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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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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꿈꾸는 상인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여드는 무역성 운몽. 이 자유로운 도시 속에 봄 버들잎처럼 청신한 담녹색 저고리를 즐겨 입어 사람들에게 버들 낭자라 불리는 소녀가 있었는데, 오늘도 담녹색 저고리를 꼭 차려입은 버들 낭자의 출신은 사실 난릉이었다. 이 소녀의 본명은 금자봉. 숙부에게 명령받은 대로 연화오 대사저 강염리와 그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제 위무선의 숨겨진 물밑 관계를 파악해서 돌아가야만 했다. 다소 부덕한 행동이지만, 선문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 중에는 으레 이런 부류도 있는 법.

 

사적인 영광을 뒤로하고 야심 있는 종주의 은밀한 수족으로서 오직 그림자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람들.

 

그중 하나가 바로 금자봉 자신이었다.

 

가끔 똑똑해 보이다가도 다시 보면 늘 그래왔듯이 시키는 일만 간신히 할 줄 아는 멍청한 질녀, 그게 금자봉이 제 스스로 정한 이 집안에서의 역할이었다. 도를 넘어서 유능해 보이면 정반대로 제게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시키는 일만 근근이 해내는 아이. 소녀는 그것만으로 족히 살 수 있었다. 직계 자식이라는 이유로 먹고 입을 것, 잠자리까지 모든 요소를 최상급으로 제공해주는 이 집안에서 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데 그 정도의 역할이면 능히 살 수 있었다.

 

‘다른 이에게 시켰다가는 괜한 말들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어 너를 불렀다.’ 이 말은 즉, 그 행동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숙부에게 명을 하달받은 소녀가 그간 수집해왔던 건 전부 그런 떳떳지 못한 일들이었다. 외부인의 손에 넘어갈 시 가문의 존망이 판가름 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곤란해질 수도 있는 비공개 장부라든가, 또는 때때로 한 가문의 종주 지위를 가벼이 흔들 수 있을 정도의 부도덕하고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추문의 증거.

 

만약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주저 않고 버릴 패라는 게 제 자신의 위치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쨌든 간에 소녀는 금씨 사람이었다.

 

난릉 금씨의 그 단단한 기둥에 기대어 무탈하게 살아 남으려면 기꺼이 나서서 냄새 나는 오물 처리를 맡는 사람도 있어야 했다.

 

강염리, 그리고 사제 위무선…… 쥐구멍에도 숨을 수 없는 눈부신 해가 뜬 대낮에는 시장판에서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그들의 뒤를 쫓아다녔고, 달빛도 별빛도 모두 잠든 깊은 밤에는 시원하게 트인 연화오의 지붕 위에서 사적인 대화를 토씨 하나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 한데 긴밀히 지켜본 결과, 두 사람은 그저 혈연으로 이어지지만 않았을 뿐 특별히 뭐라 말할 것 없는 평범한 남매지간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서신에 그대로 옮겨 급보를 통해 숙부의 앞에 올리고 난 뒤 돌아온 답은 전연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이 숙부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너무나도 절묘하여 마치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봉해진 정체불명의 약제. 냄새를 잠시 맡아보건대 이것은 고급 미약이었다. 어느 날은 숙부에게서 물씬 맡아졌던 불쾌한 냄새.

 

네가 만약 자식을 가진 어머니라면 천한 하인 따위에게 치욕을 당한 소중한 딸을 그대로 하인 놈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 아니면 부정한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오래전부터 양 가문끼리 미래를 약속한 혼약자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


너라면 이미 답을 알겠지, 똑똑한 질녀야.

 

금자봉은 답서를 다 읽은 즉시 그 자리에서 화로 속으로 내던졌다. 물론 약제는 한 손에 고이 챙겨 두었다.

 

금광선이 처음부터 목표했던 건 그깟 미적지근한 사실 확인 따위가 아니라, 계승 문제를 이유로 혼례를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강염리에게 서둘러서 혼례를 추진할 수밖에 없도록 추문을 하나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추문에 불을 피우는 건 바로 금자봉 자신이어야 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추문으로 보이겠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는 평생토록 악몽으로 남을 사건을 꾸며내야만 했다.

 

금자봉은 제 스스로가 너무나도 역해 얼굴이 바싹 익을 정도로 뜨거운 화로 앞에서 한참 동안 벗어나지를 못했다.

 

허나 결국 누군가는 끝내 해야 하는 일.

 

하늘과 같은 숙부께 여전히 충성심을 품고 있노라, 필히 증명해야만 하는 일.

 

청신한 담녹색 저고리의 버들 낭자는 소매 안으로 약제 봉지를 아주 깊숙이 찔러 넣었다. 과연 불행일지 천운일지, 우연찮게도 연화오에서 식모 생활을 하는 연이가 며칠 있으면 열리는 축제 때문에 그날 딱 하루 제 대타를 구하고 있지 않았나. 낡은 객잔에서 빠져나온 버들 낭자는 지금 그 부탁을 수락하러 연이에게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전혀 없었다. 소녀는 버들 낭자로 나선 이후로부터 계속 타인의 얼굴이었다.

 

이런 복잡한 사정을 식모 연이가 감히 알 턱 있으랴.

 

수레 가득히 신선한 고급 식자재들과 이를 옮기는 하인들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연화오의 뒷문 한편에서, 연이는 저도 연등제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버들 낭자의 손을 꼭 잡고 아주 방방 뛰었다. 해가 지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 연등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볼거리였다. 연고도 없이 먼 타지에서 이 운몽까지 홀로 올라온 버들이라는 아이의 선택이 사실은 꽤 아쉬웠지만, 어쨌든 한 번 내린 결정은 제멋대로 바꿀 수 없는 것!

 

“버들이 네가 정말 최고야! 몇 년 알고 지낸 친구들도 그날만큼은 다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최고는 무슨, 그때 해야 할 일들이나 다 알려주고 가.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실수하면 어떡하니? 아무래도 역시 그게 조금 걱정되는걸.”

 

“있지, 사실 일들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모든 음식의 간은 조금 실수한 것 같다 싶으면 고춧가루부터 팍팍 뿌리면 돼. 그럼 대개 넘어가주더라.”

 

허나 버들 낭자가 연이에게 묻고 싶은 건 단순히 그게 아니었다.

 

“주의해야 할 사람, 같은 건 특별히 없고?”

 

“사람이라면 특별히…… 아, 역시 아무래도 그분이실까.”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던 연이는 이내 미간을 확 찌푸린다.

 

“그래, 강공자께서 입맛이 까다로우셔. 무엇보다 불 냄새가 나는 볶거나 구운 요리는 절대 드시지 않아. 꼭 끓이거나 삶아야만 해. 그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식사 자리도 혼자 하시니 아마 축제 날에도 밖에 나가시지 않고 쭉 계실 거야. 세상에, 전부 말하고 나니 내가 어떻게 이 중요한 걸 홀라당 까먹었나 싶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정보에 버들 낭자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 보니 연화오에는 위공자뿐만 아니라 강공자도 있었다. 한데 이레가 넘도록 이 연화오를 조사하는 동안 강공자의 머리카락 한 올 본 적이 있었나. 시장에서도, 선부에서도 본 적 없었다. 뭔가 모르게 꺼림칙한 점이 있었으나, 매사 성실한 버들 낭자의 가면을 쓴 금자봉은 답을 기다리고 있는 연이에게 친숙히 활짝 웃어보였다.

 

“괜찮아, 알려줘서 고마워.”

 

주방의 사람들에게 곧 버들아, 버들아, 불리기 시작한 금자봉은 능숙하게 일을 제 것처럼 배워나갔다. 이곳에서는 불편하게 금낭자, 아가씨, 따위로 불리지 아니하며 묵묵히 일만 하면 되었으므로 오히려 천직 같았다. 허나 순수한 기쁨도 잠시. 위공자께서 연등제 당일 사저와 마실 술상을 하나 준비해달라 말씀하시니. 이 절호의 기회를 감히 어찌 놓칠쏘냐. 친절하게도 그 장소까지 알려주시어 금자봉은 하인인 동시에 첩자 된 도리로서 당연히 누구보다도 먼저 그 장소에 들를 수밖에 없으셨다.

 

반딧불마저 자취를 감춘 깊고 깊은 밤, 하인 한 명이 발소리를 싹 죽이고 숙소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모두가 그토록 고대하는 축제는 벌써 당장 내일로 위공자께서 술상 차림을 부탁한 정각의 위치는 강에 띄우는 연등 행렬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이었다. 금자봉은 문득 이 장소가 평소 강낭자께서 붓글씨 연습을 하시는 정각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강의 풍경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강물이 바람에 쓸려 잔잔하게 물결치는 게 보였다. 물결은 서로를 끊임없이 집어삼키다 끝에 다다라서는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잠잠해졌다. 그러다가도 바람에 쓸려 일어나기를 무수히 반복.

 

저 검고 깊은 강물은 제 사사로운 잘못부터 추한 면모까지도 묵묵히, 너그러이 끌어안아줄 것 같았다.

 

내일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시끄러워질 터.

 

부끄럽지만 이에 무너지지 않고 끝내 살아야 했다. 살아서, 어떻게든 살아서…….

 

이리 추하게라도 살아서 정녕 무엇이 하고 싶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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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있다면, 오라버니께 돌아가고파.

 

예고 없이 몰아닥친 거센 기억의 파도에 금자봉은 순간 아찔했다. 귓가에는 철썩거리는 물결의 소리가 여전했으나 지금 이 순간 단언컨대 자신의 몸은 불타고 있었다. 몸속에서 한 번 피어오른 불의 감각은 끝을 모르고 기어이 소녀의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듯 태고의 재앙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이제 금자봉의 시야에는 고요했던 호수의 정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시뻘겋게 작열하는 불길만이 생생히 보인다. 한 치의 앞도 보기 어려운 자욱한 연기와 거센 불길 한가운데 자신은 망부석처럼 우뚝 서 있다.

 

한때 자유로이 움직이던 팔다리는 어느새 아주 단단한 고목의 뿌리가 되어 저 멀리에서 어떤 형체를 옭아매더니 봐주지 않고 제 곁으로까지 끌어온다. 그것은 하나가 아닌 여럿. 그리고, 모두 다 같이 함께 불타오른다. 불타오른다. 독한 불길에 육신 곳곳의 마디마디가 여지없이 툭툭 끊어진다. 오랜 세월 버텨온 뿌리가 마치 눈처럼 녹아내린다. 허나 이 선택은 다름 아닌 제 스스로가 정한 것이니.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탐욕스러운 늪의 대군이 요성에까지 닿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꺼지지 않는 초열지옥의 한가운데에서 당시 소녀는 생각했다.

 

아아, 하지만― 만의 하나, 이 불길에서 살아남는다면

 

역시 오라버니에게 돌아가고 싶구나…….

 

악몽과 같은 기억이 그쯤 다다랐을 때 차가운 손이 구원자처럼 소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허나 어느새 감긴 소녀의 눈은 아직도 영원과 같은 불길 속이라 두 뺨 위로 서린 냉기만을 겨우 느낄 뿐. 소녀는 마치 본능적으로 따뜻한 품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처럼 냉기를 쫓아 고개를 쭉 미끄러트린다. 스스로는 고개뿐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몸 전체가 손 주인에게 폭 하고 안겨 고부라진다. 더더욱 냉기를 바짝 쫓아 몸을 가까이 갖다붙인다. 이상하게도 다정하게만 느껴지는 서늘한 온도에 드디어 조금은 살 것 같다. 어쩐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기도 해 놀랍다.

 

구원자 같은 냉기를 느끼며 정신을 잃은 금자봉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고이 안겨서 번쩍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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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삶은 왜, 이곳에서도 그때처럼 녹록지 않을까.”

 

이레가 꼬박 넘도록 행방이 묘연했던 강공자께서 열병을 앓듯 식은땀만 줄줄 흘리는 금자봉을 조심히 안고 있었다.

 

금자봉이 그간 강만음을 발견하지 못했던 건 기실 단순하게도 그가 먼저 상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강만음, 아니 요왕 망월은 인간의 탈을 발바닥까지 눌러썼지만 그 피부 아래 감각은 여전히 용의 예리한 그것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는 먼 옛날부터 창천을 비상하던 용이었으므로. 그러니 누군가 제 아무리 얼굴을 바꾸고 행동을 달리 하더라도 망월에게는 그저 그리운 한 존재였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왔던 부드럽고 뜨거운 생명이 제 품 안에 선명하게 안겨 있었으나, 망월은 감히 이 이상 욕심낼 수 없었다. 자신은 그녀에게서 앗아간 게 너무나 많았으니까.

 

“허나 그것이 네가 인간으로서 선택한 결정이라면, 이 오라비는 너의 모든 걸 존중해주마. 너를 온전히 이해해보마. 이번에야말로 너라는 걸…… 그저 있는 그대로 자체를.”

 

불덩이 같던 소녀의 몸이 마침내 열을 떨어트리자 타락의 용은 조그만 몸을 천고의 보물이라도 되듯 끌어안고는 깊은 어둠 속으로 안개처럼 녹아든다. 사라진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다다른 곳은 하인들이 묵는 숙소였다. 편안하게도 발을 담그고 있던 끈적한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빠져나온 용은 구석 한편 빈 이부자리에 소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한참을 물끄러미 쭉 바라본다. 그의 모습은 흡사 먹잇감이 어서 제 아가리로 순순히 걸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뱀 같았다.

 

지난번 꿈속에서 모질게 쫓아냈으니 상심이 분명 제법 컸을 터. 하지만 대왕이라는 이름은 언젠가 이 애의 머릿속에서 잊혀야만 하는 존재. 자칫하면 꽃같이 여린 이 애에게 또다시 끔찍한 기억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대…… 대왕, 허, 허귀인께서 그만…… 대왕? 대왕! 아아악!

 

그때 얼마나 많은 생명을 불태웠던가.

 

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듣지 않겠다. 모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다음번에는 혼까지 불태울 테니.

 

서쪽 늪에서 다시금 올라왔다는 대군의 습격 소식보다, 그 대군이 어째서인지 벌써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 속에 빠졌다는 급보보다, 당시 망월에게 급선무였던 소식은 오직 하나. 허니. 모두 깔보던 엉겁의 진흙 속에서 태어났지만 무엇보다도 순수무구했던 나의 아름다운 상수리나무. 그 애가 어찌 죽는단 말인가, 단 하루를 다투었거늘. 내일이면 성 앞에서 제 잘못을 빌고 있겠지― 정녕 그리 생각했는데. 아니어라, 네가 내게 이래선 안 된다.
 

그러나 망월을 맞이했던 건 이미 한참 전 불타버린 시체.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온 사방으로 줄기를 뻗어 저항했는지 허니의 몸은 말 그대로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혈흔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죄다 깡그리 불태워졌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불길의 흔적은 망월 자신의 것. 그제서야 문득 떠올렸다. 성 밖을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니, 도망쳐야 할 때가 생기면 제 힘을 쓰라고 목걸이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힘을 나누어주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망월 자신의 눈동자 색을 그대로 닮은 붉은 보석이 중앙에 박힌 목걸이였다.

 

허니가 곱게도 웃으면서 받아주었던 그 목걸이가 새카만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 망월은 목걸이를 주워든 이후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유일무이한 진풍경은 바로 평생 마른 적이 없다던 깊고 깊은 서쪽 늪지의 가장 끝 바닥. 그랬다, 요왕 망월은 서쪽 늪지 일대를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진흙까지 몽땅 태워버린 그의 분노는 무려 하늘의 천제에게서 하사받은 불꽃이었으니. 감히 그 누가 살아남으랴. 그의 누이마저도 살아남지 못했거늘.


동이 트려 하자 망월은 그제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어둠 속으로 다시 녹아드는 발걸음이 어째서인지 유독 굼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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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한마음으로 손을 꼽아 기다리던 연등제 당일, 도시 전체가 들떠 있다고 봐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시장에서는 어디에서나 색색의 고운 연등을 팔아 거리가 마치 살아 숨 쉬는 꽃길 같았다. 오늘만큼은 평소 근심이 많아 보이던 연화오의 대사저께서도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그런데 온갖 색채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녹아드는 이 분위기 속에 불쌍하게도 좀처럼 섞이지 못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소매 깊숙이 미약을 숨긴 버들이, 금자봉 되시겠다.

 

금자봉의 바로 눈앞에는 위공자께서 부탁하신 술상이 있었다. 잔은 딱 두 개. 섞을 건 하나. 부엌일로 조금 거칠어진 섬섬옥수의 끝에 미약을 뭉개뜨려서 잘 묻히고는 그것을 다시 잔의 입구에 동그랗게 살뜰히 바른다. 서편 하늘에 불그스름히 떠 있던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며 세상을 온통 진홍 노을빛으로 선명하게 물들인다. 이 천근 같은 상을 가져다 놓아야만 할 시간이었다. 금자봉은 상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정각 자리로 발을 옮긴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