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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2 13:19
전편
이연화는 이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연화로 살아오는 동안 이미 생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살고 싶다는 욕망도 미련도 없었고,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으로 남은 생만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연화의 남은 생에 더 많은 미련을 보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이연화가 살 방도를 찾아다녔고, 기어코 이연화의 맹독을 해독하고야 말았다.
벽차지독을 해독하고 얼마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이연화는 솔직히 자신의 수명 연장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연화의 정체가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이상이 때의 은원과 굴레가 다시 그를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사고문은 날 다시 문주로 받아들일 기세처럼 굴었지만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가 비운 10년 동안 소자금은 문주로 추대될 정도로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자신을 향한 원망을 풀지 못했다. 이연화는 그들의 원성까지 들어가며 소자금이나 운피구를 탓하고 그들을 억눌러 다시 문주가 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10년 전에 그들이 나를 버렸을 때, 나도 그들을 버렸기에, 사고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연화는 자신의 처소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해독과 회복을 위해 방다병은 천기산장의 처소를 내주었고, 이곳에서 머문 지도 벌써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천기산장도 그의 터전이 될 순 없었다. 황제는 이연화가 남윤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방다병의 아비를 놓아주고 관직을 살도록 내버려둔 것은, 일종의 인질이었다. 네가 숨죽여 산다면 이 평화가 계속될 테지만, 네가 허튼 짓을 한다면 이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 방다병과 천기산장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이연화는 순순히 생명을 바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다병과 적비성은 이연화의 꺼져가는 남은 생을 기어코 살리고야 말았고, 건강해진 이연화를 보는 황제의 마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남윤 황실의 후계자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그를 처치하지 않아주기만을 바라는 것도 요행이었다.
그러니, 다시 연화루를 끌고 다니며 시선을 끌 수도 없었다. 참으로 진퇴양란이었다.
결국, 이연화는 남은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천기산장 하효혜 당주의 여동생이자 전운비의 아내인 하효봉의 생일연이 있던 날이었다. 부가 넘치는 천기산장답게 집안은 온통 화려한 등과 장식으로 꾸며졌고, 연회장에서는 진기한 음식과 좋은 술이 넘쳤고,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이연화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천기산장이 자신을 거두어준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전운비-하효봉 부부에게 그럴 듯한 선물을 전했고, 전운비도 그런 이연화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이의원, 아니, 이문주. 이렇게 다병이와 연을 맺고 천기산장에 머물러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유, 하 당주님. 그저 이연화라고 부르시지요. 정말 의원도 아니고 문주는 더더욱 아닌데요."
이연화는 자연스럽게 방다병 가족들과 섞여있었고, 그런 사실이 어쩐지 방다병을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술은 마셔도 취할 만큼 마시는 성정이 아니었거늘, 오늘따라 술을 많이 들이키는 것 같았다. 이연화는 함께 웃으며 방다병에게 술을 한잔 더 따라주었다.
"오늘따라 많이 마시네. 이 사부 술도 한잔 받지."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이연화, 너는 아직 해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술은 좀 천천히 마셔."
"그래, 그래"
술을 꽤나 마셔서 발음이 살짝 꼬일 지경인데도 이 청년은 이연화를 먼저 챙겼다. 술을 받아드는 방다병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숱한 고난이 끝나고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다는 그런 꿈이라도 그리고 있는 걸까. 이연화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손님의 반은 취해 나자빠질 정도로 잔치가 무르익은 시각.
작은 봇짐 하나 없이 천기산장을 나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이연화였다. 이연화는 처음부터 어떤 것에도 미련 하나 없었다는 듯 홀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마셨나..'
처음부터 사람들, 특히 방다병을 안심시킬 요량으로 술을 같이 들이켰더니 취기가 조금 오르는 듯 했다. 이런 술기운 따위 양주만으로 해독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이렇게 조금 취한 채로 걷고 싶은 날이었다. 후우.. 술기운 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를 돌자 멀리 잔치 등으로 환히 불이 켜진 천기산장이 보였다. 방소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다음날 이연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방다병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미 숱하게 도망갔던 이연화인데, 이번에도 씩씩거리며 또 날 찾아나설까.
어차피 오래 있을 수 없는 곳이었잖아. 이연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방다병에게 사형과 자신의 업보를 그대로 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방다병은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떨어져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천기산장의 도련님으로서 귀애받으며, 창창한 미래를 살아야했다.
그때.
"....!"
갑자기 무언가 이연화의 발목을 빠르게 옭아맸다. 양다리가 벌어진 채 그대로 묶였고, 검을 꺼내려고 든 손목마저 결박되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피했을 함정이었거늘, 이상하게 돌았던 술기운 때문인지 어처구니없게 걸려들고 말았다. 자신을 가둔 것이 천기산장의 유명한 함정 기관임을 깨달은 건 조금 뒤였다. 천기산장 근처도 아니고 이런 으슥한 고갯길에 이런 기관이, 그것도 개조된 것 같은 강철 기관이 있을 줄이야..
"..내 이럴 줄 알았지."
익숙한 이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모의 원수로 알았을 적마저 다정했던 이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한때 천하제일 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연화의 강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너무 친절하고 너무 사랑스럽더라고. 그런데, 이연화가 그렇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잖아?"
"방다병..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지?"
"내가 왜?"
"......"
"풀어주면 또 달아날 거잖아."
이연화의 양손과 양발을 강하게 결박한 건 기관의 사슬이었지만 이연화의 심부를 날카롭게 찌르는건 차분하게 가라앉은 방다병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어? 세상한테서? ..나한테서?"
"방다병.. 천기산장이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어디로 떠나건 간에 내 자유 아니야? 아니면, 나 갇혀 있는 거였어?"
"그렇게 당당해서 이 밤에 몰래 도망가려고 했냐고."
이연화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방다병 몰래 도망가려고 한 것도 맞았고, 야반도주하려고 했던 것도 맞았으니까.
방다병을 마주 볼 면목이 없어 살짝 눈을 내리깔았는데, 방다병이 빠르게 이연화의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이연화의 얼굴을 잡고 자신을 바로 보게 했다. 방다병의 얼굴은 이연화와 한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방다병의 거친 숨결에서 짙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
방다병이 이연화의 얼굴을 잡은 채로 그대로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방다병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강호의 친구, 사형의 아들,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으로 애써 부정하려했던 그 선을, 방다병이 기어이 넘어버리고 말았다.
방다병은 집요하게 이연화의 입술과 혀를 탐했다. 술기운 섞인 숨이 달아오르자 방다병의 손이 이연화의 허리를 꽉 잡았다. 평소의 그 앳되고 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접문은 강렬했고, 이연화의 혼을 빼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방다병이 잠시 떨어져나갔을 때 이연화는 벅찬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방다병, 너 왜 이래. 취했어."
"취했지."
목소리가 떨리는걸 느꼈을까. 이제 그만 멈추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희미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안 돼, 멈추자. 여기서 멈추면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어.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이제 그만 풀어줘."
"..후회는 계속 하고 있어."
왜 당신을 진작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왜 당신을 계속 아프게 내버려뒀을까, 왜 나는 먼저 태어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선고도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후회와 후회로 점철된 방다병의 생각을, 이연화는 모를 것이다.
방다병은 다시 이연화의 뒷머리를 잡고 접문을 이어나갔다. 방다병이 손이 이연화의 웃옷 매듭을 풀었다. '방다병!!' 놀라 버둥거리는 이연화를 꾹 누른 채 이연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벽차지독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정말 온 힘을 다한다면 방다병 하나 떨구는 것쯤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방다병의 눈을 보며, 더 이상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둘 사이의 선을 남김없이 부숴버리는 방다병을 보면서 그저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이연화는 이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연화로 살아오는 동안 이미 생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살고 싶다는 욕망도 미련도 없었고,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으로 남은 생만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연화의 남은 생에 더 많은 미련을 보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방다병과 적비성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이연화가 살 방도를 찾아다녔고, 기어코 이연화의 맹독을 해독하고야 말았다.
벽차지독을 해독하고 얼마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이연화는 솔직히 자신의 수명 연장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연화의 정체가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이상이 때의 은원과 굴레가 다시 그를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사고문은 날 다시 문주로 받아들일 기세처럼 굴었지만 그 자리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가 비운 10년 동안 소자금은 문주로 추대될 정도로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자신을 향한 원망을 풀지 못했다. 이연화는 그들의 원성까지 들어가며 소자금이나 운피구를 탓하고 그들을 억눌러 다시 문주가 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10년 전에 그들이 나를 버렸을 때, 나도 그들을 버렸기에, 사고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연화는 자신의 처소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해독과 회복을 위해 방다병은 천기산장의 처소를 내주었고, 이곳에서 머문 지도 벌써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천기산장도 그의 터전이 될 순 없었다. 황제는 이연화가 남윤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방다병의 아비를 놓아주고 관직을 살도록 내버려둔 것은, 일종의 인질이었다. 네가 숨죽여 산다면 이 평화가 계속될 테지만, 네가 허튼 짓을 한다면 이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 방다병과 천기산장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이연화는 순순히 생명을 바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다병과 적비성은 이연화의 꺼져가는 남은 생을 기어코 살리고야 말았고, 건강해진 이연화를 보는 황제의 마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남윤 황실의 후계자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그를 처치하지 않아주기만을 바라는 것도 요행이었다.
그러니, 다시 연화루를 끌고 다니며 시선을 끌 수도 없었다. 참으로 진퇴양란이었다.
결국, 이연화는 남은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천기산장 하효혜 당주의 여동생이자 전운비의 아내인 하효봉의 생일연이 있던 날이었다. 부가 넘치는 천기산장답게 집안은 온통 화려한 등과 장식으로 꾸며졌고, 연회장에서는 진기한 음식과 좋은 술이 넘쳤고,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이연화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천기산장이 자신을 거두어준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전운비-하효봉 부부에게 그럴 듯한 선물을 전했고, 전운비도 그런 이연화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이의원, 아니, 이문주. 이렇게 다병이와 연을 맺고 천기산장에 머물러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유, 하 당주님. 그저 이연화라고 부르시지요. 정말 의원도 아니고 문주는 더더욱 아닌데요."
이연화는 자연스럽게 방다병 가족들과 섞여있었고, 그런 사실이 어쩐지 방다병을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술은 마셔도 취할 만큼 마시는 성정이 아니었거늘, 오늘따라 술을 많이 들이키는 것 같았다. 이연화는 함께 웃으며 방다병에게 술을 한잔 더 따라주었다.
"오늘따라 많이 마시네. 이 사부 술도 한잔 받지."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이연화, 너는 아직 해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술은 좀 천천히 마셔."
"그래, 그래"
술을 꽤나 마셔서 발음이 살짝 꼬일 지경인데도 이 청년은 이연화를 먼저 챙겼다. 술을 받아드는 방다병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숱한 고난이 끝나고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다는 그런 꿈이라도 그리고 있는 걸까. 이연화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손님의 반은 취해 나자빠질 정도로 잔치가 무르익은 시각.
작은 봇짐 하나 없이 천기산장을 나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이연화였다. 이연화는 처음부터 어떤 것에도 미련 하나 없었다는 듯 홀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마셨나..'
처음부터 사람들, 특히 방다병을 안심시킬 요량으로 술을 같이 들이켰더니 취기가 조금 오르는 듯 했다. 이런 술기운 따위 양주만으로 해독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이렇게 조금 취한 채로 걷고 싶은 날이었다. 후우.. 술기운 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를 돌자 멀리 잔치 등으로 환히 불이 켜진 천기산장이 보였다. 방소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다음날 이연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방다병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미 숱하게 도망갔던 이연화인데, 이번에도 씩씩거리며 또 날 찾아나설까.
어차피 오래 있을 수 없는 곳이었잖아. 이연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방다병에게 사형과 자신의 업보를 그대로 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방다병은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떨어져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천기산장의 도련님으로서 귀애받으며, 창창한 미래를 살아야했다.
그때.
"....!"
갑자기 무언가 이연화의 발목을 빠르게 옭아맸다. 양다리가 벌어진 채 그대로 묶였고, 검을 꺼내려고 든 손목마저 결박되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피했을 함정이었거늘, 이상하게 돌았던 술기운 때문인지 어처구니없게 걸려들고 말았다. 자신을 가둔 것이 천기산장의 유명한 함정 기관임을 깨달은 건 조금 뒤였다. 천기산장 근처도 아니고 이런 으슥한 고갯길에 이런 기관이, 그것도 개조된 것 같은 강철 기관이 있을 줄이야..
"..내 이럴 줄 알았지."
익숙한 이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모의 원수로 알았을 적마저 다정했던 이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한때 천하제일 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이연화의 강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너무 친절하고 너무 사랑스럽더라고. 그런데, 이연화가 그렇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잖아?"
"방다병..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지?"
"내가 왜?"
"......"
"풀어주면 또 달아날 거잖아."
이연화의 양손과 양발을 강하게 결박한 건 기관의 사슬이었지만 이연화의 심부를 날카롭게 찌르는건 차분하게 가라앉은 방다병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어? 세상한테서? ..나한테서?"
"방다병.. 천기산장이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어디로 떠나건 간에 내 자유 아니야? 아니면, 나 갇혀 있는 거였어?"
"그렇게 당당해서 이 밤에 몰래 도망가려고 했냐고."
이연화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방다병 몰래 도망가려고 한 것도 맞았고, 야반도주하려고 했던 것도 맞았으니까.
방다병을 마주 볼 면목이 없어 살짝 눈을 내리깔았는데, 방다병이 빠르게 이연화의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이연화의 얼굴을 잡고 자신을 바로 보게 했다. 방다병의 얼굴은 이연화와 한뼘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방다병의 거친 숨결에서 짙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
방다병이 이연화의 얼굴을 잡은 채로 그대로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방다병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강호의 친구, 사형의 아들,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으로 애써 부정하려했던 그 선을, 방다병이 기어이 넘어버리고 말았다.
방다병은 집요하게 이연화의 입술과 혀를 탐했다. 술기운 섞인 숨이 달아오르자 방다병의 손이 이연화의 허리를 꽉 잡았다. 평소의 그 앳되고 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접문은 강렬했고, 이연화의 혼을 빼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방다병이 잠시 떨어져나갔을 때 이연화는 벅찬 숨을 고르며 말했다.
"방다병, 너 왜 이래. 취했어."
"취했지."
목소리가 떨리는걸 느꼈을까. 이제 그만 멈추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희미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안 돼, 멈추자. 여기서 멈추면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어.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이제 그만 풀어줘."
"..후회는 계속 하고 있어."
왜 당신을 진작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왜 당신을 계속 아프게 내버려뒀을까, 왜 나는 먼저 태어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선고도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후회와 후회로 점철된 방다병의 생각을, 이연화는 모를 것이다.
방다병은 다시 이연화의 뒷머리를 잡고 접문을 이어나갔다. 방다병이 손이 이연화의 웃옷 매듭을 풀었다. '방다병!!' 놀라 버둥거리는 이연화를 꾹 누른 채 이연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벽차지독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정말 온 힘을 다한다면 방다병 하나 떨구는 것쯤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방다병의 눈을 보며, 더 이상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둘 사이의 선을 남김없이 부숴버리는 방다병을 보면서 그저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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