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6095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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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19:44
https://hygall.com/602674105 <이 땐 상상도 못함
https://hygall.com/608909245 <이렇게 될 줄 어케 알았겠냐
물론 밤새 그 복도에 서있던 건 아니고 곧 집으로 들어가긴 했어.
정리도 안 한 식탁은 대충 내버려두고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음. 그 상태로 담배냄새도 안 나고, 비누 냄새만 잔뜩 나던 기억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했음.
그리고 아침엔 평소처럼 출근했어. 퇴근할 땐 괜히 머리나 옷을 정돈해봄. 그래봤자 피곤한 기색은 그대로일 거고, 그나마도 지하철에서 다 치일 텐데.
그래도 역에서 내리자마자 한 번 더 핸드폰에나마 얼굴을 비춰봄. 머리칼도 정돈해서 넘기고, 옆 머리는 귀에 꽂았어.
역 밖으로 나가기 전부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역 밖의 어둠 속엔.
어둠 밖에 없었음.
담뱃불도, 덩치 큰 인기척도 없었어.
내가 너무 빨리 도착했나, 괜히 역 주변에 볼 일이라도 있는 척 서성이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있던 사람들도 사라져서 더 조용해졌음.
내일도 데리러 갈게.
매일 데리러 오던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믿은 나만 바보 된 거지.
집에 가는 길은 평소랑 다를 것도 없었음. 어둡고 조용하고 별도 많았음.
혹시 하는 미련을 못 버려서 별 보는 척 괜히 주변을 힐끔거리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
어둠 속에서 뭐가 부스럭거려서 보니까 길고양이는 한 마리 있더라.
“안녕. 어디 가?“
인사 했는데 무시 당함. 하다 하다 길고양이까지 외지인한테 폐쇄적일 일이야?
이 정도면 이 동네 사는 생물들한테 나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문이라도 도는 거 아님?
왠지 외로워져서 친구한테 전화 걸어봤는데 걔도 안 받더라. 한동안 서로 바빠서 연락을 못 해보긴 했는데, 아직 일이 안 끝났나.
한 번 더 걸어보려다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관둠. 결국 전화도 포기하고 그냥 걷던 길이나 마저 걷기로 함.
맞아. 아직 동네 위험하댔지. 얼른 집에나 들어가야지. 밍기적거려서 뭐하겠음.
밍기적거린다고 옆집남자랑 마주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마주치고 싶다는 말은 아님. 그냥 궁금하잖아. 말해놓고 안 오니까 무슨 일 있나 싶기도 하고.
무슨 하루 안 봤다고 보고 싶고 막, 그 정도로 깊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고.
이 정도면 아직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진짜임.
건물 도착해서도 주변 돌아보고, 괜히 엘리베이터 잡아놓고 잠깐 기다려보고, 내려서도 복도 걸어가는 내내 난간 밖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문 앞에 가서는 진짜 궁금하긴 했음. 혹시 집에 있나?
어쩌면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니라 그냥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잖아. 귀찮았거나. 생각해보니 자꾸 데리러 가면 성가셔질 것 같았거나.
이미 성가셔졌다는 걸 깨달았거나.
문까지 두드려볼 용기는 없어서 그냥 집에나 들어가기로 함.
그러고 보니까 언제부터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지 용기가 없어서 문을 못 두드리게 된 거지. 언제부터 옆집남자가 그 문을 열고 나오는 것보다 안 나오는 게 더 무서워지게 된 거냐고.
마음이란 게 진짜 이상한 것 같음.
요즘 공기가 차가워져서 그런가 집 안도 서늘하더라.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름.
오늘도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안 온 건 괜히 서운하면서 차라리 안 마주친 게 낫다는 생각도 드는 한 편으로는 문을 두드려서라도 얼굴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동시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대로 평생 안 마주쳤으면 싶기도 한 것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싱숭생숭.. 울렁울렁...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지.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해야지. 집 안에 불 켜고 씻고 나와서 냉동피자로 저녁 때우는데 전화가 왔음. 아까 전화했던 친구가 부재중 보고 걸었나 봐.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넌? 아까 일하고 있었지.”
/응. 바빴어. 난 이제 퇴근해.
“나도 아까 퇴근하는 길에 생각해보니까 너무 연락을 못한 것 같아서.“
/나도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 전에 너 회사랑 좀 가까운 데로 이사한다고 안 했나? 이사는 했어?
”한 지가 한참이지. 이제 반 년도 넘었는데.“
/그래? 진짜 한참 됐네. 이사간 데는 어때.
“그냥 조용한 동네야. 큰 상가나 정식 식료품점도 없어.“
/뭐? 불편하겠다. 거기 치안은 좋아?
”으음... 치안은 좋을..걸? 아직 사건사고 나는 건 본 적 없어.“
/동네 사람들은 어때. 친해진 사람들 좀 있어?
”....딱히?“
/아예 새로운 동네로 갔으면 한두 명 정도 포섭해서 동네 분위기를 일단 삭 한 번 봐야지.
“너 그거 직업병이야.”
/그보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으면 심심하잖아.
한창 통화중일 때쯤 옆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잠깐 귀 기울여봤는데 조용하기만 했음. 이제 환청도 듣나?
/그 쪽에서 방금 무슨 큰 소리같은 거 나지 않았어?
”너 귀 밝다. 난 내가 환청을 들었나 의심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린데 나한테까지 들려.
”음.. 아. 문소리였나보다.“
/문소리?
”옆집 사람 문소리였나 봐.“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옆집남자가 밖에 나갔다가 집에 왔나봄. 집에서 나간 거일 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날 피한 게 아닌 이상 다른 일정이 있어서 나갔다 온 거겠지?
원래도 음악이나 크게 틀 때 아니면 생활 소음같은 게 나지는 않지만 조용한 거 보니까 바로 씻으러 갔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으면 문이라도 두드리고 말이라도, 아니지. 무슨 그렇게까지 해. 뭐 대단한 약속이라도 했다고.
/새로 이사간 집 방음이 그렇게 안 좋아?
”그 정도는 아닌데 큰 소리는 들려. 근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심심하겠다고.
”아 맞아. 그 얘기였지.“
/외롭겠어.
”...외로워.“
이상한 일임.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는 하나도 안 외로웠거든.
바쁘고 피곤해서 딱히 친구고 사람이고 만날 생각도 못 했음.
근데 오늘은 퇴근길의 어둠이 그렇게 외롭더라. 길고양이한테까지 무시 당하고.
/연애라도 하지 그래.
”연애는 무슨. 그 정도 체력은 없어.“
/야. 연애를 무슨 체력으로 해.
“그럼 뭐로 해.”
/사랑.
“사라앙?”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 터졌다가 옆집 눈치보여서 바로 입 다물었음. 이 정도 목소리도 들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옆집남자는 아직 씻는 중이겠지?
“너 남자 생겼지? 그게 아니면 네가 별안간 그런 감성적인 얘기를 할 리가 없지.“
/데이트 몇 번 했는데 괜찮은 것 같아. 다음에 너도 소개시켜줄게.
”네가 그 때까지 만나고 있으면 말이지.“
/야. 나 요즘엔 꽤 순정파야.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아?“
/진짜 잘 되고 있다니까. 봐서 친구 하나 데리고 나오라고 할 테니까 너도 데이트라도 해.
”난 됐어. 그럴 체력 없다니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만 간신히 때우고 기절해야 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
”세상에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체력은 극복할 수 있지. 내가 진짜 한 번 골라볼게. 기다려.
“뭘 기다려. 체력도 없고 시간도 없어. 평일에 만나서 데이트라도 하면 집에는 언제 오고 다음 날 출근은 어떻게 해.“
/다 어떻게든 된다니까. 우선은 주말에만 데이트하면 되잖아.
”주말에는 체력 보충해야지.“
/앞으로는 체력이랑 시간이 저절로 생겨? 그나마 하루라도 젊을 때가 낫지.
”그보다 날 설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 쪽 남자가 나 별로라고 하면 뭐 시작해볼 것도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애가 기가 다 죽었어? 너네 상사가 많이 괴롭혀? 내가 함 가서 밟아줘?
“기가 죽긴. 그냥 사람 마음이란 게 썩 의지대로 굴러가는 건 아니라는 거지.”
/됐어. 내가 진짜 밝은 놈으로 하나 데려올게. 넌 들어보니까 지금 그런 놈 하나 옆에 있어야 돼.
“필요없다니까.”
/필요하다니까? 내가 괜찮은 놈 하나 찾으면 당장 연락할게. 바로 받아?
”아알았어. 알았어. 아. 근데 나 데이트 잡혀도 입을 옷도 없어. 다 출퇴근용이야.”
/그럼 다음에 주말에 한 번 만나서 옷도 좀 사러 가자.
“그럴까? 그러니까 또 갑자기 설레는데.”
/나도! 나 요즘에 지인짜 일만 하고 살았거든.
“데이트도 했다며.”
/그건 잠깐 짬내서 몇 번 한 거고.
“주말에 나 만날 시간은 있어? 데이트 해야지.“
/너 만나는데 무슨 데이트야. 몇 번 붙어먹은 남자 만나자고 널 안 만나?
”그런 것 치고는 꽤 즐기고 꽤 빠진 것 같은데.“
/그보다 너 회사에는 괜찮은 사람 없어? 이사할 때 이직했댔나? 부서가 바뀌었댔나?
“부서만. 약간 어색한 몇 명 빼고는 다들 그럭저럭 친해지긴 했는데 뭐.. 글쎄. 남직원들이 나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그럴 리가. 네가 눈치 못 챈 거겠지.
“아니라니까.”
/진짜 주변부터 잘 봐.
“어딜 봐. 나한테 관심 있을 남자가 없다니까.“
/그럼 진짜 내가 준비한다?
”알겠어. 알겠어. 마음대로 해. 연애한지도 한참 됐는데 데이트라도 해보지 뭐.“
/진짜로 내가 조만간, 야. 잠깐만. 업무 전화 온다.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다시 전화 할게?
”응. 내 걱정 하지 말고 한가할 때 연락해. 얼른 가.“
/진짜 내일 안에는 할게. 어? 잘 쉬고, 잘 자고!!
”알았다니까. 너도 적당히 일하고 얼른 쉬어.”
그렇게 긴 통화도 아니었고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는데 통화하고 나니까 약간 후련하긴 하더라.
친구랑 쇼핑 가는 거나 데이트..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로운 일정 생긴 것도 좋았음.
데이트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반복적인 일상에 다른 일이 생기는 게 좋았어.
쓸데없는 생각도 덜 들고. 묘하게 외로워지던 기분도 많이 가셨음.
접시 씻어서 정리해두고 양치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쯤에는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음.
옆집남자는 이제 진짜 신경 끌 수 있을 것 같음.
못 끄겠어도 꺼야지. 근데 내일은 또 역까지 데리러 오면 어떡하지.
그래도 안 흔들릴 수 있을까?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옆집남자는 그 다음 날에도 마주칠 일이 없었음. 그 날의 또 다음 날에도 말이야.
결국 옆집남자를 역 앞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주말이 온 게 더 빨랐음.
친구랑 만나서 간만에 맛있는 것도 먹고 옷도 몇 벌 삼. 많이 산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지만 머리는 많이 비울 수 있었음.
만약 주말내내 집에 있었으면 옆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까 신경쓰였을 텐데. 그 짓 안 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친구한테 고마울 지경이었지.
서로 근황 토크를 하긴 했지만 당연히 옆집남자 얘기는 전혀 안 했음. 어디 가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딱히 이야기라고 할 만한 일화가 있는 것도 아님. 생각해보니까 진짜 별 거 없더라.
옆집남자가 다 별 거 아니라고 말할 만 했던 거지. 아무래도 내 눈에만 다 별 일로 보였나봄.
그렇게 주말도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왔을 때.
그 날 퇴근길에는 옆집남자가 있었음.
이번엔 기대도 없어서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집에 가려고 걸어가는데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돌아봤더니 옆집남자더라.
늘 그렇듯이 담배 물고 사람 얼굴이나 빤히 쳐다봄.
“··오랜만이네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기가 뭐해서 쥐어짜낸 인사말이었음. 근데 생각해보니까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내일 데리러 온다던 게 언젠데. 어째 오랜만이네요? 이런 의미로 들리지 않았을까?
전혀 신경 안 쓰는 척 하고 싶었는데. 근데 이미 뱉은 말을 어카겠음.
비꼬는 말로 들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지.
이 참에 왜 며칠 내내 뜸했는지 변명이라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응.“
는 역시나 헛된 기대였음.
오랜만이라니까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음?
혹시 실례지만 얄미워 죽겠으니까 물고 있는 담배라도 꺾어버리고 짓밟아도 되냐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집 방향으로 몸 돌렸음.
그것 봐. 내 주변에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같은 건 없다니까. 바로 옆 집 사는 사람도 저렇게 관심이 없는데 누구는 있겠어.
걸음 옮기기 시작하니까 옆집남자도 옆으로 와서 걷기 시작했음. 담배도 꼭 내가 걷는 쪽으로 드는 것 같음.
그 전에 데리러 올 때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무튼 그랬던 것 같음.
적어도 오늘은 그랬어. 하필 바람이 이 쪽으로 부는지 유난히 담배 연기도 자꾸 따라옴.
담배 연기 맡기 싫고 담뱃불에 데기 싫으면 알아서 멀찍이 떨어져서 걸으라는 건가.
아예 두어 걸음 떨어졌더니 쳐다보더라. 옆에 누가 같이 걷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나 봐.
“나한테 냄새 나?”
“담배 냄새야 맨날 나는데, 연기가 자꾸 이 쪽으로 와서요. 담뱃불에 또 데기도 싫고.”
이번엔 들켰다.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백퍼 들켰을 거임.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오지도 않더니 변명도 안 하는 거에 빈정 상한 티 다 났다고.
또 무슨 표정일지 뻔히 보여서 애써 고개는 안 돌렸는데 나 보고 있는 건 알 것 같았음.
차라리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갑자기 빨리 걸으면 너무 티나겠지? 시선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그머니 밤하늘이라도 보는 척 해봄.
이 동네 밤 하늘 진짜 별 한 번 징그럽게 많다.
“새 옷이네.“
전혀 예상 못 한 말에 바로 고개 내리고 눈 마주치니까 담배 물고 살짝 웃더라.
“어떻게 알았어요?”
“주말에 친구랑 샀어?”
“어떻ㄱ,“
질문 마치기도 전에 혼자 깨닫고 충격 받아서 길 한 가운데에 멈춰 섰음. 옆집남자도 멈춤.
아씨.. 그 정도 통화 소리는 안 들릴 줄 알았는데. 우리집 부엌이 옆집 어디랑 붙어 있더라? 그보다 씻고 있을 줄 알았지. 아니. 설령 들리더라도 굳이 듣고 있지는 않을 줄 알았지.
내가 입술만 뻐끔거리니까 옆집남자도 내가 뭔 생각하는지 알아챈 건지 웃었음. 비웃느라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게 다였지만 웃긴 웃은 거지.
“..그정도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려요?”
“드문드문.”
내가 친구랑 통화하면서 무슨 대화를 했더라? 전혀 기억 안 남. 큰 틀은 얼핏 기억나는데 세세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이상한 말 한 건 없겠지? 없나? 진짜?
남은 식겁했는데 옆집남자는 담배나 물고 들이마시고 있더라. 다시 손에 들고 연기 뱉을 때 입꼬리도 올라감.
“데이트도 했어?“
”데이트?“
내가 그런 얘기도 했었나? 내 친구가 말하지 않았나? 나도 그런 말을 했던가? 정확히 뭐라고 했었지?
멍하니 되묻고 서있는 동안 옆집남자는 담배를 반대 쪽 손으로 바꿔 들었음.
“해본다며.“
”그건..“
잠깐. 아무리 어쩔 수 없이 들렸다고 해도 옆집 통화를 왜 엿듣냐고 따지지는 못할 망정 일일이 대답까지 해줘야함?
“..무슨 상관이에요.“
”궁금한데.“
“그게 왜 궁금해.“
”이웃 주민이잖아.“
“사실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냥 다시 걷기 시작했더니 바로 꽤 가까이 와서 같이 걷더라.
“말 안 하니까 더 궁금한데.”
”아직 안 했는데 곧 하기로 했어요.“
아직 누구를 소개받은 건 아닌데 소개를 받기로 한 건 맞잖음?
따라서 데이트도 아직 안 했는데 곧 하기로 했다는 것도 얼추 맞지 않냐?
옆집남자는 대충 대답해주고 나니까 조용해짐. 내 데이트 여부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거 빌미로 놀리고 싶었던 거겠지.
”어떤 남잔데?“
결국 또 멈췄더니 옆집남자도 따라 멈춤. 어떤 남자랑 데이트하는지는 왜 물어보는 거임?
돌아봤더니 표정은 역시나 그냥 그랬음. 지금 말하는 주제에 대해 하등 관심도 없어 보임. 어째 발음이 물린다 했더니 담배도 물고 있더라.
이것 봐. 사실 별로 관심 없는 거 맞잖아.
“······ 키는 이쯤 돼서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크고.“
옆집남자 턱 아래쯤에 손 올리고 말하니까 시선이 내 손으로 따라옴. 저 이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하는 표정이 사람 속을 긁는다고.
”아침형 인간에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술은 잘 마셔요.“
그쯤 되니까 왠지 흥미로워 보이기는 함. 어디까지 하나 지켜는 보겠다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본격적으로 내 말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손으로 옮겨 들었음.
담배 쥐러 가는 손바닥 안에 아직도 상처가 크게 보이더라. 이제 아프진 않겠지만 흉터는 엄청 크게 남겠지.
병원 가서 제대로 치료했으면 저렇게까지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
“작은 타투 하나도 없고, 흉터도 없고, 잘 웃고. 인상이 부드러운 남자요.“
나도 알아. 내가 말하긴 했지만 진짜 치졸했다.
그나저나 내 대답이 아무리 치졸했다고 해도 본인이 물어봐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함?
누가 봐도 거짓말이란 건 알았겠지. 특히 옆집남자 입장에서 본인이랑 정반대 되는 특징들이라는 건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멀뚱멀뚱 보고만 있더라. 어쩌자는 거임. 그냥 가던 길 다시 가면 되나?
“못생겼어?”
“···잘생겼어요.”
길 쪽으로 고개 돌리는데 대뜸 그러는 거임. 당황해서 우선 잘생겼다고 대답함.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못생겼다고 대답하면 이상하잖아.
가상의 남자한테 뭐가 이상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치졸한 핑계로 써먹는 주제에 못생긴 남자랑 데이트한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잖아.
“흠.”
저건 무슨 반응임?
불길하게 입꼬리는 또 왜 슬금슬금 올라가.
“나랑 비슷한 것도 하나는 있네.”
불길하다 했더니 또 묘하게 웃는 얼굴로, 잠깐. 저거 지금 본인이 잘생겼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거임?
애초에 못생겼냐고 물은 게 그것까지 나랑 반대냐는 질문이었다는 말이야?
황당해서 바로 대답도 못 함. 옆집남자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태연하게 담배 입에 물더라.
그리고 본인이 먼저 몸 돌려서 집 쪽으로 걸음 옮김. 우선 나도 따라 걷기는 했음.
근데 방금 내가 들은 말이 맞아?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네가 그랬잖아.”
아니.. 잘생기긴 했지. 내가 말한 것도 맞고. 맞긴 한데...
“그래서 스스로가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되게 잘생겼다고 누가 그러던데.”
“아니 그러니까 본인 얼굴을 스스로?“
재차 물으니까 아예 비스듬하게 몸 돌려서 돌아봄. 그대로 천천히 뒤로 걸으면서 담배 물고 그러더라.
“어떻게 생각해.”
“내가 아니라,“
”고마워. 너도 예뻐.“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 소리예요.“
”눈으로 말했잖아.“
”눈이 무슨, 무슨 말을 해요.“
내 눈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임? 확인하고 싶어도 내가 내 눈을 볼 수가 있어야지.
뭔가 억울하긴 한데 뭐부터 지적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음.
지금 그 생각도 내 눈이 말했나? 옆집남자가 바로 슬쩍 비웃고 다시 몸 돌려서 걸어가더라. 담배 연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거 보니까 다시 손으로 옮겼나봄.
“좋은 말씀?”
그러더니 웃음기 섞인 투로 그러는 거임. 그 놈에 좋은 말씀은. 이제 내 눈도 좋은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거임? 아니 입은 전한 적이 없는데. 눈만 전하고 다님? 눈만 특별한 종교라도 가진 거냐고.
겨우 한 번 둘러댄 걸로 너무 우려먹는 거 아님?
아까는 진짜 이래저래 억하심정 들었던 거 다 까먹었는데, 다시 화나기 시작함.
옆집남자랑 이 길을 걷거나, 쓸데없는 대화를 하는 순간들이 싫지 않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난 왜 하필 저런 인간한테 감겼지? 나한테 필요한 건 친구 말대로 밝은 남자 아님?
옆집남자한테 밝은 점이라고는 담뱃불 정도잖아. 밤하늘에 별도 아니고 담뱃불이라고. 설령 별이 쏟아져 있다고 해서 낮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근데 하물며 담뱃불이라니까?
이렇게 잘 알면서 난 왜 자꾸 밤길에 저 담뱃불만 따라가는 거냐고.
이러다 불이라도 나고 후회하면 늦을 텐데. 왜...
“내일도 데리러 갈게.“
기껏 안전한 집 앞까지 도착해놓고 왜 또 얌전히 그런 말이나 듣고 있는 건데.
심지어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지도 못 하지.
“안 올 거 알아요.“
“그럴 수도 있고.”
기어코 신경 긁는 소리 한 마디 더 듣고, 문고리 잡은 손까지 속절없이 내줌. 당긴 것도 아닌데 몸까지 돌려서 마주보고 섰다고.
옆집남자가 몸을 너무 낮추지 않아도 곧바로 닿을 수 있게 고개도 들고, 발 끝도 세웠어.
며칠 전에 그랬던 것 만큼 그 정도로 가볍게 혀나 섞게 될 줄 알았지.
여긴 펍 베이커리로 이어지는 골목도 아니고, 나도 옆집남자도 술 한 방울 없는 맨정신이니까.
근데 어째 가볍게 끝나지가 않음.
끝나기는 커녕 점점 더 짙게 엉키기만 해서 숨이 막혀오기 시작함. 양쪽 집 사이에 벽이 없었으면 난 진작 넘어졌을 지도 몰라.
간신히 벽에 기대서 혀 섞는 동안 손은.. 내 허리 근처쯤에 머무르긴 했음. 등 쪽으로 약간 옮겨갔다가 다시 쓸어내리면서 내려오거나. 밑으로 약간 내려갔다가 허리 쪽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함.
...이거 아무래도 원래 습관대로 손 안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 같지?
알아채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에는 숨이 부족했음.
물리적으로 숨이 막히기도 하고 상황이 숨 막히기도 하고 그리고.. 아무래도 흥분하니까 호흡이 밭아져서 숨이 막히겠지.
결국 살겠다고 강제로 고개 들고 벽에 더 기댈 때 쯤에는 다리에 힘이 실리지도 않았음.
“으응···”
허리 받친 손이랑, 다리가 벌어지도록 파고든 허벅지가 아니었으면 넘어졌겠지.
분명히 한 쪽일 텐데 무슨 사람 허벅지 사이즈가.. 아니 그것도 그건데 허벅지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무슨 사이즈가..? 선 것도 아ㄴ, 아니 약간은 흥분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내 다리 사이에 다른 거라도 받쳐둔 게 아닌 이상 이 정도 이물감이 맞나..?
혼란스러운 상태로 눈 반쯤 감고 숨 고르다가 고개 내리면서 눈 마주쳤는데 기다리고 있더라.
단순히 내가 숨 고르는 동안 지켜보는 게 아니라, 물러날 생각이 없더라고.
약간 초식동물 목덜미 물어놓고 숨 끊어지는 거 기다리는 맹수를 코앞에서 직관하는 기분이었음. 근데 그 초식동물이 나인 거잖아? 살려줘.
”···“
맹ㅅ, 아니 옆집남자도 나도 좀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았음. 그래서 옆집남자 겉옷 안 쪽에 입은 셔츠를 잡아 당겨봄.
분명히 말하지만 내 쪽으로 당긴 게 아니라 바깥쪽으로 당겼어. 착각할 만한 방향도 아니잖아.
근데 이상하게 다시 가까워짐. 아무리 당겨도 가까워짐. 결국 다시 입을 벌려야 할 만큼 가까워졌어.
키스는 훨씬 느려져서 숨이 막히지는 않게 됐음. 대신 다리 안 쪽으로 자꾸 허벅지가, 그리고...
왜 며칠 전에 집 문 앞에서 가벼운 키스로 끝났는지 그제야 알았어. 그 날은 일종의 몰이사냥이었던 거지.
집 앞으로 날 몰아넣은 거라고. 한 번 풀려나면 두 번째도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잖아.
오늘도 그 정도로 끝날 거라고 방심했다가 지금처럼 흥분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쉽겠지.
우리 뒤에는 지붕 있는 집이 두 개나 있단 말임.
옆집남자는 내가 어디로든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날 흥분시켜서 기다리는 거지. 억지로 끌고 들어가면 본인이 원한 게 되니까. 어디까지나 내가 원한 일이어야 한단 말이지.
본인이 발 뺄 공간은 남겨두겠다는 거 아니겠어?
진짜.. 약아빠져서.
“여자 진짜 많이 꼬셔봤구나...”
머리는 어질거리고 다리에는 힘도 안 들어가고, 간신히 고개 돌리고 숨이나 헐떡이는데 옆집남자는 짧게 웃을 여유도 있더라.
누구는 웃을 기운도 없는데.
“···집에 갈래.“
”누구 집.“
”각자 집으로 잘 들어가요.“
이번엔 그 태연하기만 하던 얼굴도 굳기는 하더라. 사냥에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나 봐. 아예 없거나.
오히려 두어 주 정도 이르게 시도했으면 벌써 어느 쪽이든 집에 들어가서 흘레붙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힘만 빼고 전술만 노출한 채로 허탕 친 거지.
예상대로 비키라는 말에는 순순히 물러났음. 반 걸음 만큼만 떨어진 채로 내가 잠깐 벽에 기대서 숨 고르는 거 지켜봄.
실패 원인 복기라도 하나.
“잘 가요.”
숨 몇 번 고른 다음, 어디 먼 데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한테 인사하는 것처럼 손도 흔들어줌.
그리고 어느새 복도 바닥에 떨어져있던 내 가방도 주움. 가방 바닥 좀 몇 번 털어주고 이미 아까 열쇠로 땄는데 열어보지도 못한 손잡이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음.
문 닫고, 문 잘 잠그고.
그 다음에 현관 문에 기대서 미끄러져 앉았어.
옆집 문 열고 닫는 소리가 안 난 거 보면 옆집남자는 아직 복도에 서있겠지?
이상하다. 분명히 다 넘어 왔는데.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옆집남자는 아무리 밤새 복도에 서서 생각해도 만만한 초식동물 사냥에 실패한 원인은 못 찾을 거임.
그 원인은 나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씻고 잠이나 자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고작 하룻밤 몸을 섞지도 못할 만큼 꽤 진심이라는 건 옆집남자가 알 리가 없잖아.
왜냐면 나도 방금 알았거든.
.....그러게 좀 덜 꼬셨어야지.
❓......................❣️
🐆맥카이너붕붕🐇
https://hygall.com/609913262 <옆집남자랑은 당연히 또 마주쳤는데
https://hygall.com/608909245 <이렇게 될 줄 어케 알았겠냐
물론 밤새 그 복도에 서있던 건 아니고 곧 집으로 들어가긴 했어.
정리도 안 한 식탁은 대충 내버려두고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음. 그 상태로 담배냄새도 안 나고, 비누 냄새만 잔뜩 나던 기억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 했음.
그리고 아침엔 평소처럼 출근했어. 퇴근할 땐 괜히 머리나 옷을 정돈해봄. 그래봤자 피곤한 기색은 그대로일 거고, 그나마도 지하철에서 다 치일 텐데.
그래도 역에서 내리자마자 한 번 더 핸드폰에나마 얼굴을 비춰봄. 머리칼도 정돈해서 넘기고, 옆 머리는 귀에 꽂았어.
역 밖으로 나가기 전부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역 밖의 어둠 속엔.
어둠 밖에 없었음.
담뱃불도, 덩치 큰 인기척도 없었어.
내가 너무 빨리 도착했나, 괜히 역 주변에 볼 일이라도 있는 척 서성이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있던 사람들도 사라져서 더 조용해졌음.
내일도 데리러 갈게.
매일 데리러 오던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믿은 나만 바보 된 거지.
집에 가는 길은 평소랑 다를 것도 없었음. 어둡고 조용하고 별도 많았음.
혹시 하는 미련을 못 버려서 별 보는 척 괜히 주변을 힐끔거리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
어둠 속에서 뭐가 부스럭거려서 보니까 길고양이는 한 마리 있더라.
“안녕. 어디 가?“
인사 했는데 무시 당함. 하다 하다 길고양이까지 외지인한테 폐쇄적일 일이야?
이 정도면 이 동네 사는 생물들한테 나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문이라도 도는 거 아님?
왠지 외로워져서 친구한테 전화 걸어봤는데 걔도 안 받더라. 한동안 서로 바빠서 연락을 못 해보긴 했는데, 아직 일이 안 끝났나.
한 번 더 걸어보려다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관둠. 결국 전화도 포기하고 그냥 걷던 길이나 마저 걷기로 함.
맞아. 아직 동네 위험하댔지. 얼른 집에나 들어가야지. 밍기적거려서 뭐하겠음.
밍기적거린다고 옆집남자랑 마주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마주치고 싶다는 말은 아님. 그냥 궁금하잖아. 말해놓고 안 오니까 무슨 일 있나 싶기도 하고.
무슨 하루 안 봤다고 보고 싶고 막, 그 정도로 깊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고.
이 정도면 아직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진짜임.
건물 도착해서도 주변 돌아보고, 괜히 엘리베이터 잡아놓고 잠깐 기다려보고, 내려서도 복도 걸어가는 내내 난간 밖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문 앞에 가서는 진짜 궁금하긴 했음. 혹시 집에 있나?
어쩌면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니라 그냥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잖아. 귀찮았거나. 생각해보니 자꾸 데리러 가면 성가셔질 것 같았거나.
이미 성가셔졌다는 걸 깨달았거나.
문까지 두드려볼 용기는 없어서 그냥 집에나 들어가기로 함.
그러고 보니까 언제부터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지 용기가 없어서 문을 못 두드리게 된 거지. 언제부터 옆집남자가 그 문을 열고 나오는 것보다 안 나오는 게 더 무서워지게 된 거냐고.
마음이란 게 진짜 이상한 것 같음.
요즘 공기가 차가워져서 그런가 집 안도 서늘하더라.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름.
오늘도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안 온 건 괜히 서운하면서 차라리 안 마주친 게 낫다는 생각도 드는 한 편으로는 문을 두드려서라도 얼굴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동시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대로 평생 안 마주쳤으면 싶기도 한 것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싱숭생숭.. 울렁울렁...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지.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해야지. 집 안에 불 켜고 씻고 나와서 냉동피자로 저녁 때우는데 전화가 왔음. 아까 전화했던 친구가 부재중 보고 걸었나 봐.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넌? 아까 일하고 있었지.”
/응. 바빴어. 난 이제 퇴근해.
“나도 아까 퇴근하는 길에 생각해보니까 너무 연락을 못한 것 같아서.“
/나도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 전에 너 회사랑 좀 가까운 데로 이사한다고 안 했나? 이사는 했어?
”한 지가 한참이지. 이제 반 년도 넘었는데.“
/그래? 진짜 한참 됐네. 이사간 데는 어때.
“그냥 조용한 동네야. 큰 상가나 정식 식료품점도 없어.“
/뭐? 불편하겠다. 거기 치안은 좋아?
”으음... 치안은 좋을..걸? 아직 사건사고 나는 건 본 적 없어.“
/동네 사람들은 어때. 친해진 사람들 좀 있어?
”....딱히?“
/아예 새로운 동네로 갔으면 한두 명 정도 포섭해서 동네 분위기를 일단 삭 한 번 봐야지.
“너 그거 직업병이야.”
/그보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으면 심심하잖아.
한창 통화중일 때쯤 옆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잠깐 귀 기울여봤는데 조용하기만 했음. 이제 환청도 듣나?
/그 쪽에서 방금 무슨 큰 소리같은 거 나지 않았어?
”너 귀 밝다. 난 내가 환청을 들었나 의심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린데 나한테까지 들려.
”음.. 아. 문소리였나보다.“
/문소리?
”옆집 사람 문소리였나 봐.“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옆집남자가 밖에 나갔다가 집에 왔나봄. 집에서 나간 거일 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날 피한 게 아닌 이상 다른 일정이 있어서 나갔다 온 거겠지?
원래도 음악이나 크게 틀 때 아니면 생활 소음같은 게 나지는 않지만 조용한 거 보니까 바로 씻으러 갔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으면 문이라도 두드리고 말이라도, 아니지. 무슨 그렇게까지 해. 뭐 대단한 약속이라도 했다고.
/새로 이사간 집 방음이 그렇게 안 좋아?
”그 정도는 아닌데 큰 소리는 들려. 근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심심하겠다고.
”아 맞아. 그 얘기였지.“
/외롭겠어.
”...외로워.“
이상한 일임.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는 하나도 안 외로웠거든.
바쁘고 피곤해서 딱히 친구고 사람이고 만날 생각도 못 했음.
근데 오늘은 퇴근길의 어둠이 그렇게 외롭더라. 길고양이한테까지 무시 당하고.
/연애라도 하지 그래.
”연애는 무슨. 그 정도 체력은 없어.“
/야. 연애를 무슨 체력으로 해.
“그럼 뭐로 해.”
/사랑.
“사라앙?”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 터졌다가 옆집 눈치보여서 바로 입 다물었음. 이 정도 목소리도 들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옆집남자는 아직 씻는 중이겠지?
“너 남자 생겼지? 그게 아니면 네가 별안간 그런 감성적인 얘기를 할 리가 없지.“
/데이트 몇 번 했는데 괜찮은 것 같아. 다음에 너도 소개시켜줄게.
”네가 그 때까지 만나고 있으면 말이지.“
/야. 나 요즘엔 꽤 순정파야.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아?“
/진짜 잘 되고 있다니까. 봐서 친구 하나 데리고 나오라고 할 테니까 너도 데이트라도 해.
”난 됐어. 그럴 체력 없다니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만 간신히 때우고 기절해야 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
”세상에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체력은 극복할 수 있지. 내가 진짜 한 번 골라볼게. 기다려.
“뭘 기다려. 체력도 없고 시간도 없어. 평일에 만나서 데이트라도 하면 집에는 언제 오고 다음 날 출근은 어떻게 해.“
/다 어떻게든 된다니까. 우선은 주말에만 데이트하면 되잖아.
”주말에는 체력 보충해야지.“
/앞으로는 체력이랑 시간이 저절로 생겨? 그나마 하루라도 젊을 때가 낫지.
”그보다 날 설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 쪽 남자가 나 별로라고 하면 뭐 시작해볼 것도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애가 기가 다 죽었어? 너네 상사가 많이 괴롭혀? 내가 함 가서 밟아줘?
“기가 죽긴. 그냥 사람 마음이란 게 썩 의지대로 굴러가는 건 아니라는 거지.”
/됐어. 내가 진짜 밝은 놈으로 하나 데려올게. 넌 들어보니까 지금 그런 놈 하나 옆에 있어야 돼.
“필요없다니까.”
/필요하다니까? 내가 괜찮은 놈 하나 찾으면 당장 연락할게. 바로 받아?
”아알았어. 알았어. 아. 근데 나 데이트 잡혀도 입을 옷도 없어. 다 출퇴근용이야.”
/그럼 다음에 주말에 한 번 만나서 옷도 좀 사러 가자.
“그럴까? 그러니까 또 갑자기 설레는데.”
/나도! 나 요즘에 지인짜 일만 하고 살았거든.
“데이트도 했다며.”
/그건 잠깐 짬내서 몇 번 한 거고.
“주말에 나 만날 시간은 있어? 데이트 해야지.“
/너 만나는데 무슨 데이트야. 몇 번 붙어먹은 남자 만나자고 널 안 만나?
”그런 것 치고는 꽤 즐기고 꽤 빠진 것 같은데.“
/그보다 너 회사에는 괜찮은 사람 없어? 이사할 때 이직했댔나? 부서가 바뀌었댔나?
“부서만. 약간 어색한 몇 명 빼고는 다들 그럭저럭 친해지긴 했는데 뭐.. 글쎄. 남직원들이 나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그럴 리가. 네가 눈치 못 챈 거겠지.
“아니라니까.”
/진짜 주변부터 잘 봐.
“어딜 봐. 나한테 관심 있을 남자가 없다니까.“
/그럼 진짜 내가 준비한다?
”알겠어. 알겠어. 마음대로 해. 연애한지도 한참 됐는데 데이트라도 해보지 뭐.“
/진짜로 내가 조만간, 야. 잠깐만. 업무 전화 온다.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다시 전화 할게?
”응. 내 걱정 하지 말고 한가할 때 연락해. 얼른 가.“
/진짜 내일 안에는 할게. 어? 잘 쉬고, 잘 자고!!
”알았다니까. 너도 적당히 일하고 얼른 쉬어.”
그렇게 긴 통화도 아니었고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는데 통화하고 나니까 약간 후련하긴 하더라.
친구랑 쇼핑 가는 거나 데이트..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로운 일정 생긴 것도 좋았음.
데이트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반복적인 일상에 다른 일이 생기는 게 좋았어.
쓸데없는 생각도 덜 들고. 묘하게 외로워지던 기분도 많이 가셨음.
접시 씻어서 정리해두고 양치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쯤에는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음.
옆집남자는 이제 진짜 신경 끌 수 있을 것 같음.
못 끄겠어도 꺼야지. 근데 내일은 또 역까지 데리러 오면 어떡하지.
그래도 안 흔들릴 수 있을까?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옆집남자는 그 다음 날에도 마주칠 일이 없었음. 그 날의 또 다음 날에도 말이야.
결국 옆집남자를 역 앞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주말이 온 게 더 빨랐음.
친구랑 만나서 간만에 맛있는 것도 먹고 옷도 몇 벌 삼. 많이 산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지만 머리는 많이 비울 수 있었음.
만약 주말내내 집에 있었으면 옆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까 신경쓰였을 텐데. 그 짓 안 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친구한테 고마울 지경이었지.
서로 근황 토크를 하긴 했지만 당연히 옆집남자 얘기는 전혀 안 했음. 어디 가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딱히 이야기라고 할 만한 일화가 있는 것도 아님. 생각해보니까 진짜 별 거 없더라.
옆집남자가 다 별 거 아니라고 말할 만 했던 거지. 아무래도 내 눈에만 다 별 일로 보였나봄.
그렇게 주말도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왔을 때.
그 날 퇴근길에는 옆집남자가 있었음.
이번엔 기대도 없어서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집에 가려고 걸어가는데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돌아봤더니 옆집남자더라.
늘 그렇듯이 담배 물고 사람 얼굴이나 빤히 쳐다봄.
“··오랜만이네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기가 뭐해서 쥐어짜낸 인사말이었음. 근데 생각해보니까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내일 데리러 온다던 게 언젠데. 어째 오랜만이네요? 이런 의미로 들리지 않았을까?
전혀 신경 안 쓰는 척 하고 싶었는데. 근데 이미 뱉은 말을 어카겠음.
비꼬는 말로 들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지.
이 참에 왜 며칠 내내 뜸했는지 변명이라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응.“
는 역시나 헛된 기대였음.
오랜만이라니까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음?
혹시 실례지만 얄미워 죽겠으니까 물고 있는 담배라도 꺾어버리고 짓밟아도 되냐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집 방향으로 몸 돌렸음.
그것 봐. 내 주변에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같은 건 없다니까. 바로 옆 집 사는 사람도 저렇게 관심이 없는데 누구는 있겠어.
걸음 옮기기 시작하니까 옆집남자도 옆으로 와서 걷기 시작했음. 담배도 꼭 내가 걷는 쪽으로 드는 것 같음.
그 전에 데리러 올 때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무튼 그랬던 것 같음.
적어도 오늘은 그랬어. 하필 바람이 이 쪽으로 부는지 유난히 담배 연기도 자꾸 따라옴.
담배 연기 맡기 싫고 담뱃불에 데기 싫으면 알아서 멀찍이 떨어져서 걸으라는 건가.
아예 두어 걸음 떨어졌더니 쳐다보더라. 옆에 누가 같이 걷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나 봐.
“나한테 냄새 나?”
“담배 냄새야 맨날 나는데, 연기가 자꾸 이 쪽으로 와서요. 담뱃불에 또 데기도 싫고.”
이번엔 들켰다.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백퍼 들켰을 거임.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오지도 않더니 변명도 안 하는 거에 빈정 상한 티 다 났다고.
또 무슨 표정일지 뻔히 보여서 애써 고개는 안 돌렸는데 나 보고 있는 건 알 것 같았음.
차라리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갑자기 빨리 걸으면 너무 티나겠지? 시선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그머니 밤하늘이라도 보는 척 해봄.
이 동네 밤 하늘 진짜 별 한 번 징그럽게 많다.
“새 옷이네.“
전혀 예상 못 한 말에 바로 고개 내리고 눈 마주치니까 담배 물고 살짝 웃더라.
“어떻게 알았어요?”
“주말에 친구랑 샀어?”
“어떻ㄱ,“
질문 마치기도 전에 혼자 깨닫고 충격 받아서 길 한 가운데에 멈춰 섰음. 옆집남자도 멈춤.
아씨.. 그 정도 통화 소리는 안 들릴 줄 알았는데. 우리집 부엌이 옆집 어디랑 붙어 있더라? 그보다 씻고 있을 줄 알았지. 아니. 설령 들리더라도 굳이 듣고 있지는 않을 줄 알았지.
내가 입술만 뻐끔거리니까 옆집남자도 내가 뭔 생각하는지 알아챈 건지 웃었음. 비웃느라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게 다였지만 웃긴 웃은 거지.
“..그정도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려요?”
“드문드문.”
내가 친구랑 통화하면서 무슨 대화를 했더라? 전혀 기억 안 남. 큰 틀은 얼핏 기억나는데 세세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이상한 말 한 건 없겠지? 없나? 진짜?
남은 식겁했는데 옆집남자는 담배나 물고 들이마시고 있더라. 다시 손에 들고 연기 뱉을 때 입꼬리도 올라감.
“데이트도 했어?“
”데이트?“
내가 그런 얘기도 했었나? 내 친구가 말하지 않았나? 나도 그런 말을 했던가? 정확히 뭐라고 했었지?
멍하니 되묻고 서있는 동안 옆집남자는 담배를 반대 쪽 손으로 바꿔 들었음.
“해본다며.“
”그건..“
잠깐. 아무리 어쩔 수 없이 들렸다고 해도 옆집 통화를 왜 엿듣냐고 따지지는 못할 망정 일일이 대답까지 해줘야함?
“..무슨 상관이에요.“
”궁금한데.“
“그게 왜 궁금해.“
”이웃 주민이잖아.“
“사실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냥 다시 걷기 시작했더니 바로 꽤 가까이 와서 같이 걷더라.
“말 안 하니까 더 궁금한데.”
”아직 안 했는데 곧 하기로 했어요.“
아직 누구를 소개받은 건 아닌데 소개를 받기로 한 건 맞잖음?
따라서 데이트도 아직 안 했는데 곧 하기로 했다는 것도 얼추 맞지 않냐?
옆집남자는 대충 대답해주고 나니까 조용해짐. 내 데이트 여부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거 빌미로 놀리고 싶었던 거겠지.
”어떤 남잔데?“
결국 또 멈췄더니 옆집남자도 따라 멈춤. 어떤 남자랑 데이트하는지는 왜 물어보는 거임?
돌아봤더니 표정은 역시나 그냥 그랬음. 지금 말하는 주제에 대해 하등 관심도 없어 보임. 어째 발음이 물린다 했더니 담배도 물고 있더라.
이것 봐. 사실 별로 관심 없는 거 맞잖아.
“······ 키는 이쯤 돼서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크고.“
옆집남자 턱 아래쯤에 손 올리고 말하니까 시선이 내 손으로 따라옴. 저 이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하는 표정이 사람 속을 긁는다고.
”아침형 인간에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술은 잘 마셔요.“
그쯤 되니까 왠지 흥미로워 보이기는 함. 어디까지 하나 지켜는 보겠다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본격적으로 내 말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손으로 옮겨 들었음.
담배 쥐러 가는 손바닥 안에 아직도 상처가 크게 보이더라. 이제 아프진 않겠지만 흉터는 엄청 크게 남겠지.
병원 가서 제대로 치료했으면 저렇게까지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
“작은 타투 하나도 없고, 흉터도 없고, 잘 웃고. 인상이 부드러운 남자요.“
나도 알아. 내가 말하긴 했지만 진짜 치졸했다.
그나저나 내 대답이 아무리 치졸했다고 해도 본인이 물어봐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함?
누가 봐도 거짓말이란 건 알았겠지. 특히 옆집남자 입장에서 본인이랑 정반대 되는 특징들이라는 건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멀뚱멀뚱 보고만 있더라. 어쩌자는 거임. 그냥 가던 길 다시 가면 되나?
“못생겼어?”
“···잘생겼어요.”
길 쪽으로 고개 돌리는데 대뜸 그러는 거임. 당황해서 우선 잘생겼다고 대답함.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못생겼다고 대답하면 이상하잖아.
가상의 남자한테 뭐가 이상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치졸한 핑계로 써먹는 주제에 못생긴 남자랑 데이트한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잖아.
“흠.”
저건 무슨 반응임?
불길하게 입꼬리는 또 왜 슬금슬금 올라가.
“나랑 비슷한 것도 하나는 있네.”
불길하다 했더니 또 묘하게 웃는 얼굴로, 잠깐. 저거 지금 본인이 잘생겼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거임?
애초에 못생겼냐고 물은 게 그것까지 나랑 반대냐는 질문이었다는 말이야?
황당해서 바로 대답도 못 함. 옆집남자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태연하게 담배 입에 물더라.
그리고 본인이 먼저 몸 돌려서 집 쪽으로 걸음 옮김. 우선 나도 따라 걷기는 했음.
근데 방금 내가 들은 말이 맞아?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네가 그랬잖아.”
아니.. 잘생기긴 했지. 내가 말한 것도 맞고. 맞긴 한데...
“그래서 스스로가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되게 잘생겼다고 누가 그러던데.”
“아니 그러니까 본인 얼굴을 스스로?“
재차 물으니까 아예 비스듬하게 몸 돌려서 돌아봄. 그대로 천천히 뒤로 걸으면서 담배 물고 그러더라.
“어떻게 생각해.”
“내가 아니라,“
”고마워. 너도 예뻐.“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 소리예요.“
”눈으로 말했잖아.“
”눈이 무슨, 무슨 말을 해요.“
내 눈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임? 확인하고 싶어도 내가 내 눈을 볼 수가 있어야지.
뭔가 억울하긴 한데 뭐부터 지적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음.
지금 그 생각도 내 눈이 말했나? 옆집남자가 바로 슬쩍 비웃고 다시 몸 돌려서 걸어가더라. 담배 연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거 보니까 다시 손으로 옮겼나봄.
“좋은 말씀?”
그러더니 웃음기 섞인 투로 그러는 거임. 그 놈에 좋은 말씀은. 이제 내 눈도 좋은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거임? 아니 입은 전한 적이 없는데. 눈만 전하고 다님? 눈만 특별한 종교라도 가진 거냐고.
겨우 한 번 둘러댄 걸로 너무 우려먹는 거 아님?
아까는 진짜 이래저래 억하심정 들었던 거 다 까먹었는데, 다시 화나기 시작함.
옆집남자랑 이 길을 걷거나, 쓸데없는 대화를 하는 순간들이 싫지 않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난 왜 하필 저런 인간한테 감겼지? 나한테 필요한 건 친구 말대로 밝은 남자 아님?
옆집남자한테 밝은 점이라고는 담뱃불 정도잖아. 밤하늘에 별도 아니고 담뱃불이라고. 설령 별이 쏟아져 있다고 해서 낮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근데 하물며 담뱃불이라니까?
이렇게 잘 알면서 난 왜 자꾸 밤길에 저 담뱃불만 따라가는 거냐고.
이러다 불이라도 나고 후회하면 늦을 텐데. 왜...
“내일도 데리러 갈게.“
기껏 안전한 집 앞까지 도착해놓고 왜 또 얌전히 그런 말이나 듣고 있는 건데.
심지어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지도 못 하지.
“안 올 거 알아요.“
“그럴 수도 있고.”
기어코 신경 긁는 소리 한 마디 더 듣고, 문고리 잡은 손까지 속절없이 내줌. 당긴 것도 아닌데 몸까지 돌려서 마주보고 섰다고.
옆집남자가 몸을 너무 낮추지 않아도 곧바로 닿을 수 있게 고개도 들고, 발 끝도 세웠어.
며칠 전에 그랬던 것 만큼 그 정도로 가볍게 혀나 섞게 될 줄 알았지.
여긴 펍 베이커리로 이어지는 골목도 아니고, 나도 옆집남자도 술 한 방울 없는 맨정신이니까.
근데 어째 가볍게 끝나지가 않음.
끝나기는 커녕 점점 더 짙게 엉키기만 해서 숨이 막혀오기 시작함. 양쪽 집 사이에 벽이 없었으면 난 진작 넘어졌을 지도 몰라.
간신히 벽에 기대서 혀 섞는 동안 손은.. 내 허리 근처쯤에 머무르긴 했음. 등 쪽으로 약간 옮겨갔다가 다시 쓸어내리면서 내려오거나. 밑으로 약간 내려갔다가 허리 쪽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함.
...이거 아무래도 원래 습관대로 손 안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 같지?
알아채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에는 숨이 부족했음.
물리적으로 숨이 막히기도 하고 상황이 숨 막히기도 하고 그리고.. 아무래도 흥분하니까 호흡이 밭아져서 숨이 막히겠지.
결국 살겠다고 강제로 고개 들고 벽에 더 기댈 때 쯤에는 다리에 힘이 실리지도 않았음.
“으응···”
허리 받친 손이랑, 다리가 벌어지도록 파고든 허벅지가 아니었으면 넘어졌겠지.
분명히 한 쪽일 텐데 무슨 사람 허벅지 사이즈가.. 아니 그것도 그건데 허벅지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무슨 사이즈가..? 선 것도 아ㄴ, 아니 약간은 흥분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내 다리 사이에 다른 거라도 받쳐둔 게 아닌 이상 이 정도 이물감이 맞나..?
혼란스러운 상태로 눈 반쯤 감고 숨 고르다가 고개 내리면서 눈 마주쳤는데 기다리고 있더라.
단순히 내가 숨 고르는 동안 지켜보는 게 아니라, 물러날 생각이 없더라고.
약간 초식동물 목덜미 물어놓고 숨 끊어지는 거 기다리는 맹수를 코앞에서 직관하는 기분이었음. 근데 그 초식동물이 나인 거잖아? 살려줘.
”···“
맹ㅅ, 아니 옆집남자도 나도 좀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았음. 그래서 옆집남자 겉옷 안 쪽에 입은 셔츠를 잡아 당겨봄.
분명히 말하지만 내 쪽으로 당긴 게 아니라 바깥쪽으로 당겼어. 착각할 만한 방향도 아니잖아.
근데 이상하게 다시 가까워짐. 아무리 당겨도 가까워짐. 결국 다시 입을 벌려야 할 만큼 가까워졌어.
키스는 훨씬 느려져서 숨이 막히지는 않게 됐음. 대신 다리 안 쪽으로 자꾸 허벅지가, 그리고...
왜 며칠 전에 집 문 앞에서 가벼운 키스로 끝났는지 그제야 알았어. 그 날은 일종의 몰이사냥이었던 거지.
집 앞으로 날 몰아넣은 거라고. 한 번 풀려나면 두 번째도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잖아.
오늘도 그 정도로 끝날 거라고 방심했다가 지금처럼 흥분하기만 하면 그 다음은 쉽겠지.
우리 뒤에는 지붕 있는 집이 두 개나 있단 말임.
옆집남자는 내가 어디로든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날 흥분시켜서 기다리는 거지. 억지로 끌고 들어가면 본인이 원한 게 되니까. 어디까지나 내가 원한 일이어야 한단 말이지.
본인이 발 뺄 공간은 남겨두겠다는 거 아니겠어?
진짜.. 약아빠져서.
“여자 진짜 많이 꼬셔봤구나...”
머리는 어질거리고 다리에는 힘도 안 들어가고, 간신히 고개 돌리고 숨이나 헐떡이는데 옆집남자는 짧게 웃을 여유도 있더라.
누구는 웃을 기운도 없는데.
“···집에 갈래.“
”누구 집.“
”각자 집으로 잘 들어가요.“
이번엔 그 태연하기만 하던 얼굴도 굳기는 하더라. 사냥에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나 봐. 아예 없거나.
오히려 두어 주 정도 이르게 시도했으면 벌써 어느 쪽이든 집에 들어가서 흘레붙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힘만 빼고 전술만 노출한 채로 허탕 친 거지.
예상대로 비키라는 말에는 순순히 물러났음. 반 걸음 만큼만 떨어진 채로 내가 잠깐 벽에 기대서 숨 고르는 거 지켜봄.
실패 원인 복기라도 하나.
“잘 가요.”
숨 몇 번 고른 다음, 어디 먼 데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한테 인사하는 것처럼 손도 흔들어줌.
그리고 어느새 복도 바닥에 떨어져있던 내 가방도 주움. 가방 바닥 좀 몇 번 털어주고 이미 아까 열쇠로 땄는데 열어보지도 못한 손잡이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음.
문 닫고, 문 잘 잠그고.
그 다음에 현관 문에 기대서 미끄러져 앉았어.
옆집 문 열고 닫는 소리가 안 난 거 보면 옆집남자는 아직 복도에 서있겠지?
이상하다. 분명히 다 넘어 왔는데.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옆집남자는 아무리 밤새 복도에 서서 생각해도 만만한 초식동물 사냥에 실패한 원인은 못 찾을 거임.
그 원인은 나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씻고 잠이나 자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고작 하룻밤 몸을 섞지도 못할 만큼 꽤 진심이라는 건 옆집남자가 알 리가 없잖아.
왜냐면 나도 방금 알았거든.
.....그러게 좀 덜 꼬셨어야지.
❓......................❣️
🐆맥카이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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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ygall.com/6095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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