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주의 핵노잼주의 캐붕주의



(BGM ㅊㅊ / 등륜 - 치정총)

1. 첫 번째 생 / 연화오 참변
2. 두 번째 생 / 연화오 재건기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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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였어. 부모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았지. 제대로 먹지 못해 깡마른 몸에 씻지 못해 꾀죄죄하게 때가 묻은 얼굴이 영락없는 까마귀 사촌이었어. 하지만 아이가 정말로 야야(까마귀)라고 불리게 된 건 운몽 강씨의 젊은 종주에게 거둬지고 난 뒤부터였어.

연화오의 수사들과 야렵을 나갔던 강징은 갑자기 숲 위로 무서울 만큼 많은 떼까마귀 떼가 솟구치는 것을 보았어. 까악까악 소리 높여 우는 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잠잠해질 기미 없이 점점 더 커져 가기만 했어. 결국 강징은 수사 두엇을 대동하고 직접 동정을 살피러 갔어. 거기서 강징이 발견한 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거지 아이였어. 아이의 주변에 깨져 있는 알들을 보고 강징은 대강 상황을 짐작했어. 필시 까마귀 둥지를 뒤져 알을 훔쳐 먹으려다 새들에게 공격을 받고 나무에서 떨어졌겠지. 열 살 남짓 된 어린 몸에 몰려든 까마귀들의 날갯짓이 몹시도 거셌어. 아이의 몸 곳곳에 검은 날개가 솟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어. 부사들이 까마귀를 쫓아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어. 강징이 자전을 몇 번 휘두르고 나서야 까마귀들은 아이에게서 떨어졌어. 다가가서 맥을 짚어보자 팔딱팔딱 여린 맥동이 손끝에 분명하게 전해졌지. 부사를 시켜서 아이를 안게 했는데, 부사의 손이 무릎 뒤로 들어온 순간 아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튕겼어. 명백한 고통의 소리였어. 강징은 습관처럼 눈을 찌푸렸어. 귀찮게 됐군.

*

하도 지저분해서 가무잡잡한 줄 알았던 아이는 씻겨놓고 보니 설원의 눈처럼 희부얬어. 뾰족한 코에 갸름한 턱선, 눈동자의 흰자위와 검은자위는 각각의 색이 선명하여 유독 또렷하게 도드라져 보였지. 아이는 그 말똥말똥한 눈에 경계심을 가득 담고 제게 닿는 모든 손길을 거부했어. 어찌나 발버둥을 치는지 씻기는 데만 한 시진이 넘게 걸렸다, 힘은 또 얼마나 좋은지 목욕통이 깨져 나가 중간에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 앓는 소리를 하는 가복의 앞섶이 아이가 튀긴 물로 푹 젖어 있었어. 가복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는지 아이의 팔다리는 손 자국과 꼬집힌 자국으로 빨갛고 파랗게 얼룩덜룩했어. 강징은 아이도 가복도 나무라지 않았어. 아이가 귀머거리인 걸 눈치채기도 했고... 아이의 눈에 떠오른 게 경계심만은 아니었거든. 아이는 무서워하고 있었어.

강징의 예상대로 아이는 연고 없는 처지였어. 말을 할 수 없으니 구걸도 제대로 할 수 없을 테고. 마을보다는 산이나 숲에서 자주 보인다고 했지. 지나다니는 행상들이 던져 준 먹을거리로 연명하다가, 정말 먹을 게 없으면 아까처럼 둥지에서 알을 훔치거나 나무 열매를 따 먹었겠지. 아이가 불쌍해서 데려온 건 아니었어.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진 꼴이, 저대로 놔 두면 정말로 까마귀 밥이 될 것 같아 인간인 이상 버려두고 올 수 없었을 뿐. 강징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어. 여덟아홉 먹은 사내아이. 부모 없이 헤매는, 배를 주리는, 다리를 다친, 겁에 질린....

"치료해주고, 낫거든 내보내라."

강징은 아이의 눈길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어. 강징을 여러 해 동안 보아 온 가복은 속으로 생각했어. 군식구가 하나 늘었구만.

*

아이가 연화오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어. 꼭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기본적인 사회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거든. 옷 입는 법도 수저를 쓰는 법도 몰랐고 침상이나 베개도 낯설어했어. 붙잡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기에는 아이가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조그맣고 귀여운 단계를 벗어나 꽤 자라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들 여유가 없었어. 종주가 바뀐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금린대로 시집 갔던 아씨가 살해당한지는 불과 1년도 되지 않았지. 가문의 기반을 다시 다지고 무역을 재개하고 상권을 회복시키고 문하생을 불러들이고. 당장 할 일이 없어도 해 두면 좋을 일들을 찾아 해 놓느라 연화오 구성원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걔 혹은 얘로 불렸던 아이에게 까마귀(야야)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지칭 대상을 추론할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어.

밤마다 낯설고 고달파 우는 제 소리를 저는 듣지 못하니, 같은 방을 쓰는 가복들이 짜증내며 구박해도 듣질 못하니, 야야는 꼬집히고 걷어채여 얼굴에 상처가 끊일 날이 없었어. 어린 짐승처럼 사념 없는 마음이 지고 가기에는 설움도 원망도 너무 무거운 감정이라 제 처지가 딱하다거나 분하다거나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 사실 야야는 뭐가 뭔지 잘 몰랐어. 알아보기 위해 입으로 가져가 깨물어보면 다들 질색하고, 음식이 보여 손을 뻗으면 싫어하고, 먹지 않으면 또 화를 내고, 때리고.... 야야는 제게 조금이라도 덜 낯선 곳, 어둠과 풀이 우거진 뒷산 초입에서 웅크린 채 동이 트길 기다리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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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에 떠는 몸 위로 뭔가가 풀썩 떨어졌어. 야야는 제 위를 덮은 두툼한 장포를 만져보았어. 부드러웠어. 해가 떨어지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직전 크게 몰려온 구름에서만 볼 수 있는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 예쁘지만 무거운 색. 무겁지만 흔치 않아 넋을 놓고 보게 되는 귀한 색. 천을 젖히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항상 그 색을 몸에 두른 그 사람이 야야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표정은 밤바람보다 차지만 한참을 입을 뻐끔대다 성을 내는 대신 저를 그저 내버려두고 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어.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유일하게 야야에게 시선을 주는 이기도 했지. 멀찍이서, 잠깐뿐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금세 제게서 시선을 거두고 떠나는 그, 묘하고 귀한 색의 사람을 야야는 하릴없이 바라보았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많이 추워 보였어.

*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야야를 발견한 게 열 손가락을 넘기게 된 어느 날 밤, 강징은 석반을 물린 후 아이를 종주실에 딸린 침소에 데려다 놓게 했어. 손수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자신은 집무를 보는 상 앞에 앉았지. 밤새 처리할 문건도 있고, 다음날 일도 다음달 일도 끌어와서 할 수 있으면 해야 할 정도로 한가득이었으므로 어차피 오늘 제가 침상을 쓸 일은 없었어. 비어 있을 바에야 누구라도 눕는 게 나을 테지.

아이는 처음 며칠은 거기서도 울었어. 하지만 강징이 들은 척도 안 하고 제 할 일에만 골몰하자 서서히 마음을 놓고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어. 며칠이 지나자 야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강징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어. 강징은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눈길을 줄 틈이 없던 거겠지. 아이는 며칠 간격을 두고 점점 거리를 좁혀왔어. 마침내 야야가 바짝 다가와서 강징이 보는 문서를 같이 들여다보게 됐을 때도 강징은 그저 내버려두었어. 글도 모르는 어린애에 벙어리니 경계할 이유가 없었거든. 대신 주방에 일러 밤마다 간단한 다과를 가져다 놓도록 시켰어. 강징이 일하는 동안 야야는 당과를 오물거렸어. 어느 날부턴가 야야는 강징이 보고 있는 문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어. 강징은 문득 고개를 들었고 야야가 꼼지락꼼지락 책상 위에 손가락 낙서를 하고 있는 걸 보게 됐어. 아이는 찻잔 속 찻물에 손가락 끝을 담갔다가 나무로 된 상 위에 죽죽 그어서 글자 비슷한 걸 그려 보이고 있었어. 심심했나보다 싶어 다시 시선을 거두려던 강징은 잠깐 생각하다가 서랍을 열고 종이와 여분의 붓을 꺼냈어. 강징은 종이 한 장에 큼지막하게 한 글자를 썼어.

[鸦](까마귀 야)

종이와 붓을 건네주자 야야는 허둥지둥 받았어. 이게 먹을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흑백이 또렷한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강징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지. 강징은 말없이 다시 한 번 글자를 써 보였어. 그리고 제가 봐야 할 문서로 눈을 돌렸어.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야야는 이미 강징이 준 종이를 다 쓴 뒤였어. 과연 강징이 써 보인대로 저 또한 종이 전체가 꽉 차도록 큰 [鸦](야)자를 여러 장 그려 놓았겠지. 한 두어 장 정도는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어. 가장자리에는 톱니 모양이 빙 둘러져 있는 어설픈 원형에, 위에는 더 조그만 물방울 모양이 빼곡히 올라간 것이 암만 봐도... 강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어. 참깨 당과였어.

*

그렇게 야야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익혀 나갔어. 하루에 한 글자씩만 써 보게 하던 것이 손놀림이 점점 빨라져서 몇 글자 더 늘려주고, 부수가 같은 것들끼리 모아놓고 함께 쓰게도 시켜보고.... 연화오의 가복들은 야야를 혼낼 때 병신이니 백치라고 불렀지만 강징은 야야가 백치이긴커녕 아주 많이 영특하다는 걸 알았어. 글을 배우는 속도도 빨랐고 눈치는 그보다 더 빨랐거든. 야야 저와 종이의 [鸦](야)자와 면경 속 얼굴을 번갈아 가리켜 준 것만으로도 처음 배운 [鸦](야)자가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아차렸지. 그 뒤 면경이 제 얼굴을 비추지 않도록 돌려놓은 뒤 손가락질하고, 자기 온몸을 훑어 보인 뒤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을 지어보이길래 [鏡](거울 경)자와 [我](나 아)자를 써 주었더니 바로 그 차이를 인지했어. 면경 속 얼굴과 실제 야야의 얼굴을 여러 번 톡톡 치고 [面](얼굴 면)자를 써 줬을 때도, 몸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준 뒤 [身](몸 신)자를 써 줬을 때도 야야는 바로바로 뜻을 파악했어. 면경을 들어보인 뒤 [鏡](경)자를 쓰고, 제 손가락을 앙 물어보인 뒤 [手](손 수)자를 써 보이는 식으로 제가 이해한 바를 되짚어 확인하곤 했지. 그럴 때마다 강징은 고개를 끄덕여줬어. 야야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게 긍정의 뜻이고 고개를 젓는 게 부정의 의미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신체의 각 부위와 문방사우, 방 안의 가구들, 참깨 당과와 꽃과자와 용수당과 꿀전병을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된 뒤 야야는 연화오의 온갖 것들을 종주실로 끌어와서 손가락질하며 이건 어떻게 쓰냐 물어보게 됐지. 그중에는 그릇에 담아 온 지네도 있었고 무쇠로 된 솥뚜껑도 있었고 분명 어느 가복의 침구에서 빼 왔을 게 분명한 목침도 있었어. 솥단지 통째가 아닌 게 어디람. 그렇더라도 뚜껑만으로도 꽤 무거웠을 텐데, 어린 것이 힘은 보통 장사가 아니었어.

강징은 그때마다 화를 내야 할지 그냥 알려주고 얼른 들려 보내야 할지 망설였지. 화를 내자니 화내는 이유를 설명해줘야 하고, 설명을 하자니 쓸 게 많아져 추가로 알려줘야 할 글자가 늘어나고, 화 한 번 잘못 냈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엉뚱한 짓을 벌일지 모르고.... 그래서 강징은 야야가 하는 건 웬만치 내버려두기로 했어. 공연히 시간을 버릴 바에야 글자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익히게 하는 편이 나을 테니.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일을 처리하는 데도 속도가 붙었어. 그날 처리할 안건을 마무리한 강징은 무심코 맞은편을 건너다봤어. 아이는 붓을 든 채 고개를 꾸벅꾸벅 떨궈가며 졸고 있었어. 이미 한 차례 엎어졌다가 일어났는지 새하얀 뺨에 쓰다 만 글자로 먹이 말라붙어 있었지. 강징은 아이를 들어다가 침상에 눕혔어. 침상에 걸터앉아 지금 잠들면 몇 시진이나 잘 수 있는지 계산해 보았지. 잠결에 뒤척이는 아이를 보노라니 금린대의 어느 침소에서 똑같이 칭얼거리고 있을 금릉이 떠올랐어. 반 년을 채우기가 무섭게 제 품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그 어린 것을, 낮 시간 동안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강징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어. 급한 일도 처리해 둔 상태고, .... 그래서였을 거야. 독하기로 이름난 삼독성수가 제 허리를 파고드는 어린 벙어리를 거절하지 않고 그 옆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려 덮은 것은.

강징은 잠이 들었어.

*

종주가 밤마다 그 까마귀를 데려다 재운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연화오의 가복들은 놀라워했겠지. 안 그래도 강퍅하신 분이 저 짐승 같은 아이를 어찌 견디느냐고 말이야. 누군가 그럴 듯한 추론을 내놓았어.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조카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니냐고. 호랑이도 제 새끼 젖 물리는 시기에 발견한 노루 새끼는 살뜰히 키운다더니만, 금릉 도련님이 막 금린대에 가셨으니 6개월의 공백 동안 아이 우는 소리가 그리워서가 아니겠느냐고...

'...우리 종주님이 그렇게 성정이 애틋한 분이란 말인가?'

다들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어. 바쁜 종주께서 까마귀를 앉혀놓고 글을 가르친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기껏해야 짐이나 나르게 할 놈을 데리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어. 듣지도 못하는 게 거치적거리기 일쑤라 밀치고 쥐어박는 게 예사였는데! 한동안 연화오의 가복들 사이에서는 종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겠지. 종주가 까마귀랑 딱 밤부터 아침까지만 같이 있을 뿐 그밖의 특별 대우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안도하는 이들도 있었을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 종주와 마주보는 아이를 함부로 대할 만큼 생각 없는 이들은 없었어.

​​

강징이 처음에 아이를 보고 위무선을, 금릉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는 위무선과 성격이 달랐어. 낮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니 눈치껏 하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침의를 입고 벗는 법, 수저를 사용해 음식을 먹는 법과 간단히 차를 우리는 법,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잡는 법 따위를 눈 앞에서 해 보일 때마다 용케도 따라하며 몸가짐이 눈에 띄게 능숙해졌으니 하루가 다르게 무섭도록 자라는 그 길고 날씬한 몸을 보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금릉을 연상하는 일도 차츰 줄어들었어. 물론 강징은 금린대에서 1년의 절반을 보내는 금릉에게도 누군가 이런 것들을 손수 가르쳐주기를, 그 누군가가 저보다는 더 능숙하고 인내심 있는 양육자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이야.

다들 놀라는 눈치였지만, 강징은 아이가 귀찮지는 않았어.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였거든. 그렇게까지 고민을 필요로 하거나 신경을 할애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거니와, 조세니 무역이니 바로 답을 낼 수 없으면서도 당장 매달려서 무언가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골치 아픈 문제들에 비하면야 눈앞에 들이미는 물건을 지시하는 기호를 적어주고 제대로 썼는지 훑어보는 일은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오니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지.

야야는 항상 강징을 열심히, 닳을 것처럼 열심히 쳐다봤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징도 야야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야야가 받은 종이를 다 사용하고도 강징이 저를 돌아보고 종이가 없는 걸 알아차릴 때까지 열심히, 그저 열심히 기다리기 때문이었어.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흑과 백이 너무도 선명한 커다란 눈 한 쌍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놀라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지.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타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 말을 삼키곤 했어. 듣지도 못하는 어린 것에게 화를 내서 무엇하나. 야야는 강징의 표정 변화에 아주 민감했어. 많은 밤을 함께 보낸 뒤에도 강징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하기사 강징이 표정이 좋거나 손속이 다정한 편은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야야가 강징을 톡톡 쳐 올 때가 있었어. 한참 어린 아랫것 주제에 저를 먼저 건드려오는 손길을 불손하다 느껴야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한 것은, ... 말 못하는 아이의 유독 선연한 두 눈이 어린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내비쳤고, 그 눈을 보노라면 아이가 강징의 몸에 손부터 가져다 대기 위해서 뱃속의 용기란 용기는 다 끌어 모았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간혹 그 눈은 강징에게 위무선도, 금릉도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했어. 저를 항상 먼저 건드렸던 주제에, 딱 한 번 꿈에도 상상한 적 없는 방식으로 무도하게 헤집어 놓고서 외려 겁에 질린 눈을 했던 무뢰한이 있었는데....

.... 거기까지. 강징은 단호하게 생각을 끊어냈어.

강징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 부른 야야가 강징과 빈 종이를 번갈아 손짓한 뒤 주저하면서 붓을 건네주었을 때, 강징은 야야에게 [汝](너 여)를 써 줘야 할지 [宗主](종주)를 써 줘야 할지 [江晚吟](강만음)을 써 보여야 할지 고민했겠지. 강징은 [汝](너)와 [江晚吟](강만음)보다는 압도적으로 사용할 일이 많을 [宗主](종주)부터 알려주기로 했어. 야야는 원하던 답을 얻어내고 기쁜 표정을 지었으나 그 뒤로도 한참을 더 머뭇대다가 강징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당겨 보였어. 아이가 뭘 원하는지 가늠하느라 강징의 미간이 좁아지고 한참이 지나도 풀어질 기미가 안 보이자 야야는 조급한 표정이 되었어. 야야가 쪼르르 달려가서 삼독을 번쩍 들고 오는 걸 보고 강징의 눈이 크게 뜨였어. 평소 같으면 바로 손에 든 걸 내려놓고 강징의 눈치를 살필 야야가 그 순간만큼은 다른 데 더욱 정신이 팔려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지. 야야는 삼독에 달린 술 장식과 강징의 옷자락을 번갈아 잡아당기고, 선물로 들어왔던 귀한 옥 벼루를 가리키고 침상에 놓인 베개도 가지고 와 보였어. 옥과 벼루와 베개를 어떻게 쓰는지는 이미 가르쳤고, 저것들의 공통점은......

"자색을 말하는 게냐?"

강징은 무심코 소리 내어 물었다가 야야가 못 듣는다는 데 생각이 미쳐 도로 입을 다물었어. 강징이 자색(紫色)을 써 주자 야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어. 야야는 새로 배운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하고, 강징은 중요한 서신에 보낼 답을 열중하여 적어내려가는 가운데 문득 딴 생각에 빠져들었겠지. 검은 곧 그 소유주와 동일시되니 함부로 남의 검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교육시켜야 했고, 그리고.... 아이에게 금단을 맺을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조만간 연무장에 데려가 볼 생각이었어.

금단.

강징은 저도 모르게 붓대를 움켜쥐었어. 손가락 뼈마디가 새하얗게 드러나도록, 꽉. 맞은편의 야야가 흠칫 제 낯빛을 살피는 걸 느끼고도 움켜쥔 주먹을 펴지 않았지.

"....하기사, 언제든 잃어버릴 것을 만들어 무엇하겠느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굳이 만들어 무엇하겠느냐.

그조차 짐일 터인데. 결국엔 약점이 되고 말 터인데.

​​

분수에 맞지 않는 날개를 달아주어 무엇하겠느냐.

날개를 쓰는 데 익숙해진 짐승은 그것이 꺾이면 굶어 죽게 마련인데.
 

제 날개만 믿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십상인데.

결국에는 날아가 버리기나 할 터인데.

으깨져 버리기나 할 터인데.

영영 사라져버릴 터인데.

*

8년이 흘렀어. 달라진 것도 있었고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어. 연화오는 몇 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막 중흥 단계를 밟아 나가는 참이었어. 운몽은 슬슬 백성과 상인, 풍류객과 수사들이 모여드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운몽 강씨로 들어오기를 소망하는 문하생 역시 연화오 참변 이전과 비등해질 만큼 늘고 있었지. 긴장과 사명감으로 가득했던 연화오의 얼굴들도 한결 여유를 되찾았어. 다만 그들의 종주, 여전히 젊으나 이제는 미욱한 티를 완연히 벗어던진 강 종주의 미간에 잡혀 있는 내 천(川) 자는 8년이 지나도록 점점 깊어지기만 할 뿐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 종주는 그와 일심동체가 되어 재건을 함께했던 연화오 사람들에게는 항상 안쓰럽고 존경스러운 이였으나 세간에서는 평판이 좋지 못했어. 표정은 서릿발이 내린 듯 차가운데다 손으로는 자전을 휘두르길 망설이지 않고, 그 행보는 덕업과 거리가 멀어 과연 삼독(三毒)성수라는 명성에 걸맞았으니까.

삼독성수의 이야기가 화제로 나왔다 하면 말미에 지나가듯 꼭 거론되는 사람이 있었어. 삼독성수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젊은 부사. 왜냐하면 그 부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었거든.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듯 앳된 얼굴은 볕 아래 수련하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새하얬고, 간결한 선으로 이루어진 이목구비는 담백하고 청수하여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켰어. 그만치 종주 옆에 붙어 다니는 다른 부사들은 종주와 귀엣말로 보고며 지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보통인데 청년은 일절 말이 없었어. 그러나 막상 지시가 떨어졌을 때 가장 빠르게 튀어나가는 사람도, 가장 겁 없이 검을 휘두르는 사람도 그 청년 부사였지. 삼독성수의 입이 달싹임과 동시에 날아오르는 몸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랬고, 검법에는 군더더기가 없어 두려움을 모르는 맹금류를 보는 것 같았어. 무시무시한 삼독성수가 사술을 그렇게나 증오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머릿속이 연결되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게끔 하는 술법이 걸려 있다는 소문이 돌아도 진즉에 돌았을 거였어.

대신 다른 소문이 저자에 파다하게 퍼졌어. 과묵하니 잘생긴 어린 부사가 귀엽기도 하고 혹하기도 하여 선자들이 꽃이나 떡이라도 건넬라치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설레설레 손까지 저어가며 사양하는데, 억지로라도 더 말을 붙여보려는 이에게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제 입술을 먼저 가리킨 후 양쪽 귀를 막고 도리질을 해 보인다는 거야. 장애를 고백하는 손짓임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눈매와 입가에 떠오르는 표정이 어찌나 해사하고 따뜻하던지, 사실을 안 뒤 청년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는 선자는 없고 오히려 나루터나 장터에 삼독성수가 모습을 비칠 때마다 소문의 청년 부사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여인들이 무리를 이루어 북적거렸겠지. 가장 앞장서 발꿈치를 드는 이들조차도 그 강 종주가 서슬 퍼런 눈으로 흘겨보기만 하면 제깍 물러나 눈을 내리깔았지만 말이야.

"...나 원 참, 번잡스러워서 더는 안 데리고 다닐란다."

강징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걸 독순술로 용케도 알아들은 야야는 슬그머니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려 고개를 숙였어. 말은 저렇게 하셔도 다음 외출에도 같이 가자고 불러주시리라는 걸 알거든.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종주님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날이야. 금릉 도련님이 오시는 날이니까.

*

연화오의 안뜰에 신나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아이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어.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금릉 도련님이 오면 선부 전체에 확실히 활기가 돌았지. 보통 까탈스러운 것이 아닌 게 아무래도 돌아가신 아씨보다는 그 부군 쪽을 더 많이 닮은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연화오 사람들은 금릉 도련님과 함께하는 6개월 동안 까다로운 어린 것의 비위를 맞춰 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도련님이 머무는 시기만큼은 삼시 세끼 시간 맞춰 꼬박꼬박 식사하는 종주님을 볼 수 있었거든.

"야야!!! 달려!!!!! 달!!!려!!!!!!!!!!!"

"아아니, 저쪽, 이쪽 말고, 저-어 쪽으로 가라고, 이 바보야!"

지금 금릉은 야야를 말 삼아 올라탄 채 잔뜩 흥이 오른 아이들 특유의 그, 찢어지는 목소리로 명령하는 중이었어. 야야도 싱글벙글해서는 어린 도련님을 무동 태우고 힘차게 내달렸지. 금릉이 속도를 높이라는 뜻으로 가슴팍을 뒷꿈치로 세게 걷어차고, 함부로 머리통을 붙잡아 마구잡이로 방향을 틀게 하는데도 야야의 입에 걸린 함박웃음은 사라지지 않았어. 제 어깨에 얹힌 아이의 다리에 행여나 손자국이라도 날까 조심하며 꼭 감싸쥔 채였지. 문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키며 연화오 일대를 휘젓는 두 사람 사이로 못마땅한 목소리가 끼어들었어.

"금릉, 악을 쓸 기운이 남아 있거든 연무장으로 가거라. 그렇게 놀기만 해서야 금단은 언제 맺는단 말이냐?"

야야는 얼른 도련님을 내려드렸어. 흑과 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이처럼 제 감정을 숨기지 못했지. 지금 야야는 제 종주님이 진짜로 심각하게 노여워하고 있을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 정작 금릉은 태연하기 짝이 없는데 말이야.

"금린대에는 이제 야야만큼 저를 태우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연화오에 있는 동안에는 매일매일 야야를 탈 겁니다!"

"말 한 번 잘했구나. 네 나이 곧 충년을 넘기거늘 언제까지 응석을 부릴 게야? 부사는 너를 보좌할 사람이지 올라탈 말이 아니다!"

"외숙은 쩨쩨해! 야야를 금린대로 보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말대꾸를 할 참이냐! 썩 연무장으로 가래도!!!"

금릉이 입을 삐죽거리며 사라진 뒤, 강징은 소매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거세게 몸을 돌렸어.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제 눈치를 보는 야야에게 호통을 쳤지.

"짐승 취급을 당하고도 뭐가 좋다고 허허실실... 속도 없는 놈이구나!"

못내 배시시 웃어보이고야 마는 야야를 향해 강징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어.

"그리도 따라가기 싫다고 울더니만...."

"......."

5년 전 일을 얘기하는 거였어.

*

그때까지만 해도 금릉은 야야를 말 못하는 병풍 정도로 여겼겠지. 금릉 도련님이 머무는 반 년 동안은 종주님의 방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야야는 그 규칙을 잘 따라서 금릉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종주님이 자기가 도련님 앞에 얼씬대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지나가는 야야의 뒤에 대고 금릉이 게 서 보라고 부른 것을 듣지 못해 혼이 난 적은 있었어. 이제 막 상전 노릇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금릉이 주인 무서운 줄도 모르는 저 하인 놈을 벌 주겠다며 펄펄 뛰는 것을, 나이 많은 가복이 '저 아이는 말 못 듣는 병신이다'고 달래어 간신히 일단락되긴 했지만. 그 뒤로 야야는 좀 더 주의해서 금릉과 마주치는 것을 피했어. 글을 배우지도, 종주님을 가까이서 보지도 못하는 와중에도 야야는 나름의 작은 낙을 찾아냈어. 도련님과 함께 있는 종주님을 보는 거였어. 도련님을 바라보는 종주님의 표정. 종주님의 저 눈. 저 표정은 어떤 글자가 될까? 저 눈빛을 담을 수 있는 글자가 존재하기는 할까? 아주 가끔 종주님은 손을 뻗어 잠든 도련님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쓸어주기도 했어. 그때마다 제 마음에 일렁이는 이 감정을 [願](부러워할/원할 원)이라고 쓴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개월이 지나서였지.

하여 야야는 금릉이 와 있는 동안에도 강징과 금릉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어. 그래서였을 거야, 막 화살에 스쳐 푸드득 도망치는 꿩의 꼬리를 잡아보겠다고 겁도 없이 몸을 날린 도련님을 제때 확 낚아채어 제 품으로 욱여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도련님!!!!!!"

썩 높지 않은 절벽이었지만 절벽은 절벽이었어. 무공도 익히지 못한 어린아이의 여물지 않은 뼈가 그 충격을 받아내기에는 무리였지. 하지만 금릉과 야야는 살아남았어. 야야가 공처럼 온몸을 둥글려 금릉을 품은 덕에, 금릉은 긁힌 데 하나 없이 무사했어. 쓰러진 야야의 눈에는 온 세상이 횡으로 보였어. 너무 놀라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하는 기울어진 도련님을 빼앗듯이 야야의 품에서 데려간 기울어진 수사들 너머로 옷자락을 펄럭이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기울어진 종주님이 보였어. 종주님의 저 표정도 처음 보는 표정인데,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시려나.....

그전에 나는 죽겠구나.

도련님 쪽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히는 종주님의 언제나와 같은 그, 자색 옷자락을 보고 야야는 생각했어.

예쁘지만 무거운 색.

낯설고도 오묘한 색.

강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색.

종주님.

마지막으로 종주님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
야야는 죽지 않았어. 눈을 떴을 때는 가복들이 머무는 침소의 제 침상 위였지. 오가는 가복들이 야야가 툭툭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어. 그래도 제 밥값은 하는 놈이라느니, 짐승처럼 살아와서 짐승만치 반사 신경이 뛰어나다느니 하는 투박한 칭찬 속에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없는지라 야야는 눈만 끔벅였어. 수진계의 어린아이들은 온갖 사고를 치며 크게 마련이라 금릉 도련님의 낙마 사건도 금세 잊혀지는 듯했어. 어린 도련님께서 야야에게 전에 없이 관심을 보이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야.

"금가의 옷을 입히면 꾀죄죄한 태도 금방 벗을 수 있을 게다. 어떠냐, 너도 금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
"까마귀는 번쩍이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금린대엔 온통 번쩍거리는 것뿐이다. 다 내 소유가 될 것들이야."

어린아이가 제법 생색을 내며 자랑해도 야야는 눈을 내리깔고 베시시 웃어보이기만 할 뿐이었어. 금릉이 쥐어주는 노리개며 옥패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쓰다듬어 본 뒤 얼른 내려놓는 야야의 머릿속에는 [明紬](명주)며 [緋緞](비단)이며 [㵦](매끄럽다) 같은 글자들만 번갈아 떠오른다는 걸 누가, 무슨 수로 알겠어? 금린대로 돌아가는 날 아침 금릉이 야야를 대동하고 제 외숙 앞에서 당당하게 야야를 데려가겠노라 선언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어.

"말도 못 하는 천한 것이 이 금릉을 도왔으니, 마땅한 주인을 섬김으로써 사람답게 살 길을 열어주는 걸로 보답을 해야지요. 옛 선현들은 다 그리하더이다. 외숙도 아릉이 군자의 도리를 다하기를 바라지 않으시오?"

콩알만한 것의 제법 야무진 억지에 연화오 사람들은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여 말문이 막혔어. 야야야 뭐, 귀머거리라 연화오 사정에는 백지나 다름없는 아이니 다른 세가로 보낸다 하여도 아주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말 못하는 저것이 낯선 환경에서, 그것도 콧대가 세기로 이름난 금가네 사이에서 쉬이 적응할 리 만무하고, 나름대로 사람 노릇을 할 때까지 키워 놓은 게 아깝기도 하고.... 입으로, 주먹으로 쏟아지는 타박 사이에서 선연한 흰자와 검은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는 까마귀는 어느 새 연화오의 한 풍경으로 녹아든 지 오래였어. 무엇보다도 야야를 밤마다 불러 앉혀놓는 종주님의 뜻이 중했겠지.

강징은 언제나처럼 표정을 굳힌 채 답지 않게 묵묵부답을 지켰어. 그걸 무언의 거절로 해석한 가복들이 금릉더러 다른 걸 내어드리마, 생일 선물을 두 개 준비하마고 쩔쩔매며 얼러 보아도 금릉은 막무가내였어. 금릉은 한 번 제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았거든. 금릉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채 도련님이 잡아끄는대로 며칠이고 끌려다니기만 하던 야야의 얼굴이, 강징의 엄혹하기까지 한 표정과 발을 구르는 금릉을 번갈아 바라보더니만 차차 어두워지기 시작했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어.

"금릉! 아랫것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구나!"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져 무심코 목소리를 높인 강징은 저도 모르게 크게 눈을 떴어. 금릉이 아니라 야야였어. 야야가, 항상 또랑또랑한 눈으로 강징을 열심히 바라보던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무릎을 꿇고 강징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거였어. 간신히 도리질을 쳐 가면서. "으으...아아...으후아아..." 생전 입을 여는 법이 없던 야야의 입에서 어린 짐승의 울음과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듣고 모두가 흠칫 놀랐어. 동앗줄이라도 되는 양 강징의 장포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는 게 어째 처음 주워 왔을 때보다 더 애뗘 보였겠지. 한쪽 손은 여섯 살 난 조카에게 붙들리고 다른 쪽 옷자락은 열둘 남짓 됐을 어린 하인에게 붙들린 채 오도가도 못하고 선 굳은 표정의 종주님을 보고 연화오의 가복과 수사들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잡아 눌렀어. 강징의 표정은 점점 더 사나워졌지만 말이야.

강징은 백 번 봐도 자애롭거나 너그러운 외숙은 아니었어. 강징 자신이 그렇게 마음 편한 어린아이로 지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대해줘야 편안해할지 알지 못한 것도 있었어. 허나 강징은 조실부모한 제 조카가, 마음 둘 곳 없는 금린대 이외에도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기억하고 있기를 바랐어. 때문에 자신이 물질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은 있는 살림 없는 살림을 다 끌어모아서라도 대 주는 편이었지. 그러나... 말 못하는 천한 것이라 하여도 제 마음을 살필 수 없는 것은 아닌 법.

제가 살려놓은 아이였어.
자유로운 짐승처럼 살던 아이를 인세로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지. 생각이라는 것이 문자로 응집되어 뇌리에 박힐 수 있도록 글자를 알려준 것도 저였지.
이 손을 뿌리치는 것은 쉽겠지. 하지만.....

너도 지금 절벽에 매달린 것 같은 기분이냐?
내가 손을 놓으면 그대로 떨어져내릴 절벽에?

"흐어, 허...하우, 우으, 으으....!"

온몸으로 저를 떠나지 않겠노라 매달리는 처절한 악력을 느끼면서 강징은 처음 나무에서 떨어진 아이를 발견하여 데려온 일, 큰 고민 없이 거두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일, 제 옷깃을 꼬옥 붙드는 손과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방관한 일을 후회했어. 일각에 한 번씩 뼈에 새기며 다짐했건만, 역시 저는 아직 종주로서 모자란 놈인 모양이었어. 정에 이끌려서. 만드느니만 못한 연을 맺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야야의 꼴을 내려다보는 강징의 눈빛이 어찌나 차갑고 막막했던지, 슬금슬금 웃으며 제 종주의 안색을 살피던 가복들은 얼른 다시 표정을 굳힌 채 강징이 야야를 금린대로 딸려 보내겠거니 짐작했어. 놀랍게도, 지레짐작이었어.

"금릉. 이 아이는 내 부사, 연화오의 수사다. 네가 그저 어린 공자라면 모를까, 난릉 금씨의 후계 된 자로서 운몽 강씨의 사제를 빼 가 너의 사람으로 삼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구나."
"허나 외숙....."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으니 말 시키지 말거라. 잘 가거라."

금릉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어. 큰 소리로 울면서 떼를 써 볼까 했지만, 저 표정을 하고 있는 외숙은 저를 무섭게 혼내기만 할 뿐 어지간해서는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 야야를 갖고 싶은 마음보다는 제 청이 거절당한 무안함이 더 컸던 금릉은 입을 다물고 양 볼을 잔뜩 부풀렸어. 까마귀는 그 와중에도 숫제 헐떡거리면서 외숙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어. 턱에서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눈으로는 외숙을 간절히 쫓는 그 모습에 금릉은 질려 버렸어. 키우던 개도 저러지는 않을 거였어.

"금단도 없는 저게 무슨 부사야!"

그런 까마귀를 매정하게 떼어 놓은 채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는 외숙의 발걸음이 잠시 늦춰지는 듯도 싶었으나 이내 다시 빨라지는 걸 보면서 금릉은 난폭하게 흙바닥에 발길질을 했겠지.

그 다음 해에 연화오에 왔을 때, 금릉은 야야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어. 가복들이 입는 옷을 벗고 연화오의 사제들에게만 제공되는 짙은 청색 옷을 걸친 야야는 더 이상 꼬질꼬질한 까마귀로 보이지 않았거든. 비단 옷 때문만은 아니었어. 노련한 수사들조차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야야는, 보다 이른 나이에 금단을 맺은 또래들과 비교해도 검사로서 월등했어. 일상생활이나 예의범절에 있어서도 더 이상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상태에서 독순술까지 익히고 나니 의사소통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차분한 눈빛과 몸가짐에서는 묘하게 속세를 초월한 것 같은 기품마저 느껴졌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야야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들을 한 마디씩 얹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을 거야. 이제 보니 참 훤하게 생긴 놈이라고. 병신으로 태어난 게 아까울 지경이라고.



*
탁, 소리나게 서첩을 닫은 강징은 대놓고 찌푸린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어. 운몽 강씨의 종주가 된 지도 어언 10년,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어. 편두통은 그중 제일 불쾌한 객이었어. 관자놀이에서 눈밑까지 번져가는 찌릿한 통증은 금단의 영력으로도, 이름난 명의가 지어준 약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았거든. 약을 먹어도 아무 차도가 없다는 강징의 날 선 불평에 의원이 답했겠지.

["지금보다 더 많이 주무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셔야 합니다."]

강징에게는 참으로 사치스러운, 절대 따를 일 없는 처방이었어. 이마를 짚은 강징의 손등에 따끈하고 보드라운 감촉의 무언가가 느껴졌어. 데운 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꽉 짜낸 영견 같았지. 강징은 굳이 눈을 뜨지도, 야야를 올려다보지도 않았어. 야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거든.

"별 것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
"그렇게 보지 말거라. 안 그래도 처리할 문서가 산더미다."
"........"

지난 몇 년 새 강징에게는 이런 식으로 듣지 못하는 야야를 앞에 두고 실꾸리에서 실을 끌러내듯 한 마디, 두 마디 풀어내는 나쁜 습관이 생겨버렸어.

"미산에서 말이 나오는구나. 교역 관련하여 방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불만인 게지."
"........"
"빌린 돈을 갚아야 할 시기가 앞당겨질 모양이다... 어떤 식으로 자금을 융통해야 할지 생각해두지 않으면...."

말은 숫제 웅얼거림이 되어 있었어. 이 또한 나쁜 습관이었지, 한동안 자취를 감췄었던.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리면 모친께 손등을 찰싹 얻어맞던 시절이 있었거든.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유가 없는 인간인 것은 마찬가지건만. 그래도 지금 손등에 닿아오는 것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매서운 일갈이 아니라, 딱 기분 좋게 맥이 풀릴 만큼 따끈한 온기였으므로.... 영견은 강징의 눈가로 옮겨 갔어. 아주 조심스럽게, 나비의 날개를 건드리듯 신중하게 안구 주변을 누르는 손가락 끝이 느껴졌어.

"요 며칠 큰비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사고는 없더냐."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어. 운몽은 별 문제 없이 평화로운 모양이었어.

"금릉은 잠들었겠구나. 어떠냐, 네가 보기엔 녀석이 수사로서 소질이 있을 것 같더냐?"

손가락은 얼굴 뼈를 따라 차분하게 미끄러져 내려 뒷목의 혈자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지.

"올해에는 금단을 맺을 것 같다고 하던데, 썩 빨리 맺는 편은 아니지 않느냐. 금가의 어느 공자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어야 할 터인데...."

강징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목에 느껴지는 다정한 온기와 세심한 압력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어.

"...이릉노조를 보았다거나 그를 자처하는 놈들은, 지난 달 영천에서 잡아다 족친 그놈들 이후로는 더 없더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어난 일이었어.

".......!!"

눈꺼풀을 턱하니 손으로 덮고 살그머니 눌러오는 어린 부사의 맹랑함에 기가 막힌 강징은 돌풍처럼 빠르게 야야의 손을 쳐 냈어.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지. 어릴 때 옷깃을 잡아당겨 오는 걸 짐승처럼 살다 온 벙어리의 의사 표현이려니 이해하여 그대로 두었더니만, 장성하여 예의범절이나 위계 질서 등등에 대해 배울 만큼 배우고도 제 몸에 손을 올리는 게 어이가 없었어. 아니, 오히려 더 거침없어졌달까. 혼을 내려면 아까 허락 없이 뒷목에, 가장 취약하고 치명상을 입기 쉬운 부위에 손을 댈 때부터 냈어야 했다는 사실이 강징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지. 종주라는 제 위치나 그에 수반되는 항시적인 위험을 순간적으로 망각하고 있었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사실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저 출신도 모르는 녀석을 주워다 곁에 두고 글자를 가르치고, 최대한 빨리 금단을 맺도록 틈틈이 개인 훈련을 지도하고, 소셋물이니 의복 단장 같은 아침 시중을 들기 시작한 것을 그러려니 내버려둔 게 잘못이었을 테니 후회할 일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강징의 표정 변화에 민감한 야야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드는 게 한눈에 보였어. 하지만 야야는 강징의 매서운 눈길을 물리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내었어. 처음 왔을 때와 다름없이 그 눈 속의 흑과 백은 놀라우리만큼 맑고 선연한지라, 마주친 이의 시선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잡아끄는 힘이 있었어. 정말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강징 하나에 불과했겠지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큰 선부의 종주 곁에서 그만큼 많은 이들의 시선이 따라오는 젊은 부사로 성장했으면서도, 야야 자신이 눈길을 부딪히는 상대는 변함없이 한 사람뿐이었거든.

아이는 사람보다는 짐승 같았지. 보다 어렸을 때는 배운 것이 없어 무도하다는 뜻에서 그러했고, 청년이 된 지금은 자신을 거둬준 종주 한 사람만을 어미 쫓듯 따르며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그러했어. 아무 사심 없는 곧고 충직한 눈길이라는 것을 알건만, 그러니 굳이 짜증을 낼 것도 없건만, 제 팔에 얹힌 손이 어느 새 다 자란 남자의 손, 한창 때인 무인의 것이라, 온기보다는 열기에 가까운 뜨거움을 전해오고 있는지라 강징의 마음에도 답지 않은 소요가 일었어. 안 그래도 외가의 방계와 골치 아픈 문제로 엮여 가라앉아 있던 강징의 심기에 서서히 짜증에 가까운 부아가 섞여들 때 즈음, 거짓말처럼 흑과 백이 자취를 감췄어. 야야가 눈을 깜빡인 것이었어.

끔뻑.

가벼운 눈썹의 오르내림 하나만으로도 팽팽하게 날이 서 가던 공기가 돌연 느슨해졌지.

끔뻑.

무해한 동물처럼, 막 사물을 눈에 담기 시작한 아기처럼 눈을 끔뻑이면서 야야는 강징의 손날 자국이 뻘겋게 찍힌 제 손을 살그머니 뒤집어 손바닥을 내 보였어.

[寢](잘 침)

"......허,"

...미리 글자까지 써 놓고 와서 보여줄 틈만 노리고 있었던 게냐...

하도 베껴 쓰다 보니 제 것을 쏙 빼닮게 된 필체가 살짝 번져 손바닥에서 반질거리는 것을, 강징은 기가 막혀 쏘아보기만 했어. 그제야 지금이 야야가 취침할 것을 권하러 오는 시간대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어. 야야의 등 뒤로 곱게 접힌 침의와 딱 알맞게 훈김이 오르는 소셋물 대야가 보였지. 아마도 처음 물을 채워왔을 때는 막 데운 직후라 제법 뜨거웠을 거야. 강징은 뜨거운 물에 살갗이 닿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야야는 항상 물이 딱 기분 좋게 손을 넣을 만한 온도로 식고 난 뒤에야 강징을 부르곤 했어. 물이 다 식어버리면 몇 번이고 다시 데우러 가고 데우러 가고를 반복하면서 강징이 침상에 들 때까지 버티고 서 있었지. 서슬 퍼런 강 종주에게 이만 주무시러 가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릴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어? 종주님의 서릿발 같은 호통을 듣지 못하니 기가 죽을 일도 없는 야야 말고는 아무도 없겠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저 놈 하나가 마누라보다 낫습니다...."]

야야가 고집으로 강징을 꺾어 자러 가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눈치챈 이가 한 말이었어. 이제는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는 수사로 성장한 야야는 연화오에서 인정받는 식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연화오 사람들이 여전히, 변함없이, 가장 기대하는 야야의 역할은 종주님을 제때 쉬도록 만드는 것이었지. 그를 모르지 않는 강징은 야야의 저, 어렸을 때나 다름없는 눈짓이며 표정이 과연 진심으로 나오는 것인지 부러 지어내서 보여주는 것인지 헷갈리던 참이었어. 이제는 그때만큼 인내심을 발휘할 이유도 없잖아. 클 만큼 다 큰 놈이니!

내가 아랫것들에게 너무 관대한가.
마누라라고?

"부사라는 놈이 연화오에 도움 될 일을 생각해오기는커녕 시간 맞춰 소셋물 들이밀 궁리나 하고 앉았고, 잘하는 짓이다!"

있는 대로 넌더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강징을 향해 야야는 활짝, 아주 기쁘게 웃어보였어.



*
다 ​'보이도록' 큰 한숨을 내쉬면서 침상으로 들어가는 종주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동안 야야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어.

["이제 너는 연화오의 부사로 살아야 한다."]
[........]
["좋든 싫든 운몽 강씨와 생사를 함께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
["그것이 네가 이곳에, 연화오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방법이다."]

이곳에, 종주님 곁에.

그때부터 야야는 연화오의 부사가 되었어.
운몽 강씨와 생사를 함께해야 하는 종복.
운몽 강씨 직계의 유일한 생존자인 당주 강만음의 사람.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강징의 미간에는 언제나처럼 짙게 내 천(川)자가 박혀 있지. 이제는 강징을 상징하는 하나의 인장이 되어버린 듯한 그 글자가 켜켜이 쌓인 불면의 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밤. 종주님은 고통받는 사람이었지만 고통에 지지 않았지, 주저앉지도 않았지. 종주님은 내 천(川) 세 개의 획 아래에 자신의 고통과 절망과 피로를 다 묻어두고 혹독하리만치 맹렬하게 가문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을 지키는 이였어. 그 누구에게보다도 스스로에게 매몰차고 치열한 분이었어. 수진계에서는 그런 종주님을 어떤 글자로 해독해야할지 몰라 삼독(三毒)이라는 글자를 가져다 붙이고 등선과는 거리가 먼 인사라 헐뜯지만, 야야는 알아, 제 종주님은 종주님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아니할 거라는 걸. 눈을 감는 순간까지 연화오에서 눈을 떼지도, 자전과 삼독에서 손을 떼지도 못할 분이라는 걸, 그렇기에 눈을 쉬이 붙이지도 못하실 거라는 걸. 야야가 바라는 건 그런 종주님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그의 눈과 손과 쉼이 되어 드리는 것이었어. 최대한 오래, 언젠가 종주님이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있을 때까지.

그러니까 아마도 이 생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린 야야는 종주님을 닮은 글자를 찾고 싶어서 걸신 들린 양 허겁지겁 글자를 먹어치우곤 했었지. 나중에야 알았어. 붓을 잡은 종주님의 곧은 손가락 마디와, 기분에 따라 지그시 올라가기도, 급격하게 솟구치기도 하는 눈썹, 빗살을 따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감촉 같은 걸 표현할 수 있는 글자가 있을 리 없었어. 이제 막 들게 된 영검이 버거워 부들부들 떨리는 제 검신을 조금의 양보도 없이 쳐 낼 때의 혹독하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눈빛 같은 것들을 무슨 수로 먹과 획 따위가 담아낼 수 있겠어. 근육통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끙끙 앓을 때마다 야야는 제 몸 위로 풀썩 떨어지던 종주님의 장포의 감촉을 떠올렸어. 하루빨리 어엿한 수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멀리서 눈으로만 종주님을 쫓는 대신 직접 옆에서 지켜드릴 수 있다고, 낮이나 밤이나 상관없이 항상 종주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되뇌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지.

["그러니 강해지거라. 나의 사람답게, 운몽 강씨답게."]

종주님은 진흙을 밀고 올라와 피어난 연꽃을 닮았어. 변화무쌍한 파동을 보이면서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큰물을 닮았고, 오묘하고 귀한 색인 자색을 닮았어. 종주님은 연화오 그 자체였어.

하여 야야는 연화오의 부사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그 말에 감격하여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
종주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오직 종주님만을 위해서 야야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 되었어.
글자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수사의 세계에 발을 들였지만, 야야의 세계는 언제나 종주님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등선 같은 건 바라지 않아.

종주님의 옆에 계속 있을 수 있고, 살아 있는 한 종주님을 지킬 수 있다면,
죽기 직전에 종주님의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차고도 넘쳐.

비록 찌푸려진 저 고운 미간을 손수 펴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그것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감히 욕심내어서는 안 되겠지만.



야야는 종주님이 침상에 들기 직전까지 들여다보던 서첩과 서신들을 갈무리하며 거기 모인 글자들에 시선을 던졌어. 

날이 밝는대로 미산에 갈 채비를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하면서.




 

***

ㅅㅈㅁㅇ

1. 전개 존나 늘어짐 ㅁㅇ ... 분량조절 실패로 나눠 올림. 이게 정말.....이렇게까지 길어질 내용이 아닌데.......... 중편에서는 조절을 해 본다고 여기다가 다짐한다...

2. 원래는 강징 시점을 배제하고 야야의 시점에서 조금 더 냉랭하고 무뚝뚝한, 알 수 없는 고원의 꽃 같은 존재로 그리려 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무순 속 강징이 그렇게 움직여주지 않더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쓰벌 종주님 뜻대로 하세요ㅠㅠㅠㅠㅠㅠㅠ

3. 강징과 항상 함께하면서 그를 지키고 싶었던 2황자의 간절한 소원은 다음 생에서야 이루어졌어.

 

날 때부터 귀가 먹은 까닭은 아마도 지난 생의 끝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절규를 들어야 했던 여파 때문이었을 거야.

그이가 제 목소리를 많이 좋아했던 줄은 꿈에도 모르고.



욱봉강징 야야강징

2022.06.27 22:2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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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긴글이 이렇게 술술 읽히다니요. 센세. 진정 천재십니다
[Code: ea2e]
2022.06.28 0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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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미친냐센세가내센가돌아왔어내센세미국간거아니었어
[Code: 6ae5]
2022.06.28 0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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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아껴서 볼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6ae5]
2022.06.28 00: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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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사랑해
[Code: da64]
2022.06.28 02: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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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진짜 ㅠㅠㅠ 아아악 ㅠㅠㅠㅠㅠ 나 진짜 며칠 전에도 정주행 했다고 ㅠㅠ 사라질까봐 댓도 못남기고 속으로 돌아와 달라고 빌고 빌었는데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진짜 ㅠㅠㅠㅠㅠㅠ
[Code: e873]
2022.06.28 04: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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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생 2황자 욱봉은 능글거리고 여유로운 맛이 있었는데 이번 야야는 종주바라기인것도 진짜 센세 맛잘알 ㅠㅠㅠ
[Code: 3dee]
2022.06.28 04: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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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ㅊ센세
[Code: 9499]
2022.06.28 10: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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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센세ㅠㅜㅠㅠㅠ 미쳤다 진짜... 개존잼이예요....ㅠㅠㅠㅠ
[Code: c6fe]
2022.06.28 19: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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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귀가 먹은 까닭은 아마도 지난 생의 끝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절규를 들어야 했던 여파 때문이었을 거야.

그이가 제 목소리를 많이 좋아했던 줄은 꿈에도 모르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쳤다 ㅠㅠ 냉랭하고 무뚝뚝한 고원 속 꽃같은 강징>> 센세 그렇게 쓰셨어요 ㅠㅠ 연화오 몰락과 욱봉 죽음, 누이와 위무선의 죽음 다겪고 얼음연꽃같으신 종주님 ㅠㅠ 야야랑 너무 잘 어울린다 ㅠㅠㅠ
[Code: dd30]
2022.06.29 04:1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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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센세 ㅠㅠㅠㅠㅠㅠ
[Code: ac74]
2022.07.14 22: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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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봐도 봐도 좋다 ㅠㅠㅠㅠㅠ
[Code: 8d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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