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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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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는 대기실에 앉아있었음. 이 날을 위해 온 동체를 광내고 새로 도색한 덕분에 대기실이 번쩍거릴 지경임. 디는 스파크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음. 쇼의 준비기간은 브레인 모듈이 식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되어줬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난 그냥 팍스랑...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들어왔음.


"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디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센티넬 프라임이 디를 향해 걸어오고 있음. 금빛의 날개가 빛을 반사했지. 센티넬을 영접한 디는 입을 떡벌리며 순간이나마 이 상황의 엿같음을 잊을 수 있었지.


"여..영광입니다 프라임."


디는 센티넬과 악수하며 황홀한 기분에 휩싸일 거임. 이렇게 가까이서 센티넬 프라임을 뵐 수 있다니..! 심지어 악수도 하다니..!


"그래서, 준비는 잘되고 있나?"


센티넬의 말에 디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음. 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죄송합니다... 제 친구들이 이런 일로 귀찮게 만들어 드려서..."
"귀찮다니 무슨 소리야! 이 프로그램 일정이 잡힌 후로 광부들의 채굴량이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센티넬이 쾌활하게 말했지. 디는 어리둥절임. 그동안 보안이니 뭐니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던지라 밖의 상황은 전혀 모르는 상태거든.


"쇼가 끝나면 너희로 드라마를 만들 계획도 이미 세워뒀다고. 휴식시간마다 한편씩 틀어주면 광부들의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되겠지."


코그드 쪽에도 드라마 인기가 좋아지면 얘들을 접대용으로 굴릴 수도 있을 거고. 센티넬은 전혀 뒤꿍꿍이가 없다는 것마냥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었음. 디는 아직 연산이 따라잡지 못해 멍하다.


"뭐 그래서.. D-16. 자네에게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센티넬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디의 주변을 돌았음. 걸을 때마다 날개가 살짝 팔락였지.


"무엇인가요?"
"자네가 오라이온 팍스를 포기하는 걸로 쇼를 마무리 하는 게 어떻겠나? 대본은 이쪽에서 준비해주겠네."


아름다운 날개를 홀린듯이 바라보던 디가 우뚝 멈췄음.


"예?"

"자네들 셋의 실적 보고서를 봤어. 두 메크와 달리 자네는 정말 뛰어난 광부더군."


센티넬이 감탄섞인 어조로 말하며 디의 어깨를 잡았음.


"솔직히 말해서 자네는 그 친구에게 너무 아까워. 왜 자발적으로 그런.. 메크에게 묶이려고 하나?"


센티넬은 '그런'을 늘려말했지. 디는 혼란스러웠음. 프라임께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쇼가 끝나고 나면 다른 더 귀엽고 얌전한 메크를 찾아서 붙여주겠네. 아주 그림처럼 잘 어울릴 거야."
"아뇨 프라임. 저는..."
"아니면 좀 활달한 쪽이 취향인가? 물론 그것도 맞춰줄 수 있지. 취향대로 말만 해보게."


센티넬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 혼란스럽던 디는 점점 표정이 분노에 맞춰질 거임.


"전 팍스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하는 말이라도..."
"아, 물론이지. 오해하지 말게. 강요는 전혀 아니야. 그냥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


말로는 순순히 물러나면서 센티넬에게 친절한 태도가 살짝 사라졌음. 센티넬은 디를 오만하게 내려다봤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자네의 앞에 있는 건 사이버트론의 프라임이야. 내가 보상할 수 있는 게 그저 귀여운 연인만은 아니란 걸 명심하게."
"......"


디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센티넬을 바라봤음. 무언의 대답에 센티넬은 방긋 입꼬리를 올렸음.


"멋지군.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는 나도 좋아해. 꼭, 자네가 이기길 바라지."


센티넬은 디에게 웃어보인 후 대기실을 나섰음. 디는 센티넬이 사라진 후에야 긴장을 풀 수 있었지. ...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정말로.










그 후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디는 대기실에서 나와 무대 아래에 섰음. 위에서 센티넬이 말하는 소리가 들림.


"자, 사이버트론의 시민 여러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왔습니다!"


오프닝을 끝마친 센티넬이 양 옆을 가리켰음.


"오늘의 주인공들을 소개하죠. 한 메크를 두고 싸우는 용맹한 사랑의 전사들! D-16과 스모크스크린!"


뭔가 큰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디는 어느 새 무대 위에 올라와있었지. 화려한 무대 효과가 걷히고 보니 반대편에 스모크스크린의 모습도 보임. 스모크스크린도 여러가지로 피곤해보였지만 그래도 관중을 향해 손 흔들 여유는 있어보일 듯. 디는 그제야 관중석을 돌아봤음. 관중석엔 코그리스는 물론이고 코그드까지 잔뜩임. 디는 스파크가 입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지. 인기가.. 이정도야??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행운의 메크!"


센티넬이 무대 중앙의 무슨 선물 상자처럼 꾸며진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음. 문 안쪽에서 오라이온의 음성이 들렸지만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음. 센티넬은 당황하지도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가더니 안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손목을 잡았음.


"오라이온 팍스!"


오라이온은 나름 버텨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의 저항도 못하고 센티넬에게 강제로 끌려나왔지. 오라이온이 나오자마자 문은 도망갈 수도 없게 무대 아래로 사라졌음. 센티넬이 무대 중앙에 오라이온을 세우니 전광판에 온통 오라이온이 가득할 거임. 디는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지. 오라이온도 디처럼 빡세게 케어받았는지 온 동체가 새 것마냥 반짝임. 평소에도 오라이온이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과연 두 메크가 정신을 못차릴 만큼 예쁜 메크로군요."


센티넬은 허허 웃으며 오라이온의 머리를 쓰다듬었지. 오라이온은 영혼이 파괴당하는 표정이었음. 항의가 보이스 박스에 장전됐지만 관중들이, 특히 코그리스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걸 보니 차마 분위기를 깨지는 못하겠는지 포기한 기색이었지.


"그럼 본격적으로 무대를 시작해볼까요."


센티넬은 오라이온의 어깨를 잡고 중앙의 의자에 앉혔음.


"다들 대충은 알고 오셨겠지만 제가 다시 한번 간단히 설명해드리죠. 이 메크들의 복잡하게 얽힌 사연을."


센티넬이 디 쪽으로 손을 뻗자 카메라와 조명이 디를 비췄음. 디는 어색함에 시선 둘 데를 모르고 당황할 듯.


"여기 앉아있는 오라이온 팍스와 이쪽의 D-16이라는 메크는 아주 오랜 시간 애정어린 관계였습니다. 코그리스가 콘적스를 맺을 수 없단 걸 생각해보면 둘은 사실상 사실혼 관계로 봐도 되겠죠."


무슨 관계?? 디는 놀라서 센티넬을 봤음. 오라이온도 펄쩍 뛰었지만 센티넬이 어깨를 누르고 있는 손에서 벗어날 순 없을 듯. 관중들이 보기엔 살짝 움찔한 게 다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관계임은 틀림 없었고.. 둘의 유대에는 결국 틈이 생기고 맙니다."


센티넬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음.


"그 틈을 파고든 게 바로 이 스모크스크린! 다른 구역 출신의 광부였던 것입니다!"


이번엔 스모크스크린쪽에 조명이 확 비춰짐. 스모크스크린은 황당한 얼굴로 센티넬을 보고 있었음.


"엄밀히 말해서 둘은 연인 관계라고 부를 수 없단 점을 노려 오라이온에게 접근한 그는.."
"잠시만요."


스모크스크린이 손을 들었지. 센티넬은 말이 끊겨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대중 앞인 걸 의식했는지 곧 미소를 띄울 거임.


"무슨 일이지?"
"제가 몇마디 해도 될까요."


센티넬은 잠시 고민하다가 스모크스크린에게 자리를 양보했음. 스모크스크린은 마이크를 쥐고 앞으로 나섰지.


"대부분 비슷하게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멀쩡한 연인들을 갈라놓은 게 아닌 이상에야 저쪽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죠."


스모크스크린은 잔뜩 모여있는 관중들을 보며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지.


"오라이온과 디 식스틴은 친구입니다! 어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친구요! 둘 사이엔 연인으로 짐작될 만한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 오히려 저쪽에서 화를 내서 황당한 건 저예요!"


스모크스크린의 말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음. 센티넬은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지.


"둘이 키스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예. 저랑 오라이온이 사귀고 난 뒤에요! 저쪽 구역에선 제가 무슨 남의 애인을 뺏기라도 한 것처럼 굴지만 반대예요. 애인을 뺏어가려고 하는 건 저쪽이라구요!"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던 디는 어느 새 차디찬 옵틱으로 스모크스크린을 보고 있었음.


"대체 뭐가 그리 억울해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제가 아니었으면 오라이온과는 지금까지도 그저 친구였을 테니 그대로 친구로 남으면 될 텐데. 제가 오라이온한테 친구 관계를 끊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관 내에 흥미진진함이 넘쳐나겠지. 스모크스크린 지지파가 격한 동의를 보이며 박수와 환호성을 보냄. 가라! 네가 정실이란 걸 알려줘! 이쪽이야말로 정당한 방법으로 사랑을 쟁취했다! 센티넬도 재밌어 죽겠는 표정으로 디를 바라봤음.


"D-16. 지금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스모크스크린을 한참 노려보던 디가 마이크를 잡았음.


"저와 팍스가 친구인 건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그렇겠죠."


디는 스모크스크린을 똑바로 노려보며 한걸음 한걸음 무게를 실어 앞으로 걸어나왔지.


"그런데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디의 옵틱이 형형하게 빛났음.


"그 이상으로!! 팍스는 내 거야!! 그게 친구가 됐든 연인이 됐든 형제가 됐든 가족이 됐든 뭐가 됐든지간에!! 그녀석 옆자리는 내 거라고!! 네가 끼어들기 한참 전부터!!"


중앙으로 나온 디가 스모크스크린을 향해 외쳤음. 디의 파격적인 받아침에 내부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지. 그래 맞아! 고백 좀 새치기 당한 게 무슨 대수냐 쌓아온 시간이 다른데! 진정한 의미의 정실은 이쪽이다! 디의 지지파가 열띤 응원을 보냈음.


"네가 들쑤시기 전까지 팍스가 내 거라는 데에 이견있는 놈 따윈 있지도 않았어. 너무 당연한 사실이어서!!"


디가 압박하기 시작하자 스모크스크린에게 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짐. 둘의 덩치 차이가 꽤 나는데도 스모크스크린도 지지 않고 버티고 서있겠지.


"이견있는 놈이 없다고? 정말 그럴까?"


스모크스크린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지. 디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의자에 앉아 있는 오라이온이 보였음.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아직 적응 못한 오라이온이 얼타고 있으니 옆에 있던 센티넬이 오라이온에게 마이크를 넘김. 오라이온은 퍼드득 대며 얼결에 마이크를 잡을 거임.


"어, 저기.. 나는.."


오라이온은 뒤늦게 정신차리고 마이크를 치우며 디에게 속삭였음.


"디, 대체 왜 그래?"
"팍스. 우리 얘긴 나중에 하자."


디는 앉아있는 오라이온의 손을 잡고 다정한 옵틱으로 오라이온을 바라봤음.


"지금은 그냥 그것만 말해. 내가 네 연인이면 싫어?"


이건 저번에 재즈한테 배운 거임. 오라이온이 이 비슷한 질문에 대답 못하는 걸 이미 한번 봤지. 역시 오라이온은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음.

쳇, 잘하면 한번에 보낼 수 있었는데..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군. 스모크스크린은 별수없이 한발 물러났음.


"음, 좋아. 둘 다 자신이 진짜 연인이라 주장할 만큼의 정당성은 확보한 거 같군요. 이제 선택은 온전히 오라이온 팍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센티넬이 마이크를 다시 잡고 말했음.


"어때. 선택할 수 있겠나?"


오라이온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두 메크를 보았음. 오라이온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 센티넬은 만족스런 얼굴임. 어차피 지금은 오라이온이 선택 한다고 해도 분량과 재미를 위해 막았을 거임.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오라이온을 위해 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센티넬이 손짓을 하니 무대 양 옆에 의자가 나타났음. 디와 스모크스크린은 서로를 진득히 바라보다가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겠지.


"쇼의 일정이 잡힌 후로 셋의 주변 메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하나같이 디와 스모크스크린이 오라이온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증언하더군요."


전광판에 코그리스들의 인터뷰 영상이 떴음. 첫빠따는 재즈였지. 재즈는 히죽히죽 웃으며 디와 오라이온이 얼마나 꽁냥댔는지 다소 과장해서 말하고 있었음. 말하는 것만 들으면 잉꼬부부가 따로 없음. 그후로 이어지는 다른 메크들의 증언도 비슷했지. 디는 머리를 쥐어싸맸음. 그때 그건 팍스가 다리를 다쳐서 그랬지 내가 언제 평소에도 팍스를 안아들고 숙소 내를 활보했어! 돌아가면 죽인다!

스모크스크린은 자신에 대한 증언이 나올 때마다 움찔하긴 했지만 그래도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 하지만 오라이온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하루에도 몇번씩 가게 유리창에 붙어서 옵틱을 반짝이며 일당을 꼬박꼬박 모으고 있단 증언엔 견디지 못하고 새빨갛게 과열된 얼굴을 손으로 가렸음.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 언제 봤어?! 아니.. 비밀이었는데..!!


"둘 다 정말 달콤하네요. 선택하기 어려울만 해요."


센티넬의 말에 관중들이 환호하며 공감했음. 어쩜 저런 사랑스런 메크들이 다 있나. 그 사랑스러운 메크들은 지금 무대 위에서 고문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이쯤되면 이쪽이 궁금해지지 않나요? 대체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는 건지."


센티넬은 오라이온의 얼굴이 화면에 잘보이도록 뒤에서 턱을 잡아 강제로 들어올렸음. 오라이온은 인터뷰가 나올 때부터 그냥 죽여달라는 표정으로 넋이 빠져있었지. 하지만 그와중에도 살짝 짜증을 내며 고개를 흔들어 센티넬의 손을 떼어냈음. 센티넬은 이번엔 둘을 향해 말했지.


"이 이야기는 당연히 당사자들에게 들어봐야겠죠. 자네들이 말해보게. 이 메크의 어떤 점에 그리 반해버렸나?"


디는 말해야 된단 걸 알았지만 아직 오그라든 스파크가 펼쳐지지 않은 상태였음. 현재 오라이온의 연인을 자처하고 있긴 해도 팍스와는 친구이기도, 형제이기도 함. 팍스의 매력이라니.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이 수많은 관중들과 팍스 앞에서?


"반한 이유요? 그냥 만난 첫날에 알았어요. 오라이온은 제 운명이라고."


그 누구보다 빨리 회복한 스모크스크린이 마이크를 잡고 뻔뻔하게 말했음.


"첫날에 바로? 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세한 건 저와 오라이온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네요. 그렇지?"


스모크스크린은 오라이온에게 윙크했음. 오라이온은 능청을 떠는 스모크스크린을 보며 간신히 현타에서 빠져나와 쿡 웃을 수 있을 거임. 스모크스크린이 자세한 걸 말하지 않는 진짜 이유를 오라이온은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단순하게, 둘이 처음 만난 게 완전 불법적인 장소였거든.


"이런... 궁금하게 만드는군."
"간단하게만 말씀드리면 그날 오라이온이 절 구해줬어요."


관중석에서 놀라움이 섞인 감탄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디는 코웃음을 쳤음. 구해줬다고 운명이면 우리 구역에 팍스 운명이 아닌 애가 없겠다. 스모크스크린은 주변에서 무슨 반응을 하건 그날의 추억에 푹 빠져 뭉글거리는 표정이 되었지.


'이제 잃어버리지 마.'


그 압수품 창고에서 온갖 개고생을 해서 찾아온 물품을 다른 메크에게 건네주는 걸 봤을 때, 스모크스크린이 느꼈던 충격이란. 나는.. 난 평생 이 메크와 함께 하겠구나.


"그렇게 화끈하고 섹시하고 멋있는 메크가.. 귀엽고 다정하기까지 한 걸 보고 제가 어떻게 운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스모크스크린은 사랑이 가득한 옵틱으로 오라이온을 바라봤음. 오라이온은 부끄러움에 머쓱히 웃었지. 관중들은 풋풋한 연인의 모습에 앓는 소리를 냈음. 센티넬 또한 감동적인 표정으로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었을 듯.


"흐음. 좋은 이야기군. 마음에 들어. 자세한 걸 말하지 않은 게 오히려 플러스야. 그건 드라마에서 풀면 되니까."


..뭔 드라마? 스모크스크린이 센티넬을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센티넬은 관심도 안 주고 디 쪽을 보겠지. 센티넬은 딱히 디를 재촉하진 않았지만 디는 당장 말해야 한단 걸 알았음. 이미 선수도 뺏겼으니 망설이면 시시각각 감점만 당하겠지.

디는 약간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으로 마이크를 들었음. 그때 이야기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팍스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으로 시작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녀석을 이렇게 아끼게 된 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죠."
"호오. 순탄하진 않았나보군."


디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이었음.


"지금에 와선 팍스가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다들 알겠지만.. 그때의 전 광부로 일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신참이었어요. 그런데 팍스같은 사고뭉치를 끼고 일하려니..."


디는 죽은 옵틱이 되었음. 관중석의 코그리스들은 디의 심정에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었지.


'너 이거 사기계약이야... 서로의 뒤를 봐주긴 뭘 봐줘! 나만 압도적으로 널 챙기고 있잖아!'
'으으.. 미안해..'


오라이온을 수도 없이 겪은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때의 디는 더이상 참지 못했음.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결국 그때 팍스와 한번 절교했어요."


관중석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렸음. 여기저기 술렁거림이 가득함.


"호오. 갈등이 꽤 컸던 거 같은데 어떻게 화해한 건가?"


센티넬의 질문에 디는 옵틱을 닫았지. 옵틱을 다시 연 디는 어딘가 허탈해보이는 가벼운 미소를 띄고 있었음.


"그때 깨달았거든요. 팍스가 웃는 모습을 하루라도 안 보면 제가 못 견딘다는 걸."


이번엔 관중석에서 거의 비명소리가 나왔음. 도파민 가득한 환호성 속에서 오라이온은 옵틱지진이 일어나선 디를 보고 있었지. 저런.. 저런 부끄러운 소리를 하다니.. 디 아닌 거 아니야? 사실 디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지만 마이크만 부숴져라 쥐며 여유로운 척 하고 있을 듯.


"아아. 갈등과 극복. 정말 좋은 스토리야."


센티넬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는 게 뭘 위해선지 아는 디는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 게 후회됐지. 스모크스크린에게 대항하기 위해 최대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꺼낸 건데.. 이걸로 드라마는 절대 만들고 싶지 않음. 특히 디가 오라이온과 화해하는 과정 중에 뭔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으윽.. 흑역사가...


"둘 모두 정말 훌륭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주관적인 기준으론 선택하기 정말 어렵겠군."


센티넬이 스크린을 향해 손짓했음. 스크린에 웬 차트와 표가 나타났지. 저게 뭔지 옵틱을 꿈뻑거리던 무대 위 코그리스들은 곧 내용을 파악하고 경악으로 물들었음.


"그럼 이번엔 현실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고."


세 메크들의 실적과 강등 내역들. 오라이온과 스모크스크린은 강등과 사고 내역이 빼곡하게 작성되어 있었지만 디는 비교적 깨끗하겠지. 그마저도 오라이온과 엮였을 때의 일들이 대부분이고.


"이거 참. 우리 마성의 메크께선 광부로선 영 성실하지 못한 모양이군."


센티넬은 오라이온의 보고서를 가리키며 웃었음. 관중석에서도 웃는 소리가 남. 아.. 난 괜찮다.. 나는 괜찮다.. 오라이온은 침착하게 되내었음. 어차피 다들 아는 건데 뭐...

문제는 스모크스크린이었지. 스모크스크린은 불안한 옵틱으로 안절부절을 못했음. 이쪽도 사고치고 다니는 거에 큰 수치는 없었다만 문제는.. 이런 실적이 공개된 이상 나올 이야기가 뻔했다는 거야.


"오라이온을 감당하는 건 웬만큼 실적 좋은 메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겠어."


센티넬이 스모크스크린을 바라보며 눈을 곱게 휘어 웃었음. 스모크스크린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디의 실적표를 보곤 살짝 주눅이 든 상태임. 저렇게 실적이 좋았단 말이야..?

디는 센티넬이 실적 보고서로 스모크스크린을 공격하니 옵틱을 데록 굴렸지. 아까 전엔 실적 들먹이면서 포기하라 하더니... 역시 그냥 해 본 말이었나.


"저기. 저희가 이런 걸 공개하는 데에 동의라도 했나요?"


오라이온이 마이크를 잡고 차갑게 말했음. 스모크스크린이 수치심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임. 쇼에 정말 최소한으로만 협조하던 오라이온이 무대 위에 올라와서 한 사실상 첫 발언이었음. 센티넬은 오라이온을 바라보며 옵틱을 가늘게 뜨다가 활짝 웃었음.


"이런, 우리 친구가 부끄러운 모양이군요. 실례했습니다."


센티넬이 손짓하자 스크린에서 표가 사라졌음. 센티넬은 오라이온이 무슨 항의를 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쇼를 이어가겠지.


"그래도 감동적인 부분은 있죠. 그가 오라이온과 교제를 시작한 시점부터 확실히, 사고 내역이 줄었다는 겁니다. 앞으로의 성장도 기대해볼만 하죠."


센티넬은 가볍게 박수를 쳤음. 관중석에서도 응원이 날아들었지. ...그래도 저쪽 실적 따라잡으려면 한참 먼 거 같은데. 스모크스크린은 한숨을 내쉬었음.


"그에 반해.. D-16.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센티넬이 디를 향해 빙글 돌았음. 날개가 활짝 펴졌지. 그리고 아까 무대 아래로 사라졌던 문이 다시 위로 올라왔음. 디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센티넬을 바라봤음. 센티넬은 생긋 웃으며 날개를 다시 접었음. 그러자 날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문 안쪽이 보임. 디는 스파크가 철렁였지.


"최근에 애인이 있었다고?"


문 안에서 끌려나온 건 프라울이었음. 프라울은 묶여있었지. 입에 재갈도 있었고. 그걸 무슨 선물처럼 포장해놔서 언뜻보기엔 그냥 연출같음.


"헤..헤어졌.."
"아까는 열정적으로 토로하지 않았나. 하루라도 못 보면 안된다면서. 그래놓고 자네는 애인을 만들고 다녔단 말인가?"


센티넬은 웃고 있엇지만 명백하게 공격적이었음. 디가 당황해서 프라울을 보니 뭔가를 필사적으로 말하려 하고 있음. 손으로도 입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옵틱을 감았다 뜨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디는 그딴 비밀 신호 같은 거 모름.

디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니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왔음. 디는 궁지에 몰려 한참 생각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할 거임.


"프라울과 사귄 건.. 사실.. 거짓말이었어요."
"호오?"
"팍스가.. 다른 메크를 만나는 게 싫어서..."
"아하, 질투 유발 작전? 클래식하군. 이 말이 맞나?"


센티넬이 프라울에게 묻자 프라울은 센티넬을 노려보다가 별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 관중석은 그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임. 오히려 흥미진진한 듯 자세히 듣고 싶어하는 반응이었지.

반응이 유해지자 급한 불은 껐다 싶어 안심한 디는 오라이온을 바라봤다가 스파크가 멎는 줄 알 거임. 오라이온이 처음보는 표정으로 디를 보고 있었음. 화가 났다? 슬프다? 놀라움? 실망? 어떤 건지 모르겠어. 확실한 건 좋은 표정은 절대 아니라는 거였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또 재밌는 걸 발견했거든."


센티넬은 다시 한번 스모크스크린의 실적표를 띄웠음. 그리곤 가장 최근에 징계 받은 내역을 짚음.


"오라이온과 교제하고 최대한 얌전히 지내던 스모크스크린이 갑자기 며칠 동안 무단으로 작업장에 나타나지 않았더군. 공교롭게도 그게 자네 둘이 사귀기 시작한 날짜와 거의 일치하던데."


디는 환기 시스템 고장으로 딸꾹질이 나올 거 같았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어때. 우연인가? 이건 자네가 말해보게."


센티넬이 스모크스크린을 향해 물었음. 스모크스크린은 마이크를 잡았음.


"당연히 우연이죠. 무슨 말이에요?"
"오. 그럼 그동안 뭘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그냥 쉬었어요. 당신도 말했다시피 최근에 사고 안 치고 얌전히 지냈거든요. 그러다보니 좀 놀고 싶어져서.."
"괴한을 만났다고 했잖아."


스모크스크린은 능청스레 말을 이어가다가 오라이온의 말에 멈췄음. 그냥 농담한 거라고 얼버무리기엔 오라이온은 상황이 돌아가는 걸 이미 알아차린 눈치였지. 원래라면 터무니 없는 음모론이겠지만 프라울이 엮여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임. 스모크스크린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자 오라이온은 이제 손이 떨리기 시작했음. 디는 오라이온이 저를 보는 표정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지. 배신감.


"팍스.. 난.. 그냥.."


그때 프라울이 센티넬 쪽으로 나오며 고개를 저었음. 공격 의사가 없다고 최대한 순하게 뜬 옵틱으로 올려다보며. 센티넬은 딱히 믿진 않았지만 재밌을 거라 판단하고 프라울을 풀어주었지. 프라울은 자유를 얻자 디 쪽으로 걸어갔음.


"이거 어떡해?"
"어쩔 수 없어. 이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야."


디가 속닥이자 프라울은 디의 마이크를 잡았음. 그리고 오라이온을 향해 말할 듯.


"오라이온. 내가 갑작스런 구역 이동을 당한 건 스모크스크린이 전산 조작으로 날 옮겨서다."


계속되는 폭로에 웅성거리던 관중석이 다시금 경악했음. 오라이온은 이제 그 표정으로 스모크스크린을 봤지. 스모크스크린은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당황해서 프라울과 오라이온을 번갈아봤음.


"아니, 나, 나는.. 저쪽이 먼저 했어!"
"그렇다고 강제로 구역을 옮겨? 광산일 위험한 거 알잖아! 익숙치 않은 구역에서 일하다가 프라울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아, 이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하네. 프라울은 얼마되지도 않는 양심이 아픈 걸 느끼며 옵틱을 닫았음. 오라이온이 그렇게 화난 얼굴은 모두에게 처음이었지. 센티넬은 무대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음. 그냥 이 광산에 둬봤자 쓸모없는 커플을 밀어주고 굴려먹으려 했더니... 이 전개도 꽤 흥미진진한데?


"갑자기 새로운 사실들이 너무 많이 밝혀졌군요. 이대로 결정하는 건 무리일 테니 잠깐 휴식시간을 갖겠습니다. 모두들, 2부에서 뵙죠."


센티넬이 오라이온을 일으켰음. 오라이온은 말없이 센티넬을 따라 무대를 떠났지. 무대 위에 남겨진 메크들은 진행요원이 오기 전까지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못했음.





디오라 스뫀오라

[Code: 6e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