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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페르타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으로 명예로운 에스텔라의 칭호를 가진 자. 올랭피아의 평야와 그곳을 가로지르는 위베른 강의 수호자 그린델모르덤 공작가의 후계자. 교황으로부터 교회의 지지자라 불러진 당대의 성녀. 황가에 충실한 밀렌덤의 백작. 이 모든 것이 허니 비 이젤든 프란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우수했다. 총명했고, 지혜로웠으며, 고귀했지만, 다정했다. 그녀를 스쳐지나간 모든 이들이 그녀의 자애로움을 칭송했다. 모두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자비로웠던 허니 비. 봄날 햇살을 실어다 주는 작고 빛나는 것의 이름을 한 사람.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아.”

 

그것은 아마 축복이 아닌 저주였으리라. 그날. 햇살이 마치 파도 위 유리조각처럼 흩어져 눈부시던 오후에. 그때. 구름이 채 붙잡지 못한 빛의 기둥이 마치 너를 갈구하듯 찾아와 너의 시야를 집요히 괴롭히던. 그 순간. 황금빛 너의 머리칼이 네게 달라붙는 햇살을 거두고 마침내 빛의 장막이 드리워져 너와 내가 눈을 마주친. 바로 그 날에.

 

나는 네게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아서. 나는 감히 그것에 저항할 수 없었으며, 감히 네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 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그저 오랜 걸인처럼 너의 시선 한조각을 구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마치 나는 셀 수 없는 시간을 건너와 비로소 너에게 다다른 듯 짧은 내 인생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벅차고 깊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날 나는 그것을 축복이라 이름지었다.

 

축복의 다른 말은 곧 사랑이다.

 

이미 나는 약속받은 브로치가 있어. 그린델모르덤의 소공작으로서 아무 브로치나 찰 수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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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브로치. 나의 손 위에 놓여진 귀한 보석이 빛바랜 순간이었다. 붉은 가넷과 푸른 사파이어를 조각해넣은 중앙의 카메오. 진실된 사랑을. 그것을 둘러싼 에메랄드와 다이아의 울타리. 변하지 않을 행복을. 그대의 어둠을 밝혀 그대가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페리도트를 더했고, 그대의 앞에 펼쳐질 모든 행복과 불행을 함께하겠다는 의미로 문스톤을 함께 장식했다. 내 손 위에 놓여진, 그대를 위한 내 모든 마음이었다.

 

그렇군요.”

 

바보 같이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태연을 가장했는데, 평정을 가장했는데, 그녀의 앞에서 난 언제나 서투른 애송이일 뿐이었다.

 

혹시.”

 

최대한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침착해 보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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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브로치를 받으셨는지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어줍잖은 나의, 마지막 용기였다. 그녀의 곁을 채울만한 이를 떠올렸을 때,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들만 여럿이었다. 대충 짐작가는 인물도 있었다. 누구의 이름이 불리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축하의 말을 건네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어리석은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

그런 이야기까지 할 사이는 아니잖아?”

 

틀렸다. 그날 너의 눈빛으로부터 시작해 나의 심장에 날아와 새겨진 상흔은 축복이 아니다. 천사가 내게 쏜 화살은 황금화살이 아니었다. 파도의 포말처럼 햇빛이 흩어져 눈부시던 그 오후에, 너는 내게 저주를 걸었다.

 

저주의 다른 말은 곧 사랑이다.

 

.

.

 

흰 눈이 내리는 어두운 오후에. 그가 나를 두고 힘없는 발걸음을 돌린다. 이제는 나보다 작아져버린, 이제는 나보다 어려진 그가. 내게 몹시 실망한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하고, 미련으로 가득한 걸음을 애써서 걷는다.

기억 속 그는 언제나 나보다 노련했고, 능숙했고, 믿음직했다. 그의 앞에선 나는. 서투르고 어리숙한 애송이일 뿐이었다. 그가 넓고 두터운 손으로 햇빛에 포근히 달궈진 내 머리를 덮어주었을 때 나는 그로인해 온 세상으로부터 가려진 기분이었다.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날. 햇살이 마치 파도 위 유리조각처럼 흩어져 눈부시던 오후에. 그때. 구름이 채 붙잡지 못한 빛의 기둥이 마치 너를 갈구하듯 찾아와 너의 시야를 집요히 괴롭히던. 그 순간. 칠흑색 너의 머리칼이 네게 달라붙는 햇살을 거두고 마침내 빛의 장막이 드리워져 너와 내가 눈을 마주친. 바로 그 날에.

 

나는 네게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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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허니? 사랑의 다른 말은 축복이래.”

 

그는 내가 그의 머리칼 같은 밤하늘을 좋아하듯, 마치 내 머리칼 같은 눈부신 오후를 좋아했다. 그래서 어느날과 같이, 이제는 그 중 어느 날이었는지 알 수 없는 그 날에, 그는 푸른 느티나무 아래에서 내 머리칼에 입맞추며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햇살에 눈을 가리며 그에게 물었다. 희망, 행복, 기쁨, 환희, 즐거움 등 온갖 다른 따듯한 말들 중에서 왜 하필 축복이었냐고. 그는 대답했다.

 

사랑을 알면 희망을 알게된데. 사랑을 하면 행복해지고, 사랑이 계속되면 기쁨을 느끼지. 오랜 사랑 속에서 비로소 환희를 느끼게 되고, 사랑 끝에 비로소 즐거워 지는거야.”

사랑이 끝나면?”

사랑이 끝나면 저주만이 남게 되. 한순간에 모든 것이 비어버려. 그래서 마치 저주와 같다는거야. 저주의 반댓말은 축복이지. 그래서 사랑을 축복이라고 한데.”

에이, 그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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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무릎을 베고 누은 채 깔깔 웃었다. 그냥 말장난이잖아. 그러면 사랑의 다른 말은 저주겠네? 내 말에 그는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그렇네. 하며 나를 따라 웃었다.

너는 틀렸다. 저주는 사랑이 끝나서 남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끝내지 못해 찾아오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잔혹해서 우리의 슬픔을 먹고 자란다. 사랑이 끝나면 슬픔도 없기에, 그녀는 우리가 사랑을 끝내지 못하도록 저주를 건다. 너와 나는 사랑을 끝내지 못한 벌을 받고 있다.

 

교활한 계집!”

 

네가 사랑했던 나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었다. 본데 없는 사생아. 기어코 후처 자리를 꿰찬 여자의 딸. 프란시아의 피를 더럽히는 계집. 너를 만나고 부터는 황음한 것. 내 어머니는 내 아버지가 사랑한 정부였고, 내 언니오빠는 아버지가 사랑하지 않는 공작부인의 자식이었다.

선대인 마그리타 부인이 타계한 후 내 어머니는 공작부인이 되었고, 나는 공녀가 되었으나, 후처인 어머니는 마그리타 부인의 언니 시모어 부인에게 살해당했다. 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의 자식이었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제 어미를 닮아 음탕한 것. 할 줄 아는 거라곤 몸으로 사내를 꾀는 재주밖에 없구나.”

…….”

네까짓게 그리모어 대공의 영식을 꾀어내면 팔자라도 필 줄 알았더냐? 어미를 닮아 천하고 무식하니 가문간의 파벌도 모르고 아무 사내에게나 흘레붙는게지. 공작은 대체 가문에 대한 은혜도 모르는 이런 어찌 공녀라고 거두는 것인지.”

 

네가 없는 나의 삶은 이러했다. 어쩌면 그래서 오기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반드시 그와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할 것이다. 어떤 음해와 모욕도 우리는 견뎌내고 사랑할 것이다. 주문처럼 되뇌이는 나날이었다.

그저 어린 아이들의 사랑이었을 뿐인데, 도대체 누가 처음 그것에 정쟁이란 베일을 덧씌워 놓았을까.

 

허니 비 이젤든 프란시아 공녀.”

 

파도의 포말처럼 햇빛이 흩어져 눈부시던 오후였다. 그 언젠가, 네가 에스텔라로써 단상에 올라서서, 나에게 황금화살을 쏘았던 그날처럼 아름다운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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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너는 내게 청혼했다.

햇살과 바람이 딱 알맞던 그날은 이페르타 학원의 졸업반 학생들이 모여 마지막 여름의 연회를 즐기는 날이었다. 우리는 서로 승계와는 거리가 먼 차남과 사생아였고, 그래서 거리낌 없이 청혼하고 승낙할 수 있었다. 그날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증인이 되어주었다.

 

                

                                                                                            
                                                                                            

                                동쪽 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티모시 할 크레이든 샬라메-   
                                                                                            

   

 

 

그날 나는 그저 기뻤다. 우리의 사랑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는 것에. 모진 나날의 끝에 결국엔 우리가 옳았음을 증명했다는 사실로만 머리가 가득했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나의 사랑, 너는 단 한번도 그런 식으로 날 불러낸 적이 없었다는 걸.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네가 기다리고 있을 동쪽 탑의 문을 열었다.
 

허니, 오지마!”

 

짧은 비명이었다. 나는 그저 놀란 눈으로 너의 피를 온몸으로 뒤집어 썼다. 너는 피투성이인 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감쌌다. 너를 안았다. 섬뜩하게 벼린 저 칼날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러나 우리는 어렸다. 약했다. 부당한 폭력이 작고 어린 우리 둘을 난도질했다. 너는 나를 감싸고, 나는 너를 안은 채, 그렇게 우리는 졌다. 스러졌다. 너의 머리칼 같은 어둠이 우리 둘을 점점 삼켰다. 열여덟살의 여름, 우리는 졸업하지 못했다.

 

있잖아, 티모시.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거야. 내가 너를 사랑해서 우리의 결말이 이렇게 된 것이라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어.

 

내가, 너를 지켜줄게.

 

.

.

 

허억!

 

깊은 숨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갑작스럽게 숨을 맞아들인 가슴은 아프게 조여왔다. 낡은 천장. 익숙한 풍경. 머리밭에 놓여진 건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토끼 인형. 여덟살의 생일 날. 너를 만나기 전의 어느 날.




티모시너붕붕으로 죽음끝에 환생한 너붕붕과 티모시의 엇갈리는 운명이 bgs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