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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01:38

1편 / 2편 / 3편

이연화는 그날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으슥한 산 속에서 거사를 치룬 후.. 정신을 차린 이연화는 자신의 몸을 닦아주며 뒤처리를 하고 있는 방다병에게 끝내 '그 말'을 꺼냈다.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 방 소보.'
'....'
'떠나진 않을게. 약속했으니까.. 다시 돌아갈테니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방다병의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이었다.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도 그 말을 눌러담게 할 순 없었다. 우리는 하룻밤 잠자리에 얼레벌레 이어질 만큼 간단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만하면 감히 사부를 묶어두고 강제로 취한 괘씸한 놈에게 줄 벌이 될 것이다. 상처를 주겠다 결심했지만 정작 상처받은 방다병의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이연화는 방다병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오늘 일은 잊는 거야' 

한참을 침묵하던 방다병의 입에서 다른 대답, 아니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좋아해, 이연화. 아니, 사랑해.'
'......'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미안해..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방 소보..'
'아직 대답하지 마. 무슨 말 할지 다 알아. 넌 아직 어리다, 어려서 잘못 생각하는 거다 이런 말 할 거면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마. 하루 이틀 생각한 것도 아니고 나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아. 너 하나 책임질 수 있는 사내라고.'

그래, 어리지 않은 건 좀 전에 온몸으로 체험했지. 이연화는 격렬했던 거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나 정말, 널.. 지켜주고 싶어. 절세고수 이상이한테 무슨 말하는 거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널 혼자 두면 내 마음이 안 놓이는데 어떡해.'
'.....'
'충분히 생각해줘. 재촉하지 않을테니까. 그럼, 대답 기다릴게.' 

그날의 절절했던 고백 이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은 오히려 방다병이었다. 아무래도 부담을 주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것 같았다. 반대로 이연화가 방다병과의 자리를 피하곤 했다. 자꾸만 그날의 일이 떠올라 방다병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방다병의 실망한 표정을 봐야하는 것 역시 이연화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이연화의 눈에 일전의 그 약재가 든 서랍이 들어왔다. 받아오긴 했지만 서랍 안에 넣어두곤 다시 만지지조차 못했다. 아이를 떠나보내는 건 그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야만 해야 할 수도 있다. 방다병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어야만 했던 그날밤처럼. 방다병과 자신의 관계는 그랬다. 

이연화는 자신의 판판한 배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계속되던 배를 콕콕 쑤시는 듯한 통증도 어지러움이나 메슥거림도 어느 정도 사라진 지라 별 느낌이 없었다. 정말 이 뱃속에 있는 건가. 그.. 그러니까, 아기가? 정말 그 의원이 돌팔이였던 건 아니고?  

저녁을 봐주러 오는 천기당의 일손들도 모두 물러갔겠다, 이연화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는 파사보를 펼쳤다. 해독된 후 처음으로 써보는 파사보였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중독되었을 때와는 비교할 바 없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이번엔 검을 꺼냈다. 이연화에게는 검이 여전히 두 자루였다. 이제 검은 필요없다고 분명히 말했건만, 기어코 방다병과 적비성이 한 자루씩 구해왔기 때문이었다.  

검을 휘둘러보았다. 휙, 허공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여전히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임신했다고 해서 내력이라거나 무공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닌가. 음인 검객은 본 적이 있어도 임신한 음인 검객은 본 적이 없긴 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연화의 검은 상이태검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때,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이연화를 덮쳤다. 

- 챙

고요한 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침입자의 기척을 알아채자마자 이연화는 검을 휘둘렀고,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보지 않고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니, 미친...! 적맹주, 이게 무슨 짓이야!"
"파사보에 상이태검까지 펼치다니, 드디어 수련을 할 마음이 들었나보군."

적비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고..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보는 상이태검에 이 무공바보가 좋아서 헐레벌떡 뛰어온 거로군.

"저기, 아비?.. 아니, 좀!! 말로 하자고!"
"비무에 말은 필요없다."
"그러니까 비무를 할 생각이 없대도!"

적비성은 10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첫사랑을 헐레벌떡 쫓아온 사람마냥 좋다고 달려들었고, 검을 거둘 생각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한번 맞붙기 시작한 검은 멈추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적이 아닌, 친우에 가까운 적비성이었지만 비무를 작정하고 덤비는 금원맹주의 검을 만만하게 맞받아칠 수는 없었다. 검에 온 신경을 기울인 채 합을 겨루던 그 순간. 

"....읏..!"

갑자기 이연화가 검을 든 손을 거뒀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고, 검을 들지 않은 손은 배를 향했다. 그 바람에 적비성은 하마터면 이연화의 목을 정통으로 찌를 뻔 했다. 비무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쓰러져 버린 이연화에, 놀란 적비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연화!"
"지금, 배가... 이상한 느낌이.."

처음 느끼는 감각에 놀란 이연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 오랜만에 상이태검을 쓰며 온몸의 기운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몸의 변화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설마 아직 벽차지독이 완벽하게 해독된 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독의 기운이 강하게 발작하는 거라면.. 

이연화는 배에 손을 올린 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보던 적비성이 자신의 손을 이연화의 배에 올렸다. 

".....!"

다시 한 번 이연화의 배에 이상한 울림이 느껴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연화와 적비성이었다. 두 사람은 이연화의 배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같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연화는 물론이고 적비성 역시 이 감각의 정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야, 약마!"  
"예!"

어찌나 당황했던지 적비성은 말까지 더듬었다.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약마할범이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달려왔다. 

"약마를 불렀어? 천기산장에?"
"지난번 네 몸의 기운이 변한 게 걸려서 약마를 데려왔다."

천기당을 금원맹 별장쯤으로 아는 거야, 지금? 금원맹주에 약마까지..! 이연화는 이와중에도 누가 들을 새라 소리 죽인 채 타박했지만 적비성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마가 다가와 진맥을 위해 이연화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순간 이연화가 약마를 피해 물러섰다. 적비성이야 그렇다쳐도 약마는 의원이었다. 자신을 진맥하면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들키고 말 것이다.

이연화가 몸을 피하자 적비성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뭐냐. 빨리 팔을 내."
"...시, 싫어!"
"지금도 이상증세가 있었잖아. 벽차지독이 다 해독되지 못한 걸수도 있으니, 벽차지독을 만든 약마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이리 와."
"싫다니까!"

이연화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고, 적비성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야밤의 비무는 그렇게 야밤의 술래잡기로 변해갔다. 이연화는 이제 그만 돌아가라며 말도 안되는 축객령을 내리곤 방으로 도망가려 했다. 아무리 내력을 많이 잃었다고는 해도 왕년의 이상이를 몸으로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비성은 체념하는 듯한 태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이연화가 방심한 순간을 틈타 그의 팔을 결박했다.

"..아비, 이젠 연기도 해?"
"사기꾼이랑 같이 다니다보니 옮았나보군."

적비성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약마에게 손짓했다. 이연화는 거부하려 버둥거려봤지만 맨몸으로 적비성의 악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약마가 이연화의 팔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그리곤 놀란 얼굴로 이연화의 배도 짚었다. 

"아니, 그..."

적비성이 진맥 결과를 재촉했고, 약마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사고문주 이상이는.. 양인이 아니었습니까?"
"..벽차지독의 음기에 형질이 변했소."
"그,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니, 그렇다고 한들 이게 가능한..?"

이연화와 약마가 자신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적비성이 못마땅한 얼굴로 약마를 윽박질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존상, 송구스럽지만 이 자는.. 회임을 했습니다."
"회임?"
"네, 회임을.."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구) 천하제일 이상이, 현) 신의 이연화의 얼굴은 석류치마보다도 더 붉게 물들었고, 강호 최고의 대마두 금원맹주 적비성은 '회임..?'을 되내이며 멍청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이연화는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직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임신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비성 앞에서 까발려지다니 민망하고 창피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금 두 분이 느끼신 것도 태동입니다. 그리 놀라신 걸 보니 아무래도 첫 태동인 듯 합니다만.."
 
태동 소리까지 듣자 이연화는 이제, 아이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이 뱃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부정하려는 어미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온힘을 다해 움직이면서. 

"이상이의 아이가 맞긴 한가 봅니다. 비무 중 검 맞부딪히는 소리에 첫 태동이 일다니.."

약마할범이 주책맞게 덧붙인 한 마디에 이연화의 얼굴이 또 한번 붉게 물들었다. 이걸 어떤 감정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몇 각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지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아이가 벌써 자신을-어쩌면 아비를- 닮았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조금은 뿌듯하기까지 한 이 기분을 말이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