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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9 04:05
***
퍽.
급작스럽게 느껴진 뒤통수의 충격에 밥은 화들짝 놀라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눈을 꼭 감았어.
방금, 방금 뭔가가 내 머리를 쳤어...!
......
...근데 왜 아무 일도 없지?
밥은 슬그머니 눈을 뜨고 열심히 좌우로 굴렸지만 아무도 없었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사방을 휙휙 돌아봐도 머리 위를 올려다봐도 무서운 새매나 육식 짐승은 보이질 않았어. 그저 저만치 덩그렇게 놓인 빨간 열매만... 어라?
밥은 조심조심 빨간 열매 근처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어. 아직 시들지도 않고 흠집도 썩은 곳도 없이 싱싱하고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는 빨간 사과가 왜 여기 혼자 떨어져 있을까. 사과나무는 여기서 한참 떨어진 농장의 과수원에나 있는...데...
멀리서 컄컄컄컄ㅎ-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뭐가 또 슉-날아와 발 밑으로 툭 떨어졌어. 아까보다 조금 작은 사과야. 밥은 이이이익-! 짜증을 내며 사과가 날아온 곳을 째려봤어. 풍성한 주황색 꼬리가 살랑이며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 항상 밥을 놀리고 못살게 구는 여우 제이크가 틀림없었어. 늦은 봄 즈음에 처음 마주쳤던 아주 못된 여우야. 사냥을 하고 있으면 훼방을 놓고 식량을 채취하고 있으면 가로채가고. 그리곤 저렇게 비웃으며 사라진다니까. 밥은 분해서 발을 쾅쾅 굴렀어. 싸우려면 싸우지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아무 소득도 없는 일에 기운을 낭비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
밥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뜨려다가 머뭇머뭇 바닥에 뒹구는 사과들을 내려다봤어.
...사과는... 사과는 잘만 보관하면 겨울 저장 식량이... 아직 싱싱하고...
겨울잠을 자기 전에 조금 더 식량을 비축해둬야 해. 지금 부족한건 아니지만 올해는 막내도 있는걸. 아무튼 모을수 있는만큼 모아둬야 해. 기분나쁘지만 버려두고 가기엔 너무 아깝지. 밥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사과 두 개를 꼭 끌어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어. 먹을 거엔 죄가 없어. 먹을 거는 무죄 ㅇㅇ.
***
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는 너구리 밥에게 이번은 두번 째 겨울이야. 원래 독립할 땐 형제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인데 밥은 한 배에서 나온 형 메이저와 동생 댄과 쭉 함께였어. 올 늦여름엔 막내 루크가 합류했지. 뭐 혼자보단 넷인게 훨씬 이득이니까.
형제들이 태어날 때 엄마가 몹시 힘들어서 전부 다 죽는줄 알았대. 근데 메이저가 어떻게 어떻게 겨우 빠져나와서 그 길을 따라 밥과 댄이 편히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대. 그 때 고생해선지 어째선지 메이저는 모든 일에 굼뜨고 어딘가 어설펐어. 엄마아빠도 메이저를 내보낼 생각에 걱정이 태산같았지. 영역 밖으로 나가자마자 죽는 거 아닌가 싶었대.
댄은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고 재주도 좋은데 이상한 놈들이 계속 꼬였어. 아직 솜털도 덜 빠진 아기 때에도 교미를 하겠다고 눈이 돌아 덤비는 미친 것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몇 번 그런 일을 당하고 나자 댄은 굴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 했고 엄마아빠는 차라리 댄에게 굴을 물려주고 당신들이 다른 곳으로 가는게 낫겠다고 생각하셨대.
그래서 밥이 독립하면서 '메이저와 댄이 그러겠다고 하면 같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아빠는 차마 찬성하지 못하셨어. 밥은 성체가 되기 전부터도 한 마리의 너구리 몫을 다 해냈던 의젓한 아이였는데 창창한 아이 앞길에 혹을 둘이나 붙여주다니 못할 짓이었지. 그치만 같이 가자는 밥의 말에 메이저는 기쁘게 고개를 꾸닥였고 댄은 며칠 고민을 하더니 밥값은 꼭 하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삼형제는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게 됐지.
익숙한 영역 밖에서의 삶은 몹시 힘들었어. 매일매일이 포식자에게 쫓기고 다른 영역의 주인과 싸우는 나날이었지. 혼자였으면 애저녁에 싸우다가 다치거나 굶어 병들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혀 죽었을 거야. 그래도 셋이어서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바깥세상의 삶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겨울이 닥쳐버렸고 아직 정착지를 찾지 못한 형제들은 누군가가 버리고간 다 무너져가는 굴에 기어들어가야했어. 사실 그것도 감지덕지였지. 굴에 들어가자마자 댄이 기절하듯 잠들었거든. 곧 메이저도 잠들었고.
먹이를 충분히 먹지도 못하고 겨울잠에 들어버린 메이저와 댄이 봄에 다시 눈뜨지 못할까봐 밥은 너무 무서웠어. 괜히 형제들과 함께 가겠다고 말해서 고생만 시킨건가 싶어 미안해진 밥은 쏟아지는 잠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며 변변찮은 먹이를 끌어모아 메이저와 댄 앞에 놓아두고 어설프게나마 굴의 입구를 가린뒤 겨우 형제들 옆에 누울 수 있었어. 봄이 왔을 때 제발 혼자서 눈뜨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을 퐁퐁 쏟다가 밥은 마침내 잠이 들었어.
그리고 봄이 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밥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움찔거리는 개구리다리였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키니 저편에서 메이저와 댄이 마주앉아 지난 겨울에 모아뒀던 다 말라비틀어진 먹이를 주워먹고 있었어. 쩝쩝거리던 메이저가 "아 일어났네 안녕?" 하고 먼저 인사를 했고 "그거 빨리 먹고 나가자 비냄새 나는데 여기 비까지 맞으면 곧 무너지겠어" 하고 뚱하게 댄이 말을 이었어. 밥은 너무 기뻐서 뿌애앵 울음을 터트렸어. 조금 어지럽고 배도 많이 고팠지만 형제들을 다시 만난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어.
부족하지만 행복하게 식사를 마친 너구리 삼형제는 무너지기 직전의 굴을 빠져나왔어. 해야할 일은 명백했어- 새 보금자리를 찾는 것. 이번에는 제대로 된 집을 찾자고 다짐하며 어디가 좋을까 다들 의견을 내놨지. 일단 개울에 가깝고 나무가 많은 곳이 베스트였어. 하지만 그런 곳은 전부 이미 주인이 있었지. 댄이 지난 겨울에 이곳으로 올 때 봐 둔 몇몇 곳이 있다고 했어. 그 땅의 주인들은 나이가 많았고 이제 차츰 영역을 관리하기 버거워질 것 같으니 그 곳을 우선 둘러보자는 거였어. 형제들은 남의 영역을 전부 뺏을 생각은 없었어. 그저 영역의 관리가 느슨해지고 후계자가 자기가 물려받을 영역을 완전히 인지하기 전에 작은 부분만 나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스텔싱이네" 메이저가 유쾌하게 외쳤고 밥과 댄은 못들은척 했어.
형제들은 조심스럽게 보금자리를 탐색해 나갔어. 여전히 포식자에게 쫓기고 다른 영역의 주인과 싸우는 나날이었지만 겨울을 이겨내고난 너구리들은 제법 딴딴하게 성장했고 혼자도 아닌 셋이 몰려다니다보니 이제 어지간한 시비는 걸려오지 않을 정도가 되었어. 허구헌날 밥을 놀려대는 여우 제이크도 셋이 있을 때는 수염 끝도 내비치지 않았지.
그래서, 여기라면 호수도 있고... 제법 괜찮지 싶은 곳에 은근히 궁뎅이를 내리고 비비적비비적 영역 주인의 눈치를 봤더니 아직 노쇄하진 않았지만 젊은 너구리 셋과 드잡이할만큼 한창 때도 아닌 영역 주인이 슬며시 눈감아 주길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잡은 땅에서, 웬 개새끼와 투닥거리는 어린 너구리를 구해줄만큼 여유도 생겼어. 그리고 갓 독립한 어린 너구리는 놀랍게도 삼형제의 동생인 루크였어. 독립해서 나올 때 부모님이 '혹시라도 세마리가 함께 다니는 너구리들을 본다면 네 형들이란다'라고 말해주셨대.
"여태 같이 다니다니 놀랍네요" 신기한듯 눈을 굴리는 루크에게 메이저가 큰 형이랍시고 엣헴 나서더니 같이 살지 않겠냐고 권했어. 댄은 슬며시 밥의 눈치를 봤지만 루크가 눈을 빛내며 그래도 되요?라고 하자 밥도 선선히 고개를 꾸닥였어. 밥이 괜찮다니 댄도 오케이였지. 서로 인사를 나누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밥은 저도모르게 세들어(?) 사는 땅을 완전히 접수하는 미래를 떠올렸지. 아주 근사해. 그뤠이트 그뤠이트.
그렇게 <깊은 숲 속 호숫가 근처 오래된 나무 둥치 아래 사이좋은 너구리 사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 시작되었어.
***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수확은 여우놈이 팔매질한 사과 두 개가 전부야. 밥은 실망하지 않기로 해. 내일 더 주으면 되니까. 당장 오늘부터 겨울잠을 자게 되도 괜찮을만큼 넉넉하게 먹이를 쌓아둔 건 아니지만 형제들과 살고 있는 굴 안의 정비는 이미 완벽하게 끝내놨으니까 걱정은 없었어. 작년에 비한다면야 올해는 차고 넘치는 수준인걸. 굴이 좀 좁은 느낌이긴 해도 넷이 꼭 붙어 잘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기도 하고.
밥은 생각을 바꿔 작은 사과는 한창 먹성이 오른 루크에게 주고 큰 것은 셋이 나눠먹기로 해. 저장해두는 것도 좋지만 배를 채우고 잠드는 것도 중요하니까. 각자 먹이를 구하러 흩어졌던 형제들이 돌아올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밥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어.
그리고 믿지못할 광경을 보았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커다랗고 새카만 늑대가 굴 앞을 떠나고 있었어. 입에는 뭔가를 한가득 물고. 미처 늑대 입 안에 다 들어가지 않은 눈에 익은 네 다리와 꼬리가 허공에서 덜렁거리고 있었어.
눈 앞이 하얗게 번득이고 뒷목이 찌릿한 순간, 밥은 들고있던 사과들을 내던지고 미친듯이 몸을 날렸어.
"메이저!"
늑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가만히 바라봤지만 밥의 눈에는 벌벌 떨고 있는 메이저의 몸통밖에 보이지 않았어.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밥은 열심히 달렸어. 갑자기 뒤에서 덥치는 뭔가에 치여서 땅바닥에 납작 눌렸을 때도 밥의 네 다리는 허공을 할퀴고 있었어.
"이거 놔! 메이저! 메이저!"
"가만히 있어. 지금 뛰어간다고 늑대를 상대로 구해낼 수 있을 거 같아?"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댔지만 밥은 계속 몸부림을 쳤어. 이렇게 형제를 잃을 수는 없었어. 이럴 수는 없었어. 밥은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을 들어 애타게 메이저를 불렀어.
밥을 가만히 노려보던 늑대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에 물고 있던 메이저를 땅에 내려놨어. 메이저는 잠깐 비틀거리더니 밥을 보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어.
"밥! 안그래도 찾ㅇ-"
밥은 혼신의 힘으로 위에서 누르고 있는 뭔가를 털어내고 벌떡 일어나 제 앞으로 다가온 메이저의 앞발을 꼭 잡았어. 어서 도망가야해. 말도 나오지 않아서 무작정 앞발을 잡아당기기만 하는데 메이저는 힘을 주고 버티며 꼼짝도 않는 거야.
"밥! 밥, 잠깐만. 나 말 좀 하고."
"나중에 해! 도망가야 한다고!"
"왜? 여우는 갔어."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메이저 때문에 밥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 여운지 뭔지 난 모르겠고 당장 저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에게서 도망가야 하는데 메이저 이 멍청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만나서 다행이야 밥. 한참 찾아야 되는줄 알았어. 댄이랑 루크랑은 벌써 인사했거든."
"...인사?"
"웅. 나 이제 독립할게. 그동안 고마웠어 밥. 내년 봄에 다시 보자."
밥의 눈 앞이 이번엔 새까매졌어. 밥은 꽉 틀어쥐고 있던 메이저의 앞발을 놓칠뻔하다가 다시 단단히 움켜쥐었어.
"...왜... 무슨.. 갑자기...?"
"마크가 나랑 같이 살고 싶대. 왜, 내가 먹이 구해오는게 좀 괜찮았잖아? 그거 다 마크가 도와준 거였어. 마크는 내가 좋아서 날 도와준거고 그러다가 같이 살고싶어졌대. 같이 살아요 내 사랑 그래서 저도 좋아요! 했어. 히힛."
수줍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메이저를 어처구니 없다는듯 바라보던 밥의 안에서 뭔가가 툭 끊겼어. 밥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한단어 한단어 버럭버럭 악을 썼어.
"늑대는! 너구리를! 먹어! 방금 저게 널 잡아먹으려고 했다고!"
밥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추렸던 메이저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처럼 말을 늘어놨어.
"아 그거? 에이 아냐아냐. 늑대들은 친애의 표시로 서로의 입 안에 머리를 넣는다잖니. 내 입에는 마크의 머리가 다 들어오질 않아서 나는 그냥 귀를 물어줬어. 그리고 저거 의외로 편하다? 옛날에 엄마아빠가 물어서 옮겨줬던거 생각도 나고."
"물어서 옮겨주는게 아니라 물어가지고 가서 잡아먹으려는 거겠지! 같이 살기는 무슨! 그냥 늑대의 겨울 저장식량이 되는 거라고!"
빌어먹을 늑대새끼가 대체 우리 형에게 무슨 소리를 지껄였길래 암만 멍청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해? 밥은 본능적인 공포를 무시하며 늑대를 삿대질했어. 온통 새카맣고 눈만 희번덕거리던 늑대가 입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쏟아지며 낮은 으르릉거림이 밀려왔지. 밥은 발작적으로 메이저를 잡아당겨 제 뒤로 숨기려 했어. 그러나 메이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늑대를 바라보기만 했어. 묵직하고 명징한 소리가 한 번 더 밥에게 밀려왔어.
"늑대는 반려를 걸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메이저는 나 마크의 반려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것입니다."
메이저가 뿌듯한 얼굴로 밥을 돌아보며 '들었지?' 입을 벙긋거렸어. 밥은, 밥은 지금이라도 이 정신나간 형새끼를 기절시켜서 들고 튈 각을 재느라 정신이 없는데 메이저가 밥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담쓰담해줬어.
"이제 내 걱정 안해도 괜찮아 밥, 정말이야. 내가 좀 어설픈 거 알아, 그치만 틀린 선택을 한 적은 없잖아."
......
메이저의 말이 맞아. 메이저의 선택은 항상 옳았어. 태어날 때도 메이저를 따라 세상에 나왔잖아. 하다못해 똑같아 보이는 갈림길에서도 메이저가 가자는 길로 따라가면 적어도 굶거나 길바닥에서 불안하게 선잠을 자진 않을 수 있었으니까.
이제 밥은 슬퍼졌어. 헤어지다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인걸.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이번 겨울까지만이라도 아니 당장 오늘 밤만이라도, 조금만 더 제 옆에 있으면 안되냐고 간청하고 싶은 밥이었어.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밥은 알아. 메이저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고 밥은 그걸 받아들여야 해.
"...정말 괜찮은거지?"
목소리가 떨려서 제대로 말이 전달된건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메이저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꾸닥였어.
"잘 자, 좋은 꿈 꾸고."
......
멍해진 밥을 향해 싱긋 웃어준 메이저가 미련없이 몸을 돌려 마크에게 돌아갔어. 늑대는 세상에 움직이는 것이 메이저밖에 없다는 듯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통실통실한 너구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메이저를 물어올렸어. 밥은 차마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겨우 실눈을 떴어. 심장이 써늘해지고 온 몸이 덜덜 떨렸지만 밥은 숨까지 참아가며 마크를 마주 노려보았어. '니가 기어코 내 형을 헤코지한다면 널 아주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거야.'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열심히 눈빛으로 전달한 것이 통했는지 마크는 밥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떠나갔어. 덜렁거리는 메이저는 늑대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지. 밥은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을 줄줄 흘렸어.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어. 굴 안에서는 댄이 기다리고 있었고 댄은 밥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묵묵히 밥을 꼭 끌어안았어. 밥은 댄의 어깨에 기대 엉엉 울었고 형제는 한참동안 꼭 끌어안고 있었어.
"형아 이것 봐! 굴 앞에 사과가 있어! 완전 쌔건데 두 개나 있..."
품 안 가득 사과를 안고 들어오던 루크는 형들이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했다가 곧 시무룩해져서 식량창고에 사과들을 조용히 내려놨어. 그리고 꼼질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댄이 앞발을 까닥거리자 얼른 다가와 밥의 등에 찰싹 붙었어. 다시 셋이 된 형제들이 서로를 꼭 안아줬어.
***
동생들의 품 안에서 울다 잠들었던 밥은 땡땡 부은 눈을 힘겹게 뜨며 자신이 곧 겨울잠에 들 거라 예감했어. 그렇다는건 댄도 루크도 겨울잠이 멀지 않았다는 거지. 댄은 이제 두번 째 겨울잠이니까 스스로 준비를 할 수 있지만 루크는 아닐거야. 작년의 댄처럼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잠에 빠지기 십상이라 루크를 주의깊게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밥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어.
입구로 다가갈수록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댄의 목소리가 들렸어. 이상했지. 댄은 어렸을 적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던 터라 가족들 이외의 누구와도 말을 나누거나 같이 있는걸 극도로 꺼렸거든. 그런데 지금 목소리는 자기나 루크나 메이저에게 말할 때처럼 단조롭고 뚱하게까지 들렸단 말이야. 저렇게 편하게 말을 나누는 상대가 대체 누굴까. 밥은 빼꼼히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어.
"아, 형. 마침 잘 나왔어. 우리 환풍구 말인데-"
"...방금 누구 있었어?"
"어? 아, 찰리 씨?"
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어. 찰리 씨? 그게 누구지? 아니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상대가 있었단 말이야? 곰곰히 생각하던 밥의 머리에 수상하게 근육질인 회색 토끼가 떠올랐어. 형제들이 세들어(?) 살고있는 곳과 영역경계선을 마주하고 있는 들판에 사는 토끼야. 자리를 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쳤던 토끼는 미간을 모은채 너구리들을 빤히 바라보며 무례한 말을 몇 마디 던지더니 자기 영역을 넘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곧 신경을 끄고는 제 할 일을 하러 가버렸어.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뭐가 그렇게 바쁜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걸 몇 번 봤었는데...
"친해졌었네..."
"어...뭐... 서로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받긴 했지... 그래서말인데, 우리 환풍구가-"
댄이 삐걱삐걱 말을 돌리며 어색하게 눈을 피했어. 형제들에게는 좀 덜한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와 대화하는걸 힘들어하는걸 알아서 밥은 말을 보태는 대신 순순히 댄을 따라 겨울잠을 대비해 뚫어놓은 환풍구를 다시 매만지기 시작했어. 원래도 머리가 좋고 재주가 있어 굴의 설계 전반에 걸쳐 솜씨를 부린건 댄이었지만 아무래도 겨울을 넘겨야하니 더 많이 신경이 쓰였나봐.
"-그래서 찰리 씨에게 조언을 많이 받았어. 아무래도 겨울을 몇 번 넘겨봤다니까 노하우가-"
"별 일이네. 그런거 순순히 알려줄 거 같이 안생겼던데."
"...그-런가...? 뭐 첫인상이 좀 그렇긴 했는데 또 아주 못된 건 아니라서... 왜 지난 여름에 우리 굴 앞으로 물길이 생겼을 때도 말이야,"
답지않게 조잘조잘 늘어놓는 얘기에는 찰리 씨의 비중이 엄청났어. 먹이를 구하거나 주변을 살피거나 하느라 각자 흩어져있느라 몰랐는데 댄의 낮시간은 거의 찰리와 함께였던 모양이야. 눈을 반짝이며 찰리의 좋은 점에 대해 늘어놓는 생기있는 댄의 목소리를 들으며 밥은 점점 어깨가 차가워지며 마음이 가라앉는걸 느꼈어. 메이저가 떠난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그래서,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고 간 거야. 싹싹하다니까 의외로."
긴 한숨과 함께 댄이 말을 맺으며 씁쓸하게 웃었어.
"..봄까지 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왜 기억 못해?"
"한참 바쁠 거 아냐, 부인이랑 아기 토끼들도 잔뜩 있고- 뭐, 그런-"
"...댄, 혹시 찰리 씨랑 같이 겨울을 보내고 싶어?"
밥은 눈을 꾹 감고 재빠르게 말해치웠어. 한참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댄은 환풍구를 돌보던 표정 그대로 묵묵히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어.
"겨울 내내 잠만 처잘텐데 뭐하러 자릴 옮겨.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잠자리를 만져놨는데."
딱딱한 말을 애써 가볍게 흘리며 댄이 어깨를 으쓱했어.
"게다가, 말했잖아, 부인이랑 아기토끼들, 찰리 씨도 나같은 거 신경쓰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ㄱ-"
"같이 살고 싶어요!"
형제는 화들짝 놀라 삐익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 눈까지 새빨개진 회색 토끼가 수염을 뻣뻣하게 세운 채 온 몸을 부풀리고 서 있었어. 발치에는 잘 마른 풀들이 수북히 쌓여있었지.
"같이, 같이 살아요! 살고 싶어요! 내년 겨울에도! 그 다음 겨울에도! 계속! 나, 부인도 아기도 필요없고 댄 씨만 있으면 되니까! 댄 씨가 자고있는 겨울동안 내가 지켜줄 수 있으니까! 댄 씨만 좋다고하면...! 아니, 댄 씨가 좋아하게 노력할게요! 약속해요!"
밥은 절망감을 느끼며 어깨를 늘어트렸어. 역시나. 댄은 돌덩어리라도 된 듯 눈을 크게 뜨고 굳어서 찰리를 바라보기만 했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찰리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척척 걸어와 댄의 앞발을 잡고 살짝 당겼어.
"같이 가요."
댄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밥을 바라보았어. 잡아주길 바라는 듯한 가도 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밥은 뭐라고 답을 돌려줘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어. 그저 두 앞발을 벌려보이며 댄의 결정을 기다릴 수 밖에. 마침내 댄이 고개를 돌려 찰리를 바라보았어. 찰리의 잔뜩 긴장한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바보같은 환한 미소가 지어졌어. 두 발로 댄의 발을 꼭 쥐고 몇 번 세게 흔든 찰리는 흥겨운 얼굴로 밥을 돌아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제 발치의 마른풀더미를 번쩍 집어들었어.
"이거! 이거 제가 가을동안 말린 풀이에요! 잠자리에 깔아두면 겨울동안 푹신하고 따뜻하게 잘 수 있어요! 입구에 가져다 둘게요!"
덩실덩실 춤을 추며 풀더미를 옮기는 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밥이 피식 웃으며 댄에게로 고개를 돌렸어. 댄은 얼굴을 붉히기는 너무 부끄럽다는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밥을 와락 껴안았어. 세게 등을 두어번 두드리고 팍 떼어내더니 눈을 번득이며 우다다다 말을 쏟아냈지.
"그거 알아? 형은 가끔 너무 무모해. 우리가 잡식종이긴 해도 털가죽붙은 사냥감에게 혼자 덤비는건 진짜 위험하다구. 그리고 아무리 조금이어도 못보던 풀이나 열매 함부로 입에 넣지 마. 내가 모르는 곳에서 혼자 그러다 쓰러질까봐 얼마나 무서웠는데."
어...? 밥이 미처 대답을 못하는 사이 댄이 다시 밥을 끌어안았어. 이번에는 좀 더 길고 애틋하게.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댄이 말했어.
"나랑 큰 형 굶기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 알아. 미안해. 고마워. 그치만 형 목숨을 담보로 그러진 마 정말. 앞으로도 그러지 마. 이제 그렇게 필사적으로 먹이 모으지 않아도 괜찮잖아, 그렇지?"
밥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걸 느꼈어. 울먹이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댄의 등을 두드린 밥이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루크는-"
"루크는 걱정마. 내가 잘 얘기할게. 잘 돌볼거니까."
"걔가 형을 잘 돌볼 거니까 걱정 안 해. 자기 전에 무슨 일 있으면 루크랑 상의하고."
어느새 풀더미를 다 옮긴 찰리가 댄의 뒤로 다가서서 작게 큼큼거렸어. 댄은 미적미적 밥의 품에서 빠져나왔어.
"잘 자 형. 봄에 다시 올게."
......
엄마아빠도 우리가 독립해 나올 때 이런 기분이셨을까. 토끼와 함께 마른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댄을 배웅하며 밥은 생각했어. 봄이 오면 다시 만날텐데 왜 이렇게 서운한지 모르겠어. 그러고보니 밥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혼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 반려를 맞이할 생각도 없었어. 그냥 이대로 형제들끼리 쭉 같이 살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을까. 한 배에서 나왔어도 각자 독립하는게 당연한 일인데. 여차하면 영역이나 먹이나 반려를 놓고 서로 싸워대는 것도 비일비재한데. 메이저도 댄도 씩씩하게 헤어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훌륭한 어른 너구리가 되었는데 자신만 아직도 어린 너구리인채 하나도 자라지 못했나봐.
***
"미안해 형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풀죽은 목소리에 밥은 허탈하게 웃었어. 쬐끄만게 뭘 안다고. ...그래, 루크가 있었지. 돌봐줘야할 동생이 있었어. 아직 완전히 혼자는 아니잖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루크를 향해 돌아선 밥은 깜짝 놀라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 벌벌 떨리는 앞발을 들어올려 가리킨 곳엔 꿈지럭거리며 쭈그러든 루크와 그런 루크의 등 뒤에 숨기라도 하겠다는 듯 커다란 덩치를 한껏 구긴 채 귀를 바짝 젖히고 고개만 내밀어 눈치를 보고 있는 개새끼 한 마리가 있었어.
밥은 그 개새끼를 알아. 여기서 좀 떨어진 곳의 농장에 사는 어린 보더콜리야. 보더콜리들은 항상 일하느라 바쁘다던데 늦여름에 루크와 투닥거리다가 형제들에게 된통 혼나고 쫓겨난 뒤에도 주변을 기웃거리며 루크와 티격태격하더니 최근엔 매일같이 놀러오는 팔자좋은 놈이었어. 루크에게 매번 깨물려 아프다고 깽깽거리면서도 좋다고 꼬리를 흔들어대는게 아무래도 어딘가 좀 모자라는 것 같아서 형제들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브렛이 가출해서 갈 데가 없대... 우리가 자는 동안 보초를 서주겠다고 굴에서 봄까지만 지내게 해주면 안되냐고 하는데... 안될까?"
되겠냐!
안그래도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판에, 밥은 무심코 소리를 빼액지를뻔 했어. 가출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사람네 농장에 얹혀살면서 구름처럼 푹신한 깔개 위에서 자고 공짜밥 얻어먹고 허구헌날 루크랑 노는게 일인 개새끼가 가출은 무슨 놈의 가출이야.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도 겁도 없이 배를 까고 팔다리를 쭉 늘어트린채 쿨쿨 자는 놈이 겨울 내내 보초를 서겠다고? 이 좁고 춥고 어둡고 딱딱하고 눅눅한 굴 앞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밥은 쿡쿡 쑤셔오는 미간을 집으며 고개를 흔들었어. 안된다고 실랑이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앞발을 내저었지.
"저기! 저기이, 하숙비도 가져왔어요! 겨울동안 저 먹을 것도 따로 챙겨왔구요! 밥 축내지 않을게요! 이불이랑 방석도 챙겨왔어요! 따뜻하게 잘 수 있어요! 저 보더콜리예요 아시잖아요 집 잘 지켜요, 네? 네?"
"형아! 형아! 얘 한 번만 받아주자 응? 얘 멍청이라 어디가서 굴도 못 파고 먹이도 다 뺏기고 눈 내리면 밖에서 자다 감기 걸릴 거야. 얘 덩치만 크고 목소리만 컸지 사냥도 못 해. 혼자서 어떻게 살아, 내년 봄까지만 봐주자 응? 응?"
양쪽에서 매달려 징징대는 통에 정신이 없는 밥이었어. 아니 진짜 이 철딱서니 없는 것들을 어쩜 좋아. 당장 키우던 개가 없어졌는데 농장에서 찾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드나? 저 덩치 큰 놈이 들어오면 굴 속이 꽉 찰텐데! 게다가 식량은! 아무리 입이 넷에서 둘로 줄었다지만 그래도 객식구까지 먹일 양은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런데도 밥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두 녀석은 영차영차 밥을 끌고가더니 굴 입구에 세웠어. 큰 자루에 당근과 고구마와 옥수수가 개밥이랑 같이 가득 담겨있었고 옆에는 낡은 천과 깔개도 있었어. 개새끼가 자기 밥푸대에 창고에서 털어온 것과 제 이불요까지 담아 끌고온 모양이었어. 턱힘이 대체 얼마나 센 거야. 밥은 어이가 없었지. 의기양양하게 '봤죠?'하고 눈을 빛내는 두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또 불쌍한 얼굴로 끼잉거리며 밥에게 부빗거리기 시작했어.
"형아아, 한 번만 봐주자 응? 얘 바보지만 애는 착해. 얌전히 있을 거야, 그럴거지 브렛?"
"그럼요 당연하죠 재워만 주세요 제발."
"...우린 다 겨울잠 잘 거고 너 심심해서 못 있어."
이구동성으로 아니라고 잘 있을 거라고 괜찮다고 소리질러대는 뻣뻣하고 긴 털과 부드럽고 긴 털에 파묻혀서 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정말이지, 개새끼야 사람들이 오냐오냐해서 철이 없다지만 독립해서 나온 한 마리의 너구리인 루크까지 왜 이러는 걸까. 역시 친구를 잘 사귀어야만... 문득 밥은 루크와 둘이서만 겨울을 나야한다는 생각에 등이 선뜻해졌지.
...개 한 마리 있는게 좋을 지도...
"...시끄럽게 굴면 바로 내쫓을 거야."
잠깐 조용하던 두 녀석이 와아아아 환호성을 지르며 꺅꺅거렸어. 밥은 금새 후회했지만.
정신없이 바스락대며 장난치는 둘을 몰아서 쌓인 물건들을 안으로 옮기고 입구를 단단히 막았어. 이제 내년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진 다시 열릴 일이 없으니까 다른 짐승의 눈에 띄거나 눈보라가 들이치지 않게 꼭꼭 막아두었어. 여차할 때 쓸 뒤쪽 입구도 잘 숨겨두고나자 어느새 밖은 온통 깜깜해진 뒤였어. 하루종일 붙어서 떠들어댔으면서도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이 남았는지 브렛과 루크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수다를 떠는데 여념이 없었어. 밥은 머리가 징징 울릴 지경이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루크의 목소리가 뚝 끊겼어.
"루크?! 루크 왜그래! 야!"
브렛이 가져온 당근을 입 안 가득 씹고있던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루크때문에 브렛은 혼비백산했어. 안절부절하는 브렛을 밀어낸 밥은 침착하게 루크의 입에서 당근을 빼내고 숨소리를 귀기울여 들었어.
"자는 거야."
"무슨 잠버릇이 이래요!"
"첫 겨울잠이라 어쩔 수 없어."
낑낑거리며 루크를 밀어 잠자리로 옮기려는 밥을 바라보던 브렛이 조심스럽게 루크의 목덜미를 물어다가 잘 마른 풀더미가 푹신하게 쌓인 위에 내려놨어. 아쉬운 얼굴로 루크를 몇 번 쿡쿡 찔러보더니 시무룩하게 루크의 등 뒤에 붙어서 똬리를 트는 브렛을 잠깐 바라본 밥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픽 웃었어.
"심심할거라고 했지?"
"안 심심해요."
뚱해져서는 콧김을 푸릉 뿜는 브렛을 무시하며 밥먹던 자리를 정돈하고 루크의 옆으로 올라온 밥이 자리를 잡고 누워 눈을 감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어.
"브렛."
"네 형님!"
"나도 곧 잠들 거 같아."
"넵! 걱정마시고 푹 주무세요! 제가 철통같이 경비를-"
"시끄럽고, ...나 잠들고 하루 쯤 있다가 뒷문으로 나가서 집에 가."
"저, 저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허락하셨잖아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낑낑거리려는 브렛에게 쓰읍- 주의를 준 밥이 말을 이었어.
"보더콜리가 이 좁은 굴 속에서 봄까지 누워만 있겠다고? 하루만 안 뛰어도 병나는 족속이?"
"...그, 그건..."
"됐으니까 말한대로 가. 집 개가 무슨 가출이야. ...나가면서 입구 잘 숨겨놓는거 잊지 말고. 루크가 걱정되면 겨울 끝날 때쯤 와 봐. 공기가 달라지니까 알 수 있어. ...너랑 루크의 운이 좋다면 루크가 깨는날 네가 딱 맞춰 찾아올 수도 있겠지."
"...매일 올게요."
"굶주린 맹수들에게 여기 뭐 있다고 신호줄 일 있어?"
"...적당히 올게요..."
***
브렛은 눈을 반짝 뜨고 슬며시 고개를 쭉 내밀었어. 너구리 두 마리가 꼭 붙어서 브렛이 가져온 애착 담요를 나눠덮고 조용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 브렛은 그래도 둘의 눈 앞에서 앞발을 휘적거려보았어. 꼼짝도 않는 루크와 밥을 보며 안심한 브렛은 담요의 끝자락을 정리해 루크와 밥의 몸을 잘 덮은다음 몸을 일으켜 조용조용 뒤쪽 입구 앞으로 나왔어. 밥이 꼼꼼하게 숨겨둔 굴 입구 앞에서 귀를 쫑긋거리던 브렛은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고는 앞발로 막아둔 것의 이음새 부분을 퍽 후려쳤어. 아직 다 굳지 않은 흙덩이와 나뭇가지가 조금 떨어져 나왔을 뿐 멀쩡했지. 브렛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번에는 좀 더 세게 앞발로 입구를 퍽퍽 쳤어. 나중에는 주둥이로 후벼파고 박박 긁어대고 아주 난리를 쳐댔지. 그러다 마침내 주둥이가 드나들 만큼의 구멍이 생기며 차가운 바람이 새들어왔어. 브렛은 흠칫 놀라 서둘러 남은 벽을 부쉈어. 밖에서도 앞발 두 개가 나타나 힘을 보탰지. 네 개의 앞발과 두 개의 주둥이가 합심하니 견고했던 입구벽은 금방 무너져내렸어. 브렛은 헥헥거리며 굴 앞에 선 상대를 쳐다보았어.
"굼뜨기는."
단정하게 앉아 수염을 매만지던 여우가 한 마디를 던지고는 굴 안으로 성큼 들어왔어. 제 굴인양 능숙하게 너구리 형제가 잠들어있는 굴 안쪽으로 들어가는 여우를 서둘러 뒤따라온 브렛은 여우가 밥 위에서 담요자락을 휙휙 물어 젖히는걸 봤어.
"뭐하는 짓이야!"
"더럽게 이런거 왜 덮어놔. 도로 가져가. 필요없으니까."
"안 더러워! 덮고있는게 안 춥다고!"
"개새끼 냄새나서 기분 더러우니까 치우라고."
여우새끼 진짜 승질하고는. 저런걸 진짜 형님이랑 둘만 두고가도 되는 걸까. 브렛은 잠시 고민했어. 그렇지만 여긴 너무 춥고 딱딱했고 브렛은 루크를 데려다 농장의 따뜻한 벽난로 앞에 놓인 안락한 자기 바구니에 눕게하고 싶었어. 장난감도 많이 있고 같이 놀아줄 작은 사람도 많이 있는 좋은 곳에서 루크도 함께 있고 싶었어.
그치만 그건 그거고 저 여우새끼를 진짜 들여도 괜찮았던 것일까.
"뭘 멍때리고 있어? 빨리 움직여."
브렛은 한숨을 내쉬었어.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찬바람이 자꾸 들어와 선잠에 든 루크와 밥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루크? 루크, 여기 올라가서 자자. 쫌만 움직이자."
잠투정하는 루크를 살살 달래 제 방석 위로 옮기고 담요로 꼭꼭 둘러쌓고 나니 여우는 어느새 밥이 잠든 주위로 마른 풀을 북돋아 따뜻하고 포근하게 둘러주고 있었어. 자기 애착담요는 더럽다고 내팽개쳤던 여우에게 짜증이 난 브렛은 그 마른풀은 다른 놈이 주고 간 거라고 쏘아붙일까 하다가 모르고 내년까지 실컷 끼고있으라지 내년에 두고보자 싶어져서 입을 다물기로 했어. 대신 루크의 남친으로서 엄중하게 한 마디를 하기로 했어.
"너어, 너 내가 매일 감시하러 올 거야. 형님 수염 한가닥이라도 건드려봐. 내가 너 가만 안 둬. 알았어? 큰 주인님한테 일러서 혼내줄거야."
"왜, 아주 여기 겨울잠 자는 뭔가가 있다고 하울링도 하시지? 너 진짜 보더콜리 맞아? 멍청하게 소란떨지말고 빨리 꺼져."
***
제이크는 조심조심 방석 끝을 물고 가는 브렛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굴 입구를 다시 막기 시작했어. 저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농장까지 가려나 싶은 속도이긴 했는데 저 앞에 작은 인간들이 개새끼를 찾으러 나와 있으니까 아마 금방 주워질 거야. 인간들이 좀 귀찮게 굴긴 하겠지만 막내너구리는 이제 인간의 집에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겨울잠을 잘 수 있겠지. 앞으로도 계속.
앞발과 길쭉한 주둥이로 입구 주변을 꼼꼼하게 메꾸는 제이크의 꼬리가 흥겹게 살랑거렸어. 이제야 겨우 다 치워버렸단 말이지. 덜떨어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감이 좋은 큰 놈이랑 눈치도 빠르고 경계심도 커서 머리써야 했던 세째랑 쬐끄만게 드세고 힘만 쎄서 애먹였던 막내까지. 멍청한 개새끼 꼬드기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의심많은 토끼와 자신조차 '야저건안되겠다다른놈알아봐야지'싶었던 속을 알 수 없는 늑대까지. 어쨌든 이제 다 치워버렸어. 이번 겨울뿐만 아니라. 내년 봄에도 내년 겨울에도 계속 계속 쭉.
"드디어."
너와 둘이서. 단 둘이.
따스한 봄날의 이른 아침에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는 아직 어렸던 너구리와 눈을 마주친 날부터 늘 꿈꿔왔던 시간이, 혼자 다니는 너구리가 혹시나 잘못될까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마음졸이며 따라다니던 시간이 다 지나고 드디어.
입구를 다 막고 숨겨둔 출입구와 환풍구까지 전부 확인한 제이크는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는 굴 안쪽으로 들어갔어. 준비없이 형제들을 떠나보내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던 (심지어 막내는 가는 줄도 모르는) 밥은 몸을 잔뜩 웅크린채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잠들어 있었어. 아직 본격적으로 깊은 잠에 든 게 아니라 깨어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제이크는 밥의 옆에 누웠어. 살그머니 이마를 맞대고 품 안에 끌어안듯 풍성한 꼬리로 밥을 감싼 제이크는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어.
여우는 겨울잠을 잘 필요가 없으니까 공기가 싸늘해지고 호수가 얼어붙고 눈이 내려 땅 위의 모든 것을 덮을 동안 밥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만족스러웠어. 부드러운 햇빛 아래 얼음이 녹고 땅이 물러지며 풀싹이 올라올 때까지 아무도 제이크와 밥을 방해하지 않을 거야. 언제쯤 그 예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봐줄까 두근두근 기대하면서, 예쁘다 곱다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겁쟁이 여우의 품에 안겨 봄에 깨어날 때까지 그 때까지 작은 굴 속의 세상엔 제이크와 밥만 있는 거야.
제이크는 코 끝으로 밥의 코를 살짝 눌렀어. 움찔한 밥이 꾸물꾸물 제이크에게로 몸을 붙여오는 것을 기쁘게 받아안으며 밥의 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제이크였어.
잘 자. 봄에 만나.
***
너굴이 한 마리 몰고가세요
그럴 능력이, 있으면
행맨밥 마크메이저 찰리댄 브렛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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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주님 생축글이 이딴 허접이라 몹시 민망..
- 동물의 세계 알못 ㅈㅇ
- 스토킹&스텔싱은 범죄임미다 ㅇㅅ"ㅇ (by 밥 더 너굴raccon dog. 미국너구리common raccon와는 다르다 미국너구리와는!)
- 루이스 풀먼의 31번째 생일 축하!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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