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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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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낼 집에 들어간 송태섭은 비서가 옮겨다 준 짐 펼쳐놓고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겠지. 크게 정리할 것도 없었음. 옷이랑 쓰던 물건들. 산모수첩과 아주머니가 선물로 주신 영양제들.
생각해보니 남들은 아기 생기면 귀여운 신발이랑 옷들도 사게 된다던데, 우리 아기 거는 하나도 없네. 아기한테 좀 미안해진 송태섭 배 한두 번 쓰다듬다 아주머니가 준 약부터 챙겨먹을 듯. 그러곤 아직 소파도 없는 거실에 드러눕겠지. 아... 찬 바닥에 눕지 말랬는데.
혼자 조용한 집에 가만히 누워 있으니 이명헌이랑은 이제 진짜 남이라는 게 실감나기 시작함. 이제 아예 얼굴 마주칠 일조차 없을 거라는게.


처음 시작은 어땠더라. 그렇게 싫은 티를 냈어도 별 말 없었지. 처음 만난 식당에서, 지금 이 결혼 나만 싫냐는 말에 메뉴는 골랐냐고 다른 말이나 하고. 진짜 나랑 결혼할 거냐니까 그땐 흔들림도 없이 할 거라고 대답했었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낯설었던 나를 이끌어줬고, 먼저 소개도 시켜줬었지. 행사 때 입을 옷들을 골라 옷장을 채워두고, 어울리는 신발과 넥타이까지 챙겨줬었지. 그땐 그게 나를 위한 선물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한텐 품위유지비 같은 개념이었으려나.
처음 조심스레 관계를 제안했을 때도, 당황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 아마. 그땐 그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 감정도 안 들어서 그랬던 걸까. 말로는 안 해줘도, 그의 몸짓에 애정이 담겼다고 생각했는데. 부드럽고 조심스레 대해주는 그 행동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기 싫었어도 결혼생활을 잘 이어나가기 위해서 내게 장단 맞춰준 걸까. 집안 어른들이 기다리는 아이 때문에 억지로라도 한 걸까.
어쨌든 조금 알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의 사촌동생을 만나기 전까진. 나한테 줬던 다정함은,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는 걸 알았으니까. 꿈에서 깨는 기분이었어. 그래, 그럴리가 없지.계약으로 시작된 이 결혼에 사랑이 남을 리 없지.
패배감 후에 찾아온 건 예상치도 못한 선물이었어. 뱃속에 자리잡은 그 사람과 나의 아이. 내 아이를 거짓 속에서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어. 입덧은 위염으로, 몸살 기운은 가벼운 감기로. 이혼해줄 때까지 참고 억눌렀어. 혀끝까지 올라오는 토기와 온 장기를 밀어내며 커가는 아이의 존재를.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줄은 몰랐지만, 아이를 들키고 나선 작은 기대도 해봤지. 지금이라도 이 사람이 나를 붙잡아준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전부 쓸데없는 상상일 건 모르고. 5개월 만에 처음 알게 된 아이의 존재와 건강에 대해 묻기보다, 이혼 서류를 내밀었더랬지. 그렇게 원하던 거, 이제 해준다고. 본인에겐 아이의 존재란 고려 대상도 아니라는 것처럼.

결혼 생활을 한 번 짚어보니 본인이 그렇게나 바보같을 수 없었음. 이건 모두 나를 착각하게 만든 그 사람 잘못인가? 주제도 모르고 착각한 내 잘못인가. 애초에 이게 잘잘못을 따질 만한 사항이던가... 한참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린 건 갑자기 배에서 느껴진 태동 때문이었음. 처음 느낀 아이의 움직임. 

사실 여태까지 병원을 안 갔던 건 이명헌에게 들키기 싫어서도 있지만, 잠깐 현실도피를 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음. 그냥 있으면 애가 뱃속에 있는지 어떤 지도 전혀 안 느껴졌으니까. 병원에 가면 살아있다는 걸 온전히 느끼게 될 테니까. 내가 멍청했지. 그깟 이명헌이, 그깟 결혼이, 그깟 사랑이 뭐라고. 온전히 내게 의지해있는 생명을 먼저 사랑했어야 했는데. 이 아이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는데... 아이의 존재를 잠시나마 부정하고 살았던 게 미안해 눈물이 났겠지. 아가야.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해.



송태섭 나가고 이명헌도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고민했을 듯. 가족 수 많아지는 거 생각해서 큰 집으로 온 거라 혼자 지내기엔 좀 과한 감이 있었겠지. 두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었으니 굳이 고용인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 근데 집 옮길 생각하니 그게 더 귀찮아서 그냥 신혼집에서 계속 지내기로 함. 

혼자 살았던 기간 내도록 익숙했던 혼자에서, 길어봐야 2년 남짓. 그 중에 반쯤은 이혼 이야기로 데면데면하게 지냈는데... 불 꺼진 집으로 퇴근하는 게 낯설게 느껴졌음. 사람이 참 간사하지. 고작 그 기간 만에. 잠깐 생각하던 이명헌 저녁은 건너뛰고 서재로 향하겠지. 가볍게 처리할 일이 있어 잠깐 책상에 앉았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소파에 문득 낯선 담요가 예쁘게 개어져있는 게 보임. 저런 게 우리 집에 있었던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날이 생각났겠지. 송태섭이 퇴원하고, 이혼서류를 내밀었던 그 날. 다음 날 아침 바로 출근 준비를 하느라 이런 걸 덮고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덮어준 건가. 앞으로 전 남편이 될 사람한테? 우리가 그런 정까지 나눈 사이였나.

송태섭을 떠올리면 눈치보던 얼굴, 당황하던 얼굴, 부끄러워하던 얼굴 같은 게 생각났음. 그 뒤엔 상처받은 얼굴, 무언가 참는 듯한 얼굴. 마지막은, 짜증나도록 신경쓰이게 만들던 얼굴.
담요를 덮어줄 땐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슨 얼굴이었을까. 방금 떠올린 것중 하나의 표정을 지었을까. 마지막으로 저녁 먹은 날 보니 생각보다 표정이 다양하던데. 다른 표정을 지었으려나.
애초에 이걸 왜 궁금해하고 있지?

이혼이 원래 이런 건가. 아니, 사랑 없는 결혼이어도 헤어짐이란 원래 찝찝하게 뭔가를 남기는 거겠지. 원래 없던 거랑 있다 없어진 건 확연히 다르니까. 

자려고 누워도 무게감 없는 옆자리. 머리 말리려 거울 앞에 서면 반쯤 비어있는 화장대 앞 화장품들. 옷 입으러 들어가보면 드레스룸엔 작게 비어있는 공간. 그런 것들이 거슬리는 이명헌. 꽉 채워져 있던 게 없어져 시각적으로 거슬리는 것이려니. 어차피 금방 익숙해지겠지. 
밖에서 저녁 해결하고 들어온 이명헌은 오늘도 서재로 향함. 딱히 할 것도 없으니 책이라도 읽으려 했지. 소파에 앉으면 어제 팔걸이에 뒀던 담요가 팔꿈치에 치임. 툭, 하고 떨어진 걸 가만히 보다가 또 그 얼굴. 꽤 담백하게 마음 썼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짜증나게 게속 생각나네. 

이명헌이 그렇게 원하던 평화로운 일상. 이혼 해주고 말면 더 이상 해칠 일 없다 생각했던 조용한 생활. 말대로 그게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이명헌 머릿 속은 연필로 아무렇게나 낙서한 종잇장처럼 정신없고 시끄럽기 그지 없었음.



명헌태섭


같이 살던 집에 남은 이명헌 혼자만 집안에서 태섭이 흔적 느끼는 거 너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