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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7:40

- 노잼& ㅅㅅㅊ 주의
- 커플링이나 탑텀구분을 의도하고 있진 않고 나붕이 남훈동준파서 ㅌㅈ적 해석이 기초적으로 깔려 있을 수 있음
- 펄럭패치 주의, 작중 배경 푸산(오사카 아님), 어색한 남동방언 주의
- 90년대 초반의 펄럭의 문화 및 시대상을 기초로 쪽본의 시대상이 일부 섞여있음
- 타싸에 올린 적 있음
※ 학교폭력에 대한 직간접적인 묘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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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귀뚜라미가 늙은 매미의 철 늦은 구애가를 잡아먹고 가을 단풍이 절반쯤 붉은 기를 덧입은 계절. 겨울 전국체전, 속칭 윈터컵의 지역 예선이 시작되었다. 부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니 대학은 포기한기가."
 

지역 예선 경기 참가를 위해 담임에게 결석계를 내러 간 동준을 반긴 것은 답답함과 한심함이 섞인 차가운 시선이었다. 남들은 지금 야자다 학원이다, 배치표에 목을 매고 있는데 니는 아직도 철 지난 공놀이를 졸업하지 못하냐는 듯한 눈빛 하나하나에 일일히 상처를 받기에는 동준의 낯가죽은 제법 튼튼했다. 옆에 도장 찍어주이소. 빳빳이 고개를 들고 결석계 귀퉁이를 가리킨 동준의 손가락 끝 담당 코치 서명란에는 영중 대신 낯선 이름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짧은 대치 끝, 무심한 중년이 제 이름 석 자를 휘갈긴 후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저깟 종이 한 장을 받는게 그토록 어려울 일인지. 체질에 안 맞는 공손함으로 결석계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 겨우겨우 고개를 숙이자 딱함과 무시가 조화롭게 섞인 한숨이 뒤를 따른다. 축축한 손바닥을 번갈아가며 허벅지 옆을 쓸어내려도 찝찝함은 가시질 않았다.

 

 

 

*

 


 

계절이 변함과 동시에 바뀐 것이 너무나 많았다. 대룡과 동준을 제외한 선수들은 3군까지 전부 교체된다. 3학년이 부 활동으로부터 졸업한 지 오래이니 당연했다 대룡은 주장이 되었고, 성호가 빠진 자리는 성호보다 3cm가 큰 2학년 센터가 주전 선수로 선발된다. 갓 선발된 센터가 아직은 위치 선정 능력도, 리바운드 기술도 부족했기에, 동준은 시시때때로 제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진 듯한 기분을, 또는 왼쪽 발목에 넝쿨 하나가 얽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평일 대신 슈팅 가드 교체선수로 올라온 귀남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준과 남훈에 대한 어린 동경을 놓질 못했다. 이번에는 지금껏 알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낯선 얼굴을 한 책임감이라는 녀석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더니 오른쪽 발목을 덥썩 잡는 것만 같았다. 양 발이 다 갑갑하고 어깨는 무거웠다. 때문에 동준의 이유 모를 씁쓸함은 혼자만 간직해야 할 불편한 감정이 되어버렸다.


“5번! 골 밑 뚫린다!”

“윽...!”

“정신 못 차리나?”
 

동준과 훈이 우직하게 고집해 온 전술 역시 바뀌어버렸다. 동준은 여전히 등번호 5번을 짊어지고 풍전의 파워포워드로써 뛰었으나, 신임 감독이라는 자는 들판에 불을 놓는 것과 같이 빠른 템포로 몰아치던 공격도, 속도감 있는 패스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동준을 따로 불러 무식하게 득점만 올릴 생각 말고 2학년 센터 옆에서 골 밑을 지키며 리바운드만 잡은 후, 빠르게 패스할 생각만 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때로는 공으로부터 떨어진 오프 플레이어를 밀착 수비할 것만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동준이 익숙치 않은 것은 당연했다.


“동준이 햄! 이 짝이요! 여깁니다!”

“동준 선배!”
 

선택권조차 없이 감독도, 전술도, 주전조차도 모든 것이 변한 가운데 변하지 않은 것은 자신 뿐인 것만 같았다. 동준은 여전히 운동장을 돌았고, 대룡과 나란히 드리블을 했고, 1학년들 사이에서 레이업과 블로킹을 연습했고, 그리고 경기를 뛰었다. 어깨와 팔다리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지만 여전히 바뀐 경기 방식은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수비 위주의 풍전”이라는 유니폼을 어찌저찌 입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영중의 덕이 컸던 것 같다. 영중과의 여름훈련. 그리고 그 이후. 신임 감독의 부임으로 월급받는 백수 신세가 된 후로도 영중은 여전히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영중은 때로는 교정 밖 경기장에서, 때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교정 내 운동장이나 체육관 한켠에 처박혀 그런 동준과 대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임 감독의 코칭도, 전술도, 훈련도,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지역 예선 전술을 분석했고, 훈련이나 예선 경기 따위가 모두 끝나면 동준과 대룡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했으며, 향상된 부분을 칭찬한 후 조용히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이사장과 어떻게 이야기를 했는지, 영중이 어른으로서 무엇을 포기했는지 동준은 알지 못한다. 다만 낯짝이 두꺼운 것은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라고 홀로 생각할 뿐이었다.

 

 

 

 

*


 

 

새롭게 바뀐 풍전 고등학교는 착실히 지역예선 승리의 기록을 쌓아간다. 비록 예전처럼 압도적인 점수차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대로라면 전국대회 진출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 가운데 동준이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널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도 동준은 부딪히고, 드리블을 하고, 또 달렸다. 그렇게 뛰다보면 코트 바닥이 넘실대며 농구화 전체에 쫀득하게 달라붙다가 스프링처럼 자신을 튕겨내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찰나가 있었다. 그건 아주 가끔, 손에 꼽을 만큼 드물게 찾아오는 불가사의한 감각이었다. 온 코트가 저를 위해 준비된 도움닫기 같은 그 때, 공을 던지면 제 손을 떠난 공은 백이면 백 림을 가르고 골대의 네트를 흔들었다.
 

농구는 좋아하나? 누군가 묻는다면 여전히 좋아한다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눈칫밥을 먹으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영중이 연습경기 후 여전히 수비력이 부족하다고 조용히 지적해도, 가끔 잘못된 턴오버를 해 신임 감독이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고 격양된 목소리로 한참을 나무라도 여전히 농구가 좋았다. 초등학교 이후로 지켜온 고집스런 길 앞에 바리게이트가 층층이 쌓여도 공을 잡고 경기장을 뛰는 순간만큼은 다시 심장이 터져라 뛰었고, 땀으로 온몸이 젖고 알싸한 쇠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울만큼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불안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러니 어떤 고민도 없어야 할 터였다.
 

선장도 키잡이도 모두 바뀐 풍전은 동준과 대룡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윈터컵이라는 대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준을 향한 신임 감독의 요구가 하나 둘 늘어갔고, 반대로 영중의 무심한 듯 걱정어린 조언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순풍을 만난 범선처럼 농구부의 순항이 계속 될수록 지난 여름이 남기고 간 패배의 상처 위로도 천천히 새살이 차올랐다. 자신만 보면 쭈볏대던 2학년들은 어느새 대룡과 귀남을 앞세워 어깨동무를 했고, 주장이라는 버거운 명패를 성공적으로 받아든 대룡은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로 햄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그런데 승리가 계속되어도 어떤 애상은 채워지질 않았다.
 

제 손을 떠난 주황빛 공이 네트를 꿰뚫으면 동준은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누군가를 찾았다. 경기의 흐름을 바뀌는 블로킹을 한 순간에도,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치열한 분투의 끝을 알렸을때도 동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은 습관처럼 반대편을 향했다가, 벤치를 향했다가, 마침내 관중석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그 때마다 명치 근처가 허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잠깐의 고양감으로 텅 빈 심장 근처를 가득 채워도 어느덧 폭우처럼 쏟아지는 허전함이 소년의 안에 깊고 굵은 골을 만들었다. 수 만가지 감정이 용솟음치다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름부터 심장 근처를 묵직하게 누르던 답답함이 늘 마지막 자리를 지켰다.

 

 

 

*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갑작스럽게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이방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질투가, 미성숙한 자아들의 흔들리는 정서의 충돌이 누군가에 대한 뚜렷한 적의로 변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리고 그 적의가 직접적인 폭력으로 변태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은 뭇 사람이 감히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익명의 적의는 먹음직스러운 제물을 만나자 짧은 태동을 끝내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시작은 누구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발길질이었다. 그 앞에 걸려 넘어진 훈이 바로 제단 위에 차려진 만찬임이 분명했다. 열등감과 시기, 질투, 불안, 경쟁, 어쩌면 기결수보다 적은 자유 아래 입시의 압박에 시달리던 십대 소년들은 꽤 그럴듯한 명분과 함께 저들의 앞에 추락한 훈에게 기꺼이 그들의 긴장과 불안, 분노를 풀어놓았다. 
 

물론 훈이 가만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샌님도 아니었거니와, 부끄럽지만 자신 역시 폭력이 낯설진 않았다. 무리에 휩쓸려본 적도, 스스로 무리를 잡고 휘두른 경험도 있었다. 집단이 주는 과잉한 효용감을 다스리는 방법을 모를리도 없었다. 때문에 훈은 이름모를 발길질에 고꾸라진 그 다음날,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가운데 주동자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주먹을 치켜 들었다. 사내새끼들끼리 주먹 한 두번 주고 받는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뜻 밖에 훈의 반항을 가로막은 것은 학원의 규율도, 부모님의 기대도 아닌 멱살을 잡힌 주동자의 말 한마디였다. 운동 한답시고 사람 패던 양아치 새끼 치고 오래 참았네. 그 쥐어짜는듯한 허세가 족쇄처럼 훈을 아주 잠시 망설이게 만든 사이, 주동자는 발재간이 특기라도 되는 듯 훈을 걷어찼다. 우왕좌왕하며 주변을 둘러싼 소년들은 발길질을 계기로 마치 달리기 출발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리고 또 어리석은 남자들의 야생과 같은 서열싸움과 잠시 찾아든 죄책감과 두려움을 지워내는 군중심리, 맹종이 한데 섞여 혼돈만 남은 학원가의 골목길에서 훈이 또다시 뼈아픈 패배를 맛보게 되는 데에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에도 농구한다드만 니는 안 나가나? 느그 학교 점수 반토막 났다던데, 니 곡괭이질 안해 가 죽 쑤는거 아이가?"

 "아 진짜 미친 새끼, 존나 웃기네. 점마 울겠다."  

"에이스 킬러가 빠져 가, 예선에서 똑 떨어지는거 아니가. 돌대가리들이 운동도 모하면 으데 쓰노."

"...."

"어? 임마 눈깔 봐라."
 

비웃음과 함께 하얀 색 실내화가 허공을 가르더니 엎드려있던 훈의 복부에 꽂혔다. 커흑, 헛구역질과 함께 훈의 허파 바닥에 남아있던 잔숨이 기관지를 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동시에 뱉어내지 못한 침 몇방울이 넓게 확장된 기도로 새어들어간다. 연속된 헛기침이 소년들의 키득거리는 조소 사이로 볼썽사납게 흩어지다가 차츰 잦아들 때 까지 목을 전부 긁어내리려는 듯한 마른 기침이 계속되었는데, 훈의 주위를 에워 소년들은 마치 그들의 발 밑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상한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저녁시간 얼마나 남았노? 한 이십 분 남지 않았나. 수학 원래 오 분씩 일찍 들어온다 아이가. 아, 맞나. 드갈까. 훈의 정면에 서 있던, 방금 전 그의 배에 발길질을 정통으로 박아 넣은 소년이 입을 열자 훈을 둘러싼 다른 녀석들이 쉽게 동조한다. 박 종호. 땟자국 하나 없이 새하얗게 빛나는 실내화 밑창의 안쪽 옆면에 적혀 있는 이름이 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큽! 헉,"
 

손목시계를 쳐다보던 종호의 발이 기습적으로 엎드린 훈의 어깨뼈와 날개죽지 사이로 떨어진다. 급작스러운 고통에 묵묵히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훈은 결국 침묵을 잃고 신음했다. 통각에 떨리는 어깨를 들키지 않는 것은 찌꺼기밖에 남지 않은 자존심의 발로인지도 몰랐다. 물론 눈 앞의 상대가 그런 잔반같은 감정을 알리는 없었다. 
 

매일 아침 학생 주임이 이발 센티미터까지 검사한다는 명문고등학교에서도 전교권에 든다는, 그 누가 보더라도 선생이고 학부모고 단정한 모범생의 표본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할 외양을 가진 종호는 마치 헛발질로 볼을 차다 넘어진 것 같은 얼굴로 안경을 고쳐썼다.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베일 것 같이 각을 세워 다린 교복 칼라까지 정리한 그의 맑은 피부 위로는 그 흔한 여드름 자국 하나 없다. 이제 들어가자. 자못 상쾌해보이기까지 한 그 얼굴의 주인은 여전히 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
 

"정리 잘 하고 온나."
 

영산 고등학교, 영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종호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읊조리던 훈은 이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인다. 혹자에게는 건설사 사장이나 국회의원, 판검사와 변호사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고로 더 유명했건만, 훈의 기억 속 영산고는 제법 괜찮은 신체조건의 주전이 서너명 있는 평범한 예선전 상대에 불과할 뿐이었다. 농구 강호도, 하다 못해 체육 강호도 아니었고  우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선수는 더더욱 없지 않았던가... 홀로 생각하던 훈은 이내 나지막히 웃음을 터뜨렸다.
 

"... 아직 에이스 킬러 안 뒤졌네." 
 

제 버릇 개 못주고 여전히 주전선수와 에이스 부터 떠올린 것을 부끄러워 하기에 훈은 이미 진작에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구겨버린 시험지처럼 널부러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 셔츠를 걷자 햇빛을 못 본 탓에 창백하게 질린 흰 뱃거죽 위 붉고 푸른 자국들이 훈의 눈에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얼굴만큼은 피해 주먹과 발을 휘두른 것을 고마워 해야 할까. 등과 배를 채운 얼룩덜룩한 흔적들이 꼭, 과거 자신이 코트 위에 뿌렸던 업보가 싹 터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 모든 과정이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길이지 않을까. 언젠가는 반드시 짊어져야 할 속죄의 무게라고 생각하면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꽤 익숙한 일이었다.  



연재 텀이 너무 질질 늘어져서 미안합니다... 기다려준 붕이 있다면 정말 고맙고 미안하조....
당연하겠지만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단체, 학교, 법인은 전부 짭임을 다시한번 명시함....


슬램덩크 슬덩 남훈동준남훈 풍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