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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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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강징은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하는 부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부사는 잠시 서서 기다리다가 몸을 숙이고 물러나왔다.
밖을 보면 해가 조금 기울어진 상태였다. 지금 출발하면 모 가문에서 준비한 야렵회에 꼭 맞추어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강징은 벌써부터 피로를 느꼈다.
요즘은 뭘 하고 있어도 온통 남희신,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남몰래 그를 연모하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죄다 그의 탓이다.
금린대의 청담회 이후로 강징은 몇 차례 남희신을 만나는 동안 그야말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칼같이 예의는 지키지만 그 너머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했고, 꼭 필요한 시선만 주었으며 쓸데없이 걸어오는 말에는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희신은 강징이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못 건드리면 곧장 검이라도 날아올 듯한 분위기에도 무감각한 듯 부드럽고 살갑게 굴었다.
덕분에 저만 물벼락을 맞는 돌처럼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그와 이런 괴상한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고, 급기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토록 상처를 주는 상대임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강징은 밭고랑처럼 패일 것 같은 미간을 짚고 갈등했다.
불참을 할까도 싶었지만 그건 또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구는 남희신이 어떻게 보면 싸움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도망을 치기는 싫었다.
강징이 사납게 소매를 휘두르며 손바닥을 벌리자, 보랏빛으로 번쩍이는 삼독이 방울 소리를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그대로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야렵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산자락에 흩어진 채 시작되었으므로 강징은 요행히 남희신과 마주치는 일 없이 산중으로 스며들었다.
밤사냥 같은 건 막 금단을 맺은 어린 수사들이나 신나 할까, 요괴잡이도 하나의 업무일 뿐 신물이 나는 강징과 같은 연장자들은 아는 사람을 찾아 밤 숲을 거닐며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의깊게 산세를 파악하고 괴들의 종류나 수준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데리고 온 애송이 문하생들에게 버거운 적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경공술을 펼쳐 이곳 저곳을 누비던 강징은 몇 체의 작은 요괴를 해치운 삼독을 싹 닦아서 검집으로 되돌렸다. 다행이랄지 시시하달지, 이 곳에서 마련한 사냥감들은 급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굳이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아랫사람들끼리 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강징은 한숨을 쉬며 멈추어 섰다.
할 일도 없어져버리자 그야말로 손이 텅 비어 귀신처럼 우두커니 달빛만 맞고 서 있는 형국이었다.
한가로운 야렵회는 달밤의 야유회나 마찬가지지지만, 강징은 이런 자리가 제일 불편했다. 쓸데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술병을 챙겨 와서 정취를 즐길 한량같은 구석도 없었으며, 피리도 불 줄 모르고 금도 탈 줄 모른다.
그래도 아무나 붙잡고 실없는 얘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강징은 불쑥 길에서 나타난 남희신을 보고 큰 후회를 했다.
“좋은 밤입니다, 강종주.”
남희신이 인삿말을 건네는 동안 강징은 말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으시군요.”
역시나 동요 없이 제 할 말을 이어가는 남희신에, 강징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치려 했다.
남희신은 지치지도 않고 말을 걸어왔고, 강징이 대꾸 없이 무시하고 가버리면 가만히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길이 좁아서 거의 스치듯이 곁을 지나가는 강징을 바라보던 남희신이 대뜸 손을 뻗어 잡아세웠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강징은 마치 손목이 불에 데인 듯하여 화들짝 뿌리쳤다.
반은 놀라고, 반은 비난하는 듯 노려보는 강징의 시선을, 남희신은 따스한 미소로 맞받으며 입으로는 미친게 아닐까 싶은 헛소리를 이어갔다.
“마침 이까지 올라왔으니 잘 됐습니다. 저 고개를 넘어가면 작은 성이 나오는데, 그 곳에서 축제를 하는 중이랍니다. 한 번 가 볼까요?”
강징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끈질기게 말을 걸기는 해도 억지로 붙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넓은 사방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깊은 산이 의식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희신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근래에는 보여 주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하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와 말을 섞을수록 불리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모처럼 권유해주셨지만 저는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재미 때문에 당신을 골랐을까요?”
남희신이 짐짓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강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험상궂게 쏘아보았다.
“택무군, 여기까지입니다. 더이상 저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경고드립니다!”
그러자 남희신이 눈썹을 까닥 하며 말했다.
“알 수가 없군요.”
“뭘 말입니까?”
“삼독성수는 욕심 많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은 저를 가지려는 노력을 손톱만큼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저에 대한 감정이 별로 대단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희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른한 표정이었다.
반면 강징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강징은 이까지 오며 상당히 독이 오른 상태였다.
남희신이 저를 놀린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상냥한 태도도 더이상은 액면 그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늘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좁은 길은 괴괴하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남희신의 말소리만 조근조근했다. 그 말 끝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찢자, 얼마 들리지 않던 풀벌레 소리마저 얼어붙으며 완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한 강징은 그대로 손을 휘둘러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철썩 하고 흉폭하게 갈라 퍼지는 소리에 대경실색한 쪽도 강징이었다.
단순히 주먹질을 하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그런 얕은 공격은 수선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함부로 검을 뽑아 휘두르는 행위조차 위협이나 경고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런 허술한 손찌검에 당한다면, 그것은 방심을 했거나, 아랫사람이 예의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맞아줄 때뿐이었다.
강징도 과거에 걸핏하면 위무선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대었지만, 맞춘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의 경우도 강징은 택무군이 피하지 못할 리 없다는 무의식적인 계산에 마음 놓고 손이 올라간 거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맨손으로 후려친 것뿐이라 해도, 영력이 실린 손이었기에 바로 입술 끝에 멍이 들고 핏기가 올라왔다.
강징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상처가 번져가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택무군의 따귀를 때렸다! 그 사실에 경악을 한 강징은 태산 같은 분노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왜... 왜...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징이 더듬거리며 외치자, 남희신은 부어터진 입을 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상한 분이시네요. 좋아한다더니 멀리하고, 때리면서 피하라고 하질 않나.”
“......”
“시원하게 맞았으니 고소하게 여기셔야 할 게 아닙니까?”
남희신은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게 살살 긁는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강징은 그로인해 다시 성질이 치밀어오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남희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습니다.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 강종주.”
그가 그대로 돌아서서 길을 내려가려 하자, 이번에는 강징이 펄쩍 뛰며 그를 잡아세웠다.
“잠깐만!”
도대체 그 꼴을 하고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내가 택무군의 뺨을 때렸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잠깐...”
남희신이 멈추어섰지만 강징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자 말문이 콱 막히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딴 상황을 만들어놓고, 꿀같이 상냥한 얼굴로 돌아보는 남희신은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았다.
강징이 버럭 외쳤다.
“가겠습니다! 간다구요!”
“어디를요?”
“그... 아랫마을! 장날인지 축제인지 뭔지!!!”
강징이 분통이 터져 어린애처럼 발을 구르며 외치자, 남희신이 풋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금 분노를 회복한 강징이 잡아먹을 듯이 남희신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술처럼 발목을 잡던 아정한 택무군의 인상이 기어코 싹 사라져버렸고, 유들유들한 얼굴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은데. 저는 말주변도 없는데다 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열악한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사람은 마치 장난처럼......!!!
강징의 성격은 한 발 물러나거나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금세 폭력으로 번지는 경향이 심했다.
남희신에게로 향하던 화살이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자, 그것은 되돌아와 본인에게 날아들었다.
어느 쪽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일방적으로 그를 때린 것보단 서로 싸웠다는 소문이 나을 테지! 반은 분풀이같은 발상으로 손을 홱 치켜드는 강징을 보고, 남희신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강징도 수진계 안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지만, 남희신의 수련 수준은 신의 경지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빛처럼 빠르게 땅을 차며 갈고리처럼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버리려던 강징의 손목을 잡아챈 그도 하마터면 한끗 차이로 실패할 뻔했다.
“...진정하십시오. 그럼 가도록 하지요.”
강징은 폭력까지 휘두를 뻔하며 치솟은 흥분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도 영력을 거두지 않은 손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손들이 서로 자신의 쪽으로 거두려고 당기며 불꽃이 튀었다.
이 편에서 당기면 저 편에서 누르고, 소매로 숨겨진 양 팔뚝에 무시무시한 힘이 흘렀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핏발이 불끈 서는 남희신의 손등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낮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손에는 맹렬한 힘을 가하며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강징은 잡힌 손목이 점점 쇠집게에 집힌 것처럼 아파왔다.
남희신은 끝내 강징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강징은 인상을 구기고 아픈 손목을 주무르면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희신이 발을 떼자, 머뭇거리다가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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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징은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하는 부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부사는 잠시 서서 기다리다가 몸을 숙이고 물러나왔다.
밖을 보면 해가 조금 기울어진 상태였다. 지금 출발하면 모 가문에서 준비한 야렵회에 꼭 맞추어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강징은 벌써부터 피로를 느꼈다.
요즘은 뭘 하고 있어도 온통 남희신,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남몰래 그를 연모하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죄다 그의 탓이다.
금린대의 청담회 이후로 강징은 몇 차례 남희신을 만나는 동안 그야말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칼같이 예의는 지키지만 그 너머로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꼭 필요한 말만 했고, 꼭 필요한 시선만 주었으며 쓸데없이 걸어오는 말에는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희신은 강징이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못 건드리면 곧장 검이라도 날아올 듯한 분위기에도 무감각한 듯 부드럽고 살갑게 굴었다.
덕분에 저만 물벼락을 맞는 돌처럼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그와 이런 괴상한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고, 급기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토록 상처를 주는 상대임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강징은 밭고랑처럼 패일 것 같은 미간을 짚고 갈등했다.
불참을 할까도 싶었지만 그건 또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구는 남희신이 어떻게 보면 싸움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도망을 치기는 싫었다.
강징이 사납게 소매를 휘두르며 손바닥을 벌리자, 보랏빛으로 번쩍이는 삼독이 방울 소리를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그대로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야렵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산자락에 흩어진 채 시작되었으므로 강징은 요행히 남희신과 마주치는 일 없이 산중으로 스며들었다.
밤사냥 같은 건 막 금단을 맺은 어린 수사들이나 신나 할까, 요괴잡이도 하나의 업무일 뿐 신물이 나는 강징과 같은 연장자들은 아는 사람을 찾아 밤 숲을 거닐며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의깊게 산세를 파악하고 괴들의 종류나 수준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데리고 온 애송이 문하생들에게 버거운 적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경공술을 펼쳐 이곳 저곳을 누비던 강징은 몇 체의 작은 요괴를 해치운 삼독을 싹 닦아서 검집으로 되돌렸다. 다행이랄지 시시하달지, 이 곳에서 마련한 사냥감들은 급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굳이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아랫사람들끼리 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강징은 한숨을 쉬며 멈추어 섰다.
할 일도 없어져버리자 그야말로 손이 텅 비어 귀신처럼 우두커니 달빛만 맞고 서 있는 형국이었다.
한가로운 야렵회는 달밤의 야유회나 마찬가지지지만, 강징은 이런 자리가 제일 불편했다. 쓸데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술병을 챙겨 와서 정취를 즐길 한량같은 구석도 없었으며, 피리도 불 줄 모르고 금도 탈 줄 모른다.
그래도 아무나 붙잡고 실없는 얘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강징은 불쑥 길에서 나타난 남희신을 보고 큰 후회를 했다.
“좋은 밤입니다, 강종주.”
남희신이 인삿말을 건네는 동안 강징은 말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별로 즐거워보이지 않으시군요.”
역시나 동요 없이 제 할 말을 이어가는 남희신에, 강징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치려 했다.
남희신은 지치지도 않고 말을 걸어왔고, 강징이 대꾸 없이 무시하고 가버리면 가만히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길이 좁아서 거의 스치듯이 곁을 지나가는 강징을 바라보던 남희신이 대뜸 손을 뻗어 잡아세웠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강징은 마치 손목이 불에 데인 듯하여 화들짝 뿌리쳤다.
반은 놀라고, 반은 비난하는 듯 노려보는 강징의 시선을, 남희신은 따스한 미소로 맞받으며 입으로는 미친게 아닐까 싶은 헛소리를 이어갔다.
“마침 이까지 올라왔으니 잘 됐습니다. 저 고개를 넘어가면 작은 성이 나오는데, 그 곳에서 축제를 하는 중이랍니다. 한 번 가 볼까요?”
강징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는 끈질기게 말을 걸기는 해도 억지로 붙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넓은 사방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깊은 산이 의식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남희신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근래에는 보여 주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하고 싶은 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와 말을 섞을수록 불리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모처럼 권유해주셨지만 저는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재미 때문에 당신을 골랐을까요?”
남희신이 짐짓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강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험상궂게 쏘아보았다.
“택무군, 여기까지입니다. 더이상 저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경고드립니다!”
그러자 남희신이 눈썹을 까닥 하며 말했다.
“알 수가 없군요.”
“뭘 말입니까?”
“삼독성수는 욕심 많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은 저를 가지려는 노력을 손톱만큼도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저에 대한 감정이 별로 대단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희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른한 표정이었다.
반면 강징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강징은 이까지 오며 상당히 독이 오른 상태였다.
남희신이 저를 놀린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상냥한 태도도 더이상은 액면 그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늘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좁은 길은 괴괴하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남희신의 말소리만 조근조근했다. 그 말 끝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찢자, 얼마 들리지 않던 풀벌레 소리마저 얼어붙으며 완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한 강징은 그대로 손을 휘둘러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철썩 하고 흉폭하게 갈라 퍼지는 소리에 대경실색한 쪽도 강징이었다.
단순히 주먹질을 하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그런 얕은 공격은 수선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함부로 검을 뽑아 휘두르는 행위조차 위협이나 경고의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런 허술한 손찌검에 당한다면, 그것은 방심을 했거나, 아랫사람이 예의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맞아줄 때뿐이었다.
강징도 과거에 걸핏하면 위무선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대었지만, 맞춘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의 경우도 강징은 택무군이 피하지 못할 리 없다는 무의식적인 계산에 마음 놓고 손이 올라간 거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맨손으로 후려친 것뿐이라 해도, 영력이 실린 손이었기에 바로 입술 끝에 멍이 들고 핏기가 올라왔다.
강징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상처가 번져가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택무군의 따귀를 때렸다! 그 사실에 경악을 한 강징은 태산 같은 분노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왜... 왜...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징이 더듬거리며 외치자, 남희신은 부어터진 입을 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상한 분이시네요. 좋아한다더니 멀리하고, 때리면서 피하라고 하질 않나.”
“......”
“시원하게 맞았으니 고소하게 여기셔야 할 게 아닙니까?”
남희신은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게 살살 긁는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강징은 그로인해 다시 성질이 치밀어오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남희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습니다.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 강종주.”
그가 그대로 돌아서서 길을 내려가려 하자, 이번에는 강징이 펄쩍 뛰며 그를 잡아세웠다.
“잠깐만!”
도대체 그 꼴을 하고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내가 택무군의 뺨을 때렸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잠깐...”
남희신이 멈추어섰지만 강징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자 말문이 콱 막히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딴 상황을 만들어놓고, 꿀같이 상냥한 얼굴로 돌아보는 남희신은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았다.
강징이 버럭 외쳤다.
“가겠습니다! 간다구요!”
“어디를요?”
“그... 아랫마을! 장날인지 축제인지 뭔지!!!”
강징이 분통이 터져 어린애처럼 발을 구르며 외치자, 남희신이 풋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금 분노를 회복한 강징이 잡아먹을 듯이 남희신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술처럼 발목을 잡던 아정한 택무군의 인상이 기어코 싹 사라져버렸고, 유들유들한 얼굴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은데. 저는 말주변도 없는데다 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열악한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사람은 마치 장난처럼......!!!
강징의 성격은 한 발 물러나거나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금세 폭력으로 번지는 경향이 심했다.
남희신에게로 향하던 화살이 그에게 닿지 못할 것 같자, 그것은 되돌아와 본인에게 날아들었다.
어느 쪽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일방적으로 그를 때린 것보단 서로 싸웠다는 소문이 나을 테지! 반은 분풀이같은 발상으로 손을 홱 치켜드는 강징을 보고, 남희신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강징도 수진계 안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지만, 남희신의 수련 수준은 신의 경지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빛처럼 빠르게 땅을 차며 갈고리처럼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버리려던 강징의 손목을 잡아챈 그도 하마터면 한끗 차이로 실패할 뻔했다.
“...진정하십시오. 그럼 가도록 하지요.”
강징은 폭력까지 휘두를 뻔하며 치솟은 흥분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도 영력을 거두지 않은 손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손들이 서로 자신의 쪽으로 거두려고 당기며 불꽃이 튀었다.
이 편에서 당기면 저 편에서 누르고, 소매로 숨겨진 양 팔뚝에 무시무시한 힘이 흘렀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핏발이 불끈 서는 남희신의 손등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낮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손에는 맹렬한 힘을 가하며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강징은 잡힌 손목이 점점 쇠집게에 집힌 것처럼 아파왔다.
남희신은 끝내 강징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강징은 인상을 구기고 아픈 손목을 주무르면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희신이 발을 떼자, 머뭇거리다가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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