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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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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화는 눈 앞에 놓인 탕약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보양탕?"
"네,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마가 지은 약탕을 먹으려니 영 꺼림칙해서 말이지. 약마표 벽차지독이 얼마나 독하고 잔인한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이연화 자신이었다. 이연화는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약탕 그릇을 들어올렸다. 

금원맹주의 명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충성스러운 약마이니 설마 여기에 독을 타진 않았겠지. 이연화는 눈을 질끈 감고는 약탕을 들이켰다. 으윽... 

"...정말 독이 없는 게 맞소?"
"존상의 명이 있었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일전에 그대가 만든 것 때문에 크게 당한 적이 있어서 말이외다.." 
"맛은 조금 역할 수 있어도 효과는 좋은 약탕이니 끝까지 잘 드시지요."

이연화는 약을 다 들이키고도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약탕은 약마가 진정 새벽부터 일어나 정말 정성을 다해 달인 보양탕이었다. 약마는 자신의 손으로 이연화의 아이를 보살필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벽차지독으로 생명을 잉태시켜 탄생하게 하다니, 그야말로 자신으로 비롯한 생명이 아닌가. 연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과업이라는 생각에 정말 성심성의껏 이연화와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약마였다.

"뒤늦게 입덧이 시작해 식사량도 줄었으니, 보양탕이라도 드셔서 원기를 보강해야 합니다."

임신 초기에나 있다는 입덧이 유별나게 넉달째인 지금에서야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임신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시기에도 속이 메슥거리긴 했지만, 이정도로 힘들진 않았었다. 이걸 먹어도 저걸 먹어도 속에서 받지 않아 올리기 일쑤였고, 입맛을 잃어 도통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현저히 줄어든 식사량에 처소의 살림을 봐주는 천기당의 일손들에게 민망하기까지 했다.  

약마는 이연화의 경우가 드문, 아니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일반적인 회임의 증세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며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약마가 매일 들고다니는 일지는 어느새 이연화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빼곡해지고 있었다. 

"혹시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신지요?"
"그게... 아니오, 됐소."

약마의 말에 한 가지 머리를 스친 것이 있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말을 꺼내봐야 헛소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수박이 먹고 싶어서는..' 

이제 단풍도 다 져가는 이 계절에, 대체 수박이 어디있단 말인가.

어젯밤부터 문득 수박이 먹고 싶더니만 온종일 수박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원래도 수박을 좋아했지만, 입덧으로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우니 시원한 수박 한 입이 더욱 간절했다. 달달하고 시원한 수박을 한입 먹으면 이 가슴께에 겹겹이 쌓인 듯한 입덧도 쑥 내려갈 것만 같았다. 

한여름에 딸기가 먹고 싶고, 한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다는 게 임신한 음인이라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산해진미까지는 아니더라도, 방소보가 자랑했듯 숙수의 요리 솜씨가 뛰어나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천기산장이었다. 널리고 널린 음식 중에서도, 지금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수박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늘도 몇 술 못 뜨신 겁니까? 제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미안합니다. 요리가 훌륭한데, 제가 요새 입맛이 영 없어서.."

이연화의 식사량이 소문이 났던지 천기산장의 숙수가 직접 이연화의 처소를 찾았다. 이연화는 괜한 걸로 신경을 쓰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몸 상태를 밝히고 입덧 때문에 그렇다고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술 뜨지 않은 이연화의 상을 보곤, 숙수는 어떤 요리를 좋아하는지 어떤 간을 좋아하는지를 한참을 꼬치꼬치 묻다가 돌아갔다. 

그날 밤. 이연화는 좌선을 하고 앉아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도는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수박이 먹고 싶지 않다... 수박이 먹고 싶지 않다.. 수박이... 수박이 먹고 싶다..!

"안되겠다, 객잔에라도 가봐야겠다."

결국 이연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박 생각 때문에 심마에 빠져 주화입마에 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큰 객잔의 경우 높으신 손님들을 위해 빙고에 수박을 저장해놓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비싸긴 할테지만, 외상이라도 해볼까. 아니면 복면을 쓰고 빙고를 터는 게 나으려나. 이연화의 머릿속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가을 밤에 수박을 먹을 수 있느냐,로 가득차 있었다. 

벽차지독도 견뎌낸 이연화이거늘, 고작 수박 하나 때문에 이리 되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연화의 머리가 이해를 하건 말건, 이연화의 손은 빠르게 옷을 챙겨입고 발은 문간을 나섰다.

이연화가 주저없는 몸놀림으로 파사보를 펼쳐 날아오른 순간-

"이연화-!!"

누군가 황급히 자신을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방다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경공을 멈추고 다시 내려앉았다. 곧 방다병 역시 이연화 옆으로 달려가 거친 숨을 허덕이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여러모로 해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나, 나 도망가는 거 아냐!"
"..그럼 무슨 일인데. 이 밤에 파사보까지 펼치고 어딜 가는 거야"

저기, 언젠가 도망을 가긴 갈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아니라고! n번째 도망 전력이 있으며 향후 야반도주 임신튀를 꿈꾸는 주제에, 이연화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때문이야?"
"이상해보이는 건 알겠는데.. 진짜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

"하인들도 그렇고 숙수도 그렇고 요새 니가 밥도 영 못 먹는다고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너무.. 널 힘들게 해서 그런 건가 싶어서.."

아무래도 하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처소를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자신 때문에 이연화가 힘들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이연화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 하고 있었다. 지금의 방다병이 강아지였더라면 양쪽 귀가 축 처져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마주한 건 야밤에 파사보로 날아가는 이연화였으니..

"내가 몰아붙여서 도망가게 만든 거라면.."
"아니 정말 도망가는거 아니었다고! 내가 대답... 해주기로 했잖아!" 

대답, 이라는 소리에 방다병의 처졌던 귀가 쫑긋거리는 듯한 착시가 들었다. 그렇지, 대답을 기다린다고 했었지. 아직도 어떤 대답을 들려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연화는 방소보가 우울해서 혼자 땅 파는 꼴을 보고싶진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 아니라고."
"그럼, 진짜 어딜 가는 거야?"
"...그게.."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고 해명하려면 정말 어딜 가려고 했는지 이야기를 해야겠지. 이 말을 정말 해야 할까. 안 믿을 것 같은데. 차라리 그냥 도망치는 중이었다고 다시 이야기할까.. 이연화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곤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수박...이 먹고 싶어서."
"수박??"

그래 어이가 없겠지.. 말하는 나도 어이가 없는데. 이연화는 사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서 해명을 늘어놓았다. 요새 입맛이 하도 없었는데, 얼마 전 적비성이 약마를 데리고 와서 진료를 보게 하더라. 들어보니 벽차지독 해독 부작용 때문인 것 같더라. 이연화는 행여 방다병이 관하몽을 부르겠다고 난리를 피울까봐 일시적인 증세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덧붙였다. 아무튼 그런 터에 갑자기 수박이 먹고 싶었고, 바보 같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수박 한번 찾아보려 나서던 길이었다.. 여기까지 털어놓자 방다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 밤에 수박을 찾으러 어딜 갈 생각이었는데?"
"그냥.. 객잔들 돌면서 물어볼까 했지.."
"...허"
"비웃지마, 방소보! 내가 오죽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이연화가 부담감 때문에 도망치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방다병이 한결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 그 일이 있은 뒤로 오랜만에 보는 방다병의 미소였다. 민망함에 괜히 고개를 슬쩍 돌린 채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는데, 방다병이 이연화의 팔을 잡았다. 

"그럼 같이 가자."
"..어딜"
"수박 찾으러."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보통 연화, 다병, 비성 이렇게 부를텐데
연화루에서 이연화! 방다병! 적비성! 이렇게 성까지 다붙여부르다보니
이름만 쓰는게 뭔가 어색하닼ㅋㅋㅋㅋ 오히려 ㅋㅋㅋ 
연화 애 태명은 뭐가 좋으려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