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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22:48
아홉겹 벗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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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즈너붕붕
레이놀즈가 나타났을 때부터 불안했다. 뜻 모를 불안이었다. 딱히 중점이 없는 거라고 해야 되나.
그가 설마 스탭들의 파티에서 뭔가 튀는 행동을 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등장한 것부터가 이례적이지만 그런 것보다 더 상식적이지 않은 것들 말이다.
사실 이 파티에 나타난 것 자체는 놀랍지 않다. 그가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았나. 파티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사람 빤히 쳐다보면서. 맨날 내 눈빛에 태클거는데 본인 눈이 더 강렬하다는 걸 도통 모르는 듯 하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볼 때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몇 초 동안 숨이 막힌다. 방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도 한다.
사실 상 그가 나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내몰린 초식동물처럼 움츠러지는 마음이 우습다.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보고 있자니 매우 피로해졌다.
애초에 파티 자체를 그렇게 즐기는 성정이 아니기에 이 공간에서 사회성을 발휘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은 아니지만 일에 걸쳐있기는 한 사적인 무언가. 사적이라고도 할 수 없고 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반갑지는 않냐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자주 본 얼굴이다.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자주 봤다. 보고 싶어도 또 보고 싶다는 감정은 내게는 없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같은 행동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나는 상대와 함께 하는 시간도 소중하게 여기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도 소중하게 여긴다.
레이놀즈에게 보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려면 그와의 거리를 좀 느껴야만 했다. 지금은 내 기준으로 매우 가까웠고.
티모시와의 대화 역시 나쁘지 않다.
친하냐 물으면 그렇다고 대뜸 대답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이가 어색하지는 않다. 딱히 불편한 상대도 아니고.
하지만 이런 식의 상황은 싫고 불편하다. 처음 이 자리에 있던 건 나니까 엄밀히 따지면 이 자리의 현주인은 나다. 저 남자 둘이 꺼지는 게 맞다. 대게 이런 곳은 음악소리에 묻히니까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된다. 타인의 시선같은 거 신경 안 쓰고 감정을 발산한다.
"내 말 못 들었어? 둘 다 꺼지라고요."
한 번 더 말하자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둘을 나란히 노려봤을 뿐이다.
어쨌든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와, 라이언 레이놀즈다!' '헐 유명한 배우잖아.' 이런 열렬한 반응은 없었다. 개중에 인사를 좀 오버해서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취기에 흥이 올라 그런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이놀즈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제법 그럴싸했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가 먼저 자기를 소개하도록 기다렸고 몇 번 대화를 해 본 사람은 이전의 대화를 이어나가듯 막힘없이 주도했다.
어설픈 신경전을 나눈 티모시와도 막상 대화는 잘 하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딜 가서도 살아남을 인간이야. 자신을 채찍질하고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뭔가를 계속 해내겠지.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있던가 괜히 생각하게 된다. 자기반성 단계까지는 아니고.
"아가씨. 파티에서 왜 혼자 있어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로 다가오는 그의 몸에는 온갖 것들이 달려 있었다.
할로윈 맞이 유령같은 건 아니고, 누군가가 꽂아준듯한 귀 위의 작은 꽃이나 슈퍼스타라고 적어 티셔츠에 붙여놓은 찢어진 종이같은 것들.
이래나 저래나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사람 손을 좀 탔네."
"오, 남의 손 탄 거 안 좋아하나봐요? 예민하시네."
레이놀즈는 개운하다는 듯 웃으며 몸에 붙어있던 것들을 미련없이 털어냈다. 꼭 내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던 사람 마냥.
"여긴 왜 왔어?"
"허니. 넌 모르는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거든."
"그쯤이야 나도 알아. 나도 그쪽이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쇄골을 검지로 꾹 눌러주자 고장난 인형처럼 애매한 소리를 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같이 일하는 사람?"
"또 뭐가 문제지..."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어떤 부분을 거슬려했는지 알겠다만 어디까지나 그에 말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냥이라고 안 했어."
"어쨌든."
"좋아. 같이 일하는 친구."
"심지어 가까운. 매우 가까운. 엄청나게 가까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헉! 라이언 레이놀즈랑 허니 비가 저렇게나 친했어? 하고 놀랄만큼."
결국 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나는 그냥 말을 한 것 뿐인데 실수해버린 느낌이다.
"원래 그렇게 집착해?"
"나?"
"응."
"대체로..."
레이놀즈가 요망하게도 예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빼앗아 마셨다.
"안 그러지."
"아아. 안 그러는구나."
"모든 거에 집착하면 미친놈같잖아. 에너지가 엄청 빼앗겨. 나는 그것보다, 내 에너지를 아껴뒀다가 내가 원하는 데에 바치고 싶거든."
충직하다 못해 죽음까지 쫓아올 것 같은 신하를 만난 느낌이다. 바치다니. 그건 너무 과한 어투라고 지적하려다가 참았다.
나를 바라보던 그가 사근사근 몸을 움직여 벽에 기댔다. 어쩐지 든든한 그늘이 생긴 것 같다. 나보다 한참 큰 사람이라 소란스러움에서 나를 숨겨주는 느낌이다.
"허니."
"응."
"네가 남자다움에 집착하는 사람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로 해두는 건 중요하잖아."
"응."
"말로 뱉는다는 행위가 생각보다 더 의미 있더라고."
"그렇지."
"난 어떤 방식으로든 널 좋아해."
어떤 방식이라는 부분이 걸렸다. 물론 그 뒤에 발언이 훨씬 더 큰 거지만 앞부분부터 짚어봐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방식?"
"네가 원하는 것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거야. 우정을 원한다면 기꺼이."
"......"
관계의 키를 저가 아니라 내가 쥐고 있다고 언질하는 것 같아서 묘해졌다. 사실 상 이 관계의 시작점은 레이놀즈이지않나. 나에게 결정권을 맡기는 것 같으면서 실상은 그가 휘두르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휘둘릴 수밖에 없는 거고.
"바친다고 했잖아. 내가 원하는 데에."
"이기적이야."
"나? 방금은 제법 이타적이지 않았어? 그럴싸했을텐데?"
그가 킥킥 웃으면서 내쪽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그가 자주 뿌리는 시원한 향수 냄새와 술냄새가 적절하게 섞여 풍겼다.
마침 테라스였던 터라 밤바람 냄새도 우릴 감싸고 있었다. 이거 정말 묘하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지척에 있는 그를 봤다. 마음 먹으면 얼핏 닿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아닌가. 그럼 언제가 맞는 거지. 머리가 엉킨 실처럼 굳었다. 별 말 못하고 그렇게 서있기만 하자 레이놀즈가 큰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는 그냥 그 상태로 내 머리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벽에 마주 기대 선 채였지만 내 머리는 그의 어깨에 기댄 셈이었다.
맥없이 휘둘리고 있네. 자조적인 웃음을 짓다가 그냥 살짝 눈을 감았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했으니까. 그게 진실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나의 귀는 이미 레이놀즈의 맹세를 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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