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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2 01:40
그리고 그 정략혼을 깨려는 폴 ㅂㄱㅅ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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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의원이 찾아와 맥을 짚고는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하자 난 아카시우스를 바라봤다. 모든 이들이 떠나고 우리 둘만 방에 남겨졌을 때, 공기가 텁텁한 것 같아 창을 열기 위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자 그가 내 행동을 저지했다. 방금 의원이 하고 간 말을 까먹은거냐며. 뭘 하든 자기를 시키라는 그의 말에 맥없이 작은 실소가 터져나왔다.
"...장군 탓이지 않습니까..."
침대 위에서 날 그렇게 몰아세울 때는 언제고...이제와서... 낯뜨거운 행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얼굴에 열이 끼쳐오는게 느껴져 이젠 정말로 창문을 활짝 열고 싶어 다시금 몸을 움직이자 그는 자신이 문을 열겠다며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 아주 살짝 문을 열었다. 쪼잔하게 열린 그 틈새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게 느껴졌기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내 손을 붙잡았다.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딘가 측은해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고 약간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결국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내 손을 마사지 하듯 어루만졌다.
"몸이 이리 약해서야..."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이 내 뺨 위를 나돌며 쓰담아준다. 나는 그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개 올린 뒤 고개를 기울며 완전히 그의 손에 기댄다.
"장군 손은 항상 따뜻합니다."
"그래서 좋으신가요?"
"그럼요. 전 추운 것보다 따뜻한게 좋습니다."
이제 그는 침대 끝이 아닌 내 옆에 누워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함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밀린 업무가 있다며 이른 아침부터 투덜대듯 말했지만 어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눈을 감으며 물었다.
"이제 떠나실 시간 아닙니까?"
"맞습니다. 근데...떠나기 싫군요."
"왜요?"
그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얼마나 업무가 많으면 이러시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날 쳐다본다. 내 말의 뜻을 눈치 채지 못한거냐는 듯한 시선.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하고 외치며 말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산처럼 쌓여서...그것들을 처리하는 것 조차 너무 아득하고 버겁게 느껴져서 이리 투정을 부리시는 겁니까?"
아카시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몇 초간 침묵했다.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를 들어올려 그의 표정을 살피려고 하자 그가 허공에 대고 크게 웃었다. 그 바람에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내 몸이 강제적으로 흔들렸다. 이제 그는 다른 팔로도 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옆으로 돌아누워 날 완전히 끌어안는다.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삼킨다. 왜 그러시는데요. 손가락으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봤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뭐가 웃긴겁니까? 같이 웃어요. 혼자만 웃지 마시고."
"부인이 웃깁니다."
"제가요? 전 뭘 한 게 없는데..."
"부인의 순진무구함이 웃깁니다."
아카시우스는 이 말을 하다가도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오늘은 부인 곁에서 업무를 봐야겠습니다."
"...왜요?"
"그거야 부인이 너무 귀여워서 그렇습니다."
"네에?"
그가 날 거세게 끌어안는다. 아, 숨 막혀요! 작게 외치며 그의 품 속에서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쏘아봤지만 그의 표정에 만족감이 너무나 한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그를 나무랄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그냥...뭐...잠깐 숨 좀 막히지 뭐. 이리 생각하며 한참 동안이나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안겨있었고 나중에는 그가 날 단단히 안는 손길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의 품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중간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내 침대 옆에 업무 탁상을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서를 읽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방에 머물러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미소가 지어진다. 잠에서 깨어나자 보이는 것이 저 사람이라는 것에 이런 안정감을 느끼게 되다니. 뭔가 믿겨지지 않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럽다.
"더 주무시지."
"...여기서 더 자면 밤에 잠을 못 자지 않을까요."
"잠이 안 오면 저와 놀면 되겠네요."
"뭘 하면서요?"
"우리가 이제껏 밤에 뭘 했는지 아시면서 묻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날 향해 짓는 미소가 음흉하다. 그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가 훤히 보여 죄없는 나까지 민망해져 이불을 슬그머니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근데... 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난 농담이었는데. 부인은 진심인가보죠?"
"이보세요!"
발끈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개구쟁이처럼 웃고있었다. 결국 나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웃게 된다. 그가 떠나지 않고 제 곁에 머물러서 업무를 보고 있는게, 이렇게 시시콜콜한 장난을 치며 나를 웃겨주는게 고맙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당장 내가 이 곳에서 홀로 눈을 뜬 채로 누워있었더라면 다시금 폴을 생각할 것이고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을거다.
지금도 그와 함께하면서 폴의 생각이 완전히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방향을 틀게 한다. 내가 폴을 생각해서 괴로워하면 그도 괴로워하니깐. 날 보며 슬픈 표정을 지으니깐. 그 표정이 보기가 싫어 폴의 생각을 애써 지워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날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그는 나라는 사람을 책망하고 실망하게 될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르쿠스."
문서를 묵묵히 읽고 있던 그가 살짝 놀란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이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온다. 혼자 읊조리듯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혀 끝이 입술에 닿고 앞니 천장에 닿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그의 이름처럼 모난 곳 하나 없는 이 사람이 내 옆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다시 제 이름을 불러달라며 다정하게 재촉해온다.
그러면 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작이 타고있는 난로 앞에 세 걸음 떨어져 서있는 것 같은 포근한 따스함이 내 몸을 감싸 안는다.
/
이른 오후, 여전히 저택에서 업무를 보는 아카시우스와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그는 항구로 가 조선공들과 배수리에 관하여 회의가 있다며 어쩔 수 없이 저택 밖으로 떠나야 했다. 그 말을 듣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곧 이곳을 떠나 다시 로마로 가야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폴을 다시 한 번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폴은 여전히 내게 화나있을까? 이번에 떠나게 되면 언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내게 화가 났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아졌다. 그리고 나를 향하고 있는 폴의 애정의 깊이 또한 알고 있으니, 그가 품은 오해를 원만하게 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시종인 올리비아가 나타났다. 그녀의 뒤로 시종 몇몇이 더 나타나 여러 벌의 옷과 장신구, 신발, 망토를 한가득 끌어안은 채 들어와 벽면에 세워둔 파티션에 걸어두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그녀는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수줍게 미소를 머금으며 내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뭐...야?"
당장 파티라도 가야 될 듯한 화려한 옷들과 장식구들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맞이했다. 내가 묻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는 화장대로 데려갔고 내 옆에 간이의자를 끌고와 앉아 대뜸 화장품들을 펼치더니만 내 얼굴 위로 분칠을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잠시 뒤로 물리며 무슨 일이냐고 되묻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오늘 행사 있으신거 잊으셨습니까?"
"...무슨 행사?"
"오늘 장군님이랑 함께 하시는 첫 공식 행사잖아요. 비록 로마는 아니지만...그래도 이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인데...모르셨나요?"
"난 들은게 없...무슨 행사인데?"
"기사 승급식과 도시 총사령관 임명식이요."
올리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늘어진 내 머리칼을 위로 틀어올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긴장 되세요? 제가 예쁘게 해드릴테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지 안심시켜 주려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간신히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내 머릿속은 폴의 거친 목소리가 메아리 치듯 크게 울려퍼졌다.
"로마를 몰락시키고, 황제를 죽일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아카시우스 장군을 죽여야 되겠지...그래야 네가 자유가 될테니깐."
/
장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황급히 계단을 타고 저택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날 본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 아름답게 꾸미시고 어딜 가시려고요?"
그가 웃었지만 난 웃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자 난 그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정원으로 그를 끌고갔다. 병사 둘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그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올리자 그 둘은 정원 앞에 멈춰 멀어져가는 우리 둘을 바라봤다.
"부인. 제가 뭘 또 잘못했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지고 난 그제서야 발걸음을 멈춰 그를 바라본 채 섰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뭘,"
"모르는 척 그만하시지요."
"그리 화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는다. 이럴 기분이 아니라고 하며 손을 빼냈지만 그가 다시 내 손을 잡는다. 간신히. 내 손 끝만.
"부인 체력이 아직 회복 안 된 듯 해보였고 또..."
"또?"
따지듯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지만 결국 입을 연다.
"당신이 그 아이를 보고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 분명 폴을 말하는 거겠지. 그가 이어 말한다.
"정확히는 그 아이가 당신을 보는 것이 싫어...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뭔데요."
"그가 당신을 울렸잖습니까."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진다. 고작 그 아이를 만났을 뿐인데 당신이 엉망진창이 되었잖아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그 아이에게 당신을 보여주면, 당신이 다시 엉망진창이 될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는 내가 폴을 만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번, 넌지시 물어왔지만 난 그 때마다 답변을 피했다.
그에게 자세한 설명이 불가했다. 나의 주군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나는 가짜고 , 그는 진짜라고. 간략하게라도 설명이 불가했다. 하지만 날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그의 마음이 안타깝고 고마워서 난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
"그 아이가 제게 화를 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가 고작 화를 냈다고 사람이 그리 망가질 수가 있나요."
"내가 말했잖아요. 폴과 나는 특별,"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다급히 내 말을 끊어내는 그의 말에 시선을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의 품에 파고 들었다. 역시 나의 허리에 그의 손이 닿는게 느껴진다. 크고 두툼하며 따스한 그 손길이.
"부인, 혹시 춥습니까?"
"...아뇨."
"거짓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안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말했다. 그와 오해가 생겼고 이제 곧 로마로 되돌아갈텐데 이렇게 오해가 쌓인 채로 떠날 수 없다고. 날 배려해준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난 그를 만나 이 오해를 풀어야 될 것 같다고. 내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1,2초 침묵했다가 부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그의 품에 벗어나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어요."
"어떤 부탁이길래 이리 정중하게 구시는 겁니까?"
"...그게..."
내가 그에게 말했고 그의 눈이 잠시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의 얼굴 위로 전쟁을 하겠다던 폴의 얼굴이 겹쳐보였고 난 황급히 붙잡은 손에 힘을 실어 애원하듯 그에게 부탁했다. 끝내 그는 내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었고 난 까치발을 들어 두 팔을 뻗어올린 채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참..."
귓가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간지럽게 들렸고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
승급전이 열리기 전 아카시우스는 내게 자그마한 경고를 해주었다. 아무래도 무술 실력을 최우선으로 보는 승급 시험이니 다소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그의 이른 경고 덕에 각오를 하고 보아서 그런지 결투장 안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의 충격이 조금은 덜했다. 심사가 이뤄지는 도중 나는 조심스레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령관 임명식도 이런 식입니까?"
그는 이런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기사 승급식이 끝이나고 이젠 총사령관 임명식 전, 예비 사령관들의 결투 실력을 확인 심사전이 열렸다. 병사들이 흘렸던 혈흔 자국들 위로 고운 모래들이 깔리고 벽에 튀긴 핏자국들도 청소부들에 의해 빠르게 지워졌다. 온전히 새 결투장에서 다시 시작되는 결투. 그 안으로 폴이 얇은 칼자루 하나를 손에 쥔 채 들어왔고 그의 상대는 한 손에는 묵직한 방패와 또다른 손에는 잔혹해보이는 도끼를 들고 위풍당당히 결투장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는 어마무시해보였다. 체급적으로도 폴과 차이가 컸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져가며 붉은 노을빛이 경기장을 감싼다. 마치 불길같은 노을빛이 폴을 감싸자 제단 위에서 타들어가던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내 뒤에 서서, 나의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마치 생명줄 마냥 붙잡으며 울부짖던 폴이 저 불길 속에 칼을 든 채 외로이 서 있다.
의자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이 한껏 실려 몸이 떨리는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내 손 위로 장군의 손이 포개어진다. 고개를 훽 돌리자 그가 왜 그러냐는 듯 날 바라본다. 그가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속이 메스꺼워.
"이걸...꼭 해야 되는 겁니까? 그냥...그냥 발표만 해도 되는 거잖아요."
"명분이라는게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이 도시를 지킬 총사령관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이 경기장에 있는 이들에게 보여줘야 해요."
"하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에게 버거운 부탁을 했으니깐. 이제 괜찮다는 듯 간신히 고개를 들었고 그가 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가 몇 번 손짓하자 시종이 나의 무릎 위로 두꺼운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폴을 바라봤고 착각인지 뭔지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붉게 물들어진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징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경기는 지체없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위태롭게 보였다. 상대의 칼날을 피하며 폴의 몸짓 하나하나가, 상대와 칼을 맞대는 그 행위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잔뜩 움켜쥐며 마구잡이로 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 순간 내 몸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아카시우스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만둬. 폴, 제발 부탁이야. 제발... 종아리 아래로 흐르는 그의 붉은 핏줄기를 보니 속이 또다시 울렁거렸다. 싸움은 마치 끝으로 향하는 것 같았고 관중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어서 빨리 이 경기가 끝나길 바라는 바람으로 손을 어루만지고 있던 내 행동을 아카시우스가 부드럽게 막았다.
"피나잖습니까."
손톱 옆 살을 긁어내는 것이 과했는지 어느덧 안쪽 열린 살이 벌어져 피를 내뿜고 있었고 그는 내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며 지혈을 해주었다. 관중석에서 경악에 가까운 환호소리가 나와 그와 함께 시선을 결투장으로 돌렸다. 어느덧 폴이 상대의 상체 위에 주저앉아 그가 들고있던 방패로 상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자의 몸부림은 격렬했지만 폴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 그의 얼굴을 내리쳤고 어느순간부터 그는 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폴의 몸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격렬한 몸부림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이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줄로만 알았지만 폴이 괴성을 지르며 방패를 세로로 세워 허공 위로 치켜 들었고 그 순간 아카시우스가 소리쳤다.
폴은 격분했고 아카시우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를 향해 소리쳤지만 사실상 날 향해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네가 감히 어떻게 저 자를 믿을 수 있냐면서.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냐고.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거의 울고있었다.
/
내가 아카시우스 장군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왜 새로운 걸까? 난 이미 이런 감정을 겪었고 겪고 있는데. 사랑이라는 감정. 그래, 이건 내가 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카시우스를 만나고 폴에게 품는 사랑과 그를 향한 사랑이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차이점을 명확히 알 수가 없어 몇 번 갑갑함을 느꼈었다.
"날 사랑해?"
폴이 괴로워한다. 내가 한 행동에 그는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며 몸부림 치고 있다. 나는 당연히 널 사랑하지.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진심이야. 손이라도 닿으면 내 진심 또한 닿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몸을 바닥에 움츠리며 철창 틈새로 팔을 넣고 그에게 닿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내게서 멀어져갔다. 폴이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은 우리의 고향이 불길에 휩쌓여 타들어 갈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나 때문에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의 영혼이 서서히 무너져가는게 보인다. 난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그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는건데. 왜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거지? 난 그저 그를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평소처럼, 그를 살리고 싶어서...
"허니야,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날 사랑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거야."
"아니야, 폴...그런 말 하지마.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응. 알아. 그래서 네게 제대로 알려주려고."
그가 고개를 든다. 이제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 말고 든게 없다. 조급함에 심장이 더욱더 빨리 뛰기 시작한다. 두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넌 날 사랑하는게 아니라 충성한거야."
아니야. 나는 널 사랑해. 이건 사랑이야.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는게 이게 사랑이 아니고서야 뭐겠어?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내 말의 근거도 충분해. 난 널 위해 조금씩 희생해왔고 그것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없다. 항상 꿈을 꿔왔다. 나의 꿈은 네가 황제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축복을 해준 뒤 네 곁을 떠나는 것. 나의 목표가 이루어졌으니, 기쁜 마음으로 한 발치 떨어져 네가 이루는 것들을 보며 축복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일순간 내 몸의 어느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는게 느껴졌다. 아카시우스와 폴의 차이점이 명확해졌다. 난 항상 폴을 떠나고 싶어했다. 때가 되면 그의 곁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아카시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와 함께이고 싶어. 나의 신분을 속여서라도... 그의 곁에 있고싶어.
철창이 거칠게 흔들렸고 그가 내게 강렬하게 외쳤다.
"넌 날 배신했어!!! 너와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나를 배신하고 그 빌어먹을 로마인에게 돌아선거야!!!"
나는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의 말이 맞다는 모습을 보이면 폴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버릴테니깐. 파도가 힘겹게 쌓은 모래성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듯, 그렇게 폴은 완전히 사라져버릴테니깐.
/
쉽게 아카시우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옷이 녹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가득했으니 이런 몰골로 나타난다면 쉽게 소문이 돌기 마련이니깐. 그래서 바닷가로 무작정 걸어갔다. 늦은 밤이라 해변가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이제 집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상인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감사하게도 나같은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작은 바위 위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봤다. 파도는 잔잔했다. 부는 바람조차 잔잔해서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턱을 괸 채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소리만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계속 앉아있으면 파도는 점점 더 거세지고 내가 앉아있는 쪽까지 물이 차오르며 어느순간 내 몸이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
하지만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고 내 앞에 다가와 한 쪽 무릎을 꾼 채 날 올려다봤다.
"세상에..."
그는 황급히 두르고 있던 망토를 내 어깨에 걸쳐주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부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딜 간다면 말씀은 하시고 가셨어야죠."
어둠 속이어서 그런지 그가 아직 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듯 했다. 어둠에 감사했다.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아, 말하지 말 걸. 내 목소리가 이리 형편없이 갈라져서 나갈 줄 알았더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텐데.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유심히 나 얼굴을 살펴보기에 난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또 그 아이 때문에 이리 우시는겁니까?"
그는 이제 내 옆 모래바닥에 앉아 나와 같이 바다에 시선을 돌렸다. 우린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였다.
"...그 아이가 당신을 울리는 이유는 바로 저 때문이라는 걸 압니다."
"........."
"명확히 말하면, 당신을 울리는 사람은 사실상 저인거지요."
"........."
"그게 화가 납니다. 그 아이 탓을 해보고 싶어도 당신을 아프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라는게."
그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뱉는다. 그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지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기에 그냥 말없이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댄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아본다. 다시금 내가 현명하지 않은 인간임을 깨닫는다. 그가 차가운 내 손을 꼭 붙잡는다. 손이 차갑습니다. 이만 돌아가야 될 것 같군요. 하며 다정하게 나를 타일러보지만 난 꿈쩍도 하지않는다.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다.
드디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달았는데 그에 수반하는 고통 또한 거대하다.
"장군은 생각보다 날 더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그가 나를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나는 조금 더 무릎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저도 그래요...저도 그렇습니다."
"........"
"그러니...이것만은 알아주셔요."
"........"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그대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대 앞에서 눈물을 보이든, 화를 내든...슬퍼하거나 웃거나...그 모든 것들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거라고. 내 턱 끝에 그의 손 끝이 와닿는다.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려지고 그와 눈이 맞닿는다. 그가 조심스레 다가와 내 입술을 머금었고 나또한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을 천천히 음미한다.
파도소리는 점차 희미해지고 내 목 위로는 그의 따스한 손이 내려앉아 차가워진 나의 체온을 다시금 따스히 데워준다.
하...어케하면 셋이서 행복해지는건데...ㅠㅠ
페드로너붕붕
폴티모시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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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의원이 찾아와 맥을 짚고는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하자 난 아카시우스를 바라봤다. 모든 이들이 떠나고 우리 둘만 방에 남겨졌을 때, 공기가 텁텁한 것 같아 창을 열기 위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자 그가 내 행동을 저지했다. 방금 의원이 하고 간 말을 까먹은거냐며. 뭘 하든 자기를 시키라는 그의 말에 맥없이 작은 실소가 터져나왔다.
"...장군 탓이지 않습니까..."
침대 위에서 날 그렇게 몰아세울 때는 언제고...이제와서... 낯뜨거운 행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얼굴에 열이 끼쳐오는게 느껴져 이젠 정말로 창문을 활짝 열고 싶어 다시금 몸을 움직이자 그는 자신이 문을 열겠다며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 아주 살짝 문을 열었다. 쪼잔하게 열린 그 틈새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게 느껴졌기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내 손을 붙잡았다.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딘가 측은해 보이는 표정이기도 했고 약간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결국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내 손을 마사지 하듯 어루만졌다.
"몸이 이리 약해서야..."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이 내 뺨 위를 나돌며 쓰담아준다. 나는 그 손등 위에 내 손을 포개 올린 뒤 고개를 기울며 완전히 그의 손에 기댄다.
"장군 손은 항상 따뜻합니다."
"그래서 좋으신가요?"
"그럼요. 전 추운 것보다 따뜻한게 좋습니다."
이제 그는 침대 끝이 아닌 내 옆에 누워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함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밀린 업무가 있다며 이른 아침부터 투덜대듯 말했지만 어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눈을 감으며 물었다.
"이제 떠나실 시간 아닙니까?"
"맞습니다. 근데...떠나기 싫군요."
"왜요?"
그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얼마나 업무가 많으면 이러시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날 쳐다본다. 내 말의 뜻을 눈치 채지 못한거냐는 듯한 시선.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하고 외치며 말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산처럼 쌓여서...그것들을 처리하는 것 조차 너무 아득하고 버겁게 느껴져서 이리 투정을 부리시는 겁니까?"
아카시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몇 초간 침묵했다.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를 들어올려 그의 표정을 살피려고 하자 그가 허공에 대고 크게 웃었다. 그 바람에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내 몸이 강제적으로 흔들렸다. 이제 그는 다른 팔로도 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옆으로 돌아누워 날 완전히 끌어안는다.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삼킨다. 왜 그러시는데요. 손가락으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봤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뭐가 웃긴겁니까? 같이 웃어요. 혼자만 웃지 마시고."
"부인이 웃깁니다."
"제가요? 전 뭘 한 게 없는데..."
"부인의 순진무구함이 웃깁니다."
아카시우스는 이 말을 하다가도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오늘은 부인 곁에서 업무를 봐야겠습니다."
"...왜요?"
"그거야 부인이 너무 귀여워서 그렇습니다."
"네에?"
그가 날 거세게 끌어안는다. 아, 숨 막혀요! 작게 외치며 그의 품 속에서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쏘아봤지만 그의 표정에 만족감이 너무나 한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그를 나무랄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그냥...뭐...잠깐 숨 좀 막히지 뭐. 이리 생각하며 한참 동안이나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안겨있었고 나중에는 그가 날 단단히 안는 손길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의 품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중간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내 침대 옆에 업무 탁상을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서를 읽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방에 머물러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미소가 지어진다. 잠에서 깨어나자 보이는 것이 저 사람이라는 것에 이런 안정감을 느끼게 되다니. 뭔가 믿겨지지 않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럽다.
"더 주무시지."
"...여기서 더 자면 밤에 잠을 못 자지 않을까요."
"잠이 안 오면 저와 놀면 되겠네요."
"뭘 하면서요?"
"우리가 이제껏 밤에 뭘 했는지 아시면서 묻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날 향해 짓는 미소가 음흉하다. 그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가 훤히 보여 죄없는 나까지 민망해져 이불을 슬그머니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근데... 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난 농담이었는데. 부인은 진심인가보죠?"
"이보세요!"
발끈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개구쟁이처럼 웃고있었다. 결국 나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웃게 된다. 그가 떠나지 않고 제 곁에 머물러서 업무를 보고 있는게, 이렇게 시시콜콜한 장난을 치며 나를 웃겨주는게 고맙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당장 내가 이 곳에서 홀로 눈을 뜬 채로 누워있었더라면 다시금 폴을 생각할 것이고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을거다.
지금도 그와 함께하면서 폴의 생각이 완전히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방향을 틀게 한다. 내가 폴을 생각해서 괴로워하면 그도 괴로워하니깐. 날 보며 슬픈 표정을 지으니깐. 그 표정이 보기가 싫어 폴의 생각을 애써 지워내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날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그는 나라는 사람을 책망하고 실망하게 될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르쿠스."
문서를 묵묵히 읽고 있던 그가 살짝 놀란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이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온다. 혼자 읊조리듯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혀 끝이 입술에 닿고 앞니 천장에 닿아 부드럽게 간지럽힌다. 그의 이름처럼 모난 곳 하나 없는 이 사람이 내 옆에 앉아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다시 제 이름을 불러달라며 다정하게 재촉해온다.
그러면 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는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작이 타고있는 난로 앞에 세 걸음 떨어져 서있는 것 같은 포근한 따스함이 내 몸을 감싸 안는다.
/
이른 오후, 여전히 저택에서 업무를 보는 아카시우스와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그는 항구로 가 조선공들과 배수리에 관하여 회의가 있다며 어쩔 수 없이 저택 밖으로 떠나야 했다. 그 말을 듣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곧 이곳을 떠나 다시 로마로 가야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폴을 다시 한 번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폴은 여전히 내게 화나있을까? 이번에 떠나게 되면 언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내게 화가 났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아졌다. 그리고 나를 향하고 있는 폴의 애정의 깊이 또한 알고 있으니, 그가 품은 오해를 원만하게 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시종인 올리비아가 나타났다. 그녀의 뒤로 시종 몇몇이 더 나타나 여러 벌의 옷과 장신구, 신발, 망토를 한가득 끌어안은 채 들어와 벽면에 세워둔 파티션에 걸어두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마치 그녀는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수줍게 미소를 머금으며 내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뭐...야?"
당장 파티라도 가야 될 듯한 화려한 옷들과 장식구들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맞이했다. 내가 묻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는 화장대로 데려갔고 내 옆에 간이의자를 끌고와 앉아 대뜸 화장품들을 펼치더니만 내 얼굴 위로 분칠을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잠시 뒤로 물리며 무슨 일이냐고 되묻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오늘 행사 있으신거 잊으셨습니까?"
"...무슨 행사?"
"오늘 장군님이랑 함께 하시는 첫 공식 행사잖아요. 비록 로마는 아니지만...그래도 이곳에서는 매우 중요한 행사인데...모르셨나요?"
"난 들은게 없...무슨 행사인데?"
"기사 승급식과 도시 총사령관 임명식이요."
올리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늘어진 내 머리칼을 위로 틀어올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긴장 되세요? 제가 예쁘게 해드릴테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지 안심시켜 주려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간신히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내 머릿속은 폴의 거친 목소리가 메아리 치듯 크게 울려퍼졌다.
"로마를 몰락시키고, 황제를 죽일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아카시우스 장군을 죽여야 되겠지...그래야 네가 자유가 될테니깐."
/
장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황급히 계단을 타고 저택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날 본 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 아름답게 꾸미시고 어딜 가시려고요?"
그가 웃었지만 난 웃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자 난 그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정원으로 그를 끌고갔다. 병사 둘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그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올리자 그 둘은 정원 앞에 멈춰 멀어져가는 우리 둘을 바라봤다.
"부인. 제가 뭘 또 잘못했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지고 난 그제서야 발걸음을 멈춰 그를 바라본 채 섰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뭘,"
"모르는 척 그만하시지요."
"그리 화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는다. 이럴 기분이 아니라고 하며 손을 빼냈지만 그가 다시 내 손을 잡는다. 간신히. 내 손 끝만.
"부인 체력이 아직 회복 안 된 듯 해보였고 또..."
"또?"
따지듯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지만 결국 입을 연다.
"당신이 그 아이를 보고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 분명 폴을 말하는 거겠지. 그가 이어 말한다.
"정확히는 그 아이가 당신을 보는 것이 싫어...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뭔데요."
"그가 당신을 울렸잖습니까."
그가 내 뺨을 어루만진다. 고작 그 아이를 만났을 뿐인데 당신이 엉망진창이 되었잖아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그 아이에게 당신을 보여주면, 당신이 다시 엉망진창이 될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는 내가 폴을 만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번, 넌지시 물어왔지만 난 그 때마다 답변을 피했다.
그에게 자세한 설명이 불가했다. 나의 주군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나는 가짜고 , 그는 진짜라고. 간략하게라도 설명이 불가했다. 하지만 날 걱정해주고 염려해주는 그의 마음이 안타깝고 고마워서 난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
"그 아이가 제게 화를 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가 고작 화를 냈다고 사람이 그리 망가질 수가 있나요."
"내가 말했잖아요. 폴과 나는 특별,"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다급히 내 말을 끊어내는 그의 말에 시선을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의 품에 파고 들었다. 역시 나의 허리에 그의 손이 닿는게 느껴진다. 크고 두툼하며 따스한 그 손길이.
"부인, 혹시 춥습니까?"
"...아뇨."
"거짓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안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말했다. 그와 오해가 생겼고 이제 곧 로마로 되돌아갈텐데 이렇게 오해가 쌓인 채로 떠날 수 없다고. 날 배려해준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난 그를 만나 이 오해를 풀어야 될 것 같다고. 내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1,2초 침묵했다가 부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그의 품에 벗어나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어요."
"어떤 부탁이길래 이리 정중하게 구시는 겁니까?"
"...그게..."
내가 그에게 말했고 그의 눈이 잠시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의 얼굴 위로 전쟁을 하겠다던 폴의 얼굴이 겹쳐보였고 난 황급히 붙잡은 손에 힘을 실어 애원하듯 그에게 부탁했다. 끝내 그는 내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었고 난 까치발을 들어 두 팔을 뻗어올린 채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참..."
귓가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간지럽게 들렸고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
승급전이 열리기 전 아카시우스는 내게 자그마한 경고를 해주었다. 아무래도 무술 실력을 최우선으로 보는 승급 시험이니 다소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그의 이른 경고 덕에 각오를 하고 보아서 그런지 결투장 안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의 충격이 조금은 덜했다. 심사가 이뤄지는 도중 나는 조심스레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령관 임명식도 이런 식입니까?"
그는 이런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기사 승급식이 끝이나고 이젠 총사령관 임명식 전, 예비 사령관들의 결투 실력을 확인 심사전이 열렸다. 병사들이 흘렸던 혈흔 자국들 위로 고운 모래들이 깔리고 벽에 튀긴 핏자국들도 청소부들에 의해 빠르게 지워졌다. 온전히 새 결투장에서 다시 시작되는 결투. 그 안으로 폴이 얇은 칼자루 하나를 손에 쥔 채 들어왔고 그의 상대는 한 손에는 묵직한 방패와 또다른 손에는 잔혹해보이는 도끼를 들고 위풍당당히 결투장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는 어마무시해보였다. 체급적으로도 폴과 차이가 컸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져가며 붉은 노을빛이 경기장을 감싼다. 마치 불길같은 노을빛이 폴을 감싸자 제단 위에서 타들어가던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내 뒤에 서서, 나의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마치 생명줄 마냥 붙잡으며 울부짖던 폴이 저 불길 속에 칼을 든 채 외로이 서 있다.
의자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이 한껏 실려 몸이 떨리는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내 손 위로 장군의 손이 포개어진다. 고개를 훽 돌리자 그가 왜 그러냐는 듯 날 바라본다. 그가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속이 메스꺼워.
"이걸...꼭 해야 되는 겁니까? 그냥...그냥 발표만 해도 되는 거잖아요."
"명분이라는게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이 도시를 지킬 총사령관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이 경기장에 있는 이들에게 보여줘야 해요."
"하지만..."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에게 버거운 부탁을 했으니깐. 이제 괜찮다는 듯 간신히 고개를 들었고 그가 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그가 몇 번 손짓하자 시종이 나의 무릎 위로 두꺼운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폴을 바라봤고 착각인지 뭔지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붉게 물들어진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징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경기는 지체없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위태롭게 보였다. 상대의 칼날을 피하며 폴의 몸짓 하나하나가, 상대와 칼을 맞대는 그 행위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잔뜩 움켜쥐며 마구잡이로 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 순간 내 몸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아카시우스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만둬. 폴, 제발 부탁이야. 제발... 종아리 아래로 흐르는 그의 붉은 핏줄기를 보니 속이 또다시 울렁거렸다. 싸움은 마치 끝으로 향하는 것 같았고 관중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어서 빨리 이 경기가 끝나길 바라는 바람으로 손을 어루만지고 있던 내 행동을 아카시우스가 부드럽게 막았다.
"피나잖습니까."
손톱 옆 살을 긁어내는 것이 과했는지 어느덧 안쪽 열린 살이 벌어져 피를 내뿜고 있었고 그는 내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며 지혈을 해주었다. 관중석에서 경악에 가까운 환호소리가 나와 그와 함께 시선을 결투장으로 돌렸다. 어느덧 폴이 상대의 상체 위에 주저앉아 그가 들고있던 방패로 상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자의 몸부림은 격렬했지만 폴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 그의 얼굴을 내리쳤고 어느순간부터 그는 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폴의 몸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격렬한 몸부림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이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줄로만 알았지만 폴이 괴성을 지르며 방패를 세로로 세워 허공 위로 치켜 들었고 그 순간 아카시우스가 소리쳤다.
폴은 격분했고 아카시우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를 향해 소리쳤지만 사실상 날 향해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네가 감히 어떻게 저 자를 믿을 수 있냐면서.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냐고.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거의 울고있었다.
/
내가 아카시우스 장군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왜 새로운 걸까? 난 이미 이런 감정을 겪었고 겪고 있는데. 사랑이라는 감정. 그래, 이건 내가 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카시우스를 만나고 폴에게 품는 사랑과 그를 향한 사랑이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차이점을 명확히 알 수가 없어 몇 번 갑갑함을 느꼈었다.
"날 사랑해?"
폴이 괴로워한다. 내가 한 행동에 그는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며 몸부림 치고 있다. 나는 당연히 널 사랑하지.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진심이야. 손이라도 닿으면 내 진심 또한 닿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몸을 바닥에 움츠리며 철창 틈새로 팔을 넣고 그에게 닿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내게서 멀어져갔다. 폴이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은 우리의 고향이 불길에 휩쌓여 타들어 갈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나 때문에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의 영혼이 서서히 무너져가는게 보인다. 난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그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는건데. 왜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거지? 난 그저 그를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평소처럼, 그를 살리고 싶어서...
"허니야,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날 사랑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거야."
"아니야, 폴...그런 말 하지마.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응. 알아. 그래서 네게 제대로 알려주려고."
그가 고개를 든다. 이제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 말고 든게 없다. 조급함에 심장이 더욱더 빨리 뛰기 시작한다. 두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넌 날 사랑하는게 아니라 충성한거야."
아니야. 나는 널 사랑해. 이건 사랑이야.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는게 이게 사랑이 아니고서야 뭐겠어?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내 말의 근거도 충분해. 난 널 위해 조금씩 희생해왔고 그것들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없다. 항상 꿈을 꿔왔다. 나의 꿈은 네가 황제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축복을 해준 뒤 네 곁을 떠나는 것. 나의 목표가 이루어졌으니, 기쁜 마음으로 한 발치 떨어져 네가 이루는 것들을 보며 축복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일순간 내 몸의 어느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는게 느껴졌다. 아카시우스와 폴의 차이점이 명확해졌다. 난 항상 폴을 떠나고 싶어했다. 때가 되면 그의 곁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아카시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와 함께이고 싶어. 나의 신분을 속여서라도... 그의 곁에 있고싶어.
철창이 거칠게 흔들렸고 그가 내게 강렬하게 외쳤다.
"넌 날 배신했어!!! 너와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나를 배신하고 그 빌어먹을 로마인에게 돌아선거야!!!"
나는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의 말이 맞다는 모습을 보이면 폴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버릴테니깐. 파도가 힘겹게 쌓은 모래성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듯, 그렇게 폴은 완전히 사라져버릴테니깐.
/
쉽게 아카시우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옷이 녹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가득했으니 이런 몰골로 나타난다면 쉽게 소문이 돌기 마련이니깐. 그래서 바닷가로 무작정 걸어갔다. 늦은 밤이라 해변가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이제 집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상인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감사하게도 나같은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작은 바위 위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봤다. 파도는 잔잔했다. 부는 바람조차 잔잔해서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턱을 괸 채 바위에 부숴지는 파도소리만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계속 앉아있으면 파도는 점점 더 거세지고 내가 앉아있는 쪽까지 물이 차오르며 어느순간 내 몸이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
하지만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고 내 앞에 다가와 한 쪽 무릎을 꾼 채 날 올려다봤다.
"세상에..."
그는 황급히 두르고 있던 망토를 내 어깨에 걸쳐주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부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딜 간다면 말씀은 하시고 가셨어야죠."
어둠 속이어서 그런지 그가 아직 내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듯 했다. 어둠에 감사했다.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아, 말하지 말 걸. 내 목소리가 이리 형편없이 갈라져서 나갈 줄 알았더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텐데.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유심히 나 얼굴을 살펴보기에 난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또 그 아이 때문에 이리 우시는겁니까?"
그는 이제 내 옆 모래바닥에 앉아 나와 같이 바다에 시선을 돌렸다. 우린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였다.
"...그 아이가 당신을 울리는 이유는 바로 저 때문이라는 걸 압니다."
"........."
"명확히 말하면, 당신을 울리는 사람은 사실상 저인거지요."
"........."
"그게 화가 납니다. 그 아이 탓을 해보고 싶어도 당신을 아프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라는게."
그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뱉는다. 그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지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기에 그냥 말없이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댄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아본다. 다시금 내가 현명하지 않은 인간임을 깨닫는다. 그가 차가운 내 손을 꼭 붙잡는다. 손이 차갑습니다. 이만 돌아가야 될 것 같군요. 하며 다정하게 나를 타일러보지만 난 꿈쩍도 하지않는다.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다.
드디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달았는데 그에 수반하는 고통 또한 거대하다.
"장군은 생각보다 날 더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그가 나를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나는 조금 더 무릎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저도 그래요...저도 그렇습니다."
"........"
"그러니...이것만은 알아주셔요."
"........"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그대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대 앞에서 눈물을 보이든, 화를 내든...슬퍼하거나 웃거나...그 모든 것들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거라고. 내 턱 끝에 그의 손 끝이 와닿는다.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려지고 그와 눈이 맞닿는다. 그가 조심스레 다가와 내 입술을 머금었고 나또한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을 천천히 음미한다.
파도소리는 점차 희미해지고 내 목 위로는 그의 따스한 손이 내려앉아 차가워진 나의 체온을 다시금 따스히 데워준다.
페드로너붕붕
폴티모시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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