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다


어나더




황제가 칼까지 들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했던 발정기가 끝나고 돌아오자 비빈들은 하나같이 몰려들어서
황후 마마 몸을 보살피느라 정신 없었겠지

사실 대만이 튼튼하고 영걸단이 지키고 있긴하지만 나름 제 몸하나는 지킬 수 있게 무예도 배웠고...
일단은 남성이고 키도 크고 이런데 가녀린 비빈들이 황후 마마 기력 보존해야 한다면서 
서로 귀한 것들 진상해 오는 바람에 혼자 먹기 미안하단 이유로 매일이나 다름없이 다과회가 열리게 됐지

대개 이런 다과회에선 후궁의 암투...
서로의 집안 자랑 혹은 출세를 위한 견제가 포함되는데 황후 마마 옥체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런 것도 없어
다만 집안에서 보내올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 없는 비빈들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지게 되겠지

그러다 하루는 붕팔소의가 가져온 차로 다과회를 열게됐어
아버지께서 보내온 것인데 지금 이 시기가 딱 향이 그윽하고 좋다나 뭐라나,
대만이 집은 수도이긴 하지만 좋은 집안에서 좋은 물건들 어릴 때부터 보고 맛봐서 잘 구별하거든
그 덕분에 태섭이가 잘 못하고 껄끄러워하는 외교 업무도 대신 맡을 만큼

대만이는 오랜만에 보는 붕팔 소의한테 그간 잘 지냈냐며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데
황후 마마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는 것에 기쁜 붕팔 소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이 직접 기미까지 하며 차를 돌렸어
다같이 다식에 곁들여 차를 마시려는데 당연히 황후 마마가 먼저 들고 비빈들이 따라마시겠지

그런데 붕팔 소의가 자신의 차를 마시는 순간 놀라서 황후 마마의 찻잔을 내치는 건 물론이고 막 삼킨 차를 토해내라며 
귀한 옥체를 마구 때리는 거야
당연히 난리가 났지

황후 마마의 차에 독이 들어 있데
두 말할 것도 없이 다과회는 엉망이 되고 의원들은 달려와서 황후 마마의 옥체를 살피고 기미 역을 했던 시중들은 붙잡혀갔지
얼마 삼키지 않은데다 독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약과 독 사이에 있는 것이라 문제는 없다지만 
이유가 뭐가 됐던 황후가 마시는 차에 독을 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난리가 났어

특히 기미역을 맡은 시중들은 옥에 끌려가서 추궁에 추궁을 당했지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황후를 독살하고자 하는, 혹은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돌고돌아 범인을 잡아보니 붕팔 소의야
다과회에 곁들일 차와 다식을 준비한 붕팔 소의.

태섭이는 당연히 눈 돌아갔지
약과 독의 사이라 하더라도 만약 대만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대만이를 구해주었다 생각한 게 사실은 독을 준비한 장본인이라고?

태섭이는 친히 붕팔 소의를 심문하겠다 했고,
그 자리에는 이게 선례이자 본보기라는 듯 모든 비빈들이 둘러앉았어
귀한 집 자식들인 비빈들의 눈에는 매개한 살 타는 냄사, 차갑기 짝이 없는 돌바닥과 거기서 나오는 냉기 그리고 핏자국에 사시나무처럼 떨었지

송태섭, 갑작스럽게 황제에 오른 이가 한 번 물면 목이 떨어질 때까지 놓질 않는다는 인간인 줄 알았지만 이럴 줄 몰랐을 거야
대개 이런 자리에선 몸이 안 좋다거나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 자리를 빠져나가는 건 어느정도 용서가 됐는데
황제는 비빈들이 실신하건 무엇하건 무조건 자리에 앉아 붕팔 소의의 끝을 보라고 했어
이건 일종의 경고였지

황후의 자리를 노리거나 황후를 노리면 니들이 다음은 저 꼴이 될 거라고
붕팔 소의는 목숨만 겨우 달랑달랑 매달린 꼴이었지
고문 당하고 얻어맞아 엉망이었어

황후를 독살하려는 죄이니 삼족이뭐야 구족이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으니까
대만이는 황제의 곁에 앉아 돌바닥에 엎드린, 서있지도 못하는 붕팔 소의를 말없이 볼 뿐이었어
뭐라도 말이라도 걸어주면 이 분위기가 조금은 온화해질지도, 태섭이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살기가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가만히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지

황제는 붕팔 소의에게 어째서 황후의 차에 독을 타려 했냐 물었고, 황후의 자리가 탐났냐 소리질렀지
하지만 붕팔 소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런 게 아니라고 빌고 또 빌었어

자신은 그저 황후 마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다른 비빈들은 값비싼 차와 다식과 과일을 가져오는데 자신은 황후 마마를 기쁘게 해 드릴 것도 옥체에 도움이 될만한 것도 드리지 못하니
황후 마마의 곁에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게 되어 너무 슬펐다고.

그 독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데.
자신이 아프고 다치면, 황후 마마께서 관심을 주실까, 나를 돌봐주실까 해서
황후 마마를 해하려고 싶은 마음은 처음 뵈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런 몸이 되어도 하나 없다고

다른 비빈들처럼 좋은 과일과 차를 가져와 황후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지 못한 부러움에 황후 마마의 자애로움에 빌붙어 보기 위해서, 저를 한 번이라도 더 봐주셨으면 해서 그랬던 것 뿐입니다
그 독은 저를 위한 것이지 절대 황후 마마를 해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리를 낼 때마다 갈라진 목에서 피가 튀어나왔고 비빈들은 그 모습에 자신의 몸이 다 떨리는 걸 느꼈지만
황제가 저 앞에 든 칼을 자신이 쥐고 목을 칠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붕팔 소의가 황후 마마에게 빌고 또 비는 걸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어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보다 황후 마마께 미움받고 오해받는 게 더 두려워하는 모습에 태섭이는 어이가 없었지만 죄는 죄야
붕팔 소의 본인은 물론이고 황후를 해하려 한 죄를 물어 가족과 친척, 그 집안을 죄다 파내고 목을 치라고
미리 준비한 것처럼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
지금껏 가만히 있던 황후 마마께서 자리에 일어나 돌계단을 아래로 내려왔어
그리고는 계단을 다 내려와 황제께 머리를 숙였지

붕팔 소의의 죄를 물으신다면 제 죄도 같이 물으셔야 할 겁니다
차분한 황후 마마의 말에 붕팔 소의는 물론이고 비빈들 그리고 무엇보다 송태섭이 제일 놀랐지
무슨 죄.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무슨 죄냐고

내명부를 관리해야 하는 황후의 입장으로서 비빈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죄, 함께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둘은 대개 이야기를 나눌 때면 편하게 했는데 대만이는 높임말을 쓰고 있었지
그건 송태섭에게 정대만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황후가 황제에게 고한다는 의미였어

그걸 알고 있는 태섭이라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이건 안 되는 일이야
정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어
본보기를 보여야 할 때라고
당신의 곁을 맴돌며 황후 자리를 탐내려는 놈들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황후는 자리로 돌아가라. 황후를 독살하려고 한 죄는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황제께선 이 자리에 있는 비빈들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
비와 빈 그리고 소의와 숙의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계시느냐 물었습니다

...
이 자리에 있는 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후궁에 들어온 데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고 그들도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1년에 한 번도 볼 수 없는 가족의 얼굴을 참고 저 벽 너머로는 갈 수 없는 현실을 알고 견디고 있지요.
이들이 기댈 곳은 저와 지아비이신 황제 폐하밖에 없는데 폐하께선 이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이들이 기댈 곳은 저밖에 없는데 제가 공평하게 돌보지 못해 외로움이 턱을 넘어서서 발생한 일. 그것이 어찌 소의 하나의 잘못입니까
그러니 소의를 벌하시려거든 공평하게 정을 주지 않은 제 잘못도 함께 벌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까지 함께 벌하라며 황제의 앞에,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는 황후의 모습에 붕팔 소의는 물론 둘러앉은 비빈들까지 놀라 어쩔 줄 몰라했지
하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따르는 황후 마마가 관심을 받고 싶어,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고 싶어 일을 벌인 소의를 감싸고 있잖아?
게다가 자리에는 소의와 비슷한 사정이라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많았어
집안이 잘나지 못해서, 황후 마마에게 드릴 것이 없어서 저 다과회에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그들이 먼저 돌계단 아래로 내려와 황후 마마를 따라 무릎을 꿇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나머지 비빈들도 따라와 무릎을 꿇으며 황후 마마를 벌하지 말아달라 애원했지
후궁의 꽃들이 하나같이 고운 자태를 버리고 돌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나름의 장관이었지만 태섭이는 이를 갈 뿐이었어

나는 당신을 위해 본보기를 보이려고 했는데 당신이 그 아이의 편을 들면 어떡하냐고.
갑갑했지만 대만이를 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구족을 멸하는 일은 없었고 붕팔 소의는 폐위되어 가족들을 만나지도,
대만이를 만나지도 못하는 어딘가에 갇히게 된 것으로 끝났지

나 때문에 화나서 안 올줄 알았는데
화가 나니까 더 와야죠

황후의 침전에 찾아온 태섭이는 모두가 물러나고 대만이와 둘이 되자마자 바닥이 꺼져라 한숨부터 쉬었어
대만이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별 다른 말없이 제 품에 안겨있는 뺨을 살살 만지기만 했지


나 놀라게 좀 하지 말아요. 내가 소식 전해듣고 얼마나...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소의가 자신이 마시려던 차가 내 것과 바뀐 걸 알아차리고 바로 쳐내서 아무 문제 없는 거야. 그건 고마워 해야지

그놈의 다과회 안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내 말 못들으셨습니까 폐하 이 자식아. 내가 공평하게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 게 죄라고

그게 왜 죄냐고. 관심 좀 덜받았다고 눈 돌아가서 자해 공갈을 하려는 게 죄지
내가 다른 아이에게 찾아가라 했다고 발정기까지 혼자 칼들고 버티려고 했던 게 누구더라?

그게 자해 공갈이라고?
도움 없이 발정기 보내겠다 칼 들고 침소에 박힌 게 자해 공갈이 아니면 뭔데

알았어요. 알았는데...
그리고 애들 겁 좀 그만 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곳에 불러앉히는 건...

아무리 황후가 격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이건 못물려
...

게다가 어차피 미움 받는 역할은 난데 이거 잘 이용해야지
너 그러다 애들한테 칼 맞는 수가 있어

황후께서 칼 맞는 거보단 낫지요
말은 잘한다. 후사 없이 돌아가시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그러게 후사...후사. 왜 안 생길까...?
태섭이는 혼잣말처럼 대만이의 아랫배를 주무르다 고개를 들이밀고 배에 입을 맞췄어
옷을 입고 있는지라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파묻은 게 꼭.

너는 이런 날에도 하고 싶냐
오늘은 안 할거야. 마음도 별로 일테고...폐위한 것도 마음에 안 들잖아요. 안 그래?

...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손만 잡고 자요. 따로 자는 건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 돼

몇 시진 전에는 애들 다 모아두고 협박한 주제에 약한 척은. 약한 척은 내가 해야지
애들 앞에서 황제에게 "이거 다 니 잘못아니냐" 했으면서 약한 척은 무슨 약한 척이에요. 황제한테 니가 잘못했잖아 할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덕분인지 때문인지 그 날은 둘다 손만 잡고 얌전히 잠들었고,
이 일로 후궁이 시끄러워져서 대만이가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태섭이었지만
역으로 황후 마마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아끼고 보살피는지 알게되어 비빈들에게 인기가 더 높아졌겠지

황제는 수틀리면 지들 죽일 거다 협박하는데,
그 앞에서 황제에게 대놓고 얘들 벌할거면 나부터 하라는 황후?
최고죠
따봉

인기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황후 마마 보고싶다


태섭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