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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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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59.

모처럼의 노숙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길을 떠나면서 각오했던 것에 비해 잠자리가 대체로 편안했다. 도망자 신분이라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이동했던 초반 며칠을 제외하고 파비안은 크든 작든 가능하면 마을에서 숙박하는 쪽을 고집했다. 계속 가야 하지 않을까? 허니가 걱정할 때마다 파비안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쉴 땐 쉬어야 목적지까지 가죠. 그리고 이 날씨에 노숙 잘못하면 얼어죽어요. 언제 붙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허니도 갈수록 체력이 바닥나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지라 밤마다 멀쩡한 잠자리에서 잠이 들며 내심 안도했었다. 어쨌거나 야외에서 자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숲에서 적당한 공간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떨어지고 있었다. 파비안이 장작개비로 쓸 만한 나뭇가지 몇 개를 모아다 불을 피우려 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거 보면 도련님 맞다니까. 허니는 파비안의 팔을 잡아당겨 부싯돌과 부싯깃을 넘겨받았다. 탁탁, 부싯돌을 치자 부싯깃에 불이 호르륵 붙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장작에 불을 옮기려고 돌아서는데 모닥불이 먼저 활활 타올랐다. 허니는 티모시가 모닥불 뒤에서 돌아나오는 것을 보았다. 옆에서 파비안도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방금 뭘 한 거야?”
“...? 불을 피웠어.”
“도구도 없이?”

허니가 되묻자 티모시는 자신이 예상되는 범주 밖의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되던데.”
“언제부터 그게 됐는지 기억나?”

티모시의 기억이 제법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멈추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파비안이 말없이 짐꾸러미에서 요깃거리를 꺼냈다. 마른 빵과 육포였다. 길에서 질릴 만큼 먹은 음식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모닥불 앞에 앉아서 조용히 저녁식사를 마쳤다.

밤이 깊어 모닥불 주변을 제외하고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다. 파비안은 티모시와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허니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티모시가 제 품에 안긴 허니의 어깨 위로 망토를 여미며 물었다.

“고민이라도 있어?”
“글쎄...”

허니는 말끝을 흐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티모시에게 어디까지 말하는 것이 좋을까. 허니는 티모시의 손을 붙잡고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너 카를이랑 싸웠을 때 말야. 카를이 너한테 칼 날렸었는데, 네가 막았잖아. 손도 안 대고.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아마도.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내 생각엔...”

티모시가 허니의 손을 붙들어 깍지를 꼈다. 허니는 잠깐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러고 있자니 어쩐지 그가 떠났다고 생각했던 때가 기억났다. 그를 다신 볼 수도, 이야기를 할 수도, 만질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그 능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쓰는 게 맞겠지. 하지만 평소에는 감추는 게 좋겠어. 그런 능력을 가진 센티넬은 몇 명 없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거든.”
“불을 만드는 것도?”
“응. 기억을 잃기 전에 너는 불을 일으키거나 사물을 움직이는 능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어. 그런 건 센티넬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가진 능력이야. 그런 건 핏줄을 타고 전해지기 때문에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네 입장이 곤란해질지도 몰라. 네가 기억을 찾아서 직접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신중해야 할 것 같아. 나도 네 사정을 전부 알지는 못해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이 정도가 고작이야.”
“새겨 듣지.”

문득 왕궁에서 아델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선견을 하면 형질 소모가 크다던 말.

“게다가 그런 능력은 사용할수록 너한테 부담이 가. 가이딩이 많이 필요해질 거야.”
“그건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는 걸.”

웃음기가 묻어나는 대꾸에 허니는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항의하듯 티모시의 품에서 몸을 홱 일으키려는데, 티모시가 맞잡았던 손을 풀고 허니를 꽉 끌어안았다. 

“네가 곁에 있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야.”
“과장하지 마.”

툴툴거렸지만 허니는 몸에 힘을 풀고 다시 티모시에게 등을 기댔다. 날이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타오르는 모닥불과 두터운 망토를 동원해도 아직은 싸늘한 계절이었다. 맞닿은 체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의지가 되었다. 

“과장하는 거 아니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허니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으으... 허니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그동안 편안한 잠자리에 익숙해진 탓인지, 고작 하룻밤의 노숙인데도 온몸이 저항하는 것 같았다. 근육이 잔뜩 굳은데다 안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만 데가 쑤시고 으슬거렸다. 파비안과 티모시가 진작부터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지만 눈을 뜨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정신이 든 것은 어디선가 살이 타는 냄새를 맡고서였다. 허니는 몸을 칭칭 감싼 망토를 생명줄처럼 꼭 쥐고 간신히 눈을 떴다. 

“깼어요?”

비틀비틀 일어나 앉는 허니를 보고 파비안이 모닥불에서 꼬챙이 하나를 꺼내 다가왔다.

“자, 오늘 아침이에요. 아가씨 약혼자가 손수 잡아온 싱싱한 토끼를 구워 만들었답니다. 따뜻할 때 먹어요.”

파비안이 고기가 꽂힌 꼬챙이를 내미는 것과 동시에 코끝을 감돌던 살 타는 냄새가 훅 짙어졌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허니는 망토 깃으로 얼굴을 가렸다.

“난 됐어.”
“사양할 거 없어요. 마을까지 꼬박 하루는 더 가야 하는데 든든하게 먹어둬야죠.”
“미안한데 속이 안 좋아. 입맛도 없고...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너 많이 먹어.”

파비안이 얼굴을 굳혔다.

“허니는 입맛 없을 때가 없잖아요.”
“나도 입맛 없을 때가 가끔은 있어.”
“토끼가 입에 안 맞아요? 보존식 꺼낼까요?”

생각해봤지만 당장 속이 하도 메슥거려서 토끼구이든 육포든 소화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다 현기증이 들었다. 갑자기 몹시 어지러웠다. 

“어어...”

눈을 몇 번 깜박거리는데 그만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파비안이 볼을 가볍게 톡톡 치고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시야가 온통 회색이었다. 고막이 웅웅 울렸다. 귓가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천둥치듯 크게 들리는 가운데 손가락 끝이 너무 차가웠다. 맨땅에 닿은 등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몸과 영혼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니.”

나 어디 잘못된 건가? 

“허니, 대답해.”

익숙한 목소리에 허니는 서서히 정신을 되찾았다. 혼미한 가운데 몸의 중심이 기우뚱 움직였다. 손을 감싸고 주무르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동안 차갑게 얼어붙은 볼과 귓불을 매만지며 녹이는 손길이 있었다. 목덜미로도 체온치고 높은 열기가 전해졌다. 금세 몸에 훈기가 돌았다. 허니는 자신이 전날처럼 티모시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응... 나 이제 괜찮아.”

허니는 침을 삼켜 칼칼한 목을 적시며 대답했다. 파비안이 놋쇠 잔을 건넸고 티모시가 그것을 받아들어 허니의 입가에 갖다댔다. 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허니는 더운 물을 몇 모금 마셨다. 혀를 데지 않을 정도로 따끈한 물이 목으로 넘어가며 속을 마저 덥혔다. 

“뭘 좀 먹는 게 좋겠군.”

티모시가 그렇게 말하고 손짓하자 파비안이 냉큼 오목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가져왔다. 스튜였다. 토끼고기 냄새가 났다. 위장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허니는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속이 울렁거려... 먹으면 토할 것 같아.”
“그래도 먹어.”
“못 먹겠는 걸.”
“건과라도?”

허니는 티모시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저었다. 먹을 것을 가지고 투정부리는 듯한 상황이 창피했지만 정말 식욕이 없었다. 식욕이 없는 정도면 다행이지, 까딱했다간 입에 넣은 것을 도로 뱉어내고야 말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허니.”

티모시가 허니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새로 돌아온 기억이 있어. 네가 뭐라도 먹으면 들려줄게.”

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머리까지 둔해진 모양이었다. 허니는 티모시가 한 말을 한참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말뜻을 이해한 순간 발끈했다.

“이거 불공평하잖아!”

티모시가 대답했다.

“난 네가 아무것도 안 먹으니까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아. 이건 공평해?”
“....”

허니는 티모시가 내미는 건과를 노려보다 결국 고집을 꺾었다. 얌전히 받아 입에 넣었는데 다행히 고기보다 먹을만 했다. 속이 아주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까처럼 구역감이 심하지도 않았다. 허니가 건과 한 조각을 씹어삼키자 티모시가 한 조각을 더 내밀었다. 주는 대로 꾸역꾸역 먹은 것은 반쯤 오기였다. 이윽고 티모시가 허니에게 더 먹으라고 종용하기를 그만두었다. 그가 새로 내미는 물까지 들이키고 허니는 물었다.

“어떤 기억이야?”

지난 며칠 동안 티모시는 사소한 기억을 제법 많이 되찾았고 그때마다 허니에게 제 기억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제 허니는 어린 티모시가 우연히 선물받은 물감 세트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명의 검술 스승들이 그를 거쳐갔고 개중에는 엉터리도 있었지만 티모시가 그 엉터리 스승과 훈련하는 시간도 퍽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티모시는 동생과 묘지에서 숨바꼭질을 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티모시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대부분 허니가 모르는 티모시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티모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

이번에 티모시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허니가 등장했다.



👀
2024.04.15 00:00
ㅇㅇ
모바일
센세 ㅜㅜㅜㅜㅜㅜ 다시는 미국가지마 ㅜㅜㅜㅜㅜ
[Code: 8e1c]
2024.04.15 01: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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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친 센세 기념으로 정주행까지 했어ㅠㅠㅠ 잠은 포기했지만 너무 행복하다 티모시 기억 일어서 표현 더 적나라하게 하는 것도 진짜 미쳤고 허니는 혹시 임신인가? 몰라 됐고 그냥 제발 행복하자ㅜㅜㅜ 센세 나 기다린다?? 늦지 않게 돌아와야해
[Code: 9ca3]
2024.04.15 21: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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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ㅠㅠ 나 짇짜 존나 행복해 사랑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ㅍ
[Code: 983f]
2024.04.15 22:2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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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센세 진짜 제목보고 심장이 쿵 떨어짐 내 센세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허니 안 먹는다고 걱정하는 티미 너무 좋아아아아아
[Code: ba33]
2024.04.16 07:3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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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사랑해...
[Code: a47a]
2024.04.17 11:25
ㅇㅇ
모바일
앜 시발 내 센세 언제 왔었어 시발 나 심장 떨려 경건하게 볼 거야 센세 사랑해
[Code: 89c7]
2024.05.25 20: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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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세 사 랑 해
[Code: 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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