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78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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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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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체주의 그냥다주의
PTSD주의
로건은 눈을 떴다. 눈앞에는 자비에 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그는 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저택의 문을 열었을 때, 로비는 예상 밖의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고요함이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이 내뿜는 긴장이 그의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비를 훑었다. 머리 위로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먼지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부츠가 닿을 때마다 둔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쪽 벽에는 자비에 교수와 제자들,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자리를 비우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은 것을 보며 로건은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무심코 입으로 가져갔다.
“학교를 오래 비워서 잊었나보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계단 위로 향했다. 스톰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흰 머리칼은 기억과 달리, 짧아져 있었다. 로건은 물었던 시가를 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스톰.”
”교내 금연이야.“
”인사부터 해 줘.“
둘은 마치 며칠 전에 본 듯이 가볍게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야, 로건.“
스톰은 몸을 떼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건은 미소로 응답했다.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돌아올 이유가 생겼더군. 바깥이 뒤숭숭하던데. 학교는 어때?”
“마찬가지야. 마침 잘 됐어. 학교에 베이비시터가 필요하거든.“
미스틱의 혁명 이후 뮤턴트 사회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뮤턴트의 존재가 일찌감치 알려지면서 그들을 위한 단체도 세워지고 인권 운동도 많아졌지만, 반작용으로 뮤턴트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행크는 뮤턴트 단체의 대표로서 자비에를 대신하여 대외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비에는 능력이 밝혀지면 너무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비에보다 더 “뮤턴트”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행크에 대한 총기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크게 보도가 되었다. 대중들의 예상과 다르게 범인은 인간이 아니라 뮤턴트였다. 자비에 교수는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매그니토를 찾아가려 했다. 여러 모로 혼란스러울 때, 로건이 돌아왔다.
스톰은 그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진과 함께 범인을 추적하고, 스콧은 자비에 교수님을 경호할 예정이야.”
“그렇군…. 찰스와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자비에 교수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그의 모습에 스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는 교수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 새삼스럽게 그의 젊은 얼굴에 위화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이따가 말할게.”
로건은 찰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찰스는 그의 방문을 예상한 것처럼 태연하게 반겼다.
“오랜만이군, 로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상황이 좀 복잡해져서.”
“어떤 일이 있었나?”
“교수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스트라이커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사라진 돌연변이의 주변을 수소문하고, 추적해보니 공통점이 보이더군요.”
이 넓은 대륙에는 외진 곳도, 버려진 곳도 너무 많았다. 그런 곳들을 뒤지고 다닌 결과, 아주 큰 소득은 없었지만 적어도 뮤턴트를 노리는 단체가 있다는 낌새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자식,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느낌이었어요.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곳들도 가봤는데, 알카리 지역의 오래된 댐 말고는……. 의심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역시…….”
“다만 걱정되는 건, 최근의 일들로 이 학교의 위치가 너무 정확하게 노출되었다는 거예요.”
“스트라이커가 좋은 먹이 창고를 찾았다는 의미인가?”
“그가 교수님을 모를 리 없어요. 분명 자리를 비우시면 아이들이 위험할 겁니다.”
자비에의 푸른 눈이 천천히 깊고 어둡게 잠겼다. 좋지 않은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들이닥치기 마련이었다.
자비에 교수는 교사들을 불러들였다.
자비에의 호출에 따라 교사들이 서둘러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서 로건은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자꾸만 발밑으로 차오르는 걱정과 두려움을 무심한 표정 안에 감추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스콧이 들어섰다. 단정한 셔츠와 정장 바지를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서늘했다. 로건은 문득 눈을 들어 스콧을 보았다. 마주친 눈길에 어깨 위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스콧의 단단하게 굳은 얼굴 위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로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확인하려는 듯 날카로웠다. 로건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지만, 스콧의 입술 끝에 걸린 작은 미소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둘 사이의 공기는 팽팽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고도 애써 외면하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스콧은 눈앞의 로건을 보며 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공기, 어두운 방, 그에게서 느껴지던 야생적이면서도 따뜻한 체온. 그런 것들이 짧은 순간 온몸을 스쳐지나갔다.
스콧은 덮쳐오는 기억을 힘겹게 밀어내며 시선을 거두었다. 로건에게도 아직까지 그 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날이 서 있었다.
로건은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말은 짧고 묵직했다. 로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눈을 돌렸다. 회의가 시작되며, 자비에 교수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자 주의는 금방 다른 곳으로 집중되었다. 다만 조용히, 그 기억의 그림자는 불안한 마음속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었다.
로건은 자신이 여태 뮤턴트 생체 실험 단체를 조사하고 있었으며, 스트라이커, 그가 죽지 않았고 또 야망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는 단서를 찾고 흔적을 찾아다녔음을 알렸다.
“아이들이 위험해요.”
“설마 이곳을 공격하겠어?”
“이곳은 가장 큰 뮤턴트 사립학교야.”
“영재학교로 포장되어 있잖아.”
“그래, 아이들이 문서상 뮤턴트라고 증명될 어떤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더 위험하지.”
한 마디씩 주고받는 스톰과 스콧에게 로건이 말을 던졌다.
“중요한 것은 교수님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거야.”
그는 자비에가 떠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매그니토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비에뿐이었다.
깊이 고민하던 자비에는 스콧에게 학교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교장이 없을 때 학생들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면 행크 다음으로 스콧이었다. 공식적인 엑스맨의 리더였으니 그에게 학교를 맡기고 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교수님의 경호는 제가 맡아야 하나요?”
로건의 말에 진과 스톰 사이에서 눈빛이 오갔다.
“에릭을 만나러 가는 건데, 괜찮나?”
“도움이 되지 않을걸.”
스톰이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력을 다루는 매그니토에게 로건은 맞춤형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교수님 엄호는 진과 내가 할 테니, 너는 학교를 지켜.”
“그럼 암살 용의자 추적은?”
“며칠 미룰 수밖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니 당분간 몸을 사리겠죠.”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딘가 불안했지만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이들을 기숙사에 재운 후, 자비에와 진, 스톰은 운동장 밑에 숨겨져있던 제트기를 타고 몰래 학교를 나섰다. 그들을 태운 제트기를 보내고 나서야 로건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 말을 안 했었어요?”
“뭘?”
서두를 자르고 물어오는 스콧의 질문에 로건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학교를 떠나는지요. 그런 일을 하러 가는 거면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서.”
“그건 내 일이잖아.”
“…….”
또 일부러 선을 긋는 중이다. 스콧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아니었다. 같은 시간이라도 그 무게와 속도는 나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로건에게 3년은 어떻게 흘렀는지 예상할 수 없으나, 스콧에게 그 시간은 더디고 다채로웠다. 그도 자신이 없는 학교에서 그의 빈자리만을 느끼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스콧을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아요. 말을 해줄 이유는 없죠.”
“너, 또 멋대로 생각하지?”
“뭘요?”
로건은 가볍게 받아쳐진 말을 되넘기지 못했다. 그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이 스콧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아쉽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어요.”
학교 경비 시스템을 점검해야하거든요. 스콧의 말에 로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콧의 뒷모습을 보며 흘러버린 시간을 느꼈다.
그 역시 아직 그 고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를 떠나 스콧을 떠올릴 때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무력해지는 자신을 계속 건져냈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케일라의 죽음뿐 아니라, 그는 몇 번의 큰 전쟁을 거치며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속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명확히는 자신과 유일한 혈육이었던 빅터만이.
그의 뮤테이션은 한없이 이기적이었다. 자신만을 되살리는 몸은 처음 그 능력을 드러낼 때부터 누군가를 죽였다. 네 곁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는다는 에이션트 제로의 말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뼈에 새겨진 듯하였다.
로건은 스콧을 불러세우려다 그만두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많은 세월을 지나 온 로건에게는 찰나이지만 스콧에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감정도 흘려보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추억 중 하나로 남고 싶었다.
“잡지 않네요?”
“아, 깜짝이야.”
로건은 뒤의 어깨너머로 다가온 목소리에 소스라치며 돌아보았다.
“서운해요.”
“…….”
“그런데 어떻게 제가 다가오는 걸 눈치를 못 챈 거죠? 당신이.”
스콧은 로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목에서 은은한 체향이 느껴졌다. 그는 오래 전, 로건의 방에서 맡았던 그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건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내려다 자신의 손목을 잡는 악력이 예상보다 강하여 내심 당황하였다. 로건은 자신의 섣부른 오만함을 탓했다. 이 자식은 아직 마음을 접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이에요?”
“무례함이 늘었군.”
“당신에게 배웠죠.”
“…아직 아니야.”
“곧이라는 말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해.”
로건은 질린 듯 스콧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스콧은 순순히 밀려났다. 대신 정면을 똑바로 그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 거죠?”
“뭐가?”
“당신과 나요.”
“방금 누가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감상 따위가 아닌데요, 이건.”
“…….”
로건은 미간을 찌푸린 채 스콧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콧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렸어요, 로건”
“…….”
로건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다시 스콧을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짧게 중얼거렸다.
“내 답은 그때 줬어.”
로건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스콧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더 단호하게,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로건은 스콧의 눈을 피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얇은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왔다. 붉은 빛은 수십 프레임으로 그 움직임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기다릴 거예요.”
“마음대로 해.”
로건은 그가 원하는 대답 대신,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안타깝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어.”
그리고 두 사람에겐 정말 그렇게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자비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구름이 잔뜩 껴 달빛도 비치지 않는 밤에 방독면을 쓴 정예부대가 소리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학교 안팎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로건 덕에 빠르게 경보음을 울려 학생들을 깨울 수 있었다. 스콧은 아이들을 학교 내 대피로로 안내했고 로건은 아이들을 생포해가려는 이들의 가슴을 클로로 꿰뚫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콜로서스가 어린 아이들을 인솔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대피시키는 사이, 군인의 어깨에 발톱 구멍을 낸 로건의 등 뒤로 익숙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제임스?”
“…….”
목소리가 마치 어떤 신호라도 된 듯이, 로건의 주먹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는 손끝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스트라이커였다.
로건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뇌를 관통하는 고통에 주저앉아버렸다.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발바닥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이런, 불쌍한 지미.”
“스…스트라이커….”
로건은 양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그의 눈꺼풀과 볼이 사정없이 떨리며 학습된 고통과 두려움을 주입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벌벌 떨리며 손등 사이에서 클로가 튀어나왔다. 클로가 이마를 스치며 상처를 냈지만 금세 아물었다.
“나를 보면 손톱을 세우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스트라이커는 여유를 부리며 로건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기며 어떻게든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로건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나는 어떤가? 좀 많이 변했는데.”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다만티움으로 묵직한 몸이 순순히 위로 따라왔다. 로건은 스트라이커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뺨에 소형 대거의 끝을 대고 긁어내렸다. 살은 피가 맺힘과 동시에 아물어갔다. 스트라이커는 그 모습을 태연히 감상하였다. 그는 마치 승자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로건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완전히 굳어버려 꼼짝하지 못하였다. 스트라이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로건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로건의 감기지 못한 눈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켜보던 대원이 눈치를 보다가 스트라이커를 불렀다.
“대령님.”
“재촉하지 마, 이 짐승도 전리품이라고.”
스트라이커는 그렇게 말하며 로건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발로 밟았다. 로건은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챙겨.”
스트라이커는 고갯짓으로 로건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대원 중 하나가 저항 의지를 잃은 로건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그가 붉은 빔에 맞아 날아갔다. 순식간에 한 명 한 명이 조준 당하며 배와 가슴이 꿰뚫렸다. 붉은 광선은 빠르고 정확했다. 스트라이커는 초토화된 주변을 보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과거에 자신이 수집했었던 돌연변이 중 하나를. 그는 분명히 불리한 상황인데도 두려운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눈앞의 돌연변이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멀리서 걸어오는 붉은 눈의 괴물에게 말했다.
“그 망할 레이저를 쏘는 순간 나도 이 방아쇠를 당길 거다.”
스트라이커의 얼굴을 모르는 스콧은 비웃음을 흘리며 바이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다만티움 총알이야”
덧붙인 한 마디에 스콧의 손끝이 멈췄다.
“아주 예전에 이 머리에 쏘아버리려다가 실패했었지.”
그 순간 여유를 부리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손에서 총을 떨어뜨렸다. 핏기를 잃고 창백해지던 스트라이커는 이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의 주변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스콧은 순간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서 꾸물거리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로그?”
그녀의 숨은 가쁘게 몰아쉬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다른 장갑을 꼭 쥐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하얀 손끝이 그녀의 긴장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콧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로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들려오는 익숙한 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로건.”
피와 먼지로 얼룩진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스콧은 황급히 달려가 로건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요, 로건?”
로그의 가냘픈 음성에 로건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며 천천히 떠졌다. 스콧이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하며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희미한 시선으로 스콧을 바라보며 낮게 내뱉었다.
“…고마워.”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퉁명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스콧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로건은 한쪽 팔에 힘을 주어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난 괜찮아. 이 꼬맹이 덕에.”
로건은 로그를 흘긋 보며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상황의 긴장감을 일깨워주었다. 스콧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어서 가요. 아이들은 제트기를 타고 있을 거예요.”
로건은 여전히 몸에 힘이 덜 들어간 듯했지만,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으며 스콧의 손을 뿌리쳤다.
“걸을 수 있어.”
스콧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지만, 말다툼을 할 시간은 없었다. 로그는 두 사람을 따라나서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늙은 남자의 고통이 담긴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달렸다.
어디선가 부서진 조각과 먼지가 흩날리며, 싸움의 흔적만이 복도에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탑승한 비행정에 오른 로건은 그때서야 제대로 된 숨을 쉬었다. 스콧은 그를 콜로서스에게 잠시 맡기고 조종석으로 가서 바로 비행정을 띄웠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 몇몇이 조심스럽게 로건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디. 로건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상기했다. 아이들에게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태연한 척 아이들을 물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트라이커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추적했던 것이 그의 흔적이었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여정이었는데, 거기다 그가 언젠가 이 학교가 노려질 것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대비했던 모든 것들이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옛 이름 한 마디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이, 허탈했다.
거기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비에까지 설득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학교에 와서 오랜만에 보여준 모습이 나약한 모습이라니.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로건은 속으로 자학을 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스콧의 옆으로 갔다. 로건은 축축한 손바닥으로 이마를 닦은 후 조종석으로 가는 문의 버튼을 눌렀다. 그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얼마나 탄 거지? 타지 못한 아이들은 없나?”
“미처 구하지 못한 아이가 8명 정도 돼요.”
“이런…….”
“좀 더 쉬어요, 로건.”
“그럴 시간도, 자격도 없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못했어요.”
스콧이 그렇게 말하며 로건을 살짝 돌아봤다. 로건은 조종석 의자등받이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로건.”
“왜.”
“비행이 무서워요?”
“전혀.”
무서워하는군. 스콧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있지 말고 앉는 게 좋을 거예요.”
옆에 앉으라는 스콧의 말에 로건은 조심조심 게걸음으로 기어가듯 걸어가 앉았다. 스콧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애써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보다 중요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납치된 아이들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교수님이 안 계시네요.”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해.”
로건은 지난 시간을 허투로 보낸 것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덧붙였다.
“우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지.”
그때 난기류로 인해 기체가 덜컹거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 로건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손을 뻗어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다. 그게 스콧의 손이었던 건 달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스콧의 손등 위로 그의 거친 손이 덮였다. 온기가 닿은 순간, 스콧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손가락을 웅크리며 로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로건은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스콧의 손가락이 얽혀들어가며 단단히 그를 붙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스콧의 섬세한 손길이 스며들었고, 거칠게 굳은 로건의 손은 그 안에서 미묘하게 떨렸다. 로건은 당황스러운 듯 시선을 내려 손을 쳐다보았지만, 스콧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이봐, 손 치워.”
로건이 투덜거렸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스콧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로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은 넘어지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스콧의 태연한 목소리에 로건은 말문이 막혔다. 손가락 사이로 스콧의 온기가 스며들자, 그제야 로건의 저항도 서서히 느슨해졌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못마땅함과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지만.
잠시 흘렀던 침묵을 깨고, 스콧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로건의 손을 꼭 쥐었다.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좀 잡아줘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 말에 로건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애써 손을 빼내려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힌 채, 어색하지만 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로건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클로가 튀어나오지 않게 긴장해야만 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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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로건 로건텀 맨중맨텀 엑스맨
항상 읽어줘서 고마워!!
늘어지는 부분을 빨리 넘기고싶다.
오타수정안해서 오타있을수있음
소설체주의 그냥다주의
PTSD주의
로건은 눈을 떴다. 눈앞에는 자비에 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그는 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저택의 문을 열었을 때, 로비는 예상 밖의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고요함이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이 내뿜는 긴장이 그의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비를 훑었다. 머리 위로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먼지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반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부츠가 닿을 때마다 둔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쪽 벽에는 자비에 교수와 제자들,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자리를 비우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은 것을 보며 로건은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무심코 입으로 가져갔다.
“학교를 오래 비워서 잊었나보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계단 위로 향했다. 스톰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흰 머리칼은 기억과 달리, 짧아져 있었다. 로건은 물었던 시가를 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스톰.”
”교내 금연이야.“
”인사부터 해 줘.“
둘은 마치 며칠 전에 본 듯이 가볍게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야, 로건.“
스톰은 몸을 떼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건은 미소로 응답했다.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돌아올 이유가 생겼더군. 바깥이 뒤숭숭하던데. 학교는 어때?”
“마찬가지야. 마침 잘 됐어. 학교에 베이비시터가 필요하거든.“
미스틱의 혁명 이후 뮤턴트 사회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뮤턴트의 존재가 일찌감치 알려지면서 그들을 위한 단체도 세워지고 인권 운동도 많아졌지만, 반작용으로 뮤턴트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행크는 뮤턴트 단체의 대표로서 자비에를 대신하여 대외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비에는 능력이 밝혀지면 너무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비에보다 더 “뮤턴트”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행크에 대한 총기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크게 보도가 되었다. 대중들의 예상과 다르게 범인은 인간이 아니라 뮤턴트였다. 자비에 교수는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매그니토를 찾아가려 했다. 여러 모로 혼란스러울 때, 로건이 돌아왔다.
스톰은 그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진과 함께 범인을 추적하고, 스콧은 자비에 교수님을 경호할 예정이야.”
“그렇군…. 찰스와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자비에 교수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그의 모습에 스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는 교수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 새삼스럽게 그의 젊은 얼굴에 위화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이따가 말할게.”
로건은 찰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찰스는 그의 방문을 예상한 것처럼 태연하게 반겼다.
“오랜만이군, 로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상황이 좀 복잡해져서.”
“어떤 일이 있었나?”
“교수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스트라이커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사라진 돌연변이의 주변을 수소문하고, 추적해보니 공통점이 보이더군요.”
이 넓은 대륙에는 외진 곳도, 버려진 곳도 너무 많았다. 그런 곳들을 뒤지고 다닌 결과, 아주 큰 소득은 없었지만 적어도 뮤턴트를 노리는 단체가 있다는 낌새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자식,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느낌이었어요.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곳들도 가봤는데, 알카리 지역의 오래된 댐 말고는……. 의심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역시…….”
“다만 걱정되는 건, 최근의 일들로 이 학교의 위치가 너무 정확하게 노출되었다는 거예요.”
“스트라이커가 좋은 먹이 창고를 찾았다는 의미인가?”
“그가 교수님을 모를 리 없어요. 분명 자리를 비우시면 아이들이 위험할 겁니다.”
자비에의 푸른 눈이 천천히 깊고 어둡게 잠겼다. 좋지 않은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들이닥치기 마련이었다.
자비에 교수는 교사들을 불러들였다.
자비에의 호출에 따라 교사들이 서둘러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서 로건은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자꾸만 발밑으로 차오르는 걱정과 두려움을 무심한 표정 안에 감추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스콧이 들어섰다. 단정한 셔츠와 정장 바지를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서늘했다. 로건은 문득 눈을 들어 스콧을 보았다. 마주친 눈길에 어깨 위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스콧의 단단하게 굳은 얼굴 위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로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확인하려는 듯 날카로웠다. 로건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지만, 스콧의 입술 끝에 걸린 작은 미소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둘 사이의 공기는 팽팽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미묘한 기류를 감지하고도 애써 외면하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스콧은 눈앞의 로건을 보며 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공기, 어두운 방, 그에게서 느껴지던 야생적이면서도 따뜻한 체온. 그런 것들이 짧은 순간 온몸을 스쳐지나갔다.
스콧은 덮쳐오는 기억을 힘겹게 밀어내며 시선을 거두었다. 로건에게도 아직까지 그 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날이 서 있었다.
로건은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말은 짧고 묵직했다. 로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눈을 돌렸다. 회의가 시작되며, 자비에 교수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자 주의는 금방 다른 곳으로 집중되었다. 다만 조용히, 그 기억의 그림자는 불안한 마음속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었다.
로건은 자신이 여태 뮤턴트 생체 실험 단체를 조사하고 있었으며, 스트라이커, 그가 죽지 않았고 또 야망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는 단서를 찾고 흔적을 찾아다녔음을 알렸다.
“아이들이 위험해요.”
“설마 이곳을 공격하겠어?”
“이곳은 가장 큰 뮤턴트 사립학교야.”
“영재학교로 포장되어 있잖아.”
“그래, 아이들이 문서상 뮤턴트라고 증명될 어떤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더 위험하지.”
한 마디씩 주고받는 스톰과 스콧에게 로건이 말을 던졌다.
“중요한 것은 교수님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거야.”
그는 자비에가 떠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매그니토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비에뿐이었다.
깊이 고민하던 자비에는 스콧에게 학교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교장이 없을 때 학생들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면 행크 다음으로 스콧이었다. 공식적인 엑스맨의 리더였으니 그에게 학교를 맡기고 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교수님의 경호는 제가 맡아야 하나요?”
로건의 말에 진과 스톰 사이에서 눈빛이 오갔다.
“에릭을 만나러 가는 건데, 괜찮나?”
“도움이 되지 않을걸.”
스톰이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력을 다루는 매그니토에게 로건은 맞춤형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교수님 엄호는 진과 내가 할 테니, 너는 학교를 지켜.”
“그럼 암살 용의자 추적은?”
“며칠 미룰 수밖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니 당분간 몸을 사리겠죠.”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딘가 불안했지만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이들을 기숙사에 재운 후, 자비에와 진, 스톰은 운동장 밑에 숨겨져있던 제트기를 타고 몰래 학교를 나섰다. 그들을 태운 제트기를 보내고 나서야 로건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 말을 안 했었어요?”
“뭘?”
서두를 자르고 물어오는 스콧의 질문에 로건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학교를 떠나는지요. 그런 일을 하러 가는 거면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서.”
“그건 내 일이잖아.”
“…….”
또 일부러 선을 긋는 중이다. 스콧은 그렇게 생각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젠 아니었다. 같은 시간이라도 그 무게와 속도는 나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로건에게 3년은 어떻게 흘렀는지 예상할 수 없으나, 스콧에게 그 시간은 더디고 다채로웠다. 그도 자신이 없는 학교에서 그의 빈자리만을 느끼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스콧을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아요. 말을 해줄 이유는 없죠.”
“너, 또 멋대로 생각하지?”
“뭘요?”
로건은 가볍게 받아쳐진 말을 되넘기지 못했다. 그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이 스콧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아쉽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어요.”
학교 경비 시스템을 점검해야하거든요. 스콧의 말에 로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콧의 뒷모습을 보며 흘러버린 시간을 느꼈다.
그 역시 아직 그 고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를 떠나 스콧을 떠올릴 때마다 물에 잠긴 것처럼 무력해지는 자신을 계속 건져냈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케일라의 죽음뿐 아니라, 그는 몇 번의 큰 전쟁을 거치며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속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명확히는 자신과 유일한 혈육이었던 빅터만이.
그의 뮤테이션은 한없이 이기적이었다. 자신만을 되살리는 몸은 처음 그 능력을 드러낼 때부터 누군가를 죽였다. 네 곁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는다는 에이션트 제로의 말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뼈에 새겨진 듯하였다.
로건은 스콧을 불러세우려다 그만두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많은 세월을 지나 온 로건에게는 찰나이지만 스콧에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감정도 흘려보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추억 중 하나로 남고 싶었다.
“잡지 않네요?”
“아, 깜짝이야.”
로건은 뒤의 어깨너머로 다가온 목소리에 소스라치며 돌아보았다.
“서운해요.”
“…….”
“그런데 어떻게 제가 다가오는 걸 눈치를 못 챈 거죠? 당신이.”
스콧은 로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목에서 은은한 체향이 느껴졌다. 그는 오래 전, 로건의 방에서 맡았던 그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건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내려다 자신의 손목을 잡는 악력이 예상보다 강하여 내심 당황하였다. 로건은 자신의 섣부른 오만함을 탓했다. 이 자식은 아직 마음을 접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이에요?”
“무례함이 늘었군.”
“당신에게 배웠죠.”
“…아직 아니야.”
“곧이라는 말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해.”
로건은 질린 듯 스콧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스콧은 순순히 밀려났다. 대신 정면을 똑바로 그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 거죠?”
“뭐가?”
“당신과 나요.”
“방금 누가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감상 따위가 아닌데요, 이건.”
“…….”
로건은 미간을 찌푸린 채 스콧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콧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 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렸어요, 로건”
“…….”
로건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다시 스콧을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짧게 중얼거렸다.
“내 답은 그때 줬어.”
로건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스콧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더 단호하게,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로건은 스콧의 눈을 피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얇은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왔다. 붉은 빛은 수십 프레임으로 그 움직임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기다릴 거예요.”
“마음대로 해.”
로건은 그가 원하는 대답 대신,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안타깝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어.”
그리고 두 사람에겐 정말 그렇게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자비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구름이 잔뜩 껴 달빛도 비치지 않는 밤에 방독면을 쓴 정예부대가 소리 없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학교 안팎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로건 덕에 빠르게 경보음을 울려 학생들을 깨울 수 있었다. 스콧은 아이들을 학교 내 대피로로 안내했고 로건은 아이들을 생포해가려는 이들의 가슴을 클로로 꿰뚫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콜로서스가 어린 아이들을 인솔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대피시키는 사이, 군인의 어깨에 발톱 구멍을 낸 로건의 등 뒤로 익숙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제임스?”
“…….”
목소리가 마치 어떤 신호라도 된 듯이, 로건의 주먹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는 손끝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스트라이커였다.
로건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뇌를 관통하는 고통에 주저앉아버렸다.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발바닥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이런, 불쌍한 지미.”
“스…스트라이커….”
로건은 양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그의 눈꺼풀과 볼이 사정없이 떨리며 학습된 고통과 두려움을 주입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벌벌 떨리며 손등 사이에서 클로가 튀어나왔다. 클로가 이마를 스치며 상처를 냈지만 금세 아물었다.
“나를 보면 손톱을 세우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스트라이커는 여유를 부리며 로건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기며 어떻게든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로건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나는 어떤가? 좀 많이 변했는데.”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다만티움으로 묵직한 몸이 순순히 위로 따라왔다. 로건은 스트라이커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뺨에 소형 대거의 끝을 대고 긁어내렸다. 살은 피가 맺힘과 동시에 아물어갔다. 스트라이커는 그 모습을 태연히 감상하였다. 그는 마치 승자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로건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완전히 굳어버려 꼼짝하지 못하였다. 스트라이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로건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로건의 감기지 못한 눈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켜보던 대원이 눈치를 보다가 스트라이커를 불렀다.
“대령님.”
“재촉하지 마, 이 짐승도 전리품이라고.”
스트라이커는 그렇게 말하며 로건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발로 밟았다. 로건은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챙겨.”
스트라이커는 고갯짓으로 로건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대원 중 하나가 저항 의지를 잃은 로건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그가 붉은 빔에 맞아 날아갔다. 순식간에 한 명 한 명이 조준 당하며 배와 가슴이 꿰뚫렸다. 붉은 광선은 빠르고 정확했다. 스트라이커는 초토화된 주변을 보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과거에 자신이 수집했었던 돌연변이 중 하나를. 그는 분명히 불리한 상황인데도 두려운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눈앞의 돌연변이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스트라이커는 로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멀리서 걸어오는 붉은 눈의 괴물에게 말했다.
“그 망할 레이저를 쏘는 순간 나도 이 방아쇠를 당길 거다.”
스트라이커의 얼굴을 모르는 스콧은 비웃음을 흘리며 바이저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다만티움 총알이야”
덧붙인 한 마디에 스콧의 손끝이 멈췄다.
“아주 예전에 이 머리에 쏘아버리려다가 실패했었지.”
그 순간 여유를 부리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손에서 총을 떨어뜨렸다. 핏기를 잃고 창백해지던 스트라이커는 이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의 주변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스콧은 순간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서 꾸물거리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로그?”
그녀의 숨은 가쁘게 몰아쉬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다른 장갑을 꼭 쥐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하얀 손끝이 그녀의 긴장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콧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로그를 바라보았다가, 곧 들려오는 익숙한 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로건.”
피와 먼지로 얼룩진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스콧은 황급히 달려가 로건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요, 로건?”
로그의 가냘픈 음성에 로건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며 천천히 떠졌다. 스콧이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하며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희미한 시선으로 스콧을 바라보며 낮게 내뱉었다.
“…고마워.”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퉁명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스콧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로건은 한쪽 팔에 힘을 주어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난 괜찮아. 이 꼬맹이 덕에.”
로건은 로그를 흘긋 보며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상황의 긴장감을 일깨워주었다. 스콧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어서 가요. 아이들은 제트기를 타고 있을 거예요.”
로건은 여전히 몸에 힘이 덜 들어간 듯했지만,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으며 스콧의 손을 뿌리쳤다.
“걸을 수 있어.”
스콧은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지만, 말다툼을 할 시간은 없었다. 로그는 두 사람을 따라나서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늙은 남자의 고통이 담긴 신음소리를 뒤로 하고 달렸다.
어디선가 부서진 조각과 먼지가 흩날리며, 싸움의 흔적만이 복도에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탑승한 비행정에 오른 로건은 그때서야 제대로 된 숨을 쉬었다. 스콧은 그를 콜로서스에게 잠시 맡기고 조종석으로 가서 바로 비행정을 띄웠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 몇몇이 조심스럽게 로건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디. 로건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상기했다. 아이들에게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태연한 척 아이들을 물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트라이커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추적했던 것이 그의 흔적이었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여정이었는데, 거기다 그가 언젠가 이 학교가 노려질 것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대비했던 모든 것들이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옛 이름 한 마디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이, 허탈했다.
거기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비에까지 설득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학교에 와서 오랜만에 보여준 모습이 나약한 모습이라니.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로건은 속으로 자학을 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스콧의 옆으로 갔다. 로건은 축축한 손바닥으로 이마를 닦은 후 조종석으로 가는 문의 버튼을 눌렀다. 그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얼마나 탄 거지? 타지 못한 아이들은 없나?”
“미처 구하지 못한 아이가 8명 정도 돼요.”
“이런…….”
“좀 더 쉬어요, 로건.”
“그럴 시간도, 자격도 없어.”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대피시키지 못했어요.”
스콧이 그렇게 말하며 로건을 살짝 돌아봤다. 로건은 조종석 의자등받이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로건.”
“왜.”
“비행이 무서워요?”
“전혀.”
무서워하는군. 스콧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있지 말고 앉는 게 좋을 거예요.”
옆에 앉으라는 스콧의 말에 로건은 조심조심 게걸음으로 기어가듯 걸어가 앉았다. 스콧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그는 애써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보다 중요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납치된 아이들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교수님이 안 계시네요.”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해.”
로건은 지난 시간을 허투로 보낸 것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덧붙였다.
“우선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지.”
그때 난기류로 인해 기체가 덜컹거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 로건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손을 뻗어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다. 그게 스콧의 손이었던 건 달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스콧의 손등 위로 그의 거친 손이 덮였다. 온기가 닿은 순간, 스콧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손가락을 웅크리며 로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로건은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스콧의 손가락이 얽혀들어가며 단단히 그를 붙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스콧의 섬세한 손길이 스며들었고, 거칠게 굳은 로건의 손은 그 안에서 미묘하게 떨렸다. 로건은 당황스러운 듯 시선을 내려 손을 쳐다보았지만, 스콧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이봐, 손 치워.”
로건이 투덜거렸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스콧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로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은 넘어지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스콧의 태연한 목소리에 로건은 말문이 막혔다. 손가락 사이로 스콧의 온기가 스며들자, 그제야 로건의 저항도 서서히 느슨해졌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못마땅함과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지만.
잠시 흘렀던 침묵을 깨고, 스콧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로건의 손을 꼭 쥐었다.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좀 잡아줘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 말에 로건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애써 손을 빼내려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힌 채, 어색하지만 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로건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클로가 튀어나오지 않게 긴장해야만 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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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로건 로건텀 맨중맨텀 엑스맨
항상 읽어줘서 고마워!!
늘어지는 부분을 빨리 넘기고싶다.
오타수정안해서 오타있을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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