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8149129
view 5641
2023.06.13 22:51
https://hygall.com/547059788
https://hygall.com/547127836
https://hygall.com/547517795
https://hygall.com/547909712





날이 더웠다.
입맛이 없어진 강징은 몇 술만에 젓가락을 놓고 마주 앉은 남희신을 바라보았다.
하얀 뺨 옆으로 맑은 땀이 한 방울 쪽 흘러내렸지만 그 외에는 매무새가 단정했다. 성실하게 음식을 넣고 씹는 소년은 더위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가끔씩 강징은 남희신과 함께 식사도 하게 되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낡아진 종잇장처럼 부스스 흩어졌다. 한결같이 부드럽고 예의바른 남희신은 나긋하게 놓여 있는 백자 같기도 하고, 혹은...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강아지 두 마리를 얻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연화오 근처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얻었던 것 같다.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강징은 자그마한 강아지들이 너무 귀여웠고, 곁에 끼고 자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외로움이었다는 사실은 20여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부친 강풍면에게 발각되자 그는 금단을 수련하는 자가 영견도 아닌 천한 짐승에게 시간을 낭비한다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 날 밤 강징은 밤새도록 이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어린 마음은 상처받은 스스로보다 가련한 동물들의 행방을 염려하여, 혹여 죽임을 당한 거나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상상에 죽도록 울었다.
가슴아픈 추억을 떠올리던 강징은 문득 남희신에게 그 그림자가 겹쳐지는 듯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인, 아직 반 공기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강징이 일어서자 남희신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강징은 물끄러미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먹거라. 나는 성에 들어갔다 오마.”
그 때, 남희신의 눈에 어수선한 빛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강징은 설마 하다가 물었다.
“따라오고 싶으냐?”
금린대에 다녀온 후 남희신은 다시금 연화오에 갇힌 듯 지내고 있었다. 나가고 싶다 하면 감시는 붙이겠지만 내보내줬을 텐데. 말을 하지 않기에 별로 나가고 싶지 않은 줄 알았다. 
강징은 주저하며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남희신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다.”



사람이 많은 성내는 무더위가 더 심했다.
세상을 부숴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자가 더위에 지칠 리는 없지만, 요즘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강징은 더위를 느끼는 것이 짜증이 났다.
뜨거운 대장간에서 볼일을 보고 났더니 움직이기도 싫어진 강징은 잠시 찻집에서 쉬면서 냉차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제 뒤에 선 소년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본 그는 잠시 짜증도 물러가며 입가에 어릿한 미소마저 떠올랐다.
연화오에 오기 전, 고소 남씨의 어린 후계자는 수많은 지식과 수련에 절여지느라 고소의 저자거리는커녕 운심부지처 밖으로 나갈 기회도 별반 없었다.
아무리 의젓해도 아이는 아이인지, 고소와는 빛깔도 다르고 말씨도 다른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흔한 풍경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마시거라.”
강징이 냉차를 내밀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남희신이 얼른 두 손으로 받았다. 하지만 금세 주의가 흐트러지며 가판대니 커다란 소가 끄는 수레 따위를 마냥 쳐다보았다.
단순한 시장의 풍경에 홀리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강징은 저 뿐만 아니라 고소 남씨도 어린애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금릉에게도 틈만 나면 열심히 수련을 하라고 닦달했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연화오로 데려와 제 손에 품고 있는다면 마냥 아이답게 놀게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본래 아비를 거쳐 그의 것이 될 것이었던 난릉 금씨를 온전하게 물려받게 만들려면 하루빨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했다.
“그만 앉거라.”
강징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남희신은 앉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얼굴에 살짝 떠올랐던 아이다운 즐거움마저 사라진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표정을 보고 강징은 움찔했다.
강징이 아는 남희신의 모습은 언제나 부드럽기만 했다. 심지어 저를 감시하려고 붙어 다니는 운몽 강씨의 수사들에게도 그는 친절하게 대했다.
강징은 이유가 궁금하기보다는 남희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별안간 장식처럼 지니고 다니던 검집에서 삭월이 뽑혀나오자 강징의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너 왜 그러느냐?”
남희신은 더 이상 길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옆으로 돌아가, 병풍으로 반쯤 가리워진 객잔의 구석 자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신.”
“저들이 부인을 모욕했습니다...!”
강징이 남희신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투박한 옷을 입은 잡배들 몇몇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짧은 순간 강징은 그들이 전부 다 패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패검을 쓸 수 있는 자들이니, 강징을 모르지는 않을 터다.
아마도 그들이 뒤에서 제 욕을 한 모양이라고, 강징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버려둬라.”
뒤에서 내 욕 하는 자들을 다 죽여버리면 세상에 인간이 남아날까.
그보다도 이 거리에서 말소리를 가려낸 남희신의 청력이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남희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검을 뽑은 채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희신!”
강징이 일갈하자 놀란 사내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삼독성수의 욕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음에도 정작 본인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새파란 빛이 흐르는 검날을 기울인 채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는 소년을 보고 하나 둘씩 자기들의 검을 뽑는 모습을 보고 강징이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공기가 얼어붙는 듯하며 남희신이 신속하게 앞으로 차고 나갔다.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한 훈련을 한 듯, 그에 맞서려는 불량배들의 자세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양 측의 검이 닿기도 전에 그야말로 빛처럼 날아간 보랏빛 물체가 두 개의 패검을 튕겨냈다.
이어서 번쩍이며 휘어지는 진짜 보랏빛 번개가 물보라처럼 공중을 찢었다.
갑작스레 끔찍한 비명이 수차례 터져나오자 객잔 안은 순식간에 놀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난장판이 되었다.
남희신은 채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놀란 듯이 멈추어 섰고, 그의 곁을 스치듯 내뻗는 빛줄기가 볶이는 콩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그에 베이고 찔리고 채찍처럼 얻어맞은 사내들은 끝없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이윽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떼의 장정들을 해치운 강징이 남희신의 손목을 때리자, 삭월이 쨍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희신이 돌아보자 노기와 흥분이 반반씩 뒤섞인 눈빛이 번쩍이며 노려보았다. 
곧장 강징이 남희신의 팔뚝을 꽉 쥐면서 외쳤다.
“다치면 어쩌려고 함부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남희신은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목소리가 음침할 정도로 작았고 잡힌 손이 가늘게 떨렸다.
“너같은 애송이가 나서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다시는 쓸데없는 참견 마라!”
“부인...!”
“한 마디만 더 하면 영영 연화오를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릴 테다!”
강징이 난폭하게 남희신의 팔을 밀쳐버리며 윽박질렀다.
천지도 모르는 소년이 괴수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것 같았던 금방의 장면이 떠오르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디 놈들인지 알아볼까요?”
객잔을 나설 때 강징의 곁으로 따라붙은 부사가 낮게 물었다.
“필요없다. 잡놈들이 터진 입으로 지껄이는 것까지 단속할 수 있겠느냐.”
길을 나서기 전 강징은 흘끔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남희신은 일행의 꼬리로 뒤쳐진 채 무척이나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징이 찌푸린 눈으로 눈짓을 하자, 두 명의 수사가 남희신의 뒤로 따라붙었다.
본래는 볼일이 더 있었지만 강징이 수로로 향하자 전원이 군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고, 얼마 후 그들은 연화오로 돌아왔다.



가져온 물건들을 풀게 하며, 강징은 꾸벅 절을 하고 가버리는 남희신의 뒷모습을 살폈다. 
기실 남희신은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걸어갔다.
그는 몇 채의 건물을 지나고서야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던 걸 깨닫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남희신은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걸터앉아서 강징이 머리를 뉘었던 베개를 쓰다듬었다.
신방은 천천히 시간이 흐르며 연화오의 바탕과, 고소 남씨의 기풍이 섞인 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남희신은 운심부지처에서 십년 넘어 지냈던 자신의 방보다 이 방을 더 사랑했다.
이 침상에서, 강징과 나란히 누워 지낸 밤이 몇십번쯤 될까.
다음 순간 남희신의 눈에 날카로운 노기가 떠오르며 손 닿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머릿속에, 깨끗하고 올바른 마음에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더러운 말들이 잇달아 스쳤다.

......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얘기지.
......기산 온씨도 다 재물과 군대의 힘이었지. 사람 하나가 세면 얼마나 세겠어?
......그렇게 욕을 해도 예쁜 음인이니 봐 주는 거 아냐?
......더러운 음인......
......집안이 망했을 때에는 도움을 구하려고 아무데나 다리를 벌렸다지.

................얼굴이 반반하니까.......

남희신은 피를 토할 것 같은 역겨운 분노를 느끼며 목을 움켜잡았다.
잇달아 두어달 전 침모의 방을 지나다가 들은 대화가 떠올랐다.
-이그... 음인이 종주가 다 무엇이여. 큰아씨처럼 시집이나 가서 예쁨받았을 터인디.
-운도 지지리도 없지. 전대 종주님만 살아계셨어도 이 고생을 했으까.
-돈 없고 힘 없으니 수모를 당하는 게지. 신선이 된다고들 수련한다는 거 허이구 말들은 참!
-힘없을땐 못살게 굴더니, 힘 있으니까 또 뒤에서 하는 짓들 보게나.
-흥! 그래도 힘있고 쪼사부리는게 낫지. 
-암만. 

갑자기 강징이 방으로 들어오자, 남희신은 벌떡 일어났다.
냉랭하게 굳은 얼굴이 다가오자 남희신은 흥분인지 분노인지, 서글픔인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들먹거렸다.

...성깔이 더러워도 얼굴이 반반하니...

그 한 마디가,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노기를 띨수록 불이 붙는 듯 번져가는 아름다움으로 휘어지는 눈매, 보드라운 입술을 차마 오래 볼 수 없어 남희신은 그만 눈을 떨구고 말았다.
강징은 그 모습을 보고 남희신이 제게 야단을 맞아서 속이 상한 줄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부인. 부인의 곁에는 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희신이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강징은 당황스러웠다.
사실은 다시 위험한 짓을 못 하도록 확실하게 혼을 낼 요량을 하고 온 강징은 상황이 무척 거북하여 저도 모르게 얼버무리는 소리를 했다. 
“...혼인을 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
분명 따끔한 소리를 하러 온 것인데, 기가 죽은 소년을 보고 있으려니 어째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제기랄.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였길래.
아무튼 강징은 누군가를 달래거나 위로할 말은 추호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음... 피곤하구나. 그만 잠이나 자자.”
강징은 불을 끄고 누운 다음, 한참을 눈을 뜨고 있었다. 왠지 남희신이 잠이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희신. 아직 안 자고 있느냐?”
그리고 조금 있으려니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저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강징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리석긴. 어른이 되면 뭐가 더 좋을 것 같으냐.” 
강징은 남희신이 언제까지나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남희신의 머리가 굵어질수록 이 혼사는 오래가기 힘들 것이니.
그래도 조금만 더...
강징은 스르르 눈이 감겼다.

고요해진 강징의 곁에서 남희신은 정말로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안정된 호흡 소리를 한참 동안 듣다가 손을 뻗었다. 
이불 밖에 놓인 강징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뒤집고는 뭐라도 찾는 듯이 찬찬히 쓸었다.
이윽고 부드러운 손마디 사이에서 희미한 돌기 같은 것이 만져지자, 남희신은 참을 수가 없는 듯이 작고 날씬한 손을 움켜쥐었다.





어린 남희신은 오래된 기억을 몇년이나 곱씹어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또한 자라나며 알게 된 여러 가지 지식이 더해져 기억은 마치 얼기설기 덧댄 천조각 같았다.
그 당시 남희신은 너무 어려서 기산 온씨나 전쟁의 상황도 잘 알지 못했다. 
모친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의 밤이었다. 
남희신은 저보다도 더 어린 남망기에게 모친의 죽음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모친의 별당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남망기를 달래어 데려가 다독여 재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나왔을 때에는 아주 깜깜한 밤이었다. 
불빛이 거의 없어도 익숙한 길이라 잘 찾아갈 수 있었고 어둠도 무섭지 않았다. 다만 어린 마음 속이 서늘했던 건 외로움 때문이란 걸 역시 어린 소년은 몰랐다.
돌풍과 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덮쳐들었던 건 바로 그 때였다.
남희신은 순식간에 멱살이 당겨지고 입을 틀어막히며 공중을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놀란 그가 발버둥을 쳤지만 선문가의 자제라도 아직은 아무 힘이 없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냐.”
그 다음으로는 붙잡힌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갗이 닿는 주변에 가깝게 오싹한 검기가 종횡무진 저미는 것이 느껴졌다.
어둡고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고, 놀란 채로 몸이 굳어져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있는데.
별안간 뜨뜻한 액체가 얼굴에 뿌려지며 모든 것이 멈추었다.
격하게 흔들리던 몸이 멈추는 느낌도 격하여, 남희신은 헉 하며 눈을 크게 치떴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검날이 차가운 냉기가 얼굴에 뿌려질 정도로 지척에 있었다. 그리고 검날을 꽉 움켜쥔 날씬한 손가락들이 보였다. 
다음 순간 남희신은 제 몸이 또 한 바퀴 휙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옮아간 품은 금방 잡혀 있던 곳과는 완전히 달랐다.
억센 힘으로 조이긴 하나 넓은 소매가 몸을 완전히 둘러쌌고, 무서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 펼쳐진 손바닥이 남희신의 얼굴을 그의 어깨 쪽으로 눌렀다.
그 다음 기억은 꿈에서 깨어나는 듯 어둠이 물러가며 들이대어지는 수많은 등불이었다.
자객은 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버린 뒤였고, 성큼 나타난 남계인이 강징의 손에서 남희신을 채어갔다.
두 번째로 또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진 남희신은 그저 말도 못하는 인형 같았다.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고요한 운심부지처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종주, 이 오밤중에 왜 나와 있는거요? 
-운심부지처에는 통금이 있는 걸 모르오?
의심에 찬 목소리가 가운데 선 사람을 심문하듯 함에 남희신은 어린 머리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를 안은 남계인은 얼른 등을 돌려 그 곳을 빠져나왔다.
짧은 순간, 불빛에 환해진 강징의 모습이 어린아이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남희신은 애가 타서 손을 내밀었지만 작은 두 팔과 손은 허공을 짧게 휘저었을 뿐.
곧 시선이 끊어지며, 그의 모습도 긴 긴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사일지정이 지나간 후에도 고소 남씨의 외부 일처리는 숙부와 장로들이 도맡아 했으므로 남희신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동생인 남망기가 운몽 강씨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위험한 존재라고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삼독성수가 운심부지처로 왔다. 
어려서부터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남희신은 순진한 마음으로 그에게 호소해볼 생각을 품고 어른들을 따라 나갔다.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무신경하고 불손한 얼굴을 한 번 보자, 다 탄 재와 같이 흐려졌던 기억이 생생하게 끓어올랐다. 
얼굴을 적시던 따뜻한 피. 그리고 단단하게 감싸 안아주던 팔. 
지금보다 어리고, 우울해 보이던 얼굴은 분명하게 대면하고 있음에도 가장 나중에 떠올랐다.
---저 애로 주시오.
자신을 똑바로 가리키며 내뱉는 목소리에 다 익지도 못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도화선에 불꽃을 튕긴 듯 그가 뱉은 말에 주변이 시끄러워졌지만, 남희신은 더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남희신은 몸을 굽혀 가느다랗게 뻗은 손가락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부드러운 손등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자 잠든 강징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부군이라 불러준 적이 없었다.
내가 어리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이다. 남희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얼른 커지고 누구보다, 수진계 최강이라는 그보다도 강해져서.
사실은 상처받기 쉽고 불행한 이 사람을 가슴에 안고 위로해 줄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