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혹시나 해서 다시 도서관을 찾아 전날 케이가 앉아 있었던 자리로 가 봤지만 그 자리에는 모르는 얼굴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전날과는 다른 열람실에서 공부 중인 케이를 찾은 건 만년필을 손에 쥐고 도서관을 한참 뒤지고 났을 때였다. 뒷모습이었지만 노부가 케이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동그랗게 예쁜 뒤통수를 바라보며 걸어가서 케이가 노트북 옆에 꺼내놓은 다이어리 위에 만년필을 내려놓자 휙 고개를 드는 케이와 눈이 마주쳤다. 

"... 어디서... 아,어제 거기서 흘렸군..."

어디서 만년필을 주운 건지 물으려 했던 듯한 케이는 그러나 어제 필통을 쏟으며 흘린 거라는 걸 깨달은 듯 말을 흘리며 얼버무렸다. 

"일부러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부가 감사인사를 받고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계속 쳐다보고 있자, 케이는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필통에 잘 넣었다. 전생이었을 그때는 외할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만년필이라 소중히 아꼈었는데 지금은 누구에게 받은 선물이라 아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자, 케이는 고개를 들고 흘긋 노부를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내리며 조용히 물었다. 

"사례는-"
"같이 식사 한 번 하시죠."

지금의 케이는 전생에 먼저 식사를 권했던 케이가 아니라서. 케이는 노부의 제안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확 구겼지만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케이를 바라보며 노부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도 1700년대의 자아와 20xx년의 자아가 완전히 섞이지 않은 느낌이라서 핸드폰이 손 안에서 낯설게 덜그럭거릴 법도 한데, 노부의 몸은 정말로 자연스럽게 20xx년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올리며 지문을 인식하는 노부의 움직임도 흠잡을 데 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자기가 더 놀란 노부는 놀란 맘을 추스르면서 케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식사 약속을 핑계로 케이의 번호를 받으려고 머리를 써 봤지만...

"폰번호를-"

이라고 입을 열었으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케이가 책상에 펼쳐놓은 노트북과 짐을 다 챙기더니 일어섰다. 

"지금 가시죠."

아무리 봐도 케이의 냉랭한 표정이 지금 당장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폰번호를 주기 싫어서 빠르게 '사례'를 해결하려는 것 같은데. 노부는 케이의 뒤를 따라 도서관을 나가며 어제도 밤새도록 했던 생각을 또 했다. 지난 생에서 케이는 노부보다 먼저 죽었다. 노부의 마지막 기억이 케이의 묘 앞에 서서 케이가 묻힌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러니 케이가 분명히 노부보다 먼저 죽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해 봐도 케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케이와의 행복했던 기억들도 잔뜩 있었고 케이가 지친 얼굴로 모두를 등지고 틀어박혔던 기억도 있었다. 어디에 있었냐고 왜 오지 않았냐고 케이를 다그치던 자신의 모습은 떠오르는데 왜 케이를 다그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에는 듬성듬성 빈틈이 있었다. 특히 혁명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가두시위 때부터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때부터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케이와 노부가 왜 싸웠는지, 케이가 실종됐던 이유가 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고. 

케이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괴롭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노부를 바라보던 케이의 모습은 슬플 정도로 생생하니... 

케이, 날 원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워하는 거예요?

당신도...

그때를 기억해요?





먼 과거의 그날 노부가 케이를 따라가 자작나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케이는 자신이 황자라고 밝혔다. 5황자이고 황제의 8번째 자식이라고. 그제야 노부는 이니셜로만 적혀 있던 M.이 활가의 성인 마치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때 이 나라는 분명히 일처일부제가 법령으로 규정돼 있었지만, 황제에게는 애인들이 많았다. 황제가 대놓고 법을 어길 수 없으니 황제도 물론 부인은 한 명만 두었다. 황후 한 명만. 그때의 그 나라는 황권만큼 신권도 강했다. 신이 진짜 인간들의 삶에 관여했다는 건 아니고 신관들의 힘이 강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모든 걸 제멋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신권이 강력해서 신전이 황궁을 강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혁명을 준비할 때 신전에서 어떻게 나올지를 두고 엄청나게 비관적인 예측이 강세였을 정도로. 실제로 혁명이 벌어지자 신관들은 신전의 문을 걸어잠그고 숨어 버렸지만. 

어쨌든 신전의 힘이 강하다보니 황제도 신전의 눈치를 봐야 해서 첩은 둘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황제의 딸들과 아들들은 모두 배다른 형제자매들이었다. 3황자를 빼고 모두가 황후 소생이 아니었고, 나머지 7명의 어머니도 다 달랐단 말이었다. 황실에서는 쉬쉬했지만 사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케이는 그 배다른 황자녀들 중 하나가 자신이라고 밝힌 것이었다. 

그때 케이가 가장 좋아했던 건 닭고기 요리였다. 닭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 같은 걸 레드와인에 푹 끓인 요리를 아주 좋아했었다. 들어가는 와인은 싸구려 레드와인이었기 때문에 황자가 즐겨먹기엔 지나치게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케이의 어머니는 가난한 지방 소귀족의 딸이었다. 그리고 케이는 황제가 지방에 사냥하러 갔을 때 어느 소귀족이 딸을 황제의 침실에 밀어넣어 생긴 아이였고 케이는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입맛이나 생활방식이 소박한 면이 있었다. 닭고기 요리도 외할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요리였고. 그래서 수도에 올라온 뒤에도 평민들을 상대로 한 저렴한 밥집에서 종종 이 닭고기요리를 먹곤 했었고 노부도 종종 데려갔었다. 노부에게 처음으로 밥을 사 줬던 날도 케이의 고향식 닭요리와 무척 비슷하다며 닭요리를 사 줬었고.





그렇기에 노부는 케이에게 식사를 권하며 자연스럽게 닭요리를 떠올렸다. 게다가 지금도 대학가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해 가정식 요리를 파는 저렴한 밥집이 많아서. 

"닭고기 요리 맛있게 하는 데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케이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닭고기 요리 안 먹습니다."

어...?

노부가 기억과 현재의 괴리에 당황해하며 케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케이는 노부를 흘긋 보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하신 식당이 '느티나무 아래'라면 거기 가는 건 좋습니다. 맛있는 요리가 많은 곳이니까요."

그랬다. 가난한 대학생을 상대로 장사하는 그 포근한 이릉의 식당은 다양한 요리를 판매했고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끓이는 거라서 1인분만 만들기 힘들지만 커다란 냄비에 푹 끓여서 1인분씩만 담아서 팔기도 하기 때문에 노부는 닭요리를 주문하고 케이는 다른 요리를 주문해도 상관없기 한데...

닭요리를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닭요리가 더 맛있다고 하면서 외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던 케이의 얼굴이 아직 생생한데. 

안 먹는다고? 왜?

그러나 케이는 정말로 버터를 녹여 흰살생선을 살짝 구워낸 요리를 시켰고 혹시나 해서 노부가 시킨 닭요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어진 식사 자리는 조용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사실 노부는 지난밤에 잠을 설치며 현재의 세상에 대한 기억을 꼼꼼하게 되짚어봤고, 케이를 만나기 한참 전에 도서관에 와서 역사 기록도 많이 찾아봤다. 케이와 노부가 먼저 세상을 떠났음에도 케이와 노부의 친구들은 정말로 힘을 냈던 모양이었다. 다들 혁명 준비에 돈을 다 퍼부어서 마른 빵에 싸구려 와인을 마시면서도 신나게 꿈꿨던 혁명 이후의 아름다운 세상을 친구들은 노부와 케이가 없어도 정말로 잘 만들어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언제나 완벽하고 선할 수는 없어서 2024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빈부격차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고, 끔찍한 범죄가 매일 신문에 실리고 차별과 혐오가 넘실거리기는 하지만 노부와 케이, 친구들이 봤던 그때의 지옥보다는 그래도 나아졌다. 돈이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고 해도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의 차이로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세상은 아니었다. 친구를 두 명이나 허무하게 보낸 뒤에도 남은 친구들은 힘을 내서 혁명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준 것이었다. 역사서에 반짝이는 이름으로 남은 친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보며 얼마나 고맙고 설렜던가. 

케이가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해도 이제는 역사서에 위인으로 남은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었는데. 

노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조용히 생선만 조금씩 썰어 입에 넣는 케이를 시무룩하게 바라보던 노부는 우울한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250여 년이나 흘렀는데도 새처럼 조금씩 쪼아먹는 건 그대로인 케이가 오물오물 식사를 하는 모습은 여전히 귀여워서.

"... 왜요?"
"네?"
"왜 웃냐고요."

케이가 뭘 먹을 때마다 노부가 귀여워서 웃으면 그때의 케이는 웃지 말고 먹기나 하라며 노부의 입에 먹을 걸 넣어줬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고. 
아픈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주는 대신 차갑게 돌아서게 됐고
노부에게 웃어주지 않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안아주지도 않는 케이는.

노부와 달리 그때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때의 케이와 같은 사람도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도 어떤 케이든 노부에게는 여전히 애틋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사람이라서 노부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아픈 마음으로 다시 웃었다. 

"그 만년필은 소중한 거예요? 이름도 새겨져 있던데."
"네, 선물받은 거라."
"... 애인분한테?"

먼 옛날에 야오토메가 선배가 고향 특산물이라고 준 거라며 가져온 열매를 멋모르고 씹었다가 입 안 가득 퍼지는 쓴 맛에 기겁했을 때처럼 입 안 가득 쓴 맛이 느껴지는 질문을 던지자 케이는 아무 말 없이 생선만 씹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외할머니에게 받은 겁니다."

현대의 외할머니도 케이를 많이 사랑하시나 보네. 그때 그 시절에 남편의 헛된 야망 때문에 딸이 황제의 첩이 되고 하나뿐인 외손자가 부유한 수도 귀족들을 어머니로 둔 황자녀들 사이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평생의 한이었던 케이의 외할머니는 케이가 안타까워서 더욱 사랑해 주었었다고 했다. 그때도 케이는 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고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맞아, 외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파발을 받은 케이가, 그래, 파발이 왔었고. 케이가 사색이 돼서 노부가 달래주기도 했었다. 괜찮으실 거라고... 그리고... 케이가 급하게 작은 짐만 챙겨서... 맞아... 그리고 그때... 케이가... 기차를...





과거의 기억들 중에서 잊혀졌던 파편 하나가 맞춰지려고 하는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게다가 속도 함께 뒤틀려서 방금 먹은 닭고기가 올라올 것 같은 기분. 노부가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고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숙이자 앞에서 포크가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 이후부터는 기억이 흐릿했다. 토했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나친 두통 때문에 눈앞이 점멸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은 기억난다. 케이가 노부를 끌어다 어디 눕히고 포근한 뭔가를 덮어준 것도 기억났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줬던가. 안아줬던가. 기억나진 않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체온이 노부를 애틋하게 감싸주며 닿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의식이 사라졌다. 

흐릿하게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노부!!!!'라고 외치는 케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안 돼, 노부! 안 돼! 정신차려! 왜 이래! 노부! 노부!!!!' 라고 외치는 절박한 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지만...





환청이겠지.




#성혁망사놉맟환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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