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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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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없다니까요!"
"내 이미 있는 거 다 듣고 왔으니까 순순히 내놓으시게."
"아니 공자님,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가을에 수박이 없는 건 세 살 아이도 아는 법입니다."
"상호객잔이 특별한 손님을 위해서 가을 수박을 빙고에 보관해뒀다는 것도 세 살이면 알 만한 일이지 않소."
뻔뻔스럽게 둘러대는 건 늘상 이연화의 몫이었는데. 능청스럽게 객잔 주인을 다루는 방다병을 보며 이연화는 살짝 쓰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간 함께 다니면서 배운 건 양주만만이 아닌가 보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 객잔. 방다병은 세 개의 객잔에 '이미 다 듣고 왔다.', '빙고에 가을 수박 있지? 바로 내 놔'의 레퍼토리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대고 있었다. 앞서 두 개의 객잔에서 방다병은 정말 없다고 읍소하는 주인을 앞세워 창고에 빙고까지 몽땅 확인하고 나서야 물러났었다. 적비성은 연기를 하더니 방다병은 사기를 치고. 어휴.. 어울려 다니면서 좋지 않은 물만 잔뜩 들이는 것 같아 기분이 약간 묘해진 이연화였다.
"내가 누군지 모르지 않겠지. 천기산장 믿고 얼른 내 오게."
얼씨구. 지위를 이용한 공갈협박까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티 팍팍 나는 풋내기였는데, 어느새 능구렁이가 다 됐다. 보통 청년이나 지나가는 객이라면 헛소리 말라고 냅다 내쫓았을 텐데, 상대가 이 근방 최고 권세를 누리는 천기산장의 소가주다보니 객잔에서도 어쩌지 못해 울상이었다.
그래도 정파인데 이렇게 평민을 겁박하는 것이 맞나.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말려야 하는 건 아닌가. 한때 사고문을 세우고 의협과 정의를 위해 살았던 이상이의 신념이 꿈틀대려 했다. 고작 수박을 위해서 이럴 수는... 고작 수박... 수박을 위해서.. 일단 조금만 더 참고 지켜보자.
"방 공자님, 제발요.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
"허면 이 객잔에서 병부상서와 천기산장 당주, 소가주는 수박을 대접받을 정도의 급은 안되는 모양이요?"
이젠 부모님 명의까지 총출동.. 이연화는 입까지 살짝 벌린 채 진짜 천기산장 하 당주가 보면 천인공노할 이 행태를 구경하고 있었다. 천기산장 당주에 병부상서까지 오르내리자 결국 두 손 든 객잔 주인이 울며 겨자먹기로 빙고를 살펴보겠다며 들어갔다. 살펴보겠다는 걸 보니 일단 뭔가 있긴 한 모양이다.
"방소보, 어쩌려고 그래. 천기산장 소가주가 아정한 공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깡패와 다름 없다는 소문이 퍼지겠어."
"그간 덕을 잘 쌓아왔으니 누군가 퍼트린 헛소문이라고 하면 되지."
저, 저 가책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빤질빤질한 얼굴이라니.
"그래도 이번엔 성공할 거 같은데?"
큰 객잔이라 그런지 밤 늦은 시간에도 아직도 간간히 오가는 손님이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며 두 사람은 객잔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 주인이 낑낑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오는 게 보였다. 이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박, 틀림없는 수박이었다.
"이연화 니가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네. 수박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내가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방소보"
어젯밤부터 꼬박 하루를 얼마나 수박을 기다려왔던가. 수박이 다가올수록 벅차오르는 감정에 이연화는 방다병 손까지 잡아가며 감사를 표했다. 방다병 없이 홀로 파사보를 해서 객잔에 내려왔던들 수박을 얻지 못 했을 것이다. 아니면 빙고를 털다가 걸려 수박도둑 이연화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강호에 명성을 날리게 되던가.
객잔 주인이 큰 칼을 들곤 자신의 팔이라도 자르는 양 망설이다가 수박을 쪼갰다. 그토록 기다리던 수박 한 조각이 이연화의 앞에 놓여졌다. 이연화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박을 한입 크게 물었다.
"....읍..."
"이연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박을 우물거리던 이연화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란 방다병이 이연화를 살폈다.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까지 떨군 채 힘들어하는게 누가 봐도 뱉어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수박이 상했어?"
"그럴 리가요! 우리 빙고의 수박은 상할 리가 없습니다요!"
방다병은 이연화 앞에 놓인 수박을 한입 베어 물었다. 수박은 빙고에 오래 있었음에도 여전히 달고 시원했다.
"...미안, 방소보. 못 먹겠어.."
"뭐??"
방다병과 주인이 수박을 먹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인 걸 보니 이상한 건 역시 수박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가야, 정말 이럴 거니.. 심마에 빠질 뻔할 정도로 간절하게 원했던 수박이었거늘.. 막상 입에 넣으니 온몸으로 거부하는 수준이었다. 객잔 주인과 방다병의 눈치를 보며 수박을 한입 더 먹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더 먹다간 얼마 뜨지 못 한 저녁밥마저 토할 지도 몰랐다.
이대로 수박을 남긴다면 객잔 주인이 수박을 썰던 칼을 자신을 향할 것만 같았다. 이연화는 벽차지독 해독 후유증 핑계를 대며 방다병이라도 마저 먹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방다병은 난색을 표했다.
"나는 수박을 안 좋아해서.."
참 그랬지. 문득 옥성의 한 객잔에서 연화가 수박을 권하자 그때도 수박은 즐기지 않는다며 거절했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그, 그럼.. 두 분... 수박은 아니 드실..."
가을밤에 단정한 공자 둘이 나타나 수박을 내놓으라며 공갈협박을 해댄 것도 기가 찬데, 정작 하나 남은 귀한 수박을 꺼내왔더니 아무도 안 먹겠다며 서로 권하는 이 모양새라니.. 이 황당한 상황에 객잔 주인은 말도 제대로 잇질 못 했다.
결국 방다병은 수박 값과 위로금으로 있는 돈을 몽땅 털어준 것은 물론이며 몸에 걸치고 있던 값비싼 장신구까지 몽땅 벗어주었다. 그들이 털어버린 이 객잔의 마지막 수박은 돈을 준다고 더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객잔 주인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 돈을 받으며 마음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아가야, 대체 뭐가 먹고 싶은 거니.. 방다병이 계산을 하는 동안 객잔 앞에서 기다리던 이연화가 허탈한 마음에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수박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박도 아니었던 거니. 제 아비도 자기가 그렇게 미식가라며 자랑을 늘어놓더니 네 입맛도 까다롭기 그지 없구나. 그래도 아비가 어렵게 얻어온 수박인데 좀 먹게 해주지 그랬니. 야밤에 방다병을 끌고 다니며 한 고생이 미안해 아이는 듣지도 못할 타박을 속으로 해보는 이연화였다.
"이연화, 이거 하나 먹을래? 수박도 못 먹었잖아."
계산을 마친 방다병이 웬 종이 봉투 하나를 가득 들고 나왔다. 그가 건넨 건 빨갛게 잘 익은 사과 하나였다. 맛있는 음식은 이미 다 입에 대보았고, 수박마저 대실패를 한 마당에 저자에 흔히 널린 사과라니.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방금 전엔 수박 대소동으로 진까지 뺀 이연화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과를 받아들었다.
"...음?"
또 입덧이 올라오더라도 한입 먹고 올리자 싶어 아삭 베어문 순간, 이연화는 놀라 잠시 멈칫했다. 뭐지, 이 입으로 들어오는 새콤달콤하면서도 아삭한 이 과일은? 신선들이 먹는다는 신선과가 바로 이런 맛일까. 사과를 씹자 과즙이 터지며 입안을 부드럽게 감쌌고 씹어서 목으로 넘기는 그 과정 어디에도 메스꺼움은 올라오지 않았다.
"맛있어.."
"맛있어? 먹을 만 해??"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근 며칠 동안 이렇게 입안 가득 무언가를 씹어 넘긴 적이 없었는데. 이연화가 촉촉한 눈으로 사흘 굶은 거지처럼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먹자 옆에서 방다병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좋다고 팔짝팔짝 뛰는 꼴이 마치 눈 오는 날 놀러 나온 강아지 같았다.
"떨이 사과를 파는 노파가 있길래 조금 샀는데, 사기를 잘했네."
"..사과 좋아해?"
"어, 난 수박은 별로인데 사과는 좋더라고. 내가 어릴 때부터 사과를 그렇게 좋아했대."
하. 답은 사과였던가. 이 가을 밤에 사방 천지에 널린 사과를 두고 수박을 찾겠다고 이 고생을 하다니.. 이 녀석은 뱃속에서부터 제 아비의 입맛을 쏙 빼닮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약마는 전날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진 이연화의 얼굴을 보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연화가 앉은 상 위에 놓인 소쿠리에는 탐스러운 사과가 수북히 담겨 있었다. 다른 건 역해서 들 수가 없는데 이 사과만은 들어간다며, 이연화는 약마와 마주한 자리에서도 사과를 오물거렸다.
"뭐라도 드시니 다행입니다.. 고비만 좀 넘기면 입덧도 나아질 테니 그때까지 몸 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
오늘의 진맥을 마치고 물러가려던 약마가 잊을 뻔 했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참, 복중 태아가 벌써 넉달이 넘었는데 아직 태명이 없으시죠. 태명을 지어 불러주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도 도움이 됩니다만.. 혹시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으실까요?"
"...수박이."
"네?"
"수박이로 하죠."
이연화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쉬지 않고 사과를 먹으면서 애 이름은 수박이로 한다고? 약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여 수박이 드시고 싶으신지요..?"
"수박? 어휴, 어제 먹어봤는데 토할 거 같았소."
"그런데 왜 수박을..."
"그.. 그런 게 있습니다."
아비가 아이를 위해 처음으로 애써준 날이었으니까. 부모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해줄 수는 없을지라도, 이렇게나마 아비의 흔적을 남겨주고 싶었던 연화였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결국 태명은 수박이로 낙점 땅땅땅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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