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 아마미야 료이치로 기억 안 나요?"

키스가 길었던 덕분에 얼굴에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채 어딘가 몽롱한 표정으로 노부의 어깨에 기대 있던 케이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노부를 바라봤다.

"기억 안 나냐고? 기억난다니까? 만났다고 했잖아."
"아니, 그때 케이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썼던 가명이 아마미야 료이치로였잖아요."
"어?"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노부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그 깜빡임은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고 곧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노부를 바라봤다. 케이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그걸 왜 잊고 있었지?"

노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며 케이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원래는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그때 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선전국에서... 소라랑 같이 일한 애 있었잖아. 우리보다 어리고. 그럼 그건 누구야?"

역시. 그때 선전국을 이끌던 건 고토와 미야무라였다. 고토는 어째서인지 케이에게 자신의 기억을 아마미야 료이치로로 바꿔놓은 모양이었다. 특별히 동생이란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그 기억은 완전히 지운 건가. 

이미 잊은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수차례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실신한 경험이 있는 노부는 억지로 케이에게 고토의 기억을 일깨우려고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물었다. 

"혹시 이전 생에서의 저나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미야무라 선배나 쿠로사와 선배 같은 사람들 말이에요. 단풍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동시에 다시 만난 것을 수상하게 여긴 적 없어요? 진지하게 의문을 갖지 않더라도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고보니까 우리 그때 혁명 주동자들이랑 이름이 다 똑같네, 재미있다. 이런 정도라도요."
"응. 나도 그게 이상했는데. 다들 물어봐도 그때와 같은 학문을 전공하고, 같은 이름의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말을 꺼내기 전에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 흥미로울 만한 상황인데도. 전혀 관심이 없었어. 내가 상기시켜줘도 그냥 오, 그러네? 하고 말던데."

그럼 케이와 노부의 인생에 깊게 개입해서 마구 흔들고 있는 이가 모두를 세트로 묶어서 한꺼번에 환생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의문을 갖지 않도록 여러 사람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야? 케이에게선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지우고? 이렇게 대규모로 여러 사람의 인생을 움직이는 일을 고토 타다오미 혼자서 다 했다고? 정말로?

노부가 지금까지 한 추론이 정말 맞는 건지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그래서 더더욱 품 안의 케이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타다오미가 벌인 일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 혹은 어떤 존재가 개입한 것이든, 따뜻한 체온을 지닌 케이를 다시는 잃을 수 없었으니까. 여러 사람을 환생시키고 있는 이가 누구든, 그게 누구든 만약에 나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케이를 다시 뺏아갈 수 없도록 노부는 케이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이젠 절대로 잃지 않아.





미야무라가 '슌짱'이랑 같이 온다고 했기 때문에 노부는 기숙사에서 미야무라를 기다리지 않고 케이와 같이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케이가 옛날 기억을 떠올린 뒤로는 닭고기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은 노부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다행히 케이의 어머니와 외조모님 모두,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황제가 아닌 케이의 아버지도 건강하게 살아 계신다고는 하지만 닭고기 요리를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그때 일이 떠올라서 못 먹겠다고 했다. 그래서 케이가 즐겨 찾는다는 다른 단골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함께 내려가는데...

노부는 노부의 7번의 죽음이 케이에게 남긴 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케이는 절대로 노부가 도로 쪽에 서게 하지 않았고,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항상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가 맞은편이나 뒤에서 사람이 오면 노부를 그 사람과 반대쪽으로 보냈다. 걸어가다가 공사장이 나오면 노부를 끌고 빙 돌아서 갔다. 

교통사고에 공사장 붕괴사고 거기다 길가에서 갑자기 흉기를 휘두른 사람까지 있었나. 정말 가지가지했구나. 케이가 왜 긴장을 풀 수 없는지 알기에 일부러 말을 걸어서 케이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이건 아마도 왜 케이와 노부가, 그리고 친구들이 반복되는 상황에 갇혔는지 알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게 뻔해서 노부는 그저 케이의 손을 꽉 잡고 케이와 같이 주변을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위기를 한 번 벗어났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불어 노부는 케이가 이번 생에서 왜 다시 만난 노부에게 냉랭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케이는 이전에도 노부에게 거리를 둔 적이 있기는 했었다고 했다. 이번 생 바로 직전과 그 전의 생에서. 혹시라도 노부가 케이와 얽히지 않으면 노부가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나 직전의 삶에서 노부는 케이가 계속 밀어내는데도 눈치없이 계속 케이를 쫓아다닌 모양이고. 대학가에서 벌어진 어떤 미친놈의 묻지마 흉기 난동에 휘말린 케이를 대신해 칼을 맞았다고 했다. 

무작정 밀어내는 게 능사는 아니더라. 

케이는 그렇게 힘없이 말했었다. 

노부 역시 케이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케이의 공포를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케이를 다그치려고 하진 않았다. 다만, 케이가 다시 노부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없도록 함께 조심하며 걸을 뿐이었다. 그와 별도로 이 루프 아닌 루프를 끊기 위해서 고토를 찾아야 하는 건 급선무지만. 





케이에게 고토를 떠올리게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도 노부가 그랬듯이 케이도 고토의 회고록을 읽으면 고토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긴 했다. 하지만 케이에게 단풍의 기록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케이는 단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고 왜 죽었는지도 알고 있는 듯했지만. 고토의 회고록에는 케이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도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그걸 다시 케이에게 읽히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츠지무라가 나왔음에도 고토나 회고록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츠지무라도 책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몰라도, 츠지무라는 두 번째 생 이후부터 영혼이 어딘가 깨진 미야무라를 보호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듯했고, 미야무라가 있는 자리에서 굳이 미야무라가 거듭 실신할 정도로 괴로워했던 시기가 담긴 이야기를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간단히 밥만 먹고 다이와 '료이치로'가 함께 운영한다는 바로 움직이려고 할 때, 아몬과 쿠로사와가 찾아왔다. 대학가 근처의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아몬이 전날 있었던 교통사고를 조사하러 온 김에 쿠로사와를 찾아와서 쿠로사와도 케이와 노부가 교통사고에 휘말릴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찾아왔다고 했다. 

"역시 음주운전이었나요?"

노부는 이번 생에서 아몬과 마주친 건 처음이라서 정중하게 물어보자, 아몬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자가 이미 이 대학의 재학생에 대한 스토킹 혐의로 고발된 상태라 조사 중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스토킹 피해자를 납치해서 데리고 도주하려고 시도하던 중에 사고를 냈습니다."

그딴 놈의 자식 죽든가 말든가 알 바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때 차량에 스토킹 피해자도 있었다는 말이라서 케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보며 노부는 케이의 손을 붙잡고 토닥이며 서둘러 물었다. 

"그럼 피해자도 차에 있었던 거 아니에요? 무사합니까?"
"피해자는 묶어서 뒷좌석에 눕힌 채 고정해 놨었기 때문에 에어백의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뒷좌석에 고정해 둔 상태라서 튀어나가거나 앞좌석과 충돌하진 않았기 때문에 교통사고 피해는 비교적 경미합니다. 클로포포롬을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의식이 아직 혼탁한 상태인 데다가 묶여 있던 부분에 압박 부상이 있긴 하지만 큰 부상은 없습니다."
"그 자식 구속돼요?"
"네, 구속됐습니다. 납치 시도 중이었고 교통 사고를 일으킨 데다 대낮 음주운전이고 여러 모로 구속이 불가피해졌으니까요."

그 교통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이 대학 재학생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오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의 신원도 알려졌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학교가 시끌시끌하다고 했다. 가해자도 이미 스토킹을 인정하고 합의도 했기 때문에 원래는 구속까지 갈 상황은 아니었다고 했다. 게다가 스토킹 가해자인 이 녀석이 원래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편이었다고. 

쿠로사와는 격분하면서 가해자를 욕했다.

"이미 합의금까지 주고, 피해자가 졸업까지 1년이 남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졸업할 때까지는 가해자가 휴학하기로 합의도 했다는데 갑자기 마시지도 않던 술까지 마시고 급발진해서 납치했다는 거야."
"... 네?"
"정말 뭐에 씌이기라도 한 건지."

쿠로사와가 중얼거린 말에 케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쿠로사와는 케이가 어제 사고로 크게 다칠 뻔했는데 계속 사고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하지만 노부는 케이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을 때가 '뭐에 씌이기라도 한 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라는 걸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아니나다를까 쿠로사와와 아몬이 케이와 노부를 위로하고 떠난 뒤에 물어보자, 케이는 역시 늘 그런 식이었다고 했다. 이전 삶에서 노부가 사고를 당할 뻔하고 노부가 몸을 던져 케이를 구했을 때, 모든 사고나 사건이 그런 식으로 석연치 않게 벌어졌었다고. 분명히 안전점검을 마친 차량이었는데 갑자기 핸들이 크게 흔들리며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서 통제불능이 된 차량이 케이에게 돌진해 왔다거나 공사장에 잘 묶어뒀던 비계가 케이가 지나갈 때 무너졌다거나 이번 스토커처럼 주변에서 저 자식이 원래 개자식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개자식이었다고? 하고 놀랄 정도로 뜬금없이 갑자기 묻지마 범죄를 일으킨 놈한테 휘말리기도 했었다거나...

그래서 노부가 그런 느닷없는 위험에 처한 케이를 구하려다 대신 죽었다고...

"기어이 네가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계속 누군가... 아니면 뭔가가 사고를 조작하고 있는 걸까?"

노부는 멍하게 중얼거리는 케이를 다리 위에 올려앉히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얼굴에 계속 입을 맞췄다. 멍해졌던 케이가 자꾸 얼굴을 간지럽히는 노부의 입술에 결국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겨우 케이가 웃었을 때, 노부는 자신의 턱 끝에 손가락을 대고 턱을 올리며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뭐해?"
"내 얼굴 보라고요."
"네 얼굴?"
"나 너무 잘 생겨서 내 얼굴만 봐도 기분이 풀린다면서요."

케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면서 웃었지만 노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예쁘게 웃었다. 

"다행이다. 아직 내 얼굴 좋아하나 봐요?"
"진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케이가 내 얼굴을 보려고도 안 해서 나 21세기에는 안 먹히는 고전미남인가 했잖아요."

케이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노부의 얼굴을 요모조모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니야. 내 생각에는 외계인이 갑자기 지구를 침공하고 인간들을 정복해서 눈 세개 달리고 팔이 한 네다섯 개 되는 외계인의 외모가 미모의 기준이 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네 얼굴은 항상 미남으로 인정받을 얼굴이야. 걱정하지 마."
"그 정도예요?"
"응. 외계인 침공이 없다면 항상 미남일 거야."
"케이는 외계인 외모가 미모의 기준이 돼도 항상 내 얼굴을 제일 좋아할 거죠?"

케이는 대답을 해 주지 않고 헤실헤실 웃으며 쳐다보기만 했다. 

"빨리 대답해 줘요. 제일 좋아할 거죠?"
"음. 그건 좀 생각해 보자."
"바로 답해야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간지럽히자 간지럼에 약한 케이는 깔깔 웃다가 노부의 다리에서 떨어질 뻔했기 때문에 노부는 서둘러 케이를 꽉 끌어안고 계속 허리를 간지럽혔다. 케이가 항복할 때까지 간지럽히다가 눈물까지 흘리며 자지러지는 케이를 다시 꽉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생각 다 했어요?"

웃으면서 그렇게 묻자 케이는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 보니까 역시 네 얼굴이 제일 좋은 것 같아."
"얼굴만?"
"응."

얼굴만 좋다고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케이를 다시 간지럽히면서 네 얼굴뿐만이 아니라 다 좋다고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 노부는 한참 웃어서 얼굴에 다시 혈색이 발그레해진 케이의 손을 잡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루베와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같이 운영한다는 바로 갈 생각이었다. 떡하니 그때 그 혁명단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있지만 원래라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마미야 료이치로가 있다는 바로 그 bar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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