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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15:37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바쁜 수확철도 넘어가자 바람이 제법 싸늘해졌다.
올해도 풍년까지는 아니었으나 충분한 결실을 맺었고, 아직 전쟁 때 퍼진 흉괴를 다 처리하지 못한 상황이라 무선의 발명품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강징은 그 옛날 평탄하던 시절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무선과 툭탁거리거나 때로는 웃기도 하며 다시 없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꼭 이대로만, 이만큼만 그대로 흘러가도 좋으련만. 세상과 삶은 다채롭게 변해가는 것이 이치였다.
강징은 무선이 이따금씩 남망기와 마주치며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워진 것을 알았다.
지금의 강징은 전쟁 전후에 남망기가 날이 서게 행동했던 것이 죄다 위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선이 사술을 즐겨 쓰지 않고 위험한 짓도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이가 원만해졌다.
남망기는 일부러 남희신을 따라와 사람 많은 자리에 참석하는 일이 잦았다. 무선은 그것이 범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몰랐지만, 어쨌든 그를 보기만 하면 반갑게 말을 걸고 농을 걸었다. 둘 사이를 가르는 거북한 문제가 없으니 서로 낯을 굳힐 일도 없어 자연히 가까워지고 더 가까워졌다.
강징은 그렇게 익어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없이 지켜보며, 당사자들보다 더 세세하게 읽었다. 위무선이 신나게 떠들고, 남망기가 부드러운 얼굴로 듣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렸지만 절대로 내색하지 않으며.
남망기는 그 누구보다도 무선을 위하고 지극히 사랑했다. 모두가 그를 적으로 돌렸을 때-그 중에는 강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편에 서서 지켰다.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무선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하니, 강징은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밀어줄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뜬 위무선이 강징의 눈치를 살피며 며칠간의 휴일을 요구하는 날이 왔다. 빠진 수업은 다녀온 후에 보충하겠다며 한 발 넘겨짚는 애교까지 떠는 무선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징은 의외로 순순하게 허락해 주었다.
위무선은 강징이 무척 빡빡하게 제 일정에 간섭하는 걸 알기에 웬일인가 싶어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무척 들뜬 채 고소로 떠났다.
말을 달려 운심부지처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남망기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무선은 온종일 제게 시간을 다 비워놓고 맞춰주는 남망기와 다니며 밀려 있던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강징을 중심으로 연화오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변화에 대한 얘기였다. 말수가 없고 고요하게 듣기만 하는 남망기에게 무선은 온가 사람들을 탈취해 올 때의 강징의 태도까지 맛깔나게 들려주었고, 온가 사람들이 연화호 근처에 살게 된 얘기며 온정이 얼마나 무서운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지 지껄이다가는 어디로 뻗어도 닿을 수밖에 없는 강징의 화제로 돌아오곤 했다.
무선은 좀처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남망기를 만나 전시에 쌓였던 회포까지 다 풀고, 천자소를 실컷 마시고 온종일 느긋하게 뒹굴고 있으려니 무척 즐거웠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얘깃거리가 다 하지 않아 계속 떠들다 또 강징의 수완을 자랑하기 시작한 무선의 머리에 문득 실제의 강징이 떠올랐다.
간만에 연화오에서 떨어진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기쁨에 들떠서 몰랐는데 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왠지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징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던 것 같았다. 제가 너무 기뻐 부리나케 떠나오느라고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밤 무선은 잠을 자려고 누운 후에도 자꾸만 눈이 떠졌다.
밑도끝도 없이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강징에게 진짜 가족이라곤 저와 사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마저 난릉으로 떠나버린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때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강징은 정말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무선은 생각했다. 그러면 그 때 강징은 저렇게 쓸쓸한 모습으로 남겨지는 걸까.
위무선은 왜 이렇게 주책없이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건지, 정말로 재수가 없어지겠다고 그만두자 싶으면서도 몸을 뒤척거리며 자꾸 마음이 어지러웠다.
새로운 수사들도 제법 수행이 깊어졌고 기강도 잡혔고, 더는 돈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사람들도 하나같이 강징에게 충성스러운데, 그런 그가 대체 왜 위태로워 보인다는 것일까. 영문을 몰랐다.
왠지 강징은 영원히 그런 상태에 머무를 거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비상한 솜씨로 가문을 이끌어가는 노련미에 저조차도 그에게 존경심을 가질 정도인데.
그와 다르게 가끔씩 강징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어린애의 허전한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언뜻 언뜻 스쳐가는 그런 느낌들을 그와 가까이 있을 땐 잘못 보았겠거니,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흘려버렸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그런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오히려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역시 양친을 포함해 주변 사람을 다 잃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을만치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리고 아픈 상처를 남모르게 숨기는 건 정말로 강징다운 일이라서 무선은 생각할수록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연화오를 떠나올 때 무선은 꼭 일주일을 약속했다. 물론 길면 길수록 좋았겠지만 어느새 그에게도 제자들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지라 스스로 타협한 숫자였다.
그렇지만 한 번 마음자리가 사나워진 무선은 꾹 참고 모처럼의 휴가를 즐겨 보려 해도 만 하루가 더 지나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망기에게 이틀 가량 이른 작별을 고한 무선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말을 달려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급하여 이번 딱 한 번만 어검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바심을 쳤다.
연화오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말고삐를 하인에게 던져 버리고 대문간을 넘어온 무선은 내내 그의 걱정을 해서였는지, 강징과 맞닥뜨린 첫순간 그의 얼굴에 기묘한 떨림이 스치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에 무선은 내내 불안하게 스멀거리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강징! 하고 반가운 웃음을 꾸미며 다가오는 무선을 보는 강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단순한 반가움도, 애물단지가 돌아왔구나 하는 정겨운 눈총도 아니었다. 마치 사람이 악몽에서 깨어나며 현실과 마주했을 때 떠올리는 공포심과 안도감이 뒤섞인 듯 병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강징이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린 듯 곧장 낯빛을 고치자 무선은 더욱 불안했다.
“뭣하러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계획성이라곤 없는 녀석 같으니.”
강징이 저답게 톡 쏘는 소리까지도 잊지 않건만, 그러는 강징을 똑같이 속이는 웃음을 짓는 무선의 가슴은 막연한 의심으로 숨을 쉬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다시 연화오의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이후로 무선은 더이상 강징이 멀쩡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무리를 하고 있고,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다고. 여전히 밝게 웃고 떠들고 놀리며 그와 어울리면서도 이따금씩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바쁜 수확철도 넘어가자 바람이 제법 싸늘해졌다.
올해도 풍년까지는 아니었으나 충분한 결실을 맺었고, 아직 전쟁 때 퍼진 흉괴를 다 처리하지 못한 상황이라 무선의 발명품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강징은 그 옛날 평탄하던 시절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지는 무선과 툭탁거리거나 때로는 웃기도 하며 다시 없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꼭 이대로만, 이만큼만 그대로 흘러가도 좋으련만. 세상과 삶은 다채롭게 변해가는 것이 이치였다.
강징은 무선이 이따금씩 남망기와 마주치며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워진 것을 알았다.
지금의 강징은 전쟁 전후에 남망기가 날이 서게 행동했던 것이 죄다 위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선이 사술을 즐겨 쓰지 않고 위험한 짓도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이가 원만해졌다.
남망기는 일부러 남희신을 따라와 사람 많은 자리에 참석하는 일이 잦았다. 무선은 그것이 범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몰랐지만, 어쨌든 그를 보기만 하면 반갑게 말을 걸고 농을 걸었다. 둘 사이를 가르는 거북한 문제가 없으니 서로 낯을 굳힐 일도 없어 자연히 가까워지고 더 가까워졌다.
강징은 그렇게 익어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없이 지켜보며, 당사자들보다 더 세세하게 읽었다. 위무선이 신나게 떠들고, 남망기가 부드러운 얼굴로 듣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시렸지만 절대로 내색하지 않으며.
남망기는 그 누구보다도 무선을 위하고 지극히 사랑했다. 모두가 그를 적으로 돌렸을 때-그 중에는 강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편에 서서 지켰다.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무선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하니, 강징은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밀어줄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뜬 위무선이 강징의 눈치를 살피며 며칠간의 휴일을 요구하는 날이 왔다. 빠진 수업은 다녀온 후에 보충하겠다며 한 발 넘겨짚는 애교까지 떠는 무선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징은 의외로 순순하게 허락해 주었다.
위무선은 강징이 무척 빡빡하게 제 일정에 간섭하는 걸 알기에 웬일인가 싶어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무척 들뜬 채 고소로 떠났다.
말을 달려 운심부지처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남망기가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무선은 온종일 제게 시간을 다 비워놓고 맞춰주는 남망기와 다니며 밀려 있던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강징을 중심으로 연화오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변화에 대한 얘기였다. 말수가 없고 고요하게 듣기만 하는 남망기에게 무선은 온가 사람들을 탈취해 올 때의 강징의 태도까지 맛깔나게 들려주었고, 온가 사람들이 연화호 근처에 살게 된 얘기며 온정이 얼마나 무서운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지 지껄이다가는 어디로 뻗어도 닿을 수밖에 없는 강징의 화제로 돌아오곤 했다.
무선은 좀처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남망기를 만나 전시에 쌓였던 회포까지 다 풀고, 천자소를 실컷 마시고 온종일 느긋하게 뒹굴고 있으려니 무척 즐거웠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얘깃거리가 다 하지 않아 계속 떠들다 또 강징의 수완을 자랑하기 시작한 무선의 머리에 문득 실제의 강징이 떠올랐다.
간만에 연화오에서 떨어진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기쁨에 들떠서 몰랐는데 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왠지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징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던 것 같았다. 제가 너무 기뻐 부리나케 떠나오느라고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밤 무선은 잠을 자려고 누운 후에도 자꾸만 눈이 떠졌다.
밑도끝도 없이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강징에게 진짜 가족이라곤 저와 사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마저 난릉으로 떠나버린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때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강징은 정말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무선은 생각했다. 그러면 그 때 강징은 저렇게 쓸쓸한 모습으로 남겨지는 걸까.
위무선은 왜 이렇게 주책없이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건지, 정말로 재수가 없어지겠다고 그만두자 싶으면서도 몸을 뒤척거리며 자꾸 마음이 어지러웠다.
새로운 수사들도 제법 수행이 깊어졌고 기강도 잡혔고, 더는 돈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사람들도 하나같이 강징에게 충성스러운데, 그런 그가 대체 왜 위태로워 보인다는 것일까. 영문을 몰랐다.
왠지 강징은 영원히 그런 상태에 머무를 거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비상한 솜씨로 가문을 이끌어가는 노련미에 저조차도 그에게 존경심을 가질 정도인데.
그와 다르게 가끔씩 강징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어린애의 허전한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언뜻 언뜻 스쳐가는 그런 느낌들을 그와 가까이 있을 땐 잘못 보았겠거니,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흘려버렸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그런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오히려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역시 양친을 포함해 주변 사람을 다 잃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을만치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리고 아픈 상처를 남모르게 숨기는 건 정말로 강징다운 일이라서 무선은 생각할수록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연화오를 떠나올 때 무선은 꼭 일주일을 약속했다. 물론 길면 길수록 좋았겠지만 어느새 그에게도 제자들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지라 스스로 타협한 숫자였다.
그렇지만 한 번 마음자리가 사나워진 무선은 꾹 참고 모처럼의 휴가를 즐겨 보려 해도 만 하루가 더 지나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남망기에게 이틀 가량 이른 작별을 고한 무선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말을 달려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급하여 이번 딱 한 번만 어검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바심을 쳤다.
연화오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말고삐를 하인에게 던져 버리고 대문간을 넘어온 무선은 내내 그의 걱정을 해서였는지, 강징과 맞닥뜨린 첫순간 그의 얼굴에 기묘한 떨림이 스치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에 무선은 내내 불안하게 스멀거리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강징! 하고 반가운 웃음을 꾸미며 다가오는 무선을 보는 강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단순한 반가움도, 애물단지가 돌아왔구나 하는 정겨운 눈총도 아니었다. 마치 사람이 악몽에서 깨어나며 현실과 마주했을 때 떠올리는 공포심과 안도감이 뒤섞인 듯 병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게다가 강징이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린 듯 곧장 낯빛을 고치자 무선은 더욱 불안했다.
“뭣하러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계획성이라곤 없는 녀석 같으니.”
강징이 저답게 톡 쏘는 소리까지도 잊지 않건만, 그러는 강징을 똑같이 속이는 웃음을 짓는 무선의 가슴은 막연한 의심으로 숨을 쉬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다시 연화오의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이후로 무선은 더이상 강징이 멀쩡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무리를 하고 있고,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다고. 여전히 밝게 웃고 떠들고 놀리며 그와 어울리면서도 이따금씩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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