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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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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고 아름다운 계절이 왔지만 연화오에는 어두운 긴장감만 돌았다.
양친이 비명횡사한 이맘때가 되면 강징은 감정 기복이 더 심해지고 사나워졌다.
그가 분통이 터져 탁자라도 부숴버린 날에는 온 가문 사람들이 벌벌 떨며 발소리라도 들릴새라 살금살금 나다녔다.
남희신은 한결같이 집무실의 한구석에 앉아서, 오락가락하는 강징의 감정 변화나 패악을 묵묵히 보고 들었다.
한 번씩 집무실을 뒤엎은 후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닫는 강징은 이번에야말로 저 어린 것이 질렸겠거니 했다. 그리고 나서 일부러 확인이라도 하듯 남희신을 찾아갈 때도 있었지만, 강징을 맞이하는 소년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강징의 분노는 운몽 강씨를 제외한 온세상으로 뻗쳐나가는 것이었으므로, 고소 남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얼굴을 보며 악한 충동이 치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의 집안에 떠밀려와 어울리지도 않는 자색 의복을 걸쳐야 했던 소년은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강징은 불쑥불쑥 기분이 나빠져 잔인하게 대할까 싶다가도, 제가 그의 부인이라고 말하며 쳐다보는 부드러운 눈동자를 대하면 마지못한 듯 누그러들었다.
종이로 만든 꽃이 가짜라 할지라도, 꽃잎의 모양은 꽃잎이며, 붉은 색은 붉은 색이었다.
향기가 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모양에는 혹할 수밖에.
어느 날 강징은 대호수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근처에 개 한마리 얼씬거리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한 병씩 술을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양친은 냉담했지만, 그렇다고 강징을 아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강징에게는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누님이 있었다.
하지만 강징에게 상냥했던 누님은 어릴 적에 난릉 금씨로 시집을 가버렸기 때문에 그가 가족의 정을 느껴본 시기는 몇 년도 되지 않았다.
사일지정이 일어났을 때 매형 금자헌이 죽었고, 얼마 후 충격을 받은 누님 강염리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다음 강징에게 남은 핏줄이라고는 그들이 낳은 어린 금릉 하나였다.
과거를 떠올려봐야 좋은 일이라곤 없었지만, 우울해진 인간은 우울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긴커녕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강징은 해가 저물어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머릿속에서 짧은 평화의 시간이 스쳐지나가며, 엄한 부친과 냉정한 모친이 잇달아 떠올랐다.
강징은 누님 한 분 외에는 정말 누구에게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부친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기산 온씨를 무너뜨리고 운몽 강씨를 지키지 못하면 구천에도 오지 말라고 피묻은 손으로 강징의 멱살을 붙잡고 다그쳤다. 그 곁에서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모친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기산 온씨가 가장 먼저 기습하여 박살을 낸 운몽 강씨는 입지가 아주 약해진 상태였다.
전대 가주가 사망한 후, 강징은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가문의 고수들은 대부분 죽어버렸고, 강징에게 남은 것은 운몽 강씨라는 이름의 허울과 무거운 짐 뿐이었다.
초토화된 가문의 음인 종주.
그것은 단순히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벗겨놓은 살코기 같은 먹잇감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가 요사스러운 술법에 손을 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강징은 운이 좋았고, 기이하게도 사도의 요법이 잘 맞았다.
기산 온씨를 치는 중에는 강징도 선문 백가의 편에 서서 싸웠다.
불야천에서 대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몇 년의 고생은 강징의 사람됨을 바꾸어놓고 후안무치하게 교활해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합한 사람들은 대전투에서 운몽 강씨가 최전선에 서서 위험을 무릅쓰게 된 것이 자기들의 영악한 수작 때문인 줄 알았다.
이 때 강징은 어렵게 양성한 제 가문 사람들의 희생도 불사하며 안으로 안으로 거세게 쳐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온약한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숨겨 왔던 사악한 술법을 부려 온약한의 힘을 빼앗는데 성공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모은 음철까지 강탈했다.
자신이 태도를 바꾸어 음철로 빚은 검은 번개가 대기를 물들이자 대경실색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술에 젖은 입술이 음산하게 웃었다.
강징은 스스로가 태양이라고 자부하던 온약한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고, 세상을 다 집어삼켰다.
이제는 구천으로 가서 부친에게 욕을 퍼붓는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취기가 짙어지다가 끝내 지끈하는 두통이 일어나자 강징은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지겹다.
정말 지겨웠다.
기산 온씨를 몰아낸 사람들이 이제는 도둑게처럼 죄다 내 발목을 잡고 기어오르려는데.
일각도 마음 편히 쉴 틈이 없으니, 세상을 다 가진들 무엇에 쓸 것이냐.
강징이 고개를 들자 강렬하게 저물어가는 해가 만물을 비추었다. 금빛으로 물들어버린 수면과 연꽃들이 잔잔하게 춤을 추었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사람은... 사람들은.
그 때, 강징의 머릿속에 정말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떠올랐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런 세상에서 한 점 얼룩도 묻지 않은 아름다움이 존재할 리 없었다.
강징은 일어나 비틀거리며 정자를 내려왔다.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인지, 그로부터 남희신의 방으로 갈 때까지는 생물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술에 취해 감정이 포악해져 있던 강징에게는 다음 순간 찾아온 포근함이 너무도 상반되게 느껴졌다.
눈을 뜨자, 남희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인, 근심이 있으신가요?”
강징은 눈만 깜박였다.
남희신이 무릎 위에 강징의 머리를 올려두고 천천히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강징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지만 잔잔한 목소리는 두통마저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 머리를 스치는 손길이 달콤했다.
하얗고, 따뜻한 손.
......아니 근데, 이녀석 조그마한 주제에...
“...손이 크구나.”
그 말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강징은 그의 표정이 궁금하여 눈을 떴다.
다시금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 얼굴이 다정하게 웃어주며 위로했다.
“부인, 겁내지 마십시오. 부인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강징은 그 말에 가슴을 뚫리는 듯 찡해지는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누가. 내가?
삼독성수가 겁을 낸다고?
내가 무얼 겁낸 적이 있으랴.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일어나자, 강징은 정말로 겁을 먹은 듯이 남희신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현재 강징이 누운 곳은 침상이 아니었다.
남희신이 저를 안아서 옮겨주려는 것을 알고 강징은 당혹했다.
-아니, 너보다 크다니까. 나 꽤 무거운데, 할 수 있겠어?
그러나 남희신의 손이 무릎 아래를 받치자마자 날아오르는 것처럼 훅 몸이 띄워지며, 강징은 탄성을 지를 뻔했다.
놀란 그가 싸움을 거는 것처럼 멱살을 움켜쥐고 눈을 부릅떴지만 남희신은 예사롭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누님이 사랑해 줬다 해도, 세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남동생을 이렇게 안아준 적은 없었다. 강징은 불그락푸르락, 혹시 떨어질까 긴장되고 조마조마하여 조개처럼 남희신의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안아서 침상으로 데려다주는 몇 발자국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남희신이 들어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뿐하게 내려놓자 강징은 겨우 한숨을 쉬었다.
...햐. 우리 꼬맹이, 힘도 세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우리 꼬맹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알쏭달쏭해져 이마를 찌푸렸다.
강징의 표정이 천변만화하는 걸 못 보았는지 남희신은 강징의 머리 밑에 베개를 괴어주고 얇은 이불을 다독다독 씌워 주었다.
그런 다음, 곁에 누워서 술취한 사람보다 먼저 잠들어버리는 소년에게 강징은 또 헛웃음이 터졌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강징은 뺨을 괴고 잠든 남희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좀체 웃음이 가시지 않아 낮은 소리로 또 한 번 웃고. 그리고 어색하게 잦아들며 생각이 깊어졌다.
남희신의 행동이 과연 연기인 것인지, 근래 강징은 의문이 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알고 있을지.
강징은 고소 남씨에게 직계 양인을 바치라고 했지, 고소 남씨의 후계자를 내놓으라고 한 건 아니었다.
안하무인으로 통보한 강징은 정확히 2주 후에 고소 남씨가 약조한 남망기를 보러 갔다.
그는 저에게 뿔이라도 난건지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쳐다보는 소년을 만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대로 옥으로 깎은 듯 곱긴 했지만, 가끔씩이라도 저렇게 서리같은 얼굴을 한 녀석을 집안에 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 때 장로들의 곁에, 그와 매우 닮았지만 성격이 좋아보이는 소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징은 곧장 손가락을 들어 찌르듯이 가리켰다.
“저 애로 주시오.”
“뭐요? 저, 저 아이는 고소 남씨의 차기 종주요!”
마치 시장통의 무를 고르는 듯한 말투에 분노와 경악에 찬 목소리가 항의했지만 강징은 냉소를 지었다.
“아직 종주가 된 것도 아니지 않소?”
“아니...!”
강징이 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돌아서버리자 그들은 감히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운몽 강씨가 아닌 사람들이 불야천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늦어, 온약한의 힘을 빨아들인 강징이 전신에서 사기를 뿜어내며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간 힘을 다 잃고 죽어지내며, 울분이 치밀어도 겉으로는 터뜨리지 못했던 심약한 청년의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그 후로 수선계는 강징의 앞에서 한결같이 허리를 굽히고 그가 뭐라하든 거스르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이득을 취하려 하면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못하고 양보했고, 혹여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싶으면 납작 엎드려 조공을 바쳤다.
이후로 연화오에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강징은 그러라고 종용한 적이 없었지만, 주는 것을 물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와 온약한의 차이는, 그가 아슬아슬한 선은 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옛날 온가가 작심하고 횡포를 부리기 직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강징의 눈치를 보거나 독불적인 일처리를 모른체했다.
특히 강징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대놓고 핍박했던 사람들은 밤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운몽 강씨를 일으켜세우려고 마음먹었을 때,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자 세상 전체가 적으로 돌아섰다. 강징은 갈수록 예민해지며 사나워져가는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미쳐서 온약한 놈처럼 비명횡사를 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징은 흰꽃송이 같은 남희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부드럽고 깨끗한 것은, 내 것이 아니리라.
그는 쓴웃음과 함께 귓가에 맴돌던 달콤한 말들을 덧없이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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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고 아름다운 계절이 왔지만 연화오에는 어두운 긴장감만 돌았다.
양친이 비명횡사한 이맘때가 되면 강징은 감정 기복이 더 심해지고 사나워졌다.
그가 분통이 터져 탁자라도 부숴버린 날에는 온 가문 사람들이 벌벌 떨며 발소리라도 들릴새라 살금살금 나다녔다.
남희신은 한결같이 집무실의 한구석에 앉아서, 오락가락하는 강징의 감정 변화나 패악을 묵묵히 보고 들었다.
한 번씩 집무실을 뒤엎은 후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닫는 강징은 이번에야말로 저 어린 것이 질렸겠거니 했다. 그리고 나서 일부러 확인이라도 하듯 남희신을 찾아갈 때도 있었지만, 강징을 맞이하는 소년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강징의 분노는 운몽 강씨를 제외한 온세상으로 뻗쳐나가는 것이었으므로, 고소 남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얼굴을 보며 악한 충동이 치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의 집안에 떠밀려와 어울리지도 않는 자색 의복을 걸쳐야 했던 소년은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강징은 불쑥불쑥 기분이 나빠져 잔인하게 대할까 싶다가도, 제가 그의 부인이라고 말하며 쳐다보는 부드러운 눈동자를 대하면 마지못한 듯 누그러들었다.
종이로 만든 꽃이 가짜라 할지라도, 꽃잎의 모양은 꽃잎이며, 붉은 색은 붉은 색이었다.
향기가 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모양에는 혹할 수밖에.
어느 날 강징은 대호수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근처에 개 한마리 얼씬거리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한 병씩 술을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양친은 냉담했지만, 그렇다고 강징을 아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강징에게는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누님이 있었다.
하지만 강징에게 상냥했던 누님은 어릴 적에 난릉 금씨로 시집을 가버렸기 때문에 그가 가족의 정을 느껴본 시기는 몇 년도 되지 않았다.
사일지정이 일어났을 때 매형 금자헌이 죽었고, 얼마 후 충격을 받은 누님 강염리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다음 강징에게 남은 핏줄이라고는 그들이 낳은 어린 금릉 하나였다.
과거를 떠올려봐야 좋은 일이라곤 없었지만, 우울해진 인간은 우울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긴커녕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강징은 해가 저물어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머릿속에서 짧은 평화의 시간이 스쳐지나가며, 엄한 부친과 냉정한 모친이 잇달아 떠올랐다.
강징은 누님 한 분 외에는 정말 누구에게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부친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기산 온씨를 무너뜨리고 운몽 강씨를 지키지 못하면 구천에도 오지 말라고 피묻은 손으로 강징의 멱살을 붙잡고 다그쳤다. 그 곁에서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모친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기산 온씨가 가장 먼저 기습하여 박살을 낸 운몽 강씨는 입지가 아주 약해진 상태였다.
전대 가주가 사망한 후, 강징은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이었다. 가문의 고수들은 대부분 죽어버렸고, 강징에게 남은 것은 운몽 강씨라는 이름의 허울과 무거운 짐 뿐이었다.
초토화된 가문의 음인 종주.
그것은 단순히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벗겨놓은 살코기 같은 먹잇감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가 요사스러운 술법에 손을 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강징은 운이 좋았고, 기이하게도 사도의 요법이 잘 맞았다.
기산 온씨를 치는 중에는 강징도 선문 백가의 편에 서서 싸웠다.
불야천에서 대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몇 년의 고생은 강징의 사람됨을 바꾸어놓고 후안무치하게 교활해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합한 사람들은 대전투에서 운몽 강씨가 최전선에 서서 위험을 무릅쓰게 된 것이 자기들의 영악한 수작 때문인 줄 알았다.
이 때 강징은 어렵게 양성한 제 가문 사람들의 희생도 불사하며 안으로 안으로 거세게 쳐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온약한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숨겨 왔던 사악한 술법을 부려 온약한의 힘을 빼앗는데 성공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모은 음철까지 강탈했다.
자신이 태도를 바꾸어 음철로 빚은 검은 번개가 대기를 물들이자 대경실색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술에 젖은 입술이 음산하게 웃었다.
강징은 스스로가 태양이라고 자부하던 온약한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고, 세상을 다 집어삼켰다.
이제는 구천으로 가서 부친에게 욕을 퍼붓는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취기가 짙어지다가 끝내 지끈하는 두통이 일어나자 강징은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지겹다.
정말 지겨웠다.
기산 온씨를 몰아낸 사람들이 이제는 도둑게처럼 죄다 내 발목을 잡고 기어오르려는데.
일각도 마음 편히 쉴 틈이 없으니, 세상을 다 가진들 무엇에 쓸 것이냐.
강징이 고개를 들자 강렬하게 저물어가는 해가 만물을 비추었다. 금빛으로 물들어버린 수면과 연꽃들이 잔잔하게 춤을 추었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사람은... 사람들은.
그 때, 강징의 머릿속에 정말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떠올랐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런 세상에서 한 점 얼룩도 묻지 않은 아름다움이 존재할 리 없었다.
강징은 일어나 비틀거리며 정자를 내려왔다.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인지, 그로부터 남희신의 방으로 갈 때까지는 생물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술에 취해 감정이 포악해져 있던 강징에게는 다음 순간 찾아온 포근함이 너무도 상반되게 느껴졌다.
눈을 뜨자, 남희신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인, 근심이 있으신가요?”
강징은 눈만 깜박였다.
남희신이 무릎 위에 강징의 머리를 올려두고 천천히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강징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지만 잔잔한 목소리는 두통마저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 머리를 스치는 손길이 달콤했다.
하얗고, 따뜻한 손.
......아니 근데, 이녀석 조그마한 주제에...
“...손이 크구나.”
그 말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강징은 그의 표정이 궁금하여 눈을 떴다.
다시금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 얼굴이 다정하게 웃어주며 위로했다.
“부인, 겁내지 마십시오. 부인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강징은 그 말에 가슴을 뚫리는 듯 찡해지는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누가. 내가?
삼독성수가 겁을 낸다고?
내가 무얼 겁낸 적이 있으랴.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일어나자, 강징은 정말로 겁을 먹은 듯이 남희신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현재 강징이 누운 곳은 침상이 아니었다.
남희신이 저를 안아서 옮겨주려는 것을 알고 강징은 당혹했다.
-아니, 너보다 크다니까. 나 꽤 무거운데, 할 수 있겠어?
그러나 남희신의 손이 무릎 아래를 받치자마자 날아오르는 것처럼 훅 몸이 띄워지며, 강징은 탄성을 지를 뻔했다.
놀란 그가 싸움을 거는 것처럼 멱살을 움켜쥐고 눈을 부릅떴지만 남희신은 예사롭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누님이 사랑해 줬다 해도, 세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남동생을 이렇게 안아준 적은 없었다. 강징은 불그락푸르락, 혹시 떨어질까 긴장되고 조마조마하여 조개처럼 남희신의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안아서 침상으로 데려다주는 몇 발자국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남희신이 들어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뿐하게 내려놓자 강징은 겨우 한숨을 쉬었다.
...햐. 우리 꼬맹이, 힘도 세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 ‘우리 꼬맹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알쏭달쏭해져 이마를 찌푸렸다.
강징의 표정이 천변만화하는 걸 못 보았는지 남희신은 강징의 머리 밑에 베개를 괴어주고 얇은 이불을 다독다독 씌워 주었다.
그런 다음, 곁에 누워서 술취한 사람보다 먼저 잠들어버리는 소년에게 강징은 또 헛웃음이 터졌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강징은 뺨을 괴고 잠든 남희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좀체 웃음이 가시지 않아 낮은 소리로 또 한 번 웃고. 그리고 어색하게 잦아들며 생각이 깊어졌다.
남희신의 행동이 과연 연기인 것인지, 근래 강징은 의문이 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알고 있을지.
강징은 고소 남씨에게 직계 양인을 바치라고 했지, 고소 남씨의 후계자를 내놓으라고 한 건 아니었다.
안하무인으로 통보한 강징은 정확히 2주 후에 고소 남씨가 약조한 남망기를 보러 갔다.
그는 저에게 뿔이라도 난건지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쳐다보는 소년을 만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대로 옥으로 깎은 듯 곱긴 했지만, 가끔씩이라도 저렇게 서리같은 얼굴을 한 녀석을 집안에 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 때 장로들의 곁에, 그와 매우 닮았지만 성격이 좋아보이는 소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징은 곧장 손가락을 들어 찌르듯이 가리켰다.
“저 애로 주시오.”
“뭐요? 저, 저 아이는 고소 남씨의 차기 종주요!”
마치 시장통의 무를 고르는 듯한 말투에 분노와 경악에 찬 목소리가 항의했지만 강징은 냉소를 지었다.
“아직 종주가 된 것도 아니지 않소?”
“아니...!”
강징이 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돌아서버리자 그들은 감히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운몽 강씨가 아닌 사람들이 불야천의 중심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늦어, 온약한의 힘을 빨아들인 강징이 전신에서 사기를 뿜어내며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간 힘을 다 잃고 죽어지내며, 울분이 치밀어도 겉으로는 터뜨리지 못했던 심약한 청년의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그 후로 수선계는 강징의 앞에서 한결같이 허리를 굽히고 그가 뭐라하든 거스르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이득을 취하려 하면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못하고 양보했고, 혹여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싶으면 납작 엎드려 조공을 바쳤다.
이후로 연화오에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강징은 그러라고 종용한 적이 없었지만, 주는 것을 물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와 온약한의 차이는, 그가 아슬아슬한 선은 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옛날 온가가 작심하고 횡포를 부리기 직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강징의 눈치를 보거나 독불적인 일처리를 모른체했다.
특히 강징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대놓고 핍박했던 사람들은 밤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운몽 강씨를 일으켜세우려고 마음먹었을 때,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자 세상 전체가 적으로 돌아섰다. 강징은 갈수록 예민해지며 사나워져가는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미쳐서 온약한 놈처럼 비명횡사를 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징은 흰꽃송이 같은 남희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부드럽고 깨끗한 것은, 내 것이 아니리라.
그는 쓴웃음과 함께 귓가에 맴돌던 달콤한 말들을 덧없이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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