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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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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진스키의 장르문학 작가로 살기,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임

글쓰기 강의를 할 때마다, 드라마 대본을 작업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지난 여섯 달간 혼자 파일럿 대본을 완성했다며 그걸 방송사에 어떻게 팔지 조언을 구하는 일이 적어도 한 번씩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 아픈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영영 팔리지 않을 글을 쓰느라 지난 여섯 달을 허비했노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내 말을 못 들은 체하면서 경력이 없는 초보 작가가 파일럿 대본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증거로 내민다. 그러나 그런 일은 소문으로만 무성한 유니콘일 뿐, 현실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소문의 진상을 열심히 파헤치다 보면, 그 초보 작가가 유명 작가의 자식이었다거나 약간의 경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발표한 작품도 없고 경험도 없는 생초보 작가가 파일럿 대본을 팔 가능성은 없다.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디어란 그 자체로는 쓸모없으며 그걸 잘 표현해야 가치가 생긴다. 드라마 아이디어도 마찬가지인데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작가가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과 대부분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그 정도의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방송사나 스튜디오가 스토리텔러로서 그 사람의 성장을 지켜봐 왔으며 노련한 제작자로서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의 경험을 쌓으려면 프리랜서 작가에서부터 보조 작가, 스토리 에디터를 거쳐, 공동 제작자, 제작자, 총괄 제작자 자리까지 차근차근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기 프로그램을 만들 영향력이 생기고, 방송사들도 그 작가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이해하고 신뢰해준다.

불공정하고 편협한 것 아니냐고 반발심이 든다면,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뉴욕에서 멜버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고 할 때, 조종석에 누가 앉아 있어야 마음이 놓일까? 한 명은 같은 길을 수백 시간 비행한 경험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다음 주 목요일에 비행 학교에 갓 입학할 사람이다. 후자를 생각할 때 내심 드는 불안을 방송사와 스트리밍 업체도 익히 알고 있기에, 글쓰기 경력이 없는 사람에게 수백만 달러를 주면서 작품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혹시 그 사람이 촬영 도중에 포기하고 손을 떼버리지는 않을까 못내 불안한 것이다. 무엇을 쓰느냐 못지않게 신뢰를 주느냐도 중요하다.

작품을 팔 능력을 가진 기성 작가나 제작자를 설득해 협업할 기회를 따내기도 극도로 힘들다. (그 사람이 당신의 친구라면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친구와의 협업은 얼마 안 가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드라마 집필은 흔치 않은 기회이자 막대한 보수를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뭐 하나만 삐끗해도 금세 망가지고 만다. 혼자 힘으로 작품을 팔 수 있는 작가나 제작자가 굳이 뭐하러 무명작가의 협업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초보 작가와 일하기 위해 방송사를 설득해야 하고(그래도 방송사는 여간해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혼자 가질 돈을 절반으로 나누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정말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를 써서 팔고 싶으면,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작품을 보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그러면서 작업물을 통해 당신만의 특별한 관점을 증명하고, 제작과 글쓰기 기술을 익히자.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성장하다 보면, 방송사와 스튜디오가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작가인지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할 것이다. 그 단계에 이르러서야 파일럿 대본을 팔아 당신만의 작품을 만들 기회가 찾아온다.

- <스트라진스키의 장르문학 작가로 살기>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 지음, 송예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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