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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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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병원은 지긋지긋했다. 없는 병도 생기게 하는 곳이 병원이었다. 유난히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은 막내를 데리고 다닐 때는 모르겠더니 혼자 있으니 좋지도 않은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 둘 데가 없어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걸 노려보던 네이트는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며 손톱 표면을 긁어댔다.

의사는 꼼꼼한 사람인지 모니터를 보고 또 보더니 생각보다는 괜찮다고 했다. 그 말에 겨우 참았던 숨이 트였다. 그럼 이제 풀어도 되는 거죠? 사진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안 되죠. 뼈가 그렇게 쉽게 붙겠어요? 엑스레이 찍게 자주 오라고 해도 안 오면서."
"방금은 괜찮다고-"
"차에 받혀 몇 미터 날아간 거에 비하면 괜찮다고요. 수술까지는 안 가도 되니까. 보면 지금 갈비뼈도 멀쩡하고. 아주 운이 좋았어요."
"그럼 언제 풀 수 있는데요."


이런 깁스 말고 좀 더 가벼운 것도 있다던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의사는 딱하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세 달. 최소 세 달은 있어야 돼요. 그때까지는 어디 틀어진 데 없나 봐야 되니까 자주 오시고 나는 팔이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쉽죠?"


할 일이 천지인데 세 달이라니... 놀란 네이트가 지금은 아프지도 않은데 그냥 풀어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의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차트에 뭔가를 기록하더니 그러다 평생 고생하고 싶은 거냐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별다른 소득도 없이 주머니를 탈탈 뒤져 병원비를 내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심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도 괜히 억울해져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발로 차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받고는 멈추었다. 버스 탈 돈도 아까워 늘 걸어 다니는 길인데 오늘따라 유독 길었다.

네이트는 몇 번을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카페에 도착했다. 괜찮다는 말에 동생들보다 먼저 떠올랐던 얼굴이 보였다. 막내를 끌어안고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다 웃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숨겨둔 아들이냐며 묻던 손님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네이트."
"형아!"


늦어서 죄송하다며 브랫에게서 버드를 건네받은 네이트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피했다. 버드는 네이트의 목에 매달려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킁킁거리는 게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형아, 병원 냄새나...


"우리 버드 병원 냄새도 알아?"
"으응..."


네이트만큼이나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버드였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여전히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브랫을 올려다봤다. 그는 방금까지 웃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세상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이 앞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라 나중에 하자는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브랫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가 힘들었다.

왜 그러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나? 그런데 병원은 지금 안 가도 된다는 걸 당장 가라고 성화를 부려 다녀온 거라 딱히 그 문제 같지는 않았다. 차가운 분위기가 낯설어 눈치만 보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가온 손에 모자가 벗겨졌다. 움찔한 네이트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브랫이 다시 모자를 씌웠다.


"집에 가서 밥 많이 먹고 푹 자."
"응!"
"아니-"


뒤늦게 뭐 하는 거냐고 묻는 네이트를 브랫은 가게 밖으로 몰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얼른얼른 퇴근합시다. 둘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 버드는 꺄르르 웃다가 꼬리가 다 떨어져 나가는 티라노 인형을 안으며 목을 감았던 손을 놓았다. 버드, 잘 잡아야지. 그러다 떨어지면 아야 해. 브랫의 말에 버드는 마지못해 한 손을 들어 네이트를 잡고 다른 손은 붕붕 흔들었다.


"버드 내일 또 와."
"그래. 잘 가. 잘 가요."


갑자기 뭐냐고. 어안이 벙벙한 네이트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 몸을 돌렸다.


"버드야. 형 없을 때 무슨 일 있었어?"
"빵 먹었어."
"그거 말고. 뭐 없었어?"
"친구랑 놀구... 레이 삼촌이 자동차 말고 칼 사준다구. 방패랑."
"그랬어, 버드는 좋겠네."


다른 때랑 똑같은데 왜 그런 표정이었을까. 적막 속에 어두컴컴한 집에 도착하고도 생각에 잠겨있다 긴장으로 옷을 꽉 움켜쥐는 버드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어두운 걸 무서워했다. 얼른 불을 켜고 버드가 손을 씻는 동안 냉장고에 붙은 전단지를 훑었다. 자꾸 배달 음식만 먹이려니 속이 쓰렸다.


"형이 유치원 못 가서 미안해. 오늘도 재밌게 놀았어?"


케니랑 랜스는 오늘도 늦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사고 칠 애들은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그래도 잠은 꼭 집에서 자길래 내버려둔 것이었다. 그랬는데 밥을 먹으면서도 연신 현관문을 곁눈질하는 버드를 보니 더 이상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투게 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이상하게 밖이 시끌시끌했다. 화들짝 놀란 버드가 스푼을 떨어뜨리고 네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뭐야 저녁이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 왔어."


방금까지 네이트의 걱정거리였던 동생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식탁 한자리씩을 차지했다. 몇 주 만에 보는 장면이었다.

형아!! 반가워서 케니의 무릎으로 달려드는 버드와 달리 네이트는 처음에는 놀랐다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가, 애초에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씩씩거리는 네이트를 두고 세 사람은 밀린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얘 못 본 사이에 키 많이 컸다."
"난 잘 모르겠- 응, 많이 컸네 우리 버드."
"진짜?"
"진짜지~ 누구 동생인데~ 형이 키 재줄까? 이리 와봐." 


신이 난 버드를 잡고 도망가는 랜스를 보며 케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눈치를 살핀 케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있지, 형."
"......"
"미안해. 우리 때문에 걱정 많이 했지."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심정이었는데 막상 덤덤하게 건네는 사과에 네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안도감인지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맛있게 드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어딘지 모르게 가까이하기 꺼려진다던 뉴페이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이제는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단골도 생길 정도였다. 손이 불편해서 어쩌냐는 걱정에 네이트는 수줍게 웃었다. 아, 생각해 보니 마스크를 벗고부터 반응이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명랑함을 되찾은 버드만큼은 아니어도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면 브랫도 좋았다. 그렇게 티 내다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는 레이의 면박을 들으면서도 그랬다.

일이 잘 해결된 것 같기는 한데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연락하기가 껄끄러워 본의 아니게 애들의 연락을 무시하게 됐다. 시간이 좀 지나면 불러서 제대로 된 해명도 할 겸 식사나 할 생각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쳐들어올 줄도 모르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카페를 둘러보는 랜스를 확인한 브랫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우와 버드야. 여기 진짜 좋다, 그치? 이거야? 이게 버드가 말한 버드 자리야? 장난감도 많네. 이거 다 누가 사줬어?"
"아저씨랑 삼촌이랑."
"저 사람? 저 사람이 삼촌이야?"


네이트는 주문을 받느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브랫은 랜스를 향해 그대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랜스는 얄밉게도 제 휴대폰을 흔들며 윙크를 날렸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브랫이 하나하나 사 모은 소파에 버드를 앉힌 랜스는 손님들 뒤로 줄을 섰다. 뭐야. 뭐. 왜.

손님이 한 명, 한 명 줄 때마다 브랫은 당장 나가지 못하겠냐고 눈을 부라렸지만 랜스는 '흥' 하는 콧바람으로 맞섰다.


"형, 나 왔어."
"랜스? 네가 여길 왜 왔어?"
"왜긴. 버드 데리러 갔다가 하도 들러야 된다고 찡찡대서 왔지. 집에 안 간다는데?"


네가 갔다 왔어? 네이트가 한 손에는 방패를 끼고 다른 손으로 야무지게 칼을 쥐는 버드를 살펴보는 동안 브랫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뭐 먹겠냐고 어색하게 묻는 것뿐이었다. 아메리카노를 외친 랜스가 막내는 자기가 데리고 갈 테니까 편하게 일하다 오라며 눈을 찡긋거렸다. 당황한 네이트와 달리 윙크를 받은 브랫은 못 본척하며 쇼케이스를 열었다. 빵을 종류별로 담는 그를 네이트가 말렸다.


"너무 많아요 사장님."
"많긴 뭐가 많아. 케니 그 돼지가 한 끼에 다 먹을 텐데."


가자는 말에 생각보다 얌전히 품에 안기는 버드를 추어올린 랜스는 들어주겠다고 몇 번이나 권하는 브랫을 뿌리쳤다. 사장님 잘 먹을게요! 십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민망해하는 네이트를 보며 브랫은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상황을 모르는 레이는 버드가 벌써 왔다 갔다는 소식에 크게 아쉬워했다.


"축구공 사 왔는데!"
"이 코딱지만 한 데서 축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골랐단 말이냐?"
"안 되면 의자로 쓰면 되죠."
"그걸 말이라고..."


자기들만 있는 게 아니라 나름 꽤나 자제한 대거리를 듣고 있던 네이트가 헛기침을 했다. 레이와 브랫은 즉시 입을 다물고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평범하게 뒷정리를 하고 퇴근을 할 예정이었다. 네이트가 예상치 못한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저랑 술 한잔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슼탘 브랫네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