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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6 05:52
번호 달라고뿅

시대고증 없음ㅈㅇ..! 걍 보고싶은거 막 쓴거임






그 해 북산의 짧은 신화는 한편으로 끝이었는지 지학과의 경기는 참패로 끝이 났음 부실한 벤치나 전날의 피로같은 핑곗거리야 많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될 것을 다들 알았을거임 안선생님도 마찬가지셨음 철저히 마크당하느라 화난 콧김을 씩씩대는 태웅이를 다독이면서 이만하면 잘 해주었다고 전국대회를 일초라도 뛰어본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해주셨겠지

흠뻑 흘린 땀에 비해 담담하게 선 치수 옆에서 준호도 정렬하려고 자리를 잡았어 이 친구와 주장과 부주장으로 뛰는 경험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좀 먹먹했음 말도 못하고 숨만 겨우 고르는 대만이도 안쓰러웠겠지 상대 선수를 앞에 두고 대만의 등을 토닥이던 준호가 삐죽 튀어나온 머리통들 사이로 문득 관중석을 올려다봤어

어라? 잘못 본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이명헌이었어 하지만 그 많던 산왕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산왕의 감독과 둘이서만 한켠에 앉아있겠지 준호는 의아해하다 이내 지학전을 분석하러 왔겠구나 납득했어 강팀이니까 벌써 윈터컵 준비한다고 그렇겠거니 했음 이유야 뭐든 북산이 처참히 지는걸 봤으니 이런 약팀에 졌다고 억울해하거나 통쾌해할지도 모르겠음 유감은 없다고 했었지만 농구선수란 기본적으로 경쟁에 민감하기 마련이니까 준호는 땀때문에 흐려진 시야탓에 명헌이 제쪽을 보고있는것까진 눈치채지 못하겠지

단촐한 짐을 싸들고 북산은 다시 집으로 향했음 꼭 꿈이라도 꾼 것 같아 옆에서 몰래 훌쩍이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모르는 채 해주려 준호는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음 전철이 흔들거리며 이마 위로 여름 햇빛이 칸칸이 지나갔음




- 준호 왔니?

네, 짧지만 명확하게 대답한 준호가 무거운 현관문을 수동으로 잠그고 신발장 선반에 잘그락거리는 열쇠를 두었음 흔한 복도식 일반 가정집인데 문이 좀 낡아서 그런 버릇이 들었겠지 안테나 달린 라디오에서는 두 진행자가 합을 맞추는 중이었고 엄마는 주방에서 서둘러 아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느라 일순간 소란스러웠어 늦은 오후 햇살이 집 안을 길게 비추고 따끈한 김에서 옅은 된장 냄새가 났음 어쩐지 안정되는 기분에 준호가 슬며시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겠지

이만큼 환대받기엔 집을 며칠이나 비웠다고, 식탁에 준호가 좋아하는 반찬이 즐비했음 두부가 동동 뜬 맑은 된장국이나 바삭하게 구워진 갈치구이가 방금 꺼냈는지 뜨거웠겠지 준호의 엄마는 보드라운 아들의 볼을 통통 두드리며 얼른 손 씻고 밥 먹으라고 하셨음 굳이 말을 더 얹진 않았지만 분명 수고했다는 뜻이었음 준호는 그런 엄마의 다정을 꼭 닮았을거임

오랜만에 둘이 함께 저녁을 먹고 뒷정리도 마칠 쯤, 준호의 어머니는 뭔가에 깜짝 놀라며 준호를 보았음 설거지하느라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어낸 준호가 왜 그러세요? 했겠지

- 오자마자 말한단걸 깜박했네. 낮에 준호 찾는다고 전화가 왔었어.

- 저를요? 어디서요?

백호가 있는 병원인가 싶어 준호가 다급히 물었어 그러자 엄마는 냉장고에 붙어있던 쪽지를 떼서 건냈음

- 산왕고의 이명현 학생이래. 저녁에 다시 전화 준다더라.

물기 어린 종이조각에는 산왕공고 이명현, 하고 적혀있었음 이른 오후, 대충 준호가 전철을 탔을 무렵에 집으로 연락이 왔었대 준호는 조금 얼떨떨했음 실은 어제 대화는 예의상(?) 해본 말이겠거니 해서 연락 절대 안올거라고 생각했거든 삼백원이 그렇게까지 돌려주고 싶은가..

아무튼 준호는 씻고 나와서 유선전화기 앞에 앉아서 전화를 기다렸음 멍하니 앉아 명헌의 이름이 잘못 적힌 종이를 만지작 거리다가, 어머니 교수 첫 취임때 선물 받은 아날로그 시계 초침이 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 미세하게 어긋난 바늘이 두어바퀴를 돌고 저녁 8시 정각을 정확히 가리키자 번화벨이 울렸음

- 여보세요?

- 이명헌이다뿅.

- 네, 전화 받았습니다.

준호의 깍듯한 말투에 명헌은 갑자기 말이 없었음 통신 문젠가 싶어 준호는 수화기를 툭툭 두드렸음 여보세요? 명헌 학생? 두어번 더 부르고 나서야 반대쪽에서 뿅, 하는 대답이 들렸겠지

- 깜짝아..끊어진 줄 알았어요.

- 아니다뿅.

또 한번 마가 떴음 준호는 혼란스러웠음 그래도 어쩔 수 없겠지 아무리 뻔뻔한 이명헌이라도 첫 통화에서 준호의 정갈한 전화 목소리에 마음이 퍽 간지러웠다곤 말 못할테니까 결국 잠시 기다리던 준호가 먼저 말했음

- 음…. 오전에 경기장에 계셨죠? 관중석에서 봤어요.

- 그렇다뿅. 북산이 졌지용.

- 하하..네에….

준호가 곧장 아픈 곳을 찌르는군, 생각하는걸 명헌은 전혀 못알아챘음 명헌에게 승패는 결론일 뿐, 속뜻같은거 없었겠지 그저 감정보다 사실이 더 중요해서였음 그리고 명헌이 아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음

- 아까웠다뿅.

- 하하..그런가요. 점수차가.. 그랬는데도요?

- 지학은 강팀이니까용. 하지만 북산도 벤치가 약한거지 코어가 약한건 아니다뿅. 3학년 슈터는 말할 것도 없고, PG는 스피드 면에서 현내 최고일게 분명뿅. 1학년 콤비가 꽤 기대주였는데, 부상때문에 아깝게 됐지용. 스타팅 멤버 피로도만 낮았어도 훨씬 나은 경기 했을거다뿅.

딱히 위로하는 투가 아닌데도 냉철하게 분석해주는 평가가 오히려 위안이 돼서 준호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산왕의 주장 이명헌이 하는 말이라 내심 설득력을 느껴서 였겠지 준호는 뭔가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음 어쩐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준 것 같았어

- 낮에도 전화 했다고 들었어요.

- 아 그거, 삼백원 어떻게 갚을지 고민을 해봤는데뿅.

- 그정돈 그냥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 빚지면 내가 죽는다니까뿅. 준호도 목숨을 빚지고 싶진 않을거 아니에용. 아무튼 북산도 원터컵, 노리고 있지뿅?

뜻밖의 단어에 준호가 조금 놀랐음 자긴 이제 은퇴하겠지만 여전히 윈터컵의 의미가 컸으니까 최강자가 꺼낸 농구 이야기에 약간 동요할 수밖에 없었음

- 그렇..죠..?

- 그럼 삼백원 대신 어제부로 3년 무패기록 겨우 깨진 최강산왕 주장의 전국대회 팀 정보는 어떠냐뿅.

- 네??

- 어..왜, 별로냐뿅?

명헌은 멋쩍은지 처음으로 말을 길게 늘였음 하지만 별로냐니, 그런 정보라면 삼백원은 무슨 삼백만원 가치는 하는거였음 준호는 오히려 너무 과분해서 놀란거겠지

- 아니, 그런걸 우리한테 말해도 돼요? 산왕도 윈터컵 출전 하시잖아요.

- 권준호, 설마 우리가 두번 져줄거라고 생각하는거냐뿅?

준호는 여러 의미로 감탄했음 명헌은 오늘 패배한 북산의 속을 긁어놓으려는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감에 의한 사실을 말하는 투였어 확률상 이변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하던 이름 모를 외국인 천문학자와 말투가 똑같았겠지 하지만 정말 이변은 딱 한번 뿐일까? 준호는 입술을 꾹 깨물었어 이명헌만큼 농구에 진지한 사람이 거짓 정보를 넘길리는 없고, 제 입으로 정보를 주겠다 말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음

- 제가 정말 그런걸 받아도 되나요..?

- ? 왜? 어차피 딱 삼백원어치만 알려줄거다뿅.

- 그게 어느 정도인데요?

- 몰라용. 그때그때 다르겠지용.

준호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전화를 받고 있었어 한참 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농구를 아주 놓기엔 멀었나봐 이렇게나마 남은 아이들을 서포트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감사했음 준호가 작아진 목소리로 고마워요, 하자 명헌은 어깨를 으쓱 하며 우리 애가 받은건 세배로 돌려주래서용 하겠지

- 화요일 저녁 8시 정각에 연락하겠다뿅. 오래 통화는 못한다뿅. 산왕고 완전 산골짜기뿅. 엄지만한 산모기 나와용.

- 밖에서 연락하는 거예요?

- 기숙사는 전화가 없으니까용.

- 아하…. 그래요. 기다릴게요, 명헌 학생. 연락 줘서 고마워요.

- 뭘 이런걸로.

그렇게 평소보다 조금 길게 뾰-옹 하는 소리와 함께 불시에 전화가 끊겼음 요금이 다 돼서 그러려나? 근데 명헌 성격에 갑자기 끊는 것도 아주 말이 안되는건 아니었으니까.. 준호는 살짝 웃으며 탁상달력을 짚어보았음 화요일이면 나흘 뒤, 저녁 8시쯤이면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저녁 공부 시작 전이라 딱 알맞을 시간이었어 달력 스프링에 간이로 꽂아두었던 빨간 펜을 꺼내서 8시, 이명헌 통화 하고 메모를 적어두었음 이런 얘길 들으면 아이들은 어떤 반응일까 상상하다보니 괜히 들뜨는 기분이었음


덕분에 소개한 적 없는 제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른 명헌에 대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겠지









준호명헌 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