 층의 객실에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눈을 감으면 짙은 꽃 향기가 맡아졌다. 수상 도시인 운몽은 사방으로 나루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여러 상인이 드나들었다. 이 물의 도시는 그야말로 모두가 자진해서 모였다. 어디에서도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에 잊을 만하면 풍기는 매콤한 볶음 요리의 기름 냄새.
금으로 만든 가시밭같은 난릉에서는 볼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아, 금자봉은 며칠 정도는 편히 풀어져 있으리라고 마음먹는다. 자신에게도 가벼운 기분 전환이라는 게 필요했다. 비록 오랜 시간 알아왔던 소중한 이를 한순간에 놓쳤을지언정, 심장이 뽑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일지언정, 소녀는 이미 주어진 생을 기꺼이 살아나가야 했다. 소녀의 신조는 간단하지만 ‘꼿꼿하게’. 불길에도 수모에도 부러지지 않고 그저 담대히, 아주 꼿꼿하게. 매서운 비를 생명수처럼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성대하게 자라난 한 그루 나무를 꿈꾸는 꽃은 어느 때보다 색이 곱고 빛났다.
떠들썩한 이 도시에서 흔치 않게 살랑거리는 향기가, 잘 다듬어진 작약과 같은 푸른 향기가 얼마 전 몸을 간신히 회복한 어떤 이의 코끝에까지 훨훨 날아와 톡, 꽃잎처럼 내려앉는다.
익숙한 향기에 강만음은 침상에서 몸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으킨다. 외견으로는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지만 실은 내상이 상당하여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될 몸이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강만음의 본래 모습은 거대한 용종.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족히 반 년은 넘게 누워 있었을 부상을 고작 사나흘 만에 가뿐히 회복하였다. 용종은 당초 그리 설계된 생물이었다. 오로지 창생을 수호하고 때로는 망가져서 무뎌질지언정 언제나 그들의 방패로서 싸울 수 있게 설계된, 결코 부러지지 않는 창천의 검.
강만음은 아마 창생이 시작된 이래로 스스로 자신을 부러뜨린 최초의 검일 것이다.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군.
인간의 탈을 잘 뒤집어쓴 칠흑의 용은 이미 사라진 향기를 재차 맡아보고자 굳게 닫아 두었던 방문을 벌컥 열었다.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하여 시종은 두지 말라 했거늘, 시종 대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위무선이었다.
위무선이 유별나다는 건 강만음 또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지금 모습은 기행이라는 단어 외 달리 다른 게 떠오르지 않는다. 문에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으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게 꼭 도둑같았다. 한 사람은 문을 활짝 연 채, 한 사람은 누워 있는 채 그대로 영원히 얼어붙은 듯 쭉 요지부동이자 결국 강만음이 먼저 이 분위기를 와장창 부순다.
“쥐새끼처럼…… 뭐하는 거야?”
그제서야 위무선은 벌떡 일어나 급하게 반박한다.
“쥐, 쥐새끼라니! 그냥 너를 기다린 거지!”
“알았으니까 용건만 짧게, 간단히 말해.”
위무선이 길길이 날뛰자 벌써 그 모습에 지친 강만음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무용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만 가주면 좋겠는데.”
미간을 확 좁혀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부러 고스란히 드러낸다.
“네가 아무리 아버지께서 친아들처럼 기르셨다고 하나 내 눈에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야. 이 집안에서 너를 그렇게 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지. 어머니께서 주시는 눈칫밥으로는 아직도 모자란가?”
거두절미하고 날카로운 말들만 골라서 내뱉으니 위무선은 홀로 찔리는 게 있는지 어두운 표정이다. 한편 칠흑의 용은 암석처럼 흔들림 없이 담담했다. 강만음이란 신분에 필요한 건 오로지 인간이어야 할 당위성뿐. 그 외 관계는…… 솔직히, 어찌 되든 크게 알 바 아니었다.
“풍문으로 듣자하니 요즘 누님과 단 둘이서 어울려 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던데, 좀 자제하지 그래. 너도 알듯이 누님은 엄연히 혼약자가 있는 몸이야. 허튼 추문이 운몽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알아서 잘 단속해.”
“강징, 그건 말이 좀 심하네.”
“그리고 너와 내가 언제 봤다고 함부로 내 아명을 부르지? 위무선.”
강만음의 이유 있는 바짝 날선 태도에 위무선은 잠시 침묵했다. 강징이라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한 것들이었다. 위무선은 아량 넓은 강종주께서 저를 일찍이 거두어주신 덕에 수행자로서 재능을 발견하고 또 꽃피울 수 있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지난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떵떵거리며 지낼 수 있었던 건 전부, 온전히 강종주 덕분이었다. 위무선은 그 깊은 은혜를 뼈저리게 알았었기에 강만음에게 됐고 머리에 싸가지나 좀 잘 챙기라며 반박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고 그게 아니라면 당장 꺼져.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게 만들지 마.”
다만 오늘 이 말만큼은 꼭 하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똑똑히 정해 둔 게 있었다. 그것만은 오늘 해야 했다. 꿀꺽하고 매우 큰 소리가 긴장한 소년의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래, 말할게.”
“네가…… 우리와 그만 거리 뒀으면 좋겠어.”
그 말은 칠흑의 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와 사저는 너란 사람을 잘 알지 못해. 강징 너도 우리를 모르고. 이유는 서로 다르게 스쳐지나간 세월 때문이겠지. 그러니 네 눈에는 우리 사이가 불미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해. 다만 이 자리에서 수편을 걸고 맹세하건대, 나와 사저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남매 사이야. 그리고 너는 언제까지나 내 동생이고. 그것만큼은 저 하늘이 무너질지언정 변하지 않아.”
위무선은 놀랍게도 정녕 진심이었다. 날선 강만음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더욱, 조소가 픽 흘러나왔다. 진심이어도 어쩔 셈인가. 제 자신의 모든 게 새빨간 거짓이거늘. 무엇보다도 저 하늘이 무너질지언정 변하지 않겠다는 호언에, 강만음은 인간이라는 족속이 우스운 수준을 넘어서서 다시금 역겨워졌다. 감히 하늘에 대고 이깟 걸 맹세하는가.
이 용은 어디까지나 단 한 사람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인간의 탈을 꾹꾹 눌러 뒤집어썼을 뿐.
“나는 그리 생각 안 하는데. 거 정말 안타깝게 되었군.”
그 외 모든 건 상관없었다. 알 필요까지도 부재했다.
“강징!”
“아까도 분명 남의 아명을 멋대로 부르지 말라 했거늘, 내 경고는 영 경고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가 보지. 대단해.”
위무선은 어렵사리 꺼낸 진심을 대번에 거절당하자 믿기 어려운 표정이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너는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몰라, 위무선. 그깟 말 몇 마디로 사람을 회유하려고 드는 게 아주 큰 오만이야.”
강만음은 이제 더 이상 위무선과 아주 짧은 말 한 마디 섞고 싶지 않았으므로, 문을 도로 닫는다는 쉬운 선택지 대신 아예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상이 깊고 상당한데도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가벼워 위무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만음이 제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위무선은, 마침내 그의 뒤통수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정반대 방향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허나 그 모진 말에도 불구하고 가는 내내 강징을 생각하고 있었다.
위무선의 가장 큰 장점은 꺾이지 않는 선성이었다. 이는 타인에게 오만으로 보이기도 해, 그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는 안타깝게도 몇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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