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61066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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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시커의 선체는 부드러운 크림빛을 머금은 흰색이었다. 갑판 위로 펼쳐진 넓은 차양막은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며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 앉으면 아득히 펼쳐진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고, 선내로 이어지는 짧은 계단을 내려가면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배 안쪽에는 두 개의 방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방마다 작은 침대가 한쪽 벽면에 자리했다. 벽에 난 창문으로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였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창을 타고 흘러들었다. 방 옆엔 간단히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아담한 주방이 갖춰져 있었고, 선실 곳곳엔 오래되었지만 정돈된 가구들이 아늑함을 더해주었다. 세 사람의 임시 보금자리로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해 보였다.

몇 개 안 되는 짐을 정리하고 나니, 짧아진 가을 해가 벌써 바다 건너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배는 여전히 항구에 묶여 있었지만 바닥이 이따금씩 일렁이며 바다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로건은 여전히 어딘가 조용해진 웨이드의 모습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지만, 잠시 홀로 먹을거리를 사러 다녀오자 어떤 이유에선지 원래의 웨이드로 돌아온 모습에 안도했다.

세 사람은 차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과 루시가 챙겨준 간식, 그리고 웨이드가 잠시 나가서 사 온 것들로 간단한 저녁을 준비해 갑판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근데, 운전은 누가 하는 거야?” 
웨이드가 음식들의 봉지를 풀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물었다.

로건은 한심하다는 듯이 웨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찰스가 껄껄 웃으며 웨이드를 향해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렸다.

“웨이드, 자네가 자꾸 까먹는 게 있지. 이 친구는 자네보다 거의 다섯 배는 더 오래 살았다고.”

“아, 그랬지. 로건도 애처럼 굴 때가 있어서 깜빡했어요.” 웨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해가 서서히 수평선 너머로 내려가며 바다에 길게 주황빛을 드리웠다. 날이 저물며 서늘해진 바람에 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실로 가더니 담요와 약 두 알을 들고 나와, 한 손에 담요를 넓게 펼쳐 찰스의 어깨 위로 덮어주고 약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남은 담요 하나를 웨이드에게 무심히 던졌다. 웨이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 그 담요에 얼굴을 맞았다.

“와, 나도 주는 거야? 이건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남아서 주는 거야. 덮기 싫으면 말고.” 로건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니아니. 덮어야지. 로건, 당신은 안 추워? 이리 와서 나랑 같이 덮을래?” 웨이드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시끄러워.” 

웨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제가 헷갈린다고요.
그러면서 찰스를 향해 동의의 눈짓을 보냈다. 찰스는 약 두 알을 손에 꼭 쥐고는 로건과 웨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찰스, 약이 한정적이라 가끔은 다시 돌아가서 보충해야 해요. 기름을 넣을 때마다 구해오려고요.” 로건이 찰스에게 뚜껑을 딴 생수병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찰스가 말하며 손에 쥔 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은 약을 응시하며 머뭇거렸고, 그가 약을 바로 삼키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찰스?” 로건이 물병을 살짝 흔들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찰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로건에게서 물병을 받아든 그는 마침내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웨이드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나 같아도 질리겠어요.”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아까 식당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찰스와 로건에게 건넸다.

로건은 그런 찰스를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웨이드가 건넨 샌드위치를 들고 그 옆에 조용히 앉았다. 셋은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아 말없이 저녁을 먹으며 서서히 어두워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언제 출발할거야?” 웨이드가 조용히 물었다.

“내일 새벽에.” 로건이 짧게 답했다.

잠시 고요가 흐르던 중, 웨이드가 말을 던졌다. “방이 두 개던데.”

로건은 웨이드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찰스를 슬쩍 눈짓으로 가리키며 그를 째려봤다. 이상한 말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찰스는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웨이드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오늘은 두 분이 각각 한 방씩 쓰시라고.”

“너는?” 로건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난 어디 들릴 데가 있어서,” 웨이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로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그럼.”

세 사람은 적막 속에서 샌드위치를 씹었다. 주변엔 저 멀리 몇 척의 배들이 덩그러니 떠 있을 뿐, 항구의 끝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져 한적함이 감돌았다.

입을 정리하던 웨이드는 긴 다리를 쭉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따라 고개를 든 두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자, 웨이드는 짐짓 활기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이 데드풀은 밖에 잠시 다녀올 테니 안락한 저녁 보내십시오!”

과장된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살짝 숙인 웨이드는 장난스레 웃으며 배에서 항구로 폴짝 뛰어내렸다.

찰스는 웨이드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로건을 향해 나지막하게 한 마디 던졌다. “좀 잘해줘.”

로건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뭘요?”

찰스는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좋으면서 왜 싫은 티를 그렇게 내는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들은 로건은 고개를 숙인 채 샌드위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찰스는 잠시 그의 옆에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냥 솔직하게 살아. 괜찮아, 그래도 돼.”

로건은 말없이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웨이드는 그가 말한 것처럼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로건은 조용히 씻고 와 찰스를 침대에 눕혔다. 창밖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배 안에는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가늘게 들려왔다.

“잘 자요, 찰스. 내일이면 바다로 나갈 거에요.”

“그래, 자네도 잘 자게.” 찰스가 피곤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로건은 이불을 끌어 찰스의 어깨 위까지 덮어주고, 휠체어를 침대 가까이에 옮겨 두었다. “혹시 모르니까 여기 둘게요. 필요하면 나를 부르든지, 아니면… 옮겨 탈 수 있죠?”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의 높이가 마침 적당해, 스스로 휠체어로 옯겨타는 것도 가능해보였다.

로건이 천장에 달린 전등을 끄고, 낮은 문턱에 허리를 숙여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며 찰스는 온전한 적막에 휩싸였다.

주변의 소리들은 사라졌고, 어둠은 마치 무거운 담요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침대 위에 누운 채, 찰스는 이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이 배에,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물결이 선체를 두드리는 미세한 진동이 그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고, 그 속에서 오랜 기억과 감정들이 잠깐씩 떠올랐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 적막 속에서 찰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던 한밤중에 찰스가 눈을 떴다. 방을 건너, 벽을 타고 희미하게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찰스는 조용히 이불을 걷어내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옆으로 옮겼다. 팔로 침대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켜 휠체어로 옮겨 타는 과정은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했지만, 이제는 노쇠한 탓에 숨을 몰아쉬며 긴장한 심장박동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는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천천히 굴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배의 갑판에서 이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휠체어는 매끄럽게 움직였다. 작은 문턱조차 없었다. 찰스는 잠시 눈을 돌려 바닥과 복도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아마 로건이 그를 위해 배려했을 터였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배의 생김새가 새삼스럽게 다가와, 찰스는 묘한 감정에 잠겼다.

그가 휠체어를 조금 더 굴리자, 잠시 멈추었던 신음이 다시금 새어 나왔다. 로건의 방이었다. 척박한 기억과 고통을 담아 끌어내는, 그 낮고도 거친 숨소리. 찰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고통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끝내 찰스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로건은 작은 침대 위에 이불도 덮지 않은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두 손은 이불을 쥔 채로 무의식적으로 떨고 있었다. 찰스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 옛 엑스맨 스쿨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끔 밤이 되면 로건의 방에서 들리는 몸부림 소리에 찰스의 밤도 깨어나곤 했었다. 학생들이 곤히 잠든 복도를 홀로 지나 로건의 방 앞에 서면, 그가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리곤 했다. 

“로건…”

찰스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로건의 이마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짙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찰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능력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통받는 그의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집중하자 찰스의 정신은 서서히 로건의 내면으로 흘러들어갔다. 황량하고 어둡기만 한 들판 한가운데, 로건이 혼자 서 있었다. 찰스가 천천히 다가가 그를 불렀다.

“왜 혼자 여기 있어.”

“찰스.”

엑스맨 스쿨에서 처음봤던 로건의 모습이 찰스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로건이 돌아서서 찰스를 바라보았을 때, 찰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의 얼굴엔 평소 로건에게선 상상하기 어려운, 붉게 물든 눈가와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홀로 괴로움 속에 갇혀있던 그가 찰스를 보며 안도와 함께 왜 이제 오냐는 원망마저 서린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찰스는 그 시선에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수없이 그의 악몽을 잠재워주었던 자신이지만, 오랜만에 찾아간 그의 악몽은 어느 때보다 힘겨운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널 힘들게 해.”

찰스는 깊이 고통스러워하는 로건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안 멈춰요, 찰스… 목소리들이… 너무 많아.”

로건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순간, 로건이 몸을 휘청이자 찰스는 즉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수십 명이 한꺼번에 절규하는 듯한 괴성이 찰스의 귀를 세차게 때렸다. 그는 깜짝 놀라 손을 떼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요한 들판이 로건과 찰스를 둘러쌌다.

찰스의 손이 떨어지자, 기댈 곳을 잃은 로건은 무릎을 꿇고 풀숲에 털썩 쓰러졌다.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죄책감은 마치 무거운 족쇄처럼 그를 얽매고 있었다. 최근 쇠약해진 몸과 함께, 그 죄책감은 점점 더 무겁게 다가왔고, 그가 매일 밤 고통스런 악몽 속에 갇히게 만든 원인이 되어버린 듯했다.

찰스는 천천히 침을 삼키며, 고통 속에 무릎을 꿇고 귀를 막은 로건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로건의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가 찰스와 마주치자마자 다시 그 비명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기다렸던 유령들처럼.

“로건!!! 가지마!!!”
스톰의 목소리가 그를 애원하며 부르고 있었다.

“로건!!! 돌아와!!!”
비스트의 분노와 절박함이 섞인 외침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어딘가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진의 목소리.
“죽여줘…”

그 목소리들은 마치 사슬처럼 로건을 묶고, 갈고리처럼 그의 마음을 휘감아 어둠의 심연 속으로 계속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죄책감이 로건을 잡아먹을 듯 다가오고 있었고, 찰스는 그의 모든 고통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몸서리치며 로건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찰스가 단호하게 로건의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로건의 흐릿한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며 흔들림에 따라 조용히 찰스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었지만, 찰스의 목소리와 손길이 마치 현실로 돌아오는 유일한 닻처럼 느껴졌다.

“로건, 자네가 듣고 있는 건 과거의 목소리야. 자네가 만들어낸 환상같은 거라고.”

찰스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로건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졌다. 찰스의 말이 그의 혼란 속에 작은 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찰스는 조용히 로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짊어진 무거운 죄책감은, 사실 찰스 자신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한때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 버렸을 때, 찰스는 눈을 감기조차 두려워해야 했다. 눈을 감으면 지켜주지 못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손이 닿지 못한 이들의 고통이 밀려왔으니까. 그러던 그의 걸음을 붙잡아주었던 건 그의 학생들, 그리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로건이었다. 이제 찰스는 자신이 그랬듯, 그 길을 로건에게 다시 알려줄 차례라는 걸 깨달았다.

찰스의 침착한 눈빛이 로건의 눈 속에 반사되었다. 이내 로건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이 차츰 돌아오자, 찰스의 귀에 들려오던 비명 소리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둘 사이엔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고, 로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찰스는 로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려 했지만, 그 순간, 로건이 머리를 떨군 채 한 손을 뻗어 찰스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버텼어요…” 

로건의 목소리는 가늘고 나직했다.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온 이의 질문이었다.

찰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말을 꺼냈다.

“별거 없어, 로건. 그저… 희망을 찾아야지.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로건은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젓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행복해지면 안돼요.”

그의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속삭임처럼 들렸지만, 찰스는 그 속에 짙게 스며든 고통을 감지했다. 찰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 로건.”

로건은 그 말을 곱씹으며 찰스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찰스가 그를 바라보며 로건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무장한 사람. 그럼에도 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아파하고 또 찔려야했던 불쌍한 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고 오래된 그 얼굴이 눈앞에 겹쳐 보였다.

찰스의 따스한 말에 로건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고개를 약간 떨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바닷바람 소리가 찰스의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로건의 의식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서 빠져나오면서 찰스는 마지막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그 모든 짐을 혼자 지게 해서…”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 그가 지키지 못한 제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찰스는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로건의 이마에서 손을 떼자, 그동안 잔뜩 찌푸려 있던 그의 미간이 부드럽게 펴지며, 거칠던 숨소리도 차츰 고르게 바뀌었다. 그는 아직 깊은 잠 속에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악몽에서 벗어난 듯했다. 찰스는 잠시 로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밤의 서늘한 공기가 고요히 갑판을 감싸고 있었다. 찰스는 숨을 들이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도록 커다란 하얀 달이 그의 위로 고요히 떠 있었다. 한때 물탱크 안에서 바라보던 달빛은 언제나 천장의 작은 구멍 사이로 갈라져 흐릿하게, 작게 비치곤 했다. 이처럼 넓게 펼쳐진 달빛을 온몸으로 받는 일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찰스는 그 빛 속에서 생각의 무게를 잠시 뒤로하고, 은은하게 달빛에 물든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스.”

웨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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