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610134188
깨진 창문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로건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온몸이 뻐근했고, 살짝 몸을 틀자 나무 판자가 삐걱거리며 고요한 아침의 침묵을 깨뜨렸다.
로건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웨이드가 있었다. 그는 한 팔을 로건의 허리에 걸치고 잠들어 있었다. 둘 다 거친 바닥 위에 벌거벗은 채였다.
로건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의 정적과 아침 햇살이 가져오는 묘한 차분함을 느꼈다.
모닥불은 언제 꺼졌는지 희미한 재만 남아 있었고, 웨이드가 천진한 얼굴로 고르고도 얕은 숨을 쉬는 모습은 마치 바깥세상의 모든 혼란과는 단절된 모습 같았다. 로건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제의 기억들이 마치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가운 물의 찌르는 듯한 감각, 그것은 익숙한 공포였다.
아다만티움 클로를 갖게 된 후 물은 그에게 고통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 끔찍한 쇳덩어리는 물 속의 로건이 인간이 아님을 일깨워주듯 끝도 없이 고장난 고철처럼 밑바닥으로 끌어당겼고, 그는 그 안에 갇혀 무력하게 허우적댈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처지가 된다는 것은, 늘 사람들을 보호해왔던 로건에게 가혹한 반전이었다.
몇 번 오랫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영원같은 시간 동안 물 속에 잠겨 수도 없이 질식하고 깨어나는 것은 악몽이 되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딘가 달랐다. 물의 차디찬 감촉이 점점 그를 마비시키자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 죽음에 대한 희미한 갈망이 스며들었다. ‘이번엔 끝낼 수 있을까.’ 그 무거운 절망 속에서도 바라지 못할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물 속에 잠기는 것이 두렵지 않아지자 로건의 시야에 들어온 건 그를 향해 뻗어오는 웨이드의 손이었다. 검고 짙은 물 속에서 번뜩이는 손이 그를 향해 뻗어왔다.
로건은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웨이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자신을 끌어올린 사람, 끝없이 무모해 보이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상하고도 신기한 사람.
웨이드와의 그 뒤는... 그냥 반쯤 미쳤던 것 같다. 차가운 몸에 닿는 웨이드의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던 그 녀석이 퍽 웃겨서. 살며시 눈을 뜨고 보았던 웨이드의 속눈썹과 물이 맺힌 머리칼이 꽤 야해보여서.
몸은 항상 처음으로 돌어갔지만 기억 속에는 남자랑 했던 경험들이 분명 몇 개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어제와 같은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다. 더하자고 매달린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건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붉어졌다.
“미쳤네. 제임스 하울렛. 미쳤어.”
로건은 자신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밀어내려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저런 어린 애랑.
웨이드는 그야말로 새파랗게 젊었고, 무모했다.
로건은 한숨이 터져나오는 입을 닫고는 얼굴을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거친 손바닥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다시 그의 정신을 깨웠다. 그때였다. 웨이드가 언제 깨어난 건지 눈을 반짝이며 옆에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얼굴에 상처나잖아.”
로건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째려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웨이드는 그 시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뻔뻔하게 받아냈다. 결국 로건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힘껏 주먹을 뻗어 누워있는 웨이드의 왼팔을 강하게 때렸다.
“아오! 왜 그래?” 웨이드는 과장되게 소리쳤지만 눈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미친 새끼, 넌 지치지도 않냐?” 로건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뭐라고?” 웨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로 되물었다.
“그만하자고 했을 때 얌전히 그만뒀어야지.” 로건이 뻐근한 온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게,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어봤잖아.” 웨이드는 눈가에 장난기 어린 주름을 지으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 표정이 거슬렸지만, 로건은 더 이상 대응할 기력도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등을 돌려 누웠다. 창문 너머로 작은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의 고요 속에서 웨이드의 큭큭대는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젊은 놈 혈기에 덤비시면 안 되죠.” 웨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삼키며 로건을 바라보았다. 로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골반뼈를 쥐고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미세한 떨림이 그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웨이드는 미소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로건의 등 뒤로 몸을 밀착시켰다.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싸며 부드러운 숨결이 로건의 목덜미에 닿았다.
“마사지 해줄까?” 웨이드의 목소리는 장난기와 진심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징그러워, 저리 가.” 로건은 귀찮다는 듯 몸을 비틀었다..
“으음, 싫은데.”
웨이드는 장난스럽게 몸을 비비적거리며 로건을 더 세게 껴안았다. 그 따스한 무게가 다소 짜증스러웠지만, 로건은 이내 그 팔을 떼어내려던 시도를 멈추고 체념하듯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로건은 허리에 퍼지는 어젯밤의 그 온기와 함께 웨이드의 조용한 숨소리를 느끼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비소 한번 다녀오기 되게 힘드네.”
웨이드는 그 말을 듣고 이마를 로건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보람은 있었지, 안 그래?”
찰스는 누군가 부드럽게 흔들어 깨우는 통에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루시의 상냥한 얼굴이 보였다.
“찰스, 일어나봐요. 아드님이랑 조카분이 차 다 고쳤대요.”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기분 좋은 긴장감을 머금고 있었다. 찰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다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래요? 잘했다고 전해주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느낀 포근한 잠자리에 대한 미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찰스는 침대에 더 눌어붙고 싶었지만, 문간에 기대선 로건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척.”
찰스는 마지못해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이미 해가 뜬지 오래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루시의 환한 미소와, 문간에 기대어 있는 로건의 굳은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몸은 아직 무거웠지만, 로건의 단호한 목소리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애처럼 굴지 말고 당장 나와요. 이제 떠날 거에요.”
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건의 도움으로 천천히 휠체어에 올랐다.
아침의 평온함이 그들을 잠시 묶어두는 듯했지만, 그들은 아직 도망자 신세였다.
그걸 모르는 루시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커튼을 젖혀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와 그들 주위의 무겁게 쌓인 공기를 날려버렸다. 그 순간 찰스는 아래층에서 전해져 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베이컨 냄새군요,” 찰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루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베이컨 좋아하세요? 헨리가 일요일 아침식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차리거든요.”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가을 아침의 서늘한 한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루시의 적극적인 권유에 결국 식탁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이내 따스한 아침 햇살이 가득 찬 거실 겸 주방에 둘러앉았다. 전등이 필요 없을 만큼 환한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헨리가 준비한 아침 식사는 간단하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계란과 갓 구운 토스트,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컨이 그들 앞에 놓였다. 찰스는 따뜻한 냄새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들었다. 그 옆에서 로건도 한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천천히 베이컨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오늘의 아침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로건의 굳어있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긴 듯했다. 그의 입가에 조용히 번지는 미소가 그 증거였다.
오늘도 여전히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건 웨이드였다.
그의 유쾌한 농담에 루시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에 로건의 낮고 깊은 웃음소리도 조용히 섞여들었다. 찰스는 순간 눈을 깜빡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결코 보지 못했던 로건의 모습, 그 안에서 잠시나마 젊음과 희망을 엿본 듯한 순간이었다.
‘기적 같은 아침이군.’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느긋하게 숨을 내쉬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가운 이슬이 맺힌 차의 문이 열리고, 짐을 챙긴 로건과 일행은 차에 올랐다. 그때 루시가 다가와 작은 가방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가방 안에는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음식을 담은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어딜 가든 좋은 사람들만 만나길 바랄게요,"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온기 있는 말은 잠시나마 그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웨이드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가방을 받아들었다.
헨리도 루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손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에도 진심 어린 감사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찰스는 차창 너머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로건과 웨이드도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차의 창문이 천천히 올라가고, 엔진 소리와 함께 그들은 목장을 떠났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백미러에 비친 헨리와 루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붙잡고, 미소를 띤 채 끝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로건은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속으로 그 모습이 오래도록 남길 바랐다. 목장의 따뜻한 공기와 햇살, 그들의 미소는 그들에게 잠시나마 평화를 허락하였다. 그 평화가 목장의 두 부부에게도 오래 가길 바랐다. 이번만큼은.
또다시 세 명이 남은 차 안에서 웨이드는 내비게이션을 쳐다보고는 침묵을 깼다. "5시간 남았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로건은 한 손으로 핸들을 꽉 잡으며 답 대신 깊은 숨을 내쉬고는 엑셀을 밟았다.
저 멀리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웨이드로건 덷풀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