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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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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60.

기억 속에서 허니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작은 몸집에 가볍기도 깃털처럼 가벼워 티모시는 제가 잘못 힘을 주면 허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허니는 다리를 다쳐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던 걸까. 이유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도 허니가 몹시 흥분해서 씨근거렸고 거기에 티모시가 마음이 상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쪽이 티모시였을 때 티모시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는 조그맣고 어린 허니의 목소리였다. 나쁜 꿈 꿨어? 괜찮아. 걱정 마. 내가 좋은 꿈 꾸는 법을 가르쳐 줄게...

티모시는 새옷을 어색한 듯 매만지는 허니를 보았다. 티모시는 첨탑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허니를 보았다. 티모시는 예배당 의자에 누워 잠든 허니를, 낙엽을 빗자루로 쓸어모으다 말고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허니를 보았다. 티모시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을 축제를 구경하는 허니를 보았다. 

누군가를- 허니를 바라보던 기억은 티모시에게 가장 익숙한 기억이다. 제가 가진 기억이 백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티모시는 불안해질 때면 몇 안되는 그 기억들을 끌어안고 곱씹었다. 기원을 알 수 없던, 기껏해야 감정의 흔적에 불과했던 기억들. 막연하기만 했던 기시감은 언젠가부터 실체가 있는 기억이 되었다. 뚝뚝 끊어진 기억일지라도 티모시는 제 기억에서 허니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많은 기억이 무의식 아래 묻혀 있었지만 허니의 기억은 언제나 모자람 없이 티모시를 진정시켰고 과거의 허니를 기억하면서 현재의 허니를 바라볼 때마다 티모시는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이 있는 한 티모시는 중요한 건 다 기억하는 셈이었다.

“벽과 천장 가득한 촛불로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연회장이 있어. 화려하게 차려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틈에 너는 없지. 네가 없는 곳에서 네 모습을 그렸던 게 기억나.”

티모시는 여관에서 보았던 악사를 떠올렸다. 티모시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은 악사의 차림새였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 눈이 가는지 의아했는데 연회의 기억에서 악사를 닮은 아름다운 여자, 아직은 소녀에 가까운 앳된 여자를 발견하고 이유를 알았다. 오래 전 옅은 금발과 새하얀 살결에 어울리는 우아한 옷과 찬란한 보석으로 완벽하게 단장한 그녀를 보았을 때 티모시는 어딘가에서 수녀복을 입고 악보를 뒤적이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 아이도 저렇게 꾸미면 누구보다 예쁠 텐데.

금실과 은실이 섞인 옷을 입히고 긴 보석 띠를 허리에 묶어 늘어뜨리는 상상을 해본다. 머리카락은 진주알을 엮어 만든 장식으로 치장하면 좋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입을 일 없을 옷을 입히고 쓸 일 없을 장식을 머릿속으로 얹히기를 여러 번, 티모시에게는 어쩌다 한 번씩 여자가 욕심낼 법한 장신구를 사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아무렇게나 사들이진 않았다. 티모시는 까다롭게 골랐고 마음에 드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개인적으로 주문을 해서 만들기도 했어. 이것도 그렇게 만든 거야.”

티모시는 품에서 얼마 전 따로 챙겨두었던 페리도트 목걸이를 꺼냈다. 허니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목걸이의 줄을 풀어 허니의 목에 감아주면서 티모시는 과거에도 자신이 이렇게 직접 허니에게 목걸이를 걸어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잠금쇠를 걸고 맑게 빛나는 펜던트를 들여다보았다. 허니가 이것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만족감이 기억났다. 

“우리가 제 자리로 돌아가면 네게 더 좋은 것들을 선물할게.”
“그럴 필요 없어.”

티모시는 펜던트를 손에서 놓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너는 조금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던 것도 기억나는군.

“알아. 이건 모두 내 만족을 위해서지.”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도 널 탓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예전부터 네게 뭔가를 주고 싶어했던 게 기억났고 너도 그걸 알았으면 했어.”

허니가 머뭇머뭇 물었다.

“나한테 뭘 주고 싶었는데?”
“좋은 것들.”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주고 싶었다.

“정작은 쫓기고 도망다니며 고생하게 만들기나 해서 미안해. 내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 믿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 돌아가면 네가 감내해야 했던 것에는 꼭 보상하겠어.”

허니는 입술을 실룩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 했을 때 허니가 티모시를 끌어안았다.

“그럼 변하지 마.”

허니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어떤 기억이 돌아오든 지금처럼 계속 얘기해줘. 어떤 기억에 갑자기 화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네 마음이 바뀌거나 우리 관계가 멀어질 것 같아도 나랑 얘기해야 해. 끝이 나더라도... 너랑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쪽이 나은 것 같아. 이게 내가 원하는 보상이야. 우리가 서로 피하지 않고 얘기하는 거.”

티모시는 가만히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제 것은 아니지만 제 것처럼 울리는 소리.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난 이후 허니는 이렇게 저를 안아준 적이 많았다. 처음에는 허니가 원래 그런 사람이고 자신들이 원래 그런 관계인 줄 알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지금의 제가 매번 하는 생각을 과거의 저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네게 안길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하겠지.

티모시는 천천히 손을 올려 허니의 등을 쓸어내렸다. 



허니의 몸 상태가 도로 급격하게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티모시는 허니를 제가 탄 말에 함께 태웠다.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티모시의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허니는 티모시가 되찾은 다른 기억들을 궁금해했고 티모시는 기억나는 대로 허니에게 들려주었다. 기억이 빨리 돌아와서 다행이야. 허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티모시는 허니가 내심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읽었다. 허니는 티모시가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티모시가 보호받지 못하고 비난받을 것을 걱정했다. 티모시는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허니의 생각을 읽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허니가 그 사실을 기꺼워하지도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 허니의 걱정을 읽는 것이 싫지 않기도 했다.

이날은 드디어 일차적인 목적지였던 남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므로 화제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렀다. 티모시가 지리적인 정보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짐작한 허니는 티모시에게 그 도시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려주었다. 왕국 최대의 무역항으로 하루에도 배가 수십 척씩 드나드는 도시, 수많은 화물과 사람과 이야기가 이곳을 거쳐갔으며 외국의 최신 유행도 이곳으로 가장 먼저 들어왔다. 부유함으로 왕국 수도에 버금간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공화국 수도와 함께 대륙에서 손꼽히는 미항이었다.

“나도 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허니는 바다를 보는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때마침 숲이 끝나고 탁 트인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 아래 펼쳐진 도시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노을진 도시 너머 바다가 있었다. 노을에 황금을 쏟아부은 듯한 수면이 끝없이 이어졌고 이따금 파도가 달려드는 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잘게 부서졌다. 허니는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다 말했다.

“정말 예쁘네.”

티모시는 그렇게 말하는 허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티모시에겐 지난날 바다를 본 기억도, 보지 못한 기억도 없다. 확실한 것은 허니처럼 바다를 보며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눈동자는 티모시를 사로잡았다. 

“그래, 정말 아름답군.”

파비안이 말을 몰고 옆을 지나가며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타박했다. 

“이럴 시간 없어요. 성문 닫히기 전에 들어가려면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볼 때는 금방일 것 같았는데 도시에 들어서자 이미 밤이었다. 단지 도시는 여느 시골마을처럼 조용히 잠드는 대신 새롭게 깨어났다. 포석이 깔린 수로와 도시 곳곳에 걸린 등불을 보고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벌써 봄 축제 기간이군요.”

도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로도 유명했다. 낮의 축제도 성대했지만 밤의 축제는 더더욱 화려해서 도시 전체가 밤새도록 빛을 발하며 불야성을 이루었다. 평소에는 축제 기간이 되면 외국인 관광객들도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찾아올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환하기는 해도 축제라기엔 사뭇 엄숙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애도 기간이니... 마냥 흥청거리긴 곤란하겠죠.”

티모시의 품에서 잠자코 있던 허니가 말을 꺼냈다.

“우리 바로 여관으로 가는 거지?”
“맞아요. 여기까지 힘들게 왔으니 오늘은 저녁 먹고 좀 쉬도록 해요. 이것저것 알아보는 건 내일부터 하고요.”
“저녁 먹고 밖에 나가봐도 돼?”

파비안은 곤란한 기색이었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긴 지금까지랑 달라서 좀 위험하거든요. 보는 눈도 많고요.”

허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때부터 확연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여관을 정하고 짐을 풀고 식사를 기다리는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더니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티모시는 포크로 연어를 해체하면서 입에는 한 점도 가져가지 않는 허니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어딜 가고 싶었던 거지?”

허니가 티모시를 보았다.

“...사원에...”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고 하는 말이 추모 의식이 진행되는 사원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허니는 제 부친의 장례에 제대로 참석하지도 못한 것을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티모시가 말했다.

“식사 다 하고 나랑 같이 가.”

허니가 당장 반색하다 파비안의 눈치를 보았다.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같이 간다면야... 뭐, 어쩌겠어요.”

그제야 허니는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다. 허니가 구운 연어 살코기를 약간이나마 맛보는 사이 종업원이 후식으로 레몬 타르트와 함께 잘 익은 포도주와 잔을 가져왔다. 티모시가 타르트를 잘라 덜어주자 허니는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한 잔씩 따라주려는 종업원에게 파비안이 말했다. 

“아가씨는 술 안 마셔요. 차를 준비해줬으면 하는데.”

허니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마실래.”
“술 안좋아하잖아요.”
“오늘은 마시고 싶어.”

파비안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멈췄다. 종업원은 파비안과 허니를 번갈아 보더니 허니의 포도주 잔을 채워주었다. 할 일을 마친 종업원이 뒤로 물러나고 허니가 잔을 집어들었다. 파비안이 입술을 짓씹기 시작했다. 티모시는 파비안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포도주 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허니의 손을 붙들고 잔을 들어올렸다. 파비안이 손을 뻗으려다 주춤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

침묵을 깨고 허니가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할까, 티모시?”



 
2024.04.19 02: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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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진짜 너무 좋아오
[Code: 3f87]
2024.04.20 10: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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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주고 싶었다.

- 진짜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티모시 마음이 다 읽어지고 아니 이럴수있는거야? 나 정말 정말 정말 사랑해 ㅠㅠㅠ 고마워 ㅠㅠ 우리 계속 함께하자 센세 건강해 알라뷰ㅠㅠㅠ
[Code: 1f1f]
2024.04.26 20: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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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ㅜㅜㅜㅜㅜㅜ
[Code: 6711]
2024.04.28 00:23
ㅇㅇ
사랑하고 사랑한다...진짜루.......사랑해!!!!!!!!!!센세!!!!
[Code: 8412]
2024.04.30 23: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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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다시간거 아니지 센세 ㅜㅜ?
[Code: 10ed]
2024.05.08 20: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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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센세가 보고싶은 밤이에요
[Code: 02ff]
2024.05.16 23: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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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었더니 또 새롭고 재밋어 센세.....!!
[Code: ed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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