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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19:12




 

 

전편
벙어리인 건 맞아. 다른 건 다 괜찮아.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로우든 백작 가라면 허니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소개를 듣자마자 허니가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잭은 허니에게 사교장에서의 화려한 재미 말고 무언가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려고 애썼는데 그 중 하나가 별자리였지. 정말이지 별이 무수하게 밤하늘을 수놓은 밤이었어. 문제는 잭이 사실 별자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거였지. 그가 하늘을 보기에 허니도 그런 그를 보다가 하늘을 보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로우든 공은 “음…” 하며 고민스러워 할 뿐 아무 말이 없는 거야. 그러다 잭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어.

 

“사실 별자리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예쁘다는 것 밖에는.”

 

예쁘다는 걸 아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허니도 그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는 내내 말이 없는 허니에 대해 묻지 않았어. 허니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고개를 젓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갈 줄 아는 분이었어.

 

잭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 특히 신화에 관심이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바랐던 대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오게 된 거야. 이탈리아 유학은 잭의 바램이었고 아버지가 원하는 건 프랑스 유학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로 가기 전에 프랑스에서 먼저 1년 조금 넘게 머물러야 했대. 프랑스의 예법은 주변국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고, 그 예법은 보통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프랑스의 국민성에 따라 유행을 타곤 했는데 뭐 그런 흐름을 배우길 원하셨던 걸까.

 

잭은 그건 어머니의 관심사였고 아버지는 가서 정치를 배워오길 바라셨다고 말했어. 프랑스 정치가 유난히 대단하다는 건 아니고 거기 평민들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데 그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정치를 배워오길 바라셨던 것 같아. 그리고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는 원수지간 같더래도 국제 정세를 보면 서로 당연히 엮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하여 그곳에서 정치적 인맥을 만들고 오시길 원했지. 그런 인맥은 이곳 정치판에서 자리를 다지는 데에 큰 장점이 될 테니까.

 

사적이라면 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얘기를 처음 보는 숙녀분께 모두 털어놔도 괜찮을 걸까. 허니는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특별히 숨겨야 할 얘기도 아닌 것 같고, 잭이 말하기를 사교계에서 이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도 했어. 아버지의 정치 욕심에 대해서 말이야. 로우든 백작 가잖아. 관심 없는 사람이 없을 거야.

 

“허니 양이 제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사귄 친구에요. 물론 다른 친구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하나같이 프랑스 사교계에 대해서나 관심이 많아서.”

 

남자들이 사교계에 관심이 많다면 뭐겠어. 유행하는 패션? 유행하는 춤? 글쎄. 당연히 여자겠지.

 

“그곳 숙녀분들은 어떻냐 묻기에 ‘모든 숙녀분들이 영국인 신사를 어찌나 원수 보듯이 하는지. 그들에 비해 시대적으로 뒤처지는 우리의 식문화를 아주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네.’ 라고 대답해줬답니다.”

 

허니는 정말 그러냐고 묻고 싶었어. 정말 프랑스 사람들이 우릴 그렇게나 싫어하나요? 귀족들의 사교장에서마저요? 사교장은 그야말로 미소와 예의를 가면으로 모든 속내를 능히 감출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하잖아. 허니는 하녀가 드레스에 달아준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만년필을 꺼냈어.

 

{ 정말 우리를 그렇게나 싫어해요? }

 

잭은 허니가 메모지에 글자를 쓰는 걸 묵묵히 기다려주다가 그 물음을 보고 다시 대답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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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조금 싱겁긴 했죠?”

 

그는 허니가 틀렸다고 하는 법이 없었어. 대화 중에 한 번도 그러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지. 방금 얘기도 유치한 자기 친구들이나 알아들을 정말 별 거 없는 농담이었다고 하는 거야.

 

“그곳 숙녀분들께 관심 좀 끄라는 의미로 그렇게 대답해줬었답니다.”

 

그렇지만 허니는 조금 부끄러웠어. 농담도 알아듣지 못 하다니. 그간 가족들 외에 사람들과의 대화가 많지 않았다보니 이런 사교적인 자리는 허니에겐 어려웠나봐.

 

“프랑스의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까지는 구체적으로 모르더라도 제가 만나 뵌 분들은 다들 아주 점잖고 세련되셨답니다. 제 적응을 도와주는 분들도 많았죠. 물론 애국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언제든 영국을 손가락질 할 분들이긴 할 테지만요.”

 

잭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망설이더니 허니의 만년필을 보며 물었어.

 

“휴대가 가능하네요?”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휴대용 만년필. 이걸 보고 신기해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어. 허니에게 괴상한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어도 만년필에 대해 묻는 사람은 종종 있었으니까.

 

{ 저를 위해 직접 도면을 그리시고 제작을 맡기셨답니다. }

 

“인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익히 듣긴 했는데, 역시 따님에게 아주 다정하신 분이네요.”

 

그 다정하다는 아버지는 허니를 위한답시고 딸을 사교장에 밀어넣었지만. 하지만 아버지라고 별 수 있겠어. 사촌들에게 얹혀살며 그 도박꾼들 사이에서 애물단지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낫긴 해. 아버지 딴에는 자기 재산에 조금도 보탬이 안 되고 도박빚을 갚아달라 손 벌리는 집안에서 허니가 물려받았어야 했을 돈을 가져다 막상 자기 딸에게는 눈치를 줄 걸 생각하니 속이 다 답답했던 거지. 딸이 그렇게나 질색하는 곳으로 데려다 두는 게 아버지라고 좋으셨을 리 없지.

 

허니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어. 대화 내내 궁금해 하긴 했는데 물어볼 타이밍을 찾지 못했어.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 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세요? }

 

“아. 너무 제 얘기만 했군요.”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잭이 허니를 배려해준 거니까 괜찮아.

 

{ 제가 벙어리인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흘끗거리고 있었어요. 우리가 줄곧 대화하는 중에요. }

 

나는 아주 이상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이 말까지는 차마 적지 못 했어. 허니는 이 질문이 이 친절한 신사 분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닐까 조금 후회도 했어. 정말 좋은 시간이었는데.. 하지만 그는 살풋 웃기만 하고 허니를 비웃는 어떤 기색도 없이 대화 내내 그러했듯 참으로 따스한 눈빛으로 되물었어.

 

“저는 허니 양과 이런 시간을 보내서 좋았는데. 허니 양은 어때요?”

 

허니는 메모지에 괜찮다는 말을 적기보다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어. 잭이 다시 물었어.

 

“그거면 된 거 아닐까요?”

 

그 말에 또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어. 왜 이럴 때 눈물이 나는 거야. 그가 당황하잖아. 하지만 잭은 조금 당황하긴 했어도 그 뿐,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어. 허니를 달래려는 마음이 앞서 직접 눈물을 닦아줄 뻔 했는데, 초면에 눈물까지 직접 닦아주면 사람들 보기에 그 모습이 망측해지는 건 허니 뿐일 테니까.

 

테라스 너머, 대연회장 안에서 그 모습을 아닌 듯 내내 지켜보고 있던 조지는 지나가던 하인의트레이에서 샴페인 잔 하나를 가져와 한번에 들이켜버렸지. 곁에 있던 친구가 목이 많이 말랐냐고 물었지만 그냥 성의없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재미없는 대화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척 했어. 이 숙녀분들의 새 실크 장갑이나 친구들이 말하는 새 종마에 대해서 요만큼의 흥미도 없었지만.

 

허니는 사교장에 끝까지 남는 법이 없었어. 그건 부모님도 이해하셨지. 이런 곳에 허니가 연회가 파할 때까지 남아서 뭐하겠어. 게다가 오늘은 부모님이 바라시는 대로 신사분과 말도 섞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잭은 저택 밖까지 허니와 함께 하고 마차에 오르도록 에스코트도 해줬어. 16살에 처음 사교계 데뷔를 했던 이후로 이런 신사적인 대우는 실로 오랜만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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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가 탄 마차가 무사히 떠나는 걸 본 뒤로 그는 다시 저택의 대연회장으로 돌아갔어. 몇 년 만에 돌아왔으니 사교장에 오래도록 얼굴을 비추고 정치계 가문 아들들과 안면 좀 트라고 하셨거든. 예를 들어 조지 맥카이 같은 사람들과 말이야. 그런고로 연회장으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어야 했는데 조지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영국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주었어. 진심어린 환영이라기 보다는 그냥 적당한 예의를 갖춘 인사치레였지만.

 

“프랑스는 어떻던가요?”

 

다들 잭의 원래 목적이었던 이탈리아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봐. 정치판 데뷔가 이런 사교장에서는 더 중요한 주제가 되긴 하겠지. 잘 모르는 신사분께 친구들에게 하듯 다짜고짜 농담을 건네기는 좀 그렇고,

 

“정세가 심상치 않긴 하죠. 이곳에도 소식이 제법 퍼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의 사실만 짧게 대답해줬어. 조지에게도 그 정도면 충분했고.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거든.

 

“비 백작님의 따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데.. 라고 말을 꺼내려던 차에 조지의 무리와 어울리고 있던 숙녀들 중 하나가 잭에게 말을 건넸어.

 

“진정한 신사세요. 곤란에 빠진 숙녀를 구해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들뜬 목소리였지. 주변의 다른 숙녀들까지도 그 말에 동의하듯 잭을 보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고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며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어.

잭은 이 대화의 중심이 자신을 향해있지 않고 허니에게 향하게 되었다는 걸 알아챘어. 이들이 허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이처럼 아주 짧은 대화 속에서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바깥 날씨가 아주 좋더군요."

 

잭에게서는 허니에 관해서나 둘의 대화에 관해서는 요만큼도 들을 수 없었어. 딱 저 정도로만 대답하고 이탈리아 유학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버렸거든. 누구도 예의를 거스르고 허니에 대한 얘기를 재촉할 수 없었지. 그리고 잭이 들려주는 신화 이야기가 퍽 재밌기도 했거든. 조지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일기장아, 오랜만이야.
 

그동안은 비슷한 하루의 연속이라 일기 쓰기가 지겨울 지경이었어.

그렇지만 오늘은 달라.

오늘은 아름다운 신사 분과 짧지만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어. 그 분은 줄곧 나를 배려해주셨고 내 흠을 탓하지도 않으셨어. 어쩌면 나도 무언가를 기대해도 될 지도 몰라. 혹시 모르잖아. 우리 둘의..

안되겠지.. 그 분은 내가 불쌍해서 손을 내밀어 주신 것 뿐이야. 내가 아니어도 그 누구에게라도 그러셨을 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런 귀한 가문의 그토록 빛나는 사람을 기대해선 안 되는 거야.








 

 

로우든너붕붕
맥카이너붕붕


>> 우편물이 오면 도라가 그것을 분류하여 백작이나 백작부인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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