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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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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월모일.
계절이 바뀌어 다시 만난 강종주는 예전과 같은 침착함을 되찾은 듯하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폐를 끼친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가벼운 다과회가 끝난 후, 왠지 그는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다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진하여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차 한잔을 마신 다음 다가온 강종주가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사람이 많을 때에는 나 역시도 평정심을 지킬 수 있다 착각했는데, 다가오는 자색 소맷자락만 보아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무언으로 그를 바라보며,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난채산의 햇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눈을 피하며 금세 말투가 딱딱해지는 그의 태도도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위무선에게...
강종주는 점점 말소리가 작아지더니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일어나 버렸다.
위공자는 아직도 운몽 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꾸러미를 어루만지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
모월모일. 시간의 흐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에는 공적인 용무만 끝나면 횡하니 떠나버리던 삼독성수였는데. 요즘은 실없는 소리로 말을 걸어도 우두커니 서서 다 들어주었다.
늘상 사람들과 만나면 화를 내는 모습만 보아 와서 그런 줄 알았건만, 가만히 있을 때에는 기운이 없어보인다는 사실이 외려 마음에 걸렸다.
...금일 명남에서 특이한 과일을 보내왔습니다. 별건 아니지만 대접해 드리고 싶군요.
대담하게 초대를 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의 시간이 천추와 같았다.
한적하고 높은 정자를 택하여 다과상을 차리게 하였다. 잠시 후 시원하게 펼쳐진 경치를 함께 내려다보면서도 눈에 초목이나 하늘 구름은 전연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건네주는 차로 입술만 축이던 강종주가 불쑥 말했다.
...택무군.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셨습니까?
갑자기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는 말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윽고 한숨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는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완전히 잊은 것 같더니, 내도록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것인가.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단속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기심을 누르지 못해 말해버린 것이지만, ...
...당신은.
다시 저 편으로 고개를 돌린 강종주가 더욱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뭘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이 때도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습관처럼 안면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귀뿌리에서부터 행복감이 물결처럼 밀려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조금 있으면 운몽에서 월산련 축제가 열리지요. 괜찮다면 그대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만.
그는 내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참고 듣는 것이 무척 힘든 느낌이었다. 안절부절, 무릎 위로 펼쳐진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잔뜩 긴장되어 마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려 후려치기라도 할 듯했다.
...알겠습니다. 이따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강종주는 재빠르게 대답한 뒤 기습처럼 벌떡 일어났다. 서슬에 놀란 내가 쳐다보자, 
...그럼... 일이 있어서...!
금방 초대에 응했던 것치곤 무척 옹색한 변명을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따라가려 했지만 수학 시절의 가르침도 잊었는지 장포를 펄럭이며 뛰어가는 통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뒷모습이 작아지다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나는 그저 꿈을 꾸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
모월모일.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삼독성수는 먼저 약속을 잡는 일이 없다. 항상 내 쪽에서 만나자, 어딘가로 가자고 기별을 해야 답을 주었다. 자신의 일정을 확인해 본 후 아무 일이 없을 때에만 응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살갑진 않으나 쌀쌀맞은 것도 아니고, 함부로 굴진 않지만 부드럽지도 않은, 한마디로 무척 거북살스러운 태도로 나를 대한다. 그의 성질을 익히 아는 나로서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다만, 그가 한 번씩 퉁명스러운 소릴 하고 한참 동안 말이 없으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렇게 상당한 시일 동안 만나고, 관찰하고 고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왕래는 없지만 위공자는 그의 친혈육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망기가 그의 도려이니, 망기의 가족인 나를 대우해 주려는가보다고. 
그래서 이후부터는 태도를 더욱 삼가하였다.






...
모월모일. 그리고 다음날...
혹독하게도 춥던 겨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그가 겨울의 운심부지처를 몹시도 싫어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본디 운심부지처에서는 손님이 와도 형식적으로 작은 화로를 놓아주는 것에 그쳤지만, 그의 객실을 마련할 때에는 언제나 방을 후끈하게 데워놓도록 일렀다. 까다로운 강종주가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다소 즐거운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날.
그는 아무런 약속도 없이 불쑥 운심부지처를 찾았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는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한실에다 큰 화로를 들이라 하니 가복이 당황하는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저녁 생각이 없다 하기에 차와 간단한 다과만 대접했다. 그리고는 무미건조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매사에 관심없는 듯 내뱉는 그의 말투에도 익숙해졌기에, 그의 관심사에 가까운 화제를 끌어오며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금일의 강종주는 유독 말이 없으며 시선이 멀었다.
혹여 중요한 용건이 있어 온 것이 아닌가. 돌연 긴장이 된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마치 나의 침묵을 기다렸던 듯 그가 입을 열었다.
...택무군.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덜컥, 가장 관심이 많으면서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화제가 튀어나오자 경계심이 일었다.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관계가 이런 겁니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대답할 말도 찾지 못했다.
멍해진 내가 답이 없으니, 그는 한참 동안 기다리다 못해 흘긋 쳐다보았다.
그 한 번의 시선.
마치 눈치를 보듯, 어찌 보면 겁을 내는 듯한 눈동자에 그만 모든 것이 백지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간 숱하게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계산하던 것. 마음대로 단정지었던 것. 앞으로의 계획 등. 
정말로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흩어지고 깨어져버렸다.
몸이,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와락 그의 팔을 잡고 당기자 힘이 지나쳐 내 품으로 쓰러지다시피 하였다.
나의 가슴을 손으로 짚으며 놀라 쳐다보는 눈이 너무도 가깝고, 또한 순진하고 무방비하여 발칙한 몸은 반성은커녕 피가 끓어올랐다.
그대로 입술을 겹쳐버리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꽃잎처럼 소중하게 그의 얼굴을 받쳐들고, 그가 거부하지 않음에, 부드러운 입술이 마음대로 짓눌려지는 감각에 나는 수십년간 쌓아온 평정심과 도리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다음날. 분명 몸이 성치 않을 텐데, 그는 귀신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심지어 늦잠까지 자버렸음에 충격이 커서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침상에 은은히 두고 간 그의 향기가 아니었더라면, 현실이라고 믿을 수조차 없었으리라.

 




***





이... 삼독성수란 사람. 겁나게 답답하네.
강징은 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방에 들어와 가방을 던지고,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본래가 희극보다는 비극을 즐겨 보는 편인데도 남희신이 쓴 거라서일까. 이상하게 못마땅하고 마음이 쓰였다. 그는 왜 답지 않게 이런 소설을 쓰고 있는 건지, 저는 딱히 재미도 없고 속터지는 글을 자꾸 읽고 있는 건지 몰랐다. 
심지어 뒤로는 더 답답한 내용들이 이어졌다. 같이 밤을 보냈다기에 기대했더니, 차라리 친구로 지내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잠시 현실로 돌아온 강징이 메세지를 확인했지만 새로 들어온 건 없었다. 훈련인지 다른 볼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불러내지 않으려나 보다고 편안하게 이불 사이로 파고들어 배달 음식을 시킨 뒤 못마땅한 가상 세계로 돌아갔다.








...
모월모일.
실수를 한 것 같다.
그가 금공자, 아니 금종주에 대해 예민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성인이 넘은 가주의 뒤를 그렇게 지키고 있으면, 마치 어린 천자를 농락하는 태후와 같이 보인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걸까.
평소에도 그가 욕을 먹는 것을 듣기 힘들었는데, 이는 금종주에게도 해로운 일이었기에 말해버렸다.
금종주도 이제 의젓해졌으니 혼자서도 잘 해 나갈 것 같다. 무척이나 에둘러 말했음에도 강종주는 그만 심기가 나빠진 것 같았다.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며 일어나버리는 것을 놀라 잡았더니 고집스레 눈을 피했다.
역시 참견이었나 싶어 사과하자 무척 시큰둥한 목소리로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도 난릉 금씨나 강종주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입을 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삼독성수의 마음 속 순위는 태산같이 굳었다. 가문과 핏줄의 일이 제1위였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까마득한 하위였다.
몸을 허락해 주었으니 정인이 분명할진대, 그럼에도 연애 따위는 할 수 없노라고 못을 박았다. 절대로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지역의 기둥과 같은 가문의 주인들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내 마음을 받아준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니 다 괜찮다고, 그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낼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가족들도 모르게 만나야 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몇 주나 보지 못할 때도 많았다. 강종주는 선택의 기로에 서면 가차없이 우리의 만남을 저버렸다. 
아마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거라고. 참자고 생각하면서도 상처가 거듭되며 지쳐가는 나는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끝에는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 온다는 것. 
위무선 때문에 남들의 몇 배나 단수를 혐오한다는 것.
어렵게 단둘이 되어 그의 몸을 열고, 정신없이 탐하기 시작하면 무엇을 요구해도 거절한 적이 없다는 것.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
모월모일.
산문을 올라오다 위공자와 마주쳤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지, 넉살좋은 웃음도 지워버린 그가 머리를 숙였다.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택무군.
무척 주의를 기울였으나 망기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고, 그가 알면 위공자가 아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그들이 아는 건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들킨 사실을 알면 강종주가 어찌 나올지 두려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위공자. 그가 싫어할 겁니다.
위공자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예, 압니다... 알지요. 
그 바보같은 녀석...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길을 내려가는 위공자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강종주가 은연중 위공자의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혹은 눈에 띠게 피하는 것을 나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시 왕래를 하도록 도와 주고 싶었지만, 역시 참견이 될까 싶어 손을 쓰지 못했다.
근래의 나는 혼자가 되면 멍하니 잡생각에 빠져드는 때가 많았다.
가끔씩, 아니 자주. 그가 여인이었으면 싶은 생각을 한다.
그랬다면 혼인을 하여 온전히 그를 가질 수 있을 텐데. 나의 아이를 낳게 하고, 외롭지 않게 된 그와 아이를 목숨 바쳐 보호할 텐데.
그가 화를 내지 않도록, 피곤하지 않도록, 고독하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다. 







...
혼인도 하지 못하고...
주위에 밝힐 수도 없이.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었는지 모른다.
그의 연인이 될 수는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연인이란 것이 그리 대단한 위치가 아니었기에. 나는 행복하며 불행했다.
그가 원하는 거리를 유지해 주었고,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참을 수가 없는 건, 그가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저 스스로의 존재는, 심지어 나보다도 순위가 낮았다.
종종 그는 무척 피로에 찌든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마치 우리의 관계도 의무처럼 여기는 느낌이라, 한날은 무리해서 찾아올 필요 없다고 말했더니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귀찮으면 그렇다고 말하라고 화를 내는 그를 아니라고 달래고 달래어, 겨우 떠나지 못하도록 주저앉혔다. 미리 준비해 둔 과일과 단 것을 내오도록 했더니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으나,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연달아서 터지는 심상찮은 기침이라, 급히 수건을 대어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상하게 기침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고뿔이라는 말에, 금단 있는 이가 무슨 그런 잡병에 걸리느냐고 수상하게 여겼지만 그대로 잊어버렸다.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냐 물어보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태도는 불안감을 가중시킬 뿐이라, 맥을 짚어 보자고 했더니 참견하지 말라고 거세게 화를 내었다.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일단은 알겠다고 했지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지병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강징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여기서 끊긴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해보고, 처음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넘겨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원래도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끊기면 뒤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성격인데, 이건 내키지도 않는 찝찝한 걸 보았더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희신은 정말로 바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짬을 낼 수 없다 하는지라 강징은 주말 내내 그와 만나기를 기다리며 마음 한구석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겨우 월요일이 되어 오늘은 집에서 쉰다는 메세지를 받은 강징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