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노부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회고록을 덮고 기억이 모두 떠오른 순간 또 다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었는데 그때 발작하다가 또 쓰러진 모양이었다. 어제 기숙사에 돌아와 회고록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환할 걸 보니 쓰러지고 시간도 꽤 흐른 모양인데. 

아직도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절망과 후회, 슬픔과 고통은 그대로였다. 그때의 일은 이미 다 지나갔고, 케이는 지금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 케이의 몸을 뒤덮고 있던 온갖 상처와 흉터들이 떠오르자 숨이 턱턱 막히고, 목에서 피가 무섭게 뿜어져 나오는데 마지막까지 노부를 향하고 있다가 결국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케이의 핏발 선 눈동자를 떠올리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무섭게 솟구치는 피를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때의 절망감과 고통, 무력함이 온몸의 피를 다 빠져나가게 하는 것 같아서 누운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헉하며 숨을 삼키는 소리와 뭔가 부산한 움직임 소리가 들리더니 눈가로 휴지 같은 게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자 미야무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지를 마구 뽑아서 노부에게 마구 쥐어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 그렇게 많이 아파? 역시 병원에 가자."

그제야 울고 있다는 걸 알아서 미야무라가 건넨 휴지로 눈가를 닦자, 휴지가 흥건하게 젖는 게 꽤 많이 운 모양이었다. 미야무라는 부산스럽게 휴지를 마구 뽑다가 휴대폰을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구급차 부를까? 구급차?"

노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미야무라를 바라보다가 또 마음이 울컥했다.

"미야무라 선배."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자꾸 쓰러져? 어디가 아픈 거야. 구급차 부르는 거 싫어? 슌짱 부를까?"

1700년대 말 그때 케이가 죽는 걸 눈앞에서 보고, 케이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알게 된 후 미야무라는 정말 저러다 눈이 멀겠다 싶을 정도로 울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할 정도로 울어서 안 그래도 마치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쿠로사와와 츠지무라가 미야무라를 챙기느라 더 진이 빠져가는 것도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 속에 잠겨서 익사해 버릴 것만 같았던 당신은 어떻게 철혈의 미야무라가 됐을까. 그렇게 되기까지 대체 당신들은 어떤 과정을 겪으며 강해져야 했던 걸까. 

"어제 외박한 거 아니었어요?"
"아침에 기숙사 문 열리자마자 들어왔어. 방에 들어왔는데 네가 바닥에 쓰려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미야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슌짱이 너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했는데 문제없었다고 일단 그냥 침대에 눕혀놓으라고 해서 그냥 침대에 눕혀놓긴 했는데,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아? 병원에 가 볼래?"

그러고보니까 그때도 츠지무라와 미야무라는 친해서 늘 붙어다녔었다. 둘 다 만인에게 다정한 사람이라 두루두루 친한 사람은 많았어도 둘은 남들보다 유독 가까운 사이라는 게 티가 났다. 처음에만 해도 미야무라는 죽마고우인 아몬이나 쿠로사와와 내내 함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츠지무라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다고 쿠로사와나 아몬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그때와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도 여전한 것들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마음이 복잡해진 노부가 대답없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미야무라가 전전긍긍하며 노부를 말리려고 했다. 

아직도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지만, 일어나야 했다. 

노부는 또 다시 절망하기 위해서 케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기억이 다 떠올랐으니까 또 쓰러질 일은 없어요."
"... 기억?"
"네."

미야무라는 기억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했지만, 정말로 노부가 이제 다시 쓰러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케이가 실종됐다가 돌아왔을 때 노부가 케이에게 어떻게 했는지, 케이가 그때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케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케이가 뭘로 죽었는지, 케이가 어떤 유서를 남겼는지 그리고 노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으니까.

"선배. 고토 타다오미라는 사람 알아요?"
"고토 타다오미?"

미야무라는 영 낯선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노부를 바라봤다.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누구야?"

그때 타다오미는 이복형인 마치다를 제일 좋아했지만 제일 친하게 지낸 건 미야무라였었다. 둘이 함께 선전국에 속해 있어서 맨날 둘이 속닥속닥거리면서 선전물도 만들고 싸구려 간식이라도 항상 나눠먹으며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곤 했는데. 

"아뇨, 우연히 이름을 들어서요."

회고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미야무라는 그때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 회고록에는 미야무라의 이름이 곳곳에 나타나 있으니, 그게 자신이리고 인식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게다가 노부에게 이 회고록을 준 게 츠지무라였다. 회고록을 읽었다면 고토 타다오미란 이름을 모를 리 없는 미야무라가 모르는 이름이라고 고개를 젓는 걸 보면 츠지무라도 일부러 회고록을 미야무라에게 보여주지 않은 모양이고.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함께 이루려고 했던 일이 있었고, 한때는 모두가 그 과정에서 행복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억지로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답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다...

미야무라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보다 노부의 상태가 더 신경쓰이는지 침대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 아무튼 너 검사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 그런데 미야무라 선배. 혹시 마치다 상 전화번호 알아요?"
"케이타? 알긴 아는데."

미야무라가 남의 연락처를 줘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 노부는 얼른 고민을 덜어주었다. 

"번호 안 알려주셔도 돼요. 대신 연락해서 어딘지 물어봐 주실래요?"
"케이타 지금 어디 있냐고?"
"네."

미야무라가 이걸 물어봐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케이에게 물어보고 케이가 알려주지 말라고 하면 안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착실히 케이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케이타, 어디야? 아, 그래? 그런데 스즈키가 너 어디 있냐고 물어보던데. 어? 아, 잠깐만."

미야무라는 난처한 얼굴로 노부를 바라봤다. 

"저기, 왜 묻는 거냐고 하는데..."

케이가 바로 안 알려준 건데 미야무라 탓인 것처럼 난처해하는 미야무라에게 괜찮다고 웃어준 노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고토 타다오미에 대해서 물을 게 있다고 해 주세요."
"아, 고토 타다오미?"

아까 미야무라에게도 물었던 덕분인지 미야무라는 의심하지 않고 노부의 말을 그대로 케이에게 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야무라가 전화기를 노부에게 넘겨줬다. 

- 고토 타다오미라니, 무슨 말이죠?
"타다오미가 피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말고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거였어요?"

고토 타다오미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었는데 타다오미가 피냄새가 난다고 느낀 사람은 얼마 후 죽는다고 했었다. 타다오미의 친모가 어린 타다오미를 데리고 타다오미의 친부인 황제를 만나러 왔을 때, 이제 막 말을 뗀 어린 타다오미가 황제의 옆에 있던 시종장을 보며 '할아버지, 피냄새 지지, 지지!'라고 말했고, 며칠 후 시종장이 급사했다고 했다. 그래서 타다오미의 황자 책봉이 취소됐었다고 노부는 들었었다. 황궁이라는 곳이 허구한 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이다보니 고토의 능력을 검증할 기회는 꽤나 많았떤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그런 섬뜩한 능력을 타고난 아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고토의 소름끼치는 능력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당시 고토는 애매한 신분으로 황성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지도 사랑해주지 않은 그 저주받은 소년을 가장 사랑했던 것이 이복형인 케이였고, 기댈 데 없이 비참한 신세던 그 소년이 가장 사랑했던 것도 케이였다. 

그런데...

- 피냄새라는 건 무슨 말이고, 고토 타다오미라는 건 또 누구죠?
"... 고토 타다오미 말이에요. 기억 안 나요?"
- 모르는 이름입니다. 그게 누굽니까?

케이가 고토 타다오미를 모른다고? 설마 케이는 기억이 없는 거야? 나만 기억을 가지고 환생했어? 그렇다고 하기엔 시종일관 노부에게 냉정하면서도 직접 업어서 기숙사까지 데려다줬다는 것도 이상하고, 만년필을 가져다줬을 때 '또 어제 거기서 흘렸군'이라고 말했던 것도 걸렸다. 게다가 노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것에 대해서 사례하기 위해 뭘 사 줘야 할까 고민할 때 미야무라는 '케이타, 닭고기 요리 좋아해. 느티나무 아래에서 파는 닭고기 요리'라고 말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분명히 노부에게는 닭고기 요리를 안 먹는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부가 며칠 전 갑자기 20xx년의 몸 속에서 1700년대 말의 기억이 깨어난 것처럼... 케이도 그 시점에 그때 이전 삶의 기억이 깨어난 거라면?

그래서 이전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날까지는 외조모와 모친이 자주 해 주셨던 닭고기를 즐겨먹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깨어난 이후에는 닭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거라면 말이다. 케이를 납치하고자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2황자와 3황녀가 전한 '외조모 위독'이라는 가짜 파발에 속아서 나갔다가 잡혀갔던 게 한이 돼서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하는 닭고기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된 거라면...?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케이에게서 고토의 기억만 사라진 거라면?

".... 그 단검에 대해 설명하게 해 주세요."

앞에서 듣고 있던 미야무라는 '단검'이라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는 긴 침묵이 흘렀다. 

- 도서관 앞으로 갈게. 거기서 보자.

지금까지 거리를 두며 계속 존대말을 사용하던 케이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반말에 가슴이 쿵 뛰었다. 

역시 케이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부가 도서관 앞으로 가자, 케이는 생각이 복잡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서관 앞에 굳은 듯 서 있었다. 분명히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케이를 지금까지처럼 '마치다 상'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고, 케이는 지금 노부가 케이를 '케이'라고 부르게 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하지만 케이는 노부가 거의 근처까지 갔는데도 어지간히 깊이 생각에 빠져있는지 노부가 다가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더 큰 문제는. 

대낮부터 술을 쳐마셨는지 교정 내에서 비틀거리면서 빠르게 달려오는 차량도 케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차량이 케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는 얼마나 깊이 생각에 빠져 있는지 주변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케이!"

그 와중에도 노부가 소리를 지르는 건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는 케이를 온몸으로 밀어내는 게 노부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케이를 안고 구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차량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를 끌어당기는 건 둘 다 죽는 길이었으니까. 그래서 노부는 팔을 뻗어 있는 힘껏 케이를 밀어냈다.

이제야 케이를 겨우 다시 만났는데, 정말 보고 싶었다고, 다시 만나서 정말 좋았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게 서글프고 화가 났지만, 케이가 죽는 걸 또 눈앞에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케이가 그 찰나의 순간에 노부의 팔을 당기며 노부를 끌어안고 뒤로 같이 굴렀다. 케이는 진짜 이를 악물고 노부를 잡아당겼기 때문에 노부의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덕분에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차량을 피할 수 있었다.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그 차량은 미친 듯 질주하다 결국 도서관 앞 교내 2차선 도로 옆 가로수를 들이받고서야 멈춰섰다. 

노부는 노부를 끌어안고 구르다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고 급하게 케이의 머리를 살피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에요! 케이가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또 보게 할 거예요?"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차분하게 그때 일을 사과하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때 실종됐다 돌아온 후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왜 열흘간 연락을 할 수 없었는지 말할 수 없는 케이를 차분히 기다려주며 달래주지 못하고 다그쳤던 것을 사과하고, 그때 왜 단검을 줬던 건지 설명하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오해하게 했던 것도 사과하고 설명하려고 했었다. 케이가 죽길 바란 건 정말로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가 다시 한 번 노부의 눈앞에서 죽을 뻔한 걸 보자 눈이 돌아가고 머리가 뜨거워져서 고성부터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너야말로!"

케이는 눈이 새빨개져서 노부의 멱살을 잡았다. 

"너야말로 대체 몇 번이나 내 눈앞에서 죽을 거야!"

어....?

"벌써 7번이야! 7번! 네가 날 살리려다 죽는 걸 벌써 7번이나 봤어! 대체 몇 번이나 더 봐야 해!"

... 그러니까...

"네가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대체 몇 번이나 더 봐야 하냐고!"

... 이게 무슨 말이야?





이번 주말에 못 옴....
#성혁망사놉맟환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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