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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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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면 호숫가의 선부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통금이 없어도 일단 어두워지면 하인들은 가급적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추운 계절로 접어들면 불길한 음기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건물이 흔들리자 남희신이 얼굴을 찌푸렸다.
잠결에 가쁜 숨을 쉬던 그는 깨어나며 저도 모르게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금도 강징은 매일 밤 이 곳을 찾지는 않았다.
방 안의 기온도 바깥만큼 서늘했지만 침상 위에는 남희신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감이 아른거렸다.
일어나 앉은 남희신은 그대로 견뎌 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움켜쥔 주먹에서 핏줄이 솟았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타고내린 땀방울이 엷은 침의로 스며들었다.
남희신은 비틀거리며 방을 가로질러가 문갑을 열고 꽁꽁 싸매진 꾸러미를 꺼냈다.
검은 환약을 마른 입에 털어놓고 다시 돌아온 그는 운기조식을 하려는 것처럼 가부좌를 틀었지만 허리가 곧게 서지 않았다.
그래도 버티다 보니 괴로움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붙였다 뜨자 어느새 새벽이었다.
그는 해도 뜨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강징이 잠을 자러 올 때가 아니면 언제나 새벽에 수련을 했다.
키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어 작은 숲 같은 뒤뜰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수련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밤순찰을 하는 수사도 이까지는 오지 않았다.
강징이 운몽 강씨의 검법을 가르쳐줄 리 없으니, 남희신은 철저하게 고소 남씨의 방법대로 수련했다.
새벽 바람이 차가웠으나 남희신은 얇은 옷만 입은 채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얗게 뻗어나간 검기에 잘려나간 잎조각들이 드문드문 흩날렸다.
한참 후 남희신은 검을 집어넣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양 손을 땅에 딛고 훌쩍 물구나무를 섰다.
날렵하게 뻗은 발끝에서 팔뚝까지 긴장감이 팽팽했다.
그리고 또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으며 긴 시간이 지난 후.
겨우 자세를 되돌린 남희신이 긴 숨을 토해내었다.
간밤에 잠을 못 자서 피로해보이는 얼굴은 급한 성장을 따라 늘씬하게 깎여간 것처럼 훤칠해 보였다.
벗어두었던 장포를 걸치자 두터운 팔뚝이 소매 안으로 가려졌다. 수련이 끝나고 선비와 같이 단아한 풍채를 되찾은 남희신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정원을 나왔다.
단 하나, 냉천이 없는 것이 참 아쉬웠다.
“종주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남희신은 강징의 여종이 하는 말을 듣고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강징은 부부의 침실에만 들르지 않는 게 아니라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것이 행방도 알리지 않은 채 며칠이나 갈 때도 있었다.
남편 있는 음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문을 다스리는 주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날도 강징은 해가 다 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멀리서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강징은 얼굴에 피로한 빛이 떠올랐다.
대문 앞에 내린 후 그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것이 남희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강징은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얼굴을 보고 알았다.
강징은 아직도 기분이 멍한 상태였다. 남희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자 그는 가늘게 눈을 뜨며 쳐다보았다.
...이 아이... 원래는 나보다 작지 않았던가??
“늦으셨습니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던가. 그가 옆에 서서 팔을 부축하자 숫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바라보는 눈빛은 첫날밤 만났던 소년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열네살치곤 크다 싶었는데, 정말 문짝같이 자랐구나.
강징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니.
그 동안 세월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삼독성수의 뒤에 선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그가 피바람을 일으킬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것도 수진계 내의 이야기일 뿐 세상은 균형을 찾아가며 오히려 전보다 평화로워졌다.
강징의 손을 잡고 앉힌 남희신은 조심스레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가 찻잔을 들어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드디어 2차 발현을 한 남희신은 강징이 바쁜지라 좀체 말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강징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매일 수련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글을 읽고 쓰고, 악기를 연습하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린아이라고 머리에 박힌 인식은 변하질 않아서, 그 나이에 마땅히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가 강징의 음인향 뿐 아니라 타인의 양인향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불쾌한 시간을 견디다 온 강징은 어디선지 스치는 달콤한 향에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반면 강징에게서 기분나쁜 향이 끼치는 것을 깨달은 남희신은 더럭 인상을 찌푸렸다.
강징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보니 남희신이 새파란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대수롭잖게 웃으며 말을 건넨 강징은, 남희신이 몸을 떨며 묻는 소리에 그만 손가락이 굳어져버렸다.
“부인... 당신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강징에게 희락기가 찾아왔던 때는 그의 인생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비참한 시기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지는 혼인을 하는 것이었지만, 주변에는 저와 가문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는 양인들로 득실거렸다.
당시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강징은 수진계의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 끔찍하게 싫고 두려웠다. 그래서 지금도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까지 날아가 허름한 청루를 찾곤 했다.
강징은 다름아니라 나이도 어리고 순진한 남희신에게 자신의 비밀이 알려진 것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기습을 당한 듯한 최초의 놀라움이 가시자, 잇달아 창기에게 안겼다 온 사실을 들켰다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이제까지... 이제까지, 당신은 희락기가 올 때마다 그런 곳에 가셨단 말입니까?!”
남희신이 가차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얌전하고 온건한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그는 말 끝에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다는 듯, ‘그런 곳’이라고 날카롭게 눌러 뱉은 후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약을 쓰지 않고요?!”
강징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도 약으로 넘기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우성 음인에게 오는 희락기의 고통은 칼에 베어지거나 채찍에 맞는 고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독한 정신력까지 약화시키는 괴로움을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강징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화를 내는 소년을 낯설게 느끼며 동시에 가슴이 시려졌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측근들도 모르게, 피같은 돈을 떼어 운몽이라 할 수도 없는 곳까지 날아가서. 더러운 사창가에서, 예의도 모르는 창기에게 안겨야 했던 아픔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는 권력이며 재물이며 못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문이 퍼지는 것이 무서워서 고급 창관에는 가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강징은 세상의 끝과 같이 먼 어느 해변가의 마을까지 날아갔다.
그런 곳의 양인들은 금단도 모르고, 거칠고 무례했다. 얼굴만은 한사코 숨기는 강징의 몸이 고운 것을 보고는, 어딘가의 창기려니 하고는 마음대로 다루었다.
양인에게 양기를 받으면 희락기의 고통은 가라앉았지만, 강징은 언제나 괴로울 정도의 역겨움과 굴욕을 느꼈다. 쓴 약이 효과가 있다고 달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처럼.
음인이라 겪어야했던 수년간의 비참함과, 암울한 시절의 고생이 한꺼번에 덮친 강징은 더럭 분노가 솟구치며 눈 앞의 소년이 미운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은 어린 나이에도 다방면으로 우수한 인재였지만, 규방의 일에 대해서는 혼례 전에 속성으로 교육받은 것밖에 알지 못했다. 고소 남씨는 엄격하여 열락기나 희락기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반려자 외에는 몸을 섞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약술에 뛰어난 고소 남씨가 사용하는 억제제와 같은 효과는 다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강징이 아무리 힘들었다고 설명한들 젊은 가슴에 솟구친 불같은 감정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자신이 반려자로서 곁에 머물던 3년 내내 부인이 다른 양인에게 안겨왔다니.
남희신은 강징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아직 본 적도 없는 자색 장포 아래의 몸뚱아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몇 번이나...!!”
남희신은 말을 하다 말고 격앙되어 목구멍이 콱 막혔다.
그에 답을 하듯, 마침내 강징의 상처받은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강징은 슬픔과 고통을 안으로 불러들이며 단단한 분노로 벽을 쌓았다.
새파란 눈빛이 세상에 불을 지를 때처럼 냉담하게 이글거렸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이제까지 깨끗한 몸일 거라 생각했다니. 역시 어린애는 할 수 없구나.”
그 말을 들은 남희신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강징은 어딘지 색이 달라지는 그의 눈빛에 움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남희신이 성큼 다가와서 자신을 잡으려들자, 순간적으로 강징은 공포심마저 느꼈다.
“썩 나가거라!”
강징이 손을 뿌리치며 축객령을 내렸으나 남희신은 억지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속삭이는 듯,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울화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안 되겠습니다. 조금도 반성하시는 것 같지 않군요.”
반성?!
이윽고 허리를 붙잡고 옷 속으로 디밀어지는 손에 강징은 기절할 것 같았다. 주인이 심하게 동요하자 오른손에 낀 반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침입자의 팔을 타고 뻗어올랐다.
그러나 남희신은 자전이 지직 소리를 내며 살을 파고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려 그를 다치게 한 것에 놀란 강징이 자전을 거두어들였다.
남희신은 강징을 쓰러뜨릴 듯 난폭하게 옷자락을 흩트렸다. 자전을 쓸 수 없게 된 강징은 무력만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하얗고 억센 손아귀가 어찌나 단단한지, 그의 품에 짓눌린 채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옥신각신하던 강징은 별안간 딱딱하게 아래를 파고드는 느낌에 혼비백산하여 손을 휘둘렀다.
“그만!”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시에 시공간을 멈춰버리는 듯했다.
남희신은 가만히 서서 배신을 당한 듯한 눈으로 강징을 노려보았다. 고운 얼굴의 한 편이 호되게 맞아서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그가 홱 몸을 돌려 나가버린 후, 강징은 그대로 발꿈치가 닿는 의자에 넘어지듯 허물어져버렸다.
바로 일각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으로 찬찬히 가늠해 보려 했지만 자꾸 감정만 앞서며 눈이 뜨거워졌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키려던 강징은 얼굴빛이 확 변했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남희신의 손에 쑤셔졌던 이물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당황하여 더듬어보니 아래에 무엇인가가 들었는데 빼낼 수가 없었다.
하인을 불러 물어보니 남희신은 침실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강징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무언지 끄트머리가 딱딱하게 만져지는 물체는 강징이 가진 힘을 총동원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영력도 통하지 않고, 사술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서 해결법을 찾을 수도 없어, 자포자기한 기분이 된 강징은 그대로 침상 위에 웅크리고 누워 더욱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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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면 호숫가의 선부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통금이 없어도 일단 어두워지면 하인들은 가급적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추운 계절로 접어들면 불길한 음기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쳐 건물이 흔들리자 남희신이 얼굴을 찌푸렸다.
잠결에 가쁜 숨을 쉬던 그는 깨어나며 저도 모르게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금도 강징은 매일 밤 이 곳을 찾지는 않았다.
방 안의 기온도 바깥만큼 서늘했지만 침상 위에는 남희신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감이 아른거렸다.
일어나 앉은 남희신은 그대로 견뎌 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움켜쥔 주먹에서 핏줄이 솟았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타고내린 땀방울이 엷은 침의로 스며들었다.
남희신은 비틀거리며 방을 가로질러가 문갑을 열고 꽁꽁 싸매진 꾸러미를 꺼냈다.
검은 환약을 마른 입에 털어놓고 다시 돌아온 그는 운기조식을 하려는 것처럼 가부좌를 틀었지만 허리가 곧게 서지 않았다.
그래도 버티다 보니 괴로움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붙였다 뜨자 어느새 새벽이었다.
그는 해도 뜨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강징이 잠을 자러 올 때가 아니면 언제나 새벽에 수련을 했다.
키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어 작은 숲 같은 뒤뜰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수련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밤순찰을 하는 수사도 이까지는 오지 않았다.
강징이 운몽 강씨의 검법을 가르쳐줄 리 없으니, 남희신은 철저하게 고소 남씨의 방법대로 수련했다.
새벽 바람이 차가웠으나 남희신은 얇은 옷만 입은 채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얗게 뻗어나간 검기에 잘려나간 잎조각들이 드문드문 흩날렸다.
한참 후 남희신은 검을 집어넣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양 손을 땅에 딛고 훌쩍 물구나무를 섰다.
날렵하게 뻗은 발끝에서 팔뚝까지 긴장감이 팽팽했다.
그리고 또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으며 긴 시간이 지난 후.
겨우 자세를 되돌린 남희신이 긴 숨을 토해내었다.
간밤에 잠을 못 자서 피로해보이는 얼굴은 급한 성장을 따라 늘씬하게 깎여간 것처럼 훤칠해 보였다.
벗어두었던 장포를 걸치자 두터운 팔뚝이 소매 안으로 가려졌다. 수련이 끝나고 선비와 같이 단아한 풍채를 되찾은 남희신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정원을 나왔다.
단 하나, 냉천이 없는 것이 참 아쉬웠다.
“종주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남희신은 강징의 여종이 하는 말을 듣고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강징은 부부의 침실에만 들르지 않는 게 아니라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것이 행방도 알리지 않은 채 며칠이나 갈 때도 있었다.
남편 있는 음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문을 다스리는 주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날도 강징은 해가 다 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멀리서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강징은 얼굴에 피로한 빛이 떠올랐다.
대문 앞에 내린 후 그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것이 남희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강징은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얼굴을 보고 알았다.
강징은 아직도 기분이 멍한 상태였다. 남희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자 그는 가늘게 눈을 뜨며 쳐다보았다.
...이 아이... 원래는 나보다 작지 않았던가??
“늦으셨습니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던가. 그가 옆에 서서 팔을 부축하자 숫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드럽게 바라보는 눈빛은 첫날밤 만났던 소년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열네살치곤 크다 싶었는데, 정말 문짝같이 자랐구나.
강징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니.
그 동안 세월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삼독성수의 뒤에 선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그가 피바람을 일으킬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것도 수진계 내의 이야기일 뿐 세상은 균형을 찾아가며 오히려 전보다 평화로워졌다.
강징의 손을 잡고 앉힌 남희신은 조심스레 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가 찻잔을 들어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드디어 2차 발현을 한 남희신은 강징이 바쁜지라 좀체 말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강징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매일 수련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글을 읽고 쓰고, 악기를 연습하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린아이라고 머리에 박힌 인식은 변하질 않아서, 그 나이에 마땅히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가 강징의 음인향 뿐 아니라 타인의 양인향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불쾌한 시간을 견디다 온 강징은 어디선지 스치는 달콤한 향에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반면 강징에게서 기분나쁜 향이 끼치는 것을 깨달은 남희신은 더럭 인상을 찌푸렸다.
강징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보니 남희신이 새파란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대수롭잖게 웃으며 말을 건넨 강징은, 남희신이 몸을 떨며 묻는 소리에 그만 손가락이 굳어져버렸다.
“부인... 당신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강징에게 희락기가 찾아왔던 때는 그의 인생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비참한 시기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지는 혼인을 하는 것이었지만, 주변에는 저와 가문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는 양인들로 득실거렸다.
당시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강징은 수진계의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 끔찍하게 싫고 두려웠다. 그래서 지금도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까지 날아가 허름한 청루를 찾곤 했다.
강징은 다름아니라 나이도 어리고 순진한 남희신에게 자신의 비밀이 알려진 것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기습을 당한 듯한 최초의 놀라움이 가시자, 잇달아 창기에게 안겼다 온 사실을 들켰다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이제까지... 이제까지, 당신은 희락기가 올 때마다 그런 곳에 가셨단 말입니까?!”
남희신이 가차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얌전하고 온건한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그는 말 끝에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다는 듯, ‘그런 곳’이라고 날카롭게 눌러 뱉은 후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약을 쓰지 않고요?!”
강징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도 약으로 넘기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우성 음인에게 오는 희락기의 고통은 칼에 베어지거나 채찍에 맞는 고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독한 정신력까지 약화시키는 괴로움을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강징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화를 내는 소년을 낯설게 느끼며 동시에 가슴이 시려졌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측근들도 모르게, 피같은 돈을 떼어 운몽이라 할 수도 없는 곳까지 날아가서. 더러운 사창가에서, 예의도 모르는 창기에게 안겨야 했던 아픔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는 권력이며 재물이며 못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소문이 퍼지는 것이 무서워서 고급 창관에는 가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강징은 세상의 끝과 같이 먼 어느 해변가의 마을까지 날아갔다.
그런 곳의 양인들은 금단도 모르고, 거칠고 무례했다. 얼굴만은 한사코 숨기는 강징의 몸이 고운 것을 보고는, 어딘가의 창기려니 하고는 마음대로 다루었다.
양인에게 양기를 받으면 희락기의 고통은 가라앉았지만, 강징은 언제나 괴로울 정도의 역겨움과 굴욕을 느꼈다. 쓴 약이 효과가 있다고 달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처럼.
음인이라 겪어야했던 수년간의 비참함과, 암울한 시절의 고생이 한꺼번에 덮친 강징은 더럭 분노가 솟구치며 눈 앞의 소년이 미운 마음이 들었다.
남희신은 어린 나이에도 다방면으로 우수한 인재였지만, 규방의 일에 대해서는 혼례 전에 속성으로 교육받은 것밖에 알지 못했다. 고소 남씨는 엄격하여 열락기나 희락기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반려자 외에는 몸을 섞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약술에 뛰어난 고소 남씨가 사용하는 억제제와 같은 효과는 다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강징이 아무리 힘들었다고 설명한들 젊은 가슴에 솟구친 불같은 감정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자신이 반려자로서 곁에 머물던 3년 내내 부인이 다른 양인에게 안겨왔다니.
남희신은 강징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아직 본 적도 없는 자색 장포 아래의 몸뚱아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몇 번이나...!!”
남희신은 말을 하다 말고 격앙되어 목구멍이 콱 막혔다.
그에 답을 하듯, 마침내 강징의 상처받은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강징은 슬픔과 고통을 안으로 불러들이며 단단한 분노로 벽을 쌓았다.
새파란 눈빛이 세상에 불을 지를 때처럼 냉담하게 이글거렸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이제까지 깨끗한 몸일 거라 생각했다니. 역시 어린애는 할 수 없구나.”
그 말을 들은 남희신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강징은 어딘지 색이 달라지는 그의 눈빛에 움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남희신이 성큼 다가와서 자신을 잡으려들자, 순간적으로 강징은 공포심마저 느꼈다.
“썩 나가거라!”
강징이 손을 뿌리치며 축객령을 내렸으나 남희신은 억지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속삭이는 듯,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울화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안 되겠습니다. 조금도 반성하시는 것 같지 않군요.”
반성?!
이윽고 허리를 붙잡고 옷 속으로 디밀어지는 손에 강징은 기절할 것 같았다. 주인이 심하게 동요하자 오른손에 낀 반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침입자의 팔을 타고 뻗어올랐다.
그러나 남희신은 자전이 지직 소리를 내며 살을 파고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려 그를 다치게 한 것에 놀란 강징이 자전을 거두어들였다.
남희신은 강징을 쓰러뜨릴 듯 난폭하게 옷자락을 흩트렸다. 자전을 쓸 수 없게 된 강징은 무력만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하얗고 억센 손아귀가 어찌나 단단한지, 그의 품에 짓눌린 채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옥신각신하던 강징은 별안간 딱딱하게 아래를 파고드는 느낌에 혼비백산하여 손을 휘둘렀다.
“그만!”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시에 시공간을 멈춰버리는 듯했다.
남희신은 가만히 서서 배신을 당한 듯한 눈으로 강징을 노려보았다. 고운 얼굴의 한 편이 호되게 맞아서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갔다.
그가 홱 몸을 돌려 나가버린 후, 강징은 그대로 발꿈치가 닿는 의자에 넘어지듯 허물어져버렸다.
바로 일각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으로 찬찬히 가늠해 보려 했지만 자꾸 감정만 앞서며 눈이 뜨거워졌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키려던 강징은 얼굴빛이 확 변했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남희신의 손에 쑤셔졌던 이물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당황하여 더듬어보니 아래에 무엇인가가 들었는데 빼낼 수가 없었다.
하인을 불러 물어보니 남희신은 침실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강징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무언지 끄트머리가 딱딱하게 만져지는 물체는 강징이 가진 힘을 총동원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영력도 통하지 않고, 사술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서 해결법을 찾을 수도 없어, 자포자기한 기분이 된 강징은 그대로 침상 위에 웅크리고 누워 더욱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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