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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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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이 집 구했단 통보하고 며칠 뒤, 얼마 되지도 않는 짐 들고 이젠 진짜 나갈 일만 남았겠지.

그래도 결혼생활이었다고 나름대로 추억 많은 집 한 번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아주머니께 인사도 드리겠지. 아주머니는 말실수 때문에 사모님이 이혼하시게 된 것 같아 마음 안 좋았을 것 같음... 송태섭 그런 거 아니라고, 그 전부터 이혼 준비하고 있었다고 얘기 드리면서 아주머니 탓 아니라고 안심시켜드림. 그래도 아주머니는 죄송해서 송태섭한테 임산부한테 좋은 영양제며 차 같은 거 잔뜩 챙겨주셨을 것 같다. 고작 1-2년 정도 함께 지냈지만 그래도 집에 자주 붙어있던 태섭이라 정이 많이 들었겠지. 송태섭 주변에 임신출산육아 경력직은 아주머니 밖에 없어서, 궁금한 거 물어보고 아주머니가 알려준 이런저런 정보 들으면 이제 마지막 날이 됨.

이명헌 그래도 이 집에서의 마지막 날이니 송태섭한테 같이 밥 먹자고 했겠지. 이혼서류 제출한 이후로 처음 같이 먹는 저녁이기도 하고. 송태섭도 그에 흔쾌히 응함. 이제 안 볼 사이니까. 송태섭 이명헌 앞이라고 기 죽지 않기로 함.

생선류는 송태섭이 아직 입덧하는 바람에 패스, 날 것도 임산부라 꺼려져서 패스. 양식도 느끼한 거 안 끌리는 송태섭이 패스. 말하는 족족 싫다는 송태섭에 이명헌이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 물어봄. 송태섭 고기 냄새 안 나는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 먹고 싶다고 함. 
그거 듣던 이명헌... 유명한 한우고깃집 데려갈 듯.

결혼 기간 내내, 심지어 임신 후에도 뭘 먹고 싶다고 한 적도 없고, 본인이 무언갈 제안했을 때 싫다고 말했던 적도 없는 사람이. 항상 깨작깨작 맛없게 먹던 사람이. 지금은 맞은 편에서 고기 구워지는대로 냐암냐암 잘도 받아먹고 쌈도 크게 우물우물 잘 먹음. 고기 구워주는 직원한테 이건 무슨 부위에여? 물어도 보고 명이나물 더 주세요.... 하고 접시 두 손으로 들고 부탁도 함. 
이명헌이 처음 보는 송태섭 투성이인 거임. 
평소에 송태섭 입안 꽉 채워 음식 먹는 거 본 적 없음. 직원에게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 외에 말 거는 건 본 적도 없고 맛있는 거 먹어도 눈 동그랗게 뜨고 으음... 하는 말 외엔 반응도 별로 없었음. 
이명헌 그런 송태섭 구경하느라 정작 본인은 먹을 생각도 안 들었겠지. 이명헌 못 먹든 안 먹든 신경 안 쓰고, 된장찌개는 냄새 때문에 못 먹겠다면서 물냉면 시켜먹고 봉긋하게 올라온 배 통통 두드림. 
그래놓고 계산하고 나오니까 또 평소에 알던 송태섭으로 돌아와있음. 점잖고. 조용하고. 얌전하고.

저녁 잘 먹었어요.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이명헌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송태섭 조수석 먼저 타 배에 안 끼도록 안전벨트 맨 다음에 이명헌 준비하는 동안 창밖 볼 듯. 사실 송태섭 정신차리니까 좀 쪽팔렸음. 평소엔 좋아하는 사람 앞이니까, 저 사람이 갑이고 내가 을이니까. 그래서 행동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매일매일 신경쓰며 살아왔는데... 오늘은 어차피 마지막이고 내일부터 안 볼사람이란 생각하니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원래 송태섭 같은 행동들 나왔던 거임. 지금 생각하니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너무 처먹은 것 같고... 평소에 비해 너무 경박하게 행동했던 것 같음. 그래서 너무 쪽팔리는 거... 근데 또 갑자기 드는 생각. 그래, 어차피 마지막인데. 저 사람은 내가 이러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쓸 텐데. 또 과하게 혼자 이명헌 의식하고 있었다는 거 알아챈 송태섭 괜히 우울함. 이러나 저러나 저 사람은 이미 나랑 이혼한 사인데.

이명헌 운전하면서 송태섭 흘긋흘긋 쳐다볼 듯. 아까 밥 먹을 때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먹던 사람이 차에 타니까 갑자기 또 기분 안 좋아 보임. 원래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좀 있다던데...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집까지 가는 이명헌.


아침부터 짐 챙기기 바쁜 송태섭 내려보는 이명헌. 몸 무겁지도 않은지 여기갔다 저기갔다 쉬지도 않고 잘 움직임. 좀 도와줄까 했더니 짐이 고작 큰 캐리어 두 개 정도라... 그거 내려보면서 이제 다 했어요. 끝. 하는 말만 돌아와서 그냥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어 주는 걸로 대신함. 

기사 불러 집까지 짐 옮겨준댔더니 그건 또 싫댄다. 무거운 짐 들고 임산부가 어떻게 갈 거냐니 괜찮은데... 하고 대책없는 말 하고 있어서 이명헌 눈썹 한 번 들썩일 듯. 혹시 내가 집 주소 아는 게 신경쓰여서 그러나. 그런 생각 잠깐 했다가 아무리 그래도 전처 짐 빼는 날, 것도 임산부인 사람 짐 달랑 들고 나가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기사 불러 데려다줄 듯.

송태섭 좀 눈치 보여서 그럼 출근하는 길에 잠깐 내려달라고 함. 집이 그 근처라... 처음으로 출근 시간 차 같이 타고 나가는 두 사람.

차 안은 조용했음. 그러다 이명헌, 문득 동그란 배가 눈에 들어왔겠지. 송태섭과의 이혼에 신경쓰느라 정작 송태섭 뱃속 아이에 관한 건 딱히 생각해본 적 없었음. 송태섭이 임산부란 자각은 있었으나 내 애를 밴 임산부라는 생각도 딱히... 없었고. 
양육권 양육비만 주는 거 너무 무책임했던가.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듦.
임신한 거 안 이후로 직접적으로 송태섭이랑 뱃속 아기에 대해 이야기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냅다 묻는 이명헌.

출산할 땐 옆에 보호자가 있어야 하나?
네? 그거야, 뭐... 없어도... 되죠?
내가 애 아빠로서 더 할 일은.
아직은 모르겠어요.

송태섭은 이런 이명헌 질문에 깜짝 놀랬음. 아직 출산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며, 갑자기 애 아빠로서 더 할 게 있냐니. 송태섭에겐 그 말이 꼭, 이명헌이 아이에 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음. 이젠 제법 티가 나는 배를 한 번 문지르고 쓰게 웃은 송태섭.

이명헌 씨 귀찮게 안 해요.

저기 앞에서 내려주세요. 이명헌은 답답했음. 차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세워놓고.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또 어디까지 가겠다는 건지. 또 갑자기 밀려오는 짜증. 시간 한 번 확인한 이명헌이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낸 비서에게 말함. 집까지 옮겨다주고 오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저 괜찮아요. 출근하세요.
전 남편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가 이러는 건 너 때문이 아니라, 내 체면 때문인 거야.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