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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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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토끼는 인간들이 애벗목장이라고 부르는 땅의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작은 갈색토끼야. 로열이라는 늙은 인간은 밥토끼가 당근밭을 헤친다며 싫어했지만 밥토끼는 억울했어. 그 넓은 당근밭에서 당근 두 세 개 가져가는게 뭐 어때서! 대신 내가 두더지도 쫓아내주고! 어?! 밥토끼는 발을 쾅쾅 굴렀지만 농장의 개들은 히죽거리며 들은 척도 안해줬어. 뭐 다른 인간들은 밥토끼를 보는둥마는둥했고 제일 작은 인간이 가끔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보거나 하기는 했지만 딱히 해코지를 당한 것은 없으니까 사는게 팍팍하지는 않았어. 로열이 스튜 어쩌고라는 말을 할 때는 소름이 끼치긴 했지만. 

애벗목장과 경계선을 같이 쓰는 틸러슨목장의 땅에는 행맨이라는 여우가 살고 있어. 지 몸집만한 기러기의 목을 물고 의기양양하게 끌고가는 모습이 몇 번 보였는데 그래서 행맨이래. 여우답게 악랄하고 위험하고 아주 꽤가 많은 놈이지. 틸러슨의 젊은 인간이 매일같이 무시무시한 쇳덩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행여우를 잡아 가죽을 벗기겠다고 악을 썼지만 행여우는 저녁마다 깔깔 웃으며 틸러슨의 닭장에서 달걀을 하나씩 훔쳐가기나 했지. 어쩌다가 밥토끼와 마주치면 날카롭고 네모난 녹색 눈으로 쳐다보며 능글능글 놀려대는 것은 취미활동이고 말이야.


*


그러니까 행여우와 밥토끼는 데면데면한 이웃사촌이야. 만날 일은 드물었지. 그런데 그날은 그 드문 만남이 있던 날이었어. 그걸 만남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밥토끼는 애벗농장의 당근밭 밖으로는 좀처럼 나가질 않았어. 먹을 것도 숨을 곳도 가까이 있는데 뭐하러 위험한 밖을 싸돌아다녀? 물론 밥도 자신의 영역인 애벗농장을 순찰하기를 소홀히 할 순 없었어. 토끼는 금방 늘어나고 영역을 뺏기는 것은 순식간이니까. 그래서 밥토끼는 매일매일 구역을 정해 농장을 순찰했어.

당근밭 울타리에서 멀어질수록 초목이 줄어들고 흙먼지 뿐인 땅이 늘어났어. 갈색토끼인 밥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은신할 곳이 없는 휑한 땅은 위험했지. 밥은 부지런히 코와 귀를 씰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어. 인간들이 차라고 부르는 거대한 쇳덩이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이거든. 서둘러 살펴보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야 해. 

얼마 없는 풀더미를 찾아 몸을 숨겨가며 주변을 정찰하는건 정말 고된 일이었어. 게다가 인간들과 차에만 너무 신경썼나봐. 등의 털이 사악 곤두서는 끔찍한 느낌이 먼저 찾아오고 도저히 좋아질 수 없는 쓰고 차가운 냄새가 맡아졌어. 밥은 두려움에 떨며 천천히 눈을 굴렸어. 아주 아아주 나쁜 예감이 들었어.

저 멀리서 틸러슨의 젊은 인간이 예의 쇳덩이로 밥을 노리고 있었어.

도망쳐야해! 그렇지만 몸은 바윗덩이가 된 듯 움직이질 않았어. 숨이 가쁘고 어지러운데 눈을 깜빡일 수 조차 없어서 밥은 눈물을 흘렸어. 이렇게 죽는구나. 이게 끝이구나.

엄마아...

천둥이 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황색 빛이 젊은 인간에게 달라붙었어. 인간은 균형을 잃고 허둥거리며 쇳덩이를 놓치고는 마구 악을 썼어. 주황색 빛은 인간의 주변을 휙휙 돌아다니며 쇳덩이를 잡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어. 그때까지도 밥은 정신을 못차리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지.

"튀어! 멍청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찬 물처럼 머리 위로 쏟아졌어. 밥은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어. 너무 무서워서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어.


*


어떻게 굴 속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한참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굴 속에 몸을 둥글게 말고 덜덜 떨면서 울고 있었어. 계속 숨을 쉬는데도 너무 숨이 차고 온 몸이 벌벌 떨리고 눈에서 계속 눈물이 쏟아졌어. 몸 안에서 쿵쿵 소리나게 뛰는 것 때문에 머리가 울렸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밥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했어. 이제 안전해 여긴 안전해 여긴 애벗 농장의 당근밭 아래 내 집이고 틸러슨의 젊은 인간은 함부로 여길 들어올 수 없어 여긴 안전해 나는 살았어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그런데 행여우는

잦아들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그 주황색 빛은 행여우였을까 그 목소리는 행여우의 목소리가 맞았을까 그냥 내 착각이었을까 운이 좋아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걸까... 진짜 행여우였으면 어떡하지? 바보같이 바보같이! 교활한 여우면서 어떻게 인간에게 대들 생각을 해?! 멀리서 봤어도 도망쳤어야지! 내가 뭐라고!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밥은 크게 숨을 내쉬고 눈물을 슥슥 닦았어. 덜덜 떨리는 앞발을 싹싹 핥아서 귀를 닦고 얼굴을 씻고 뒷발이랑 등도 꼼꼼히 핥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켰어. 울고 있는건 아무 도움이 안돼.

용기를 내어 굴 밖으로 나와보니 햇님이 어제 순찰을 떠났을 때보다 낮게 떠 있었어. 꼬박 하루를 굴 안에 있었나봐. 주변을 둘러본 밥은 가장 싱싱하고 커다란 당근 하나를 조심스럽게 파내어 입에 물고 급히 걸음을 옮겼어.

밥토끼가 도착한 곳은 농장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 아래 숲 속 호숫가 근처의 오래된 나무였어. 둥치 아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을 쿵쿵 굴러 집주인이 고개를 내밀길 기다리는데 뭔가가 등을 사악 쓸어내렸어.

"이런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토끼가 어쩐 일이지?"

귓속으로 바람을 훅 불어넣는 것에 밥토끼는 삐익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어. 캥캥거리는 즐거운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털이 반지르르한 여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흥미롭다는듯 밥을 바라보고 있었어. 밥은 순간 너무 반가워서 여우에게 달려들 뻔 했지 뭐야. 무사했구나! 살아있었어! 그런데...

행여우가 아니네...

밥은 귀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하게 몸을 웅크렸어. 못생겼어... 행여우 아냐...

"야, 너 지금 무례한 생각을 하는 거 같은데?"

"넌 또 왜 애한테 시비야- 밥 오랜만이네."

둥치 구멍에서 너구리 한 마리가 고개를 쏙 내밀었어. 주인인 너구리 밥이야. 근방에서 아주 유명한 너구리야. 처음에는 형제들이 같이 살다가 겨울이 지나고 나니 형제들은 다 어딘가로 가고 여우랑 같이 살고 있다고 말이야. 너구리답게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밥토끼에게는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살갑게 대해주는 편이었어. 그럼 이 얄미운 여우가 너구리 밥이랑 같이 살고있다는 그 제이크 여우인가봐.

다정한 인사에 설움이 북받친 밥토끼가 눈물을 뚝뚝 흘렸어. 너구리 밥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두 앞발로 밥토끼를 토닥토닥해주며 제이크를 쏘아봤어. 제이크는 세상 억울하다는듯 귀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쑥 내밀었어.

"밥, 밥 왜그래? 무슨 일이야? 도움이 필요해? 배고파?"

밥토끼는 고개를 휘휘 젖고는 큰 한숨과 함께 눈물을 삼켰어. 

"...이거... 당근... 이니까 틸러슨... 행여우가... 어저께 휙하고... 막... 막... 나한테 멍청아랬어...!"

다시 생각해도 무섭고 서럽네. 밥토끼는 울며불며 가져온 당근을 꼭 쥐고 빼액거렸고 너구리와 여우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졌어. 한참을 흐느낌과 삐이 삐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제이크 여우가 앞 발 하나를 들어올렸어.

"그러니까, 어제 틸러슨네 인간에게 토끼 고기와 가죽을 헌납할 뻔 했는데-"

"제이크!"

"사실적시일 뿐이야 베이비. 그런데 오지랖 넓은 행맨 놈이 널 구해줬다, 도망치라고 해줬다, 무사히 도망쳤는지 궁금하다 나랑 친한 너구리와 같이 산다는 그 여우가 좀 알아봐줬으면 좋겠다아- 이거잖아."

밥토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어. 부여잡고 있던 당근도 너구리 밥에게 냉큼 안겨줬어.

"내가 왜?"

"제이크!"

"아니이, 그렇잖아 베이비, 나는 당근이 맛이 없다구. 따지자면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 내가 좋아하는걸 들고와도 어려울 판에 내껀 들고오지도 않았잖아. 틸러슨 인간들은 인간들 중에서도 특히나 더 이상한 놈들이라구. 브렛네 농장 인간들처럼 이래도 저래도 좋아좋아 하지 않아요. 그런 위험한 곳에 정찰을 다녀와야 하는데 맨 입으로? 그건 아니지이~"

제이크가 말하는 동안 밥토끼의 귀는 점점 축 처졌어. 제이크 여우의 말이 맞아. 부탁할 상대는 제이크인게 맞아. ...그치만! 남의 여우가 뭘 좋아하는지 밥토끼가 알 바냐구! 그런 거 궁금하지도 알고싶지도 않으니까 너구리 밥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울먹울먹하는 밥토끼의 어깨를 너구리 밥이 다정하게 도닥였어.

"걱정마 밥. 제이크 놈 심술부리는 거 상대안해줘도 돼. 실은 그 행맨인가 하는 여우가 오ㄴ-"

"오늘 아침에 그러고보니 그 놈 굴 앞을 지나 왔었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리긴 했어! 무슨 소리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으음... 신음소리였을지도?"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밥토끼를 다독이던 너구리 밥을 휙 잡아당겨 제 꼬리로 감싸안은 제이크 여우가 높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어. 밥토끼의 몸 안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지. 역시 다쳤나봐! 어쩌지어쩌지어쩌지 많이 다쳤을까 어딜 다친걸까 막 막 죽어가고 그러는거면...!

밥토끼는 몸을 돌려 급히 몇 걸음 뛰다가 다시 너구리와 여우를 돌아봤어. 퍼드득거리는 너구리를 꼭 끌어안고 싹싹 핥고 있는 여우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는 밥이었지.

"고마워 밥! 제이크! 다음에 꼭 답례하러 올게!"


*


"...그 행맨이라는 놈 멀쩡하게 아침에 호수에서 커다란 생선 잡아갔잖아."

"그랬던가? 난 베이비 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며칠째 착 달라붙어 있어놓곤 뭐가 오늘 아침에 그 놈 굴 앞을 지나오고 어쩌고야! 이 무단주거침입자! 저리 떨어져! 제이크!"

"아이이~ 무단주거침입이라니 언젯적 얘기야~ 베이비 너무 차갑다아~"


*


밥은 열심히 뛰었어. 비록 지금까지 행여우와 자신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놀리고 놀림당하는 어색한 이웃일 뿐이었다고 해도 목숨을 빚졌는데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낸다는건 토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은혜를 갚아야해. 상처를 입고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채 굴 속에서 혼자 앓고 있을 행여우를 생각하니 안그래도 빠른 달리기가 더 더 빨라졌어.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는 동안 밥토끼는 열심히 생각했지.

뭘 가져가야 하지

아까 제이크 여우가 당근은 맛이 없다고 했지. 여우는 당근이 별로인가봐. 그 맛있는걸. 그럼 뭘 가져가지. 많이 다쳤을까. 뭘 먹어야 기운이 날텐데. 굶어서 더 나빠졌으면 어쩌지. 여우는 뭘 먹지. 뭘 좋아하지.

...달걀!

행여우가 평소에 매일 틸러슨네 닭장을 털어 달걀을 훔쳐갔다는게 떠올랐어. 밥은 급히 방향을 틀어 애벗농장으로 달렸어. 틸러슨네 닭장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애벗네 닭장 위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날카로운 발톱을 번뜩이며 볏을 부풀린 채 노려보는 닭들 앞에서 밥은 애써 딴청을 피웠어. 토끼가 왜 닭장 앞에서 얼쩡거리느냐는 눈이었지. 아니 그치만... 나 달걀 하나만 주면... 진짜 꼭 필요한 곳이 있는데 내가 두더지도 쫓아주고 막 그러는데 달걀...

어쩌지어쩌지 하며 닭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부산을 떠느라 뒤에서 인간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어. 갑자기 옆에 그 커다란 몸을 구기길래 히이익하고 봤더니 애벗 농장에서 일하는 인간이야. 농장의 안주인만큼이나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하고 동물들을 괴롭히지도 않는 착한 인...!

"저기! 저기! 부탁이에요! 달걀 하나만 주세요! 제가 더 열심히 두더지 쫓을게요! 앞으로는 당근 하루에 두... 아니 하나씩만 먹을게요! 제일 작은 걸로 먹을게요! 모종을 파먹지도 않고 한 입만 먹고 버려두지도 않을게요! 제발! 달걀 하나만!" 

밥은 열심히 부탁했어. 삐익삐익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든 이 덩치만 크고 같이 살아가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족속을 설득하려고 애썼어. 그렇지만 인간은 가만히 밥을 바라보기만 했어. 이익. 인간의 표정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주겠다는건지 말겠다는건지 모르겠단 말야. 

밥토끼가 니 앞발을 물어서 달걀 위에 올려놔야 내 말을 알아듣겠냐?! 아앙?! 하고 화를 내려던 참이었어.

간절한 밥의 마음이 닿았는지 인간이 앞발을 뻗어 달걀 하나를 쥐어올렸어. 밥은 깡총깡총 뛰며 줘! 줘! 했어. 심지어 뒷발로 일어서서 두 앞발을 내밀기까지 했어. 천천히 밥의 앞에 달걀을 내려놓는 인간에게 닿지않을 무한한 감사를 남기며 밥토끼는 조심스럽게 이마로 달걀을 툭 쳤어. 도르르 굴러가는 달걀을 보며 응! 이정도 세기로 굴리면 되겠어! 하는 밥이었지. 조심조심 착실하게 달걀을 굴리며 밥은 틸러슨 농장으로 향했어. 해가 지기 전에 가려면 엄청 부지런히 굴려야 해.


*


"...저게 뭐야?"

"어... 이스터 버니요?"

"지금 10월인데 무슨... 쟤 지금 달걀 굴리면서 가는 거야? 먹지도 못하는걸?"

"선물하려고 가져가는 걸 수도 있잖아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말세로군."

"아~ 레트 말넘심~"


*


틸러슨 농장의 경계를 넘었을 때는 햇님이 나 이제 금방 들어간다~ 하는 때였어. 어찌나 열심히 달걀을 굴리고 왔는지 머리가 지잉지잉 울릴 지경이었지. 다행히 달걀은 실금 하나 안 생기고 무사했어. 수풀 속에 달걀을 숨겨놓고 옆에 주저앉아 한숨을 돌리며 밥은 행여우의 굴이 어디쯤 있을까 가늠해봤어. 틸러슨의 인간들은이 행여우가 매일 달걀을 훔쳐가는 것에 약이 바짝 올라 온 농장을 다 헤집어봤을텐데 여태 굴을 못찾은 거 보면 진짜 비밀스러운 곳에 잘 숨겨져 있는 모양인데 과연 그걸 찾을 수 있을지 이제서야 걱정이 되는 밥이었어. 아니 그렇잖아, 토끼가 여우굴을 찾아갈 이유가 어디 있...

토끼가 여우굴을 찾아가고 있네...?

갑자기 이게 좋은 생각이었나 의문이 들었어. 아니아니 물론 밥은 행여우에게 목숨을 빚졌고, 응 사실이지, 밥을 돕느라 행여우는 매우 크게 다쳤단 말이야, 아 이건 확실치 않지만 제이크 여우가 신음소리 어쩌고 했다구, 굶주린채 다쳐서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이건 좀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밥은 벌떡 일어서서 귀를 북북 문지르고 단호하게 눈을 깜박였어. 햇님이 들어가고 있잖아. 서둘러야해. 달걀만 주고 오는 거야.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러면 되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


어느틈에 뒤에 와 있었던 건지 행여우가 밥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어.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던 밥은 쿵쾅쿵쾅 울리는 뱃속을 애써 힘줘 억누르며 행여우를 향해 똑바로 섰어.

"...저기, 괘, 괜찮아?"

"여기가 어디라고 터덜터덜 기어들어와.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그 쬐끄만 머리로는 위험이라는걸 감지 못하나? 오, 그래서 틸러슨네 인간 앞에서도 정신줄 놓고 있었던 거로군. 과연."

차갑게 눈을 빛내며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는 행여우의 기세에 눌려 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어. 왜 왜 화가 났지 화가 난 거 같아.

"다 다쳐서...신음하고 있다고... 제이크가... 나 때문에... 저기...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그래서... 많이 아파?"

행여우는 대답하지 않았어. 그저 지그시 밥을 바라보기만 했어. 땅그림자가 올라오며 행여우의 붉은갈색털이 검게 물들고 녹색눈이 희게 번뜩였어. 밥은 토끼의 본능대로 부르르 떨었지만 용기를 내어 풀숲에 숨겨두었던 달걀을 조심스럽게 이마로 툭 쳐서 행여우의 앞으로 굴려보냈어. 돌돌 굴러오는 달걀을 행여우가 앞발로 턱 잡았어.

"그... 감사의 표시야... 나때문에 다치고... 어제 굶었을 거잖아... 먹어..."

행여우가 피식 웃었어. 앞발로 달걀을 빙빙 돌리면서 낮게 흐흐 웃더니 어느틈엔가 밥의 앞으로 몸을 쑥 내밀고 있었어.

"그래서, 목숨빚을 갚겠다고 목숨을 걸고 이 미친놈의 땅까지 기어들어오셨다? 이걸 주려고? 날 어디서 어떻게 찾으려고? 응? 내 굴이 어딘지 알아? 토끼가 여우굴을 어떻게 찾지?"

"어... 그게..."

"...여우굴이 어딘지 알게된 토끼가 어떻게 자기 굴로 돌아가지?"
 
코가 마주닿을 정도로 고개를 가까이 한 행여우의 번뜩이는 눈에 질려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밥의 코에 비릿한 누린내가 맡아졌어. 밥토끼같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들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말이야.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물리려하는 것보다 행여우가 입을 쩍 벌리는게 더 빨랐어. 밥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았어! 목을 물어뜯길거야!

......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더운 숨이 훅 몰려왔다가 멀어졌어. 밥은 벌벌 떨며 눈을 간신히 떴고 행여우가 달걀을 입에 물고 몸을 돌리는걸 봤어. 이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질 건가봐. 터벅터벅 걸어가는 행여우의 앞발이 살짝 절고 있는게 눈에 들어온 건 그 때였어. 아주 순간이었지만 금방 어둠 속에 숨겨졌지만 분명히 절룩거리고 있었단 말야. 밥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어.

"왜 날 구해줬어?!"

등을 돌린채 가만히 선 행여우를 향해 밥이 있는 힘껏 외쳤어.

"주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죽는다고 생각했다구! 근데! 근데 날 구해줬잖아! 왜?! 인간한테 덤비다니 제정신이야?! 지금 앞발 절고 있잖아! 피났어?! 이제 어떻게 해! 나때문에 이제 어떻게 해! 내가 뭐라고! 그동안 날 먹지도 않았었잖아! 틸러슨에게 죽었어도 아쉬울 거 없었잖아! 왜 바보같이 인간에게 덤벼! 어떤 여우가 토끼를 구해주냐고!"

너무 힘을 주고 있었던건지 온 몸이 벌벌 떨렸어.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도 모른채 밥은 꿋꿋하게 자신을 등지고 있는 행여우를 바라봤어. 당장 대답해. 대답 안하면 굴까지 쫒아갈거야. 속으로 열심히 중얼거리며 앞발로 눈물을 닦고나니 하얀 김이 행여우의 얼굴 앞에서 흐리게 퍼져나왔어. 입에 물고 있던 달걀을 내려놓고 어깨를 크게 들썩인 행여우가 조용히 말했어.

"눈치가 없는거냐 아님 원하는 답이 나올때까지 몰아부칠 셈이냐."

밥은 단호하게 뒷발을 탕 굴렀어. 

"...어떤 여우가 토끼를 구해주냐고? 그 토끼가 애틋해 죽겠는데 차마 가까워질 엄두도 못내고 어쩌다 한 번 농짓거리라도 오가면 그걸 몇날이고 며칠이고 되새기며 행복해하는 어느 배알도 없는 여우가 구해준다, 됐어?"

"...!"

"동쪽으로 똑바로 뛰어가. 니 다리가 니 목숨을 구할 거니까 최대한 빨리 뛰어."

"...해ㅇ," 

"...달걀은 잘 먹을게."

다시 달걀을 물어올리려고 고개를 숙이는 행여우를 바라보던 밥이 귀를 탁 털었어. 쏜살같이 달려나가 행여우의 입에서 달걀을 머리로 꿍 밀어서 저만치 밀어낸 밥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여우의 다리에 착 달라붙었어.

"데려가."

"뭐?"

"데려가, 여우굴. 너 숨어있는 굴로. 가서 앞발 저는 거 봐줄게. 내가 풀 종류는 좀 많이 알아. 다리를 절면서 어떻게 사냥을 해. 싫어도 내가 골라주는 풀 먹어. 며칠만 참고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밥- 너-"

"아 뭐! 왜! 그동안 내가 어떻게 달걀이라도 매일 가져다줄게! 정 안되면 날 먹어!"

"미쳤냐!"

"...그, 대신 한 번에 안아프게 먹어줘..."

기도 안찬다는듯 앞발을 털어대는 행여우의 발에 꼭 들러붙어서 밥토끼는 고집을 피웠어. 토끼는 최약체 초식동물이라 고집이 센 족속이라구.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다. 흥! 한참을 제 발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밥을 내려다보던 행여우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밥토끼의 머리 위에 턱을 살짝 얹었어.

"...대체 뭘 들은 거야, 애틋해 죽겠는 토끼를 어떻게 먹어."

"그, 그 부분은 다리가 다 나은 다음에 다시 얘기해. 일단은... 다리가 먼저..."

코를 씰룩거리며 웅얼대는 밥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쿡쿡 웃은 행여우가 입을 벌려 밥토끼의 머리를 살짝 물었어. 밥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용감하게 참아냈어. 그리고 행여우의 입이 멀어지자 고개를 들어 다시 따듯한 녹색눈으로 돌아온 행여우의 눈을 보며 말했어.

"잊지말고 저 달걀 챙겨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가져왔는데."

"뛰어서 날 따라올 수 있겠어?"

"너 지금 토끼 무시하냐?"

유쾌하게 캥캥 웃은 행여우가 밥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더니 제 등 위로 휙 던졌어. 으어어 하던 밥은 용케 균형을 잡고 행여우의 목덜미 위에 찰싹 붙었어. 행여우의 털은 아주 보드랍고 따뜻해서 굴 속에 깔아둔 지푸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어. 밥토끼가 만족스럽게 부비적거리며 몸을 붙여오자 행여우가 웃으며 말했어.

"그래서, 여우굴이 어딘지 알게된 토끼는 어떻게 자기 굴로 돌아갈 생각이신지?"

"...뭐, 봐서... 가면 가는 거고, ... 제이크도 너구리네 눌러앉았던데 뭐..."

우물우물 대답하는 밥의 목소리에 고개를 살살 내저은 행여우가 달걀을 물어올렸어. 그리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 어느새 햇님만큼이나 환한 달이 떠서 여우와 토끼가 가는길을 다정하게 비춰주었어.





행맨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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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그런데 교주님 생축글이 이딴 허접...
- 숲 속 호숫가 근처 오래된 나무 둥치 아래 사는 여우와 너구리 이야기 ->
이거
- 이스터버니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답니다 내년 봄에 애벗농장 둘째와 일꾼에게 좋은 일이 있을...
- 글렌 파월의 36번째 생일 축하!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