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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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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어찌 생각하오? 두 분 모두.”

두연청에 모여 앉은 세 종주는 강만음이란 소년에 대해 회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유인 즉, 최근 그의 눈에 띄는 활약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순 실력이 출중한 것에 불과하다면 종주가 셋이나 모여 머리를 맞대고 토의할 필요는 없다. 

“난장강 일대를 단신으로 토벌했다는 건 달리 봐야 하지 않겠소.”

그랬다, 난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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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시체들과 길 잃은 온갖 요마귀괴가 날뛰는 그곳을, 십칠 세의 강만음은 패검 한 자루만 들고 단신으로 토벌했다. 한발 늦게 강만음을 찾아 나선 위무선은 난장강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말 그대로 전율했다. 도처에 요괴들의 시체가 태산처럼 쌓이고 그들의 선혈이 바다 같이 범람했다. 결정적으로 무릎까지 차오르는 깊은 피 웅덩이 한가운데 서서, 엄지에 낀 희고 깨끗한 옥반지만을 한참 문지르고 있던 그의 동생. 그게 정말로 강징이었나. 지친 기색도 일절 없이 무감각하게 ‘어찌 왔냐.’ 이 하나만을 물어보는데 그때 당시 무슨 대답을 들려주는 게 좋았을까.

위무선의 이 기이한 넋두리는 곧 남망기에게서 남희신에게로 전달되었다. 마침 금광선에게 서신상으로 강만음의 일을 전해들었던 남희신은, 이 때문에 남망기를 대동하고 난릉까지 찾아왔던 것이었다. 강만음의 기행은 그뿐만이 아니었기에. 

길고 길었던 금광선의 말이 비로소 겨우 끝나자 남희신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하여…… 강공자를 이토록 쉽게 사마외도라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간의 행적이 의심스러워 금종주께서 능히 그리 생각하실 수 있으나. 어려서부터 지금껏 폐관하여 정진해온 공자에게 제 나이보다 비상한 재능을 가졌다 해서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섣부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섭명결도 이에 바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시작하려는 말은 남희신의 것과 내포한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허나 가만 두고 볼 수도 없지. 강공자가 남다르게 군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릇된 힘을 추구하다가 자멸하는 건 단언컨대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우리 청하 섭씨에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오.”

청하 섭씨는 오대 선문 세가 중 유일하게 검이 아닌 도를 다루었기에 다른 가문보다 수행 강도의 악명이 높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행자들이 탈선하거나 끝끝내 체내의 기를 완전히 다루지 못하여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에, 섭명결은 그의 말대로 누구보다 이 자리에서 현 사안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불온한 싹은 일찍이 잘라내야만 하는 법. 하지만 사람은 새싹 따위가 아니었기에 그의 뜻대로 손쉽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형님, 강공자는 아직 어립니다.”

“나는 약관이 되기도 전에 종주가 되었고, 너 또한 그러하거늘 열일곱이란 나이가 뭐라고 봐주어야만 하느냐?” 

그때 남은 다과를 들고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금자봉은 적봉존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안 그래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전부 들어서 마음이 심란한데 말이다. 더군다나 분위기가 심각하게 무르익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새가슴이 된 금가 여식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작은 머리를 빼꼼 내밀어 드디어 기둥 너머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 분위기에서 나서봤자 숙부에게 괜한 눈칫밥만 먹을 뿐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쭉 빼자 다과를 장식하려고 그 위에 올려 두었던 꽃잎 몇 장이 두연청의 바닥 위로 하늘하늘 춤추듯이 떨어진다. 그 짧은 순간 누군가 귀를 바짝 세운다. 꿈틀, 하고 한 사람의 뾰족한 귀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내려오는 소리, 땅바닥을 살짝 누른 어느 소녀의 다람쥐 같이 가벼운 발소리, 이 모든 걸 예리하게 잡아낸다. 코끝으로는 공기 중으로 옅게 퍼지는 풀냄새까지. 새벽이슬을 가볍게 톡 머금은 듯 싱그러웠다. 

“으흠, 어쨌든 내 말은 그를 감히 어쩌자는 게 아니다. 다만 경계하자는 것이지.”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섭명결의 목소리에 그의 두 귀는 더 이상 미지의 소리를 쫓아가지 못하였다. 

“그러시다면 경계하자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형님의 목소리까지 끼어들자 실마리를 잡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건 코끝의 향기. 

“망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위공자에게 당시 난장강에서의 상황을 상세히 전해들었다고 내게 말해주었지. 아, 일전에 강공자와 검을 한 번 나누어본 적도 있지 않았더냐. 그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들려주거라.”

“강공자의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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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음의 눈이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바다 같았다면, 이 소년의 눈은 너무나도 투명하여 바닥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얼음못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얼어붙어 있는 그 표면에 지난 일을 회상하는 빛이 옅게 떠오른다. 예민한 감각의 주인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또렷이 빛내며 말한다.

“검이라기보다 짐승의 송곳니 같았습니다. 검을 나누는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고, 그의 검법은 운몽 강씨의 것도 아니며 마치 검을 처음 쥐는 사람처럼 눈앞의 상대를 무조건 찢어발기려 하더군요.”

남망기가 말을 이토록 길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금광선은 흥미롭다는 듯 깊이 경청하는 척했다.

“지난 십몇 년간 그가 수련했던 것은 정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망기야.”

“검을 나누어보면 형장도 금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동생 남망기의 말을 통해 강공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조금 가라앉히려던 남희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무엇도 아닌 검법에 대한 망기의 식견은 결코 좁지 않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쓰게 웃은 남희신은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달리 말한다.

“오랜 시간 고독을 견디며 수행에 정진했던 것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 사람이 어려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마음에 상처가 깊이 남아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남희신은 강만음과 비슷하게 자라온 이를 한 명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강만음에게 마음이 쓰였다. 

“검법과 예절은 배우면 되는 것, 강대한 힘은 올바른 곳에 쓰면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익히 아시겠지만 난장강 일대는 우리 모두 오랫동안 골치를 앓았던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금광선과 섭명결, 두 사람 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이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는 이상, 강공자를 사도로 몰아가는 현 상황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고 고착화될 것이었다. 남희신은 한 소년의 형이자 어엿한 종주로서 이 중 유일하게 강공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찌 해야만…….

“숙부. 외람되오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 어딘가에서 들려온 낭랑한 청음.

금광선이 ‘음’ 하고 한 마디로 참견을 허락하자, 기둥 뒤에서 다과상을 든 금가 여식이 조심스럽게 걸어나온다. 남희신은 이 소녀의 이름을 알았다. 전대 금종주의 장녀, 금자봉이었다. 늘 금광선의 그늘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좀처럼 쉽게 벗어나지 않는 소녀.

“소녀, 사실은 남은 다과를 마저 드리러 왔사옵건대 보아하니 장의 분위기가 매우 가라앉아 영 드실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하여 제가 이 분위기를 조금 띄워 보고자 하는데.”

다과상을 내려놓은 금자봉이 다음으로 꺼내든 건 검 한 자루. 무척 얇은, 흡사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듯한 연검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귀빈 여러분께 검무 한 수 선보이고 싶습니다.” 

금광선은 또다시 ‘음’ 하고 허락한다. 전대 금종주가 늘그막에 얻은 자식이라 그렇게나 아낀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를, 금광선은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하인처럼 하대한다. 가장 놀라운 건 금자봉이 이 태도에 그 어떤 수치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보기보다는 단단한 사람이구나, 남희신은 그리 생각했다. 

이윽고 시작된 검무는 아주 잠깐이었으나 금자봉의 호언대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소녀는 더러운 풍문 따위 알지 못하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춤추었다. 뾰족한 검 끝에 긴 천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휘감았으나 베는 일은 결코 없었다. 장내에 연주되는 음악은 무척이나 단조로웠지만 바람같은 소녀는 그에 지지 않았다. 과연, 전대 금종주가 그렇게나 사랑하던 딸이었다. 

한풀 누그러진 분위기와 달리 금자봉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 본래 자신은 이런 일에는 결코 나서지 않는다, 결코. 

그런데 상황이…… 강공자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니까.

본능적으로,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낯선 듯 익숙한 그 얼굴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이상하게도, 정말 그럴 리 없는데 마치 어디에선가 만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렇다 해도 강씨 차남은 폐관수련을 해왔었으니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 그보다 더 오래전 같은. 머릿속부터 마음속까지 모든 게 마구 어지럽혀진 금가 여식은 누군가 저를 눈여겨보는 것도 몰랐다. 

금린대 회동은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 


꿈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평소보다 혼탁한 꿈. 이토록 불길하고 거무죽죽한 꿈은 태어나 처음이다. 대왕이 사라진 이후로 꿈을 한 번 꾼 적 없는 금자봉은 얼떨떨하게 몽중의 길을 걸어간다. 까딱하면 저 아래로 영원히, 영원히 추락할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리키는 길은 하나, 계속해서 쭉 걸어가면 아마 나갈 수 있으리라. 금자봉은 그리 믿고 전진한다. 

마침내 다다른 위태로운 길 끝에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용이 마치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구렁이도 이무기도 아닌 과연 용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건 또다시 저를 불현듯 덮친 그놈의 본능 때문이었다. 쓰러진 용을 향해 뛰어가다가 철퍼덕 아프게 넘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자봉은 나아갔다. 기껏해야 꿈이거늘, 고작 그깟 꿈이거늘, 이상하게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없는 자신의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대왕! 대왕, 대왕이시죠?
​​​​​​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어 엉망진창이 된 금자봉은 저도 모르게 쓰러진 용의 몸을 아주 부서져라 꽉 껴안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피가 흥건해요? 다, 당신은 그저 제가 꾸며낸 환영이잖아요. 그럼, 그러면 멀쩡한 꼴로 나타나야지 이게 뭐예요!

그 짧은 사이 엉엉 운 탓에 목소리가 듣기에도 부담스럽게 갈라졌다. 검은 용은 할 수 없이 느릿하게 눈을 뜬다. 

너, 그 입 좀 닫아라. 머리가 징징 울린다. 

피가 배어 붉은 건지, 원래 붉은 눈인 건지 대왕의 눈은 몹시 빨갛다. 금자봉이 처음 보는 대왕의 맨 얼굴이다. 태산만한 몸집으로 들짐승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그 괴리감에 금자봉은 파르르 떨며 더더욱 꽉 끌어안는다. 그가 조용히 하라 했으니 고분고분하게 입은 꼭 다문 채. 하지만 가느다란 두 팔은 대왕을 결코 놓지 않는다. 뽀얗고 하얀 얼굴을 외려 깊이 묻기까지 한다. 

한편 대왕은 고개를 빼어 거무죽죽한 꿈의 공간을 둘러보았다. 

금자봉이 자신의 꿈이라 생각한 이 공간은 사실 대왕의 꿈이었다. 까마득하고 무수한 세월 어떤 요괴도 침범치 못한 요왕 망월의 심중결계,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던 불굴의 철옹성. 무엇 하나 볼 것 없고 불쾌하기만 한 이 공간에 그녀가 성큼 들어왔다. 천 년 가까이 모아온 힘의 절반을 뚝 써버렸기 때문일까.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또 새로운 상처가 생겨 그대로 켜켜이 쌓이고 쌓이다 독이 되었다.

해독이야 뭐, 어렵지 않았으나. 망월에게는 해독보다 중요한 게 있었으므로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네게 심장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어서.


망월이 무거운 머리를 겨우 움직여 만만치 않게 갈라진 목소리로 금자봉에게 말을 건다. 

그만 울거라. 죽지도 않고 살아 있는데 어찌 이리 엉엉 울어. 추하다고 말해야만 그칠 테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니, 아니 금자봉은 계속 끅끅하고 운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을 것 같자 망월은 그녀에게 가장 익을 모습으로 돌아온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용 가면을 쓴 남자로, 이 불길하고 어두컴컴한 심중결계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검은 용의 비늘같은 칠흑색 장포를 입은 남자는 소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당연하게도 맨손으로는 잡지 않았다. 

되었다, 가자. 이곳은 네가 오래 있을 장소가 못 된다.

그래봤자 제 꿈이잖아요. 오래 못 있을 게 뭐라고요.

……
네 편한 대로 생각하거라. 어쨌든 나는 네게 말했다.

꿈의 끝으로 안내하는 듯 어딘가로 향하는데, 금자봉은 새삼스레 그의 등을 처음 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정말로 처음이었다. 장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랏빛에 가까운 짙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그게 어쩐지 바다 같아서. 한 번 발을 담그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오지 못할 바다 같아서. 금씨 소녀는 저도 모르게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등 한가운데를 톡 건드린다. 꾹, 하고 지그시 눌린다.

검지가 등 한가운데 박힌 이유는 망월이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느지막이 알아차린 금자봉은 황급하게 손을 뗀다.

망월은 곧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붙잡은 손은 실수로라도 놓지 않는다. 사륵거리는 옷감 너머로 손의 온도가 꼭 맞잡은 듯이 조금 느껴진다. 대왕의 손은 몹시 차갑다. 금씨 소녀는 더 이상 그가 환영이라는 헛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오랜 시간 대왕은 소녀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이상하게도 바라보고만 있으면 안심이 되어서. 늘 그렇게 지켜주었던 것 같아서. 

그러니까 대왕은…… 수신인가요? 용이라면 역시 강에 계시겠죠. 그렇다면 어느 강에 계신가요?

대왕에게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 반응은 틀렸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싶더니 대왕의 너른 어깨 너머로 태양이 떨어진 것 같은 눈부신 빛이 보인다. 단 한 번 물었을 뿐인데 그새 이 긴 꿈의 끝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대왕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붙잡은 손을 서서히, 조금씩 놓아주기 시작한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이만 앞으로 나아가거라. 이 불쾌한 꿈은 그간 네가 꾸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잘못하면 깊이 모를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아가서는 잊어버려라. 어차피 꿈이지 않느냐. 

‘어차피 꿈이지 않느냐.’ 이번 만남은 단순 우연이라는 뜻일까. 그 수많은 상처들의 일도 묻어버리고,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도 묻어버리고, 그러고 보면 대왕은 항상 그랬다. 묵묵히 들어주기만 할 뿐. 많은 것을 묻고 계속해서 묻어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을까. 곱게 키운 난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언제까지고 마냥 받기만 한다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멀어지고 있던 손은 순식간에 맞잡은 형태가 되어 마치 옥으로 만든 나뭇가지처럼 단단히 얽힌다.

저더러 전부 잊으라고요. 제가 왜 잊어야 하나요? 잊으라는 말, 여태껏 당신을 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에요.

일그러진 용 가면이 주춤한다. 

설마 했는데 정말 제 꿈이 아니었군요. 이건 당신의 꿈이었어요. 당신이 크게 다쳐 반대로 제가 이 꿈까지 오게 된 것이었어요. 

너 대체 무슨, 헛소리 마라! 

화내는 것도 처음 보고요. 말해주세요, 대왕, 당신은 누구인가요? 


거대한 용을 좁은 궁지로 몰아붙이는 낭랑한 청음. 망월은 작약의 넝쿨에 촘촘히 얽힌 것처럼 꼼짝 못 한다. 

저, 오늘 많은 걸 물었는데 하나 정도는 대답해주실 수 있잖아요. 아니면 혹시 제가 당신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동시에 꿈의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당황한 망월은 진실을 맞닥뜨리는 대신 도망치기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 금씨 소녀는 대왕의 손을 놓기는커녕 함께 떨어지자는 듯 기꺼이 제 쪽으로 팽팽히 끌어당긴다. 이 금자봉이란 열일곱 소녀는 유일무이하게 대왕의 앞에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당차게 굴었다. 소녀와 용이 딛고 서 있던 땅은 어느새 모래알처럼 흩어져 죄 사라지고 없다. 그들은 빛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 말 그대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검고 깊은 바다, 나락으로 함께 떨어진다. 

이……! 변함없이 멍청하기는!

망월은 다급히 용이 되어 금자봉을 품에 안고 거꾸로 치는 낙뢰와 같이 저 위로 날아오른다. 금자봉은 이 순간에 확신했다. 그가 정녕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환영 또한 아니라는 걸. 금자봉은 물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관계는 대체 그래서 무엇이냐고. 나를 이리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이유가 기실 무엇이냐고. 허나 안타깝게도 이 꿈의 주인은 대왕, 소녀의 의식을 멋대로 열고 닫는 것도 가능했으니. 허니의 눈은 곤히 잠든 듯 굳게 닫힌다.

피투성이 검은 용은 온몸으로 회오리를 일으키며 빛 속으로 격렬하게 뛰어든다. 곧 두 존재는 꿈에서 깨어난다. 

“대왕!”

그러나 허공에 외친 이름은 대답 없이 외로이 떠돌기만 할 뿐.

 
***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살육자는 대왕이었습니다. 십칠 년 전에 놓쳐버린 우리들의 왕, 망월, 그분이었지요.”

“확실하느냐?”

“제가 어찌 만겁 장군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만겁 장군, 그 이름은 요괴들의 사이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한때 요왕 망월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이었던 요괴.

“십칠 년…… 대왕께서 종적을 감추신 뒤,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 어떤 자도 대왕을 대신할 수 없었지. 서쪽 늪지의 주인까지도 사라진 덕분에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그는 영민한 까마귀였다. 

“대왕이 미치셨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 그 나무 요괴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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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에 깔끔하게 죽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 있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