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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6 20:22
전편  -2-   -3-   -4-   -5-




“!”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느릿하게 물을 마시던 강징은 문을 닫자마자 귀신같이 나타난 인영에 놀라 컵을 놓칠 뻔했다.
“...남망기.”
“강만음.”
처음에는 이 곳에 오는 것이 많이 거북했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나와서 음료를 찾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편해졌다. 
남희신, 남망기의 거처는 중앙 저택과는 외따로 별채처럼 지어져서 관리인들도 정해진 시간 외에는 들락거리지 않았다. 
강징은 주스 한 병을 챙겨서 바로 나가버리는 남망기의 뒤통수에 대고 작게 혀를 내밀었다. 그도 익숙해졌는지 강징과 마주쳐도 청소부를 스치는 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꼬박꼬박 강만음, 강만음 하고 부르는 것도 참 밉살맞다고 강징은 괜히 입술을 비쭉거렸다. 위무선은 만난지 한달만에 호칭이 바뀌었으면서. -물론 그를 남잠이라고 부를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지만.
방으로 돌아와 커피잔을 전해 받으며 미소짓는 남희신을 보고는 누나 생각이 났다. 
생판 타인인 사람 중에 징이라 불러 주는 사람은 남희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의 자를 불렀던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과외를 시작하고 얼마 안가 이름을 불러도 되냐고 묻는데, 다정하게 바라보는 미소에 혼이 나간 강징은 쉽게도 허락하고 말았다.
끌어당기는대로 남희신의 다리 위에 앉긴 했지만 헐벗은 상체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난감한 강징이 얼굴을 붉혔다.
“형, 옷 좀 입어.”
함께 밤을 보내고 난 후라 단단한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묵직한 향에, 자신의 꽃향까지 은은하게 섞여든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가 고용인이 보기라도 하면. 하는 근심이 미간에 어린 것이 글처럼 보여서 남희신은 웃음이 나왔다. 
그가 자신을 팔 사이에 두고 타닥타닥 타자를 치기 시작하자 강징은 별 수 없이 몸을 기대었다.
향정처럼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던 강징이 문득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 전에 그 소설... 계속 쓰고 있어?”
강징은 손을 멈추고 내려다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단단한 쇄골에다 머리를 부비작거렸다.
“음... 왜?”
“내가 봐도 돼?”
남희신은 대답 대신 야릇한 표정으로 강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답을 기다리다 못한 강징이 고개를 들자 짐짓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중에 보내 줄게.”
“응.”
강징이 다시 기대어 오며 부드러운 머리칼이 맨살에 비벼졌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레포트 내용이 깨끗이 날아가버린 남희신은 멈추어 놓았던 자료 영상으로 창을 바꾸었다.
밤새 괴롭혔더니 지친 건지 눈을 감아버린 강징은 남희신이 머리를 쓰다듬어도 뺨을 건드려도 입을 꾹 다문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남희신은 아침 잠이 깨자마자 냉큼 씻어대고 옷을 다 챙겨입은 몸에서 나는 바디샴푸의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연꽃향이 나는 제품은 없을까. 남희신은 영상도 꺼버리고는 천천히 쇼핑몰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후에 원룸으로 돌아온 강징은 간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한 피로가 몰려왔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띵똥, 하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나니 해가 져서 캄캄했다. 
더듬거리며 끌어온 폰을 확인해 보니 첨부 파일 메세지였다.
그제사 남희신에게 소설을 달라 했던 일이 생각난 강징은 쿠션 위로 비비적거리며 몸을 끌어올렸다.   
바로 소설을 열어 초입부를 읽어보니 일전에 보았던 대목이라, 고개가 갸웃했다. 그 때 클릭해 보았던 문서는 엄청 긴 앞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소설의 내용은 두서가 없이 짤막짤막하게 이어져 실제로 일기장 같은 구성이었다. 몹시도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일기장이라고나 할까.
이윽고 몇 페이지를 읽던 강징은 배고픔도 잊은 채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



...
모월모일.
화를 내고 떠나가 버린 삼독성수가 다시는 상대해주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과 달랐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냉정한 것이 아니라 마치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강종주.
나라고 평화로울 리 없었다. 하지만 검처럼 날카롭게 베어내지는 않는 태도에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름다운 시선이 곁눈질로나마 살풋 끄덕여 주었으니.
나는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