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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21:18
한달여 전의 일이다. 꽃밭에서 드디어 조로의 입으로 챠밍이 차를로스인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일을 염두에 둔 로우가 시간을 낸 것은. 그는 무려 직접 국제정세를 알려주겠다고 나섰다. 정작 조로는 공부라는 소리에 마지못해 책상 앞에 앉았다지만. 원체 공부와 연이 없는 조로에게 로우가 직접 교편을 잡은 과목은 특히 쥐약이었다.
‘그냥 내가 해치워야 되는 놈이 누군지만 알려주면 안 돼?’
‘롤로노아야! 지금 이 수업은 언제 또 네게 닥칠지 모를 위협을 대비해서라는 걸 명심해라! 그러니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이렇듯 로우가 마리조아와 드레스로자를 중심으로 우방 국가와 대립국이 어떻게 되는지, 또 현 세계정부 산하 기관인 해군과 사이퍼 폴의 차이 및 조직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세세히 풀어나가는 동안 하품하기 바빴던 조로는 불쑥 꺼낸 말로 화를 사기도 했다. 물론 로우가 사흘 밤낮을 말해도 부족함 없는 주제를 핵심만 압축해서 한 시간만에 정리한 얘기는 귀에 쏙쏙 들어올만큼 쉽고 간결했다. 단지 학생이 배울 의지가 없을 뿐이었는데 책상머리에 앉힌 것도 수업 내내 귀곡을 만지게 해주겠다는 회유책을 쓴 덕분이었다. 귀곡 역시 요기를 지닌 검으로 충성심이 남달라서 주인 외 사람이 손대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로는 이 검의 우직함을 높이 샀기에 평상시 절대 함부로 손대는 일이 없었다. 그저 로우에게 귀곡 칭찬을 종종 했을 뿐. 귀곡이 이토록 충성하도록 만들고 요사스런 기운을 잘 갈무리한 것 또한 로우의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로우의 의지를 따라 얌전했던 귀곡은 수업 내내 조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사랑받는 귀곡에 괜한 착잡함이 밀려들던 로우는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쓸 따름이었고. 하지만 오늘에 와서 로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됐다. 그러지 않고서야 조로가 어찌 스팬담을 한눈에 알아봤을까.
“육 연속 살모사성!”
연달아 날아간 여섯개의 납 탄환의 궤적이 마치 뱀의 모습과도 같았다. 스팬담은 여전히 본섬 뒤쪽, 도개교 부근의 밀집구역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어 탄환을 피한 그가 건물을 등지고 간신히 숨을 고를 때였다. 사방의 소란스러움은 물론 머리 위를 지나는 마물의 수가 많아진 느낌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닌 듯했다. 품 안의 전보벌레도 진작부터 울어대는 게 부관이 상황 전달을 하려는 모양인데 문제는 스팬담이 받을 겨를이 없다는 거였다.
“잡았다, 요놈! 필살 끈끈이성!”
“으악! 진드기 같은 놈!”
우솝이 저격수로 우수한데는 탁월한 공간지각력도 한몫했다. 때문에 그는 눈앞에 늘어선 건물을 보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의 지리와 거리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고로 스팬담이 경계하던 반대편에서 불쑥 나타난 우솝이 접착제가 든 탄환을 투구로 날렸을 때 그것은 절대 빗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달아나는 데 재능 넘치는 상대에 있었다.
“비겁한 놈 같으니! 그만 도망치고 이 저격왕과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자!”
“웃기시네! 허억! 무기도 없는 사람을 마구 공격하면서! 정정당당이 다 얼어죽었냐?!”
얼마나 더 뛰어야 할까. 숨이 턱까지 차오른 스팬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애완 검에게 밀짚모자를 지키도록 명령했던 걸 후회했다. 만오천 병력이 지키고 선 에니에스 로비에 정말 무슨 일이 생기겠냐 느긋했던 것을 말이다. 그 진한 후회 속에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든 스팬담이 방향을 트니 그 끝이 도개교를 향하는 걸 우솝도 눈치챘음이다. 이에 속으로 쾌재를 부름은 당연했고.
‘좋았어!’
사방이 탁 트이고 일직선상인 다리 위라면 저격에 더없이 용이하다. 이번에야말로 저 날다람쥐 같은 놈을 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때 도개교에 다달은 스팬담은 제 자부심의 상징과도 같던 사법의 탑 전체가 풍성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는 걸 봐야 했다.
“뭐야 저건??!!”
충격에 발이 멈춰버린 다리 위에서 스팬담은 비명을 질렀다.
스팬담은 CP9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이 막강한 전력이라면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하고 정점에 서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남자에게 마리조아의 늙은 왕이 내민 조건이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러자면 한 나라의 왕족을 말살한다는 반역에 가담해야 했지만 성공하면 혁명 아니던가. 물론 대상이 악명 높은 천야차라는 건 간담이 서늘해졌으나 스팬담에게는 CP9이 있었다. 그들도 직속상관인 스팬담의 말을 얼추 들어주는 편이었고. 세계정부의 첩보기관인 사이퍼 폴 중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넘버 나인은 살인면책 특권을 가졌다. 이말인즉 이들이 하는 모든 일은 철저히 음지에서 처리된다는 것이다. 서류 한장 남는 일 없이. 그런 이유로 루치가 중심이 된 CP9의 정예멤버는 세계정부가 일찍이 싹을 보고 데려와 키운 인재라 볼 수 있었다. 살인 병기라는 이명이 붙은 루치만 봐도 고작 열셋의 나이에 인질인 척 붙잡혀 오백이나 되는 숫자를 전멸시킨 전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일은 세계정부 수뇌부에도 CP9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으니 늙은 왕 또한 눈여겨봤으리라. 어둠의 정의를 신조로 한 그들에게 적으로 간주된 이를 위한 자비는 없다는 걸. 때문에 그들은 임무로 주어진 살인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철저하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는다. 하니 지난날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코 왕좌를 찬탈한 젊은 왕을 염두에 둔 늙은 왕에게 CP9만큼 적절한 사냥개도 없을 터였다. 그들이라면 젊은 왕과 로우 왕자를 죽이지 못했을 시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추격할 게 뻔했으니까. 이어 빈 왕좌에 차를로스를 옹립한다고 했을 때 늙은 왕은 스팬담에게 은근한 언질을 줬다.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무얼 하겠나. 왕관을 씌워줘도 흥청망청이겠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위로 묘한 웃음을 짓던 늙은 왕에 머리 회전이 빠른 스팬담은 촉이 왔다. 일이 성공하면 제게 그 뒷배를 맡기겠구나라는 걸. 그도 핏줄이 다른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건 언감생심임을 안다. 하니 꼭두각시를 세우고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다른 나라도 아닌 드레스로자인데. 풍요의 땅이라 불리는 드레스로자는 마리조아와 함께 세계 경제의 한 축을 지탱했다. 스팬담이 늙은 왕이 던진 썪은 고기를 덥석 문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 발판으로 쓰일 CP9에게 공을 들이는 것 역시 같은 뜻이었고 이는 칼리파가 거품거품 열매를 먹게 된 것과 귀결된다. 최근 스팬담이 인맥과 자비를 들여 어렵게 구한 악마의 열매 2개가 CP9 멤버 중 비능력자인 칼리파와 카쿠에게 돌아갔으니까. 악마의 열매는 유명한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먹어보기 전에 어떤 능력인지 알 방법이 없다. 때문에 칼리파도 힘을 갈구하는 마음에 먹은 거였고 그 결과 몸에서 거품이 나오는 비누인간이 됐다. CP9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칼리파의 몸에서 나오는 거품은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타인의 몸에서 힘이 빠지게 만들며 능력자 본인은 이 거품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고로 칼리파는 화마를 막고자 사법의 탑 건물에 거품을 덮어씌웠고 힘을 너무써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스팬담이 도개교 너머에서 본 장면이란 이것이었다. 제 자부심이나 다름없던 고고한 탑이 거품에 휩싸여 양 머리처럼 보였으니까. 그 앞으로는 피난 나온 마젤란과 코끼리 한 마리, 부관을 비롯한 병사 일동이 거대 양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개교너머 뒤를 바짝 추격한 우솝은 스팬담이 멈춰선 찬스를 놓치지 않았고.
“필살 특용 기름 성!”
짧은 시간이었지만 쫓기고 쫓는 관계 속에서 우솝은 스팬담의 발빠름 하나는 인정했다. 도망치는 것만큼은 세계 제일이라 자부하던 우솝이었으니. 그래서 부러 큰 소리로 놀래키니 역시 돌아오는 반응도 빠르다. 하나 스팬담이 고개 돌린 순간 탄환은 빗맞았고 부족장 같은 가면을 쓴 이는 삼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섰다. 이로써 놈이 쏜 회심의 공격이 빗나갔다고 단정한 스팬담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뗀 순간이었다.
“으악! 뭐야, 이건?!”
“좋았어! 필살 끈끈이성!”
빗나간 게 아니었다. 우솝은 스팬담의 발 앞에 기름이 가득 담긴 탄환을 날리며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를 끌었다. 이어 기름을 밟고 나동그라진 놈에게 접착제가 담긴 탄환을 날려 데미를 장식했으니 그는 다 잡은 놈 앞에 지체 없이 뛰어갔다. 하늘을 뒤덮는 마물의 그림자가 부쩍 가까워졌으므로 우솝은 한시라도 빨리 이 섬을 떠나고팠다. 그러나 스팬담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도개교 너머의 인원을 확인치 않은 건 실수였다.
“으악! 오지 마!! 젠장, 펑크프리드으!!!”
도개교의 길이는 약 삼백미터를 넘었으니 찰나에 너머를 확인키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스팬담도 덩치가 큰 마젤란과 애완 검만을 알아봤을 뿐이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백키로미터 너머의 빗소리도 듣는 코끼리 청각이라면 포탄 소리가 난무하는 곳에서도 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빠우ㅡ웅!!”
“으헉!”
역시나 주인의 위기 앞에서 한치 주저함 없던 코끼리검은 육중한 몸으로 달리는 동시에 채찍처럼 코를 늘렸다. 이 또한 열매를 통해 얻은 능력이니 엎어진 스팬담의 발치까지 달려온 우솝은 묵직한 채찍 한방에 낙엽처럼 휩쓸리고 말았다.
CP9에게 살인은 일의 연장선상이었다. 지난날 반정귀족을 돕고 여의치 않을 시 직접 로우 왕자를 제거하라는 비공식 임무가 들어왔을 때도 루치가 응했던 건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비공식이란 경우에 따라 거절하거나 그만둬도 되는 임무였으므로 조로의 등장에 쉽게 물러난 것이었고. 이렇듯 그들에게 임무로 내려온 살인이란 일말의 악감정도 없음이었다. 일찍이 그리하도록 훈련받아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함께해온 동료만큼은 아끼는지라 블루노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망설임 가득한 공격이란 물 먹은 솜과 마찬가지였다.
“납치범 자식!! 왜 그랬냐?! 왜 조로를 아프게 했어?!”
“내가 그런 게 아니다, 밀짚모자!”
“그럼 조로가 거짓말했다고??”
“아니, 그런ㅡ! 그건 아니지만, 윽!!”
“그럼 맞잖아, 납치범아!!”
블루노는 철괴로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해루석을 찬 루피의 단순한 주먹질에 얼굴을 맞은 그가 뒤로 밀려났다. 정식으로 CP9이 된 이래 이토록 마음이 흐트러진 적 있을까. 의식이 아찔해질 정도의 펀치를 맞은 블루노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밀짚모자의 뒤로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보이는 롤로노아가 보였다. 목에는 카쿠의 것이 분명한 손수건을 휘감고서. 블루노가 진정 흔들리는 건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처음 블루노를 공격했던 조로가 자연스레 뒤로 빠지고 루피가 이어받을 때만 해도 그는 두 사람의 합의된 공격인 줄 알았다. 골목에서 둘의 연계 전술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 하지만 블루노만이 보이는 시각에서 뒤로 물러난 조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조용히 괴로워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고 선 모습의 위태로움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급박했고 말이다. 하고 있는 꼴이 움직이는 시체 같은지라 더 극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지만 블루노는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앞서 조로의 공격을 방어했을 뿐인 그는 혹시 제가 모르고 녀석을 공격했나 싶었을 정도니. 저꼴을 보자면 기술 하나만 제대로 들어가도 바로 골로 가겠다 싶었기에 블루노는 답지 않게 속이 뜨끔했더랬다. 카쿠가 손수 둘러준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 때문에라도.
“하아, 하… 후……. 야, 루피! 이제 됐으니까 비켜! 이 자식은 내 상대야!”
그러던 중 드디어 고통이 가라앉았는지 숨을 고른 조로가 소리치며 튀어나왔다. 루피 역시 기다렸다는 듯 몸이 늘어지는 게 역시 해루석 탓이 컸다. 고문당한 몸으로 저녁도 못 먹고 해루석을 찬 채 계속 움직이려니 체력은 진작 한계점이었다. 이를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걸 잘 알고 있던 조로는 쉴 새 없이 공격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최우선 사항은 루피의 탈출이니 그러자면 당장 상대하는 놈의 발을 묶어둬야만 한다. 아무곳에나 문을 만들고 자유롭게 출입하는 녀석의 능력은 루피의 탈출에 매우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놈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현재 루피나 조로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곳이 철벽을 자랑하는 사법 섬인 이상 머리 위를 덮은 마물은 결국 진압될 것이니 상정외였고.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문제였다. 루피를 탈출시키기에는 지금의 혼란을 틈타는 게 가장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앞의 놈의 발을 잠시라도 묶어두는 게 한계라는 걸 감안한 조로는 틈을 보이는 때를 노리려 쉼없이 몰아쳤다. 그렇게 맞붙은 둘 사이로 맹렬하게 꽂힌 실 한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암반을 뚫고 들어가 날선 팽팽함을 자랑했다. 위험을 감지한 블루노와 조로가 뒤로 물러난 가운데 실을 따라 머리를 돌리니 이층 건물 위로 삼미터의 거대 홍학이 쪼그려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방금 막 뜯어낸 듯한 마물의 머리를 전리품처럼 손에 쥔 채로. 그는 피가 뚝뚝 흐르던 머리를 블루노 쪽에 던졌다. 블루노가 이를 가뿐히 쳐내니 위에서 내려다보던 이가 귀밑까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디어 찾았군. 염병할 왕세자비를.”
참으로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우솝이 가면을 쓰고 저격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건 이유가 있었다. 진실과 무관하게 루피에게 행해진 일련의 사태는 모두 법의 집행하에 있다는 것. 이로써 루피를 구출하려는 행위는 범죄에 해당되니 정체가 탄로나면 곤란하다는 게 나미의 주장이었다. 저희의 정체가 탄로난다는 건 애당초 경비 충당을 이유로 이 셋의 출장을 허락한 츠루 대참모에게도 누가 됐다. 사법 섬까지 안내해준 레이주도 마찬가지고.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판사판으로 나갈 결심은 하되 가능한 정체를 숨기자는 말을 했고 로빈, 우솝도 동의했다. 그런 이유로 가면을 쓰고 등장한 우솝은 현재 도개교 앞에서 곤죽이돼 쓰러져 있었다. 부관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끈끈이에서 해방된 스팬담은 마젤란과 칼리파를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해졌고 말이다. 그사이 코끼리 발에 축구공마냥 이리저리 채였던 우솝은 이제 그 발에 가슴이 짓눌려 옴짝달싹 못했다. 그 위로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스팬담이 으스대며 얼굴을 내밀었으니 한 손에는 정방형 버튼을 쥐고 있었다. 가로세로 손가락 한마디쯤 돼보이는 제어장치에는 원 형태의 붉은 단추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별것도 아닌 자식이 애먹이기는. 이봐, 너. 이게 뭔지 아냐? 응? 원격으로 폭탄을 터뜨릴 수 있는 제어장치다, 이게.”
스팬담은 손으로 우솝의 가면을 벗길듯 말듯 툭툭 치며 조롱했다. 그 순간에도 손을 뻗어 버튼을 빼앗으려 한 우솝에 스팬담이 얄밉게 팔을 들어올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구둣발로 우솝을 툭툭 건드리며 이죽였다.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밀짚모자는 끝이라고. 놈의 목에 찬 구속구를 봤겠지? 거기엔 반경 일미터 내에 있는 놈들까지 함께 세상 하직할만 한 폭탄이 장착돼 있다. 그러니까 내가 손 한번 까딱하면 밀짚모자랑 붙어있던 가짜 해병 놈까지 고기조각이 된다는 소리지. 알아들었냐?”
“그거 이리 내놓지 못해?! 이 겁쟁이 자식아! 혼자서는 도망밖에 칠 줄 모르는 주제에, 커헉!”
스팬담은 190이 넘는 장신이었다. 긴 다리가 옆구리를 걷어차니 묵직한 소리가 났다. 코끼리발에 눌려 꼼짝 못했던 우솝은 누운 그대로 피를 토했다. 가면 새로 흐르는 피 섞인 타액에 스팬담이 바들거리던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런 놈 때문에 꽁지 빠져라 달렸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감히 CP9을 거느린 지령장관인 자신인데.
“너무 억울해할 거 없어. 블루노가 잡아올 밀짚모자와 같이 네녀석도 임펠다운에서 사형 확정이니까. 그전에 오늘 이 난리를 부린 주모자의 면상이나 좀 볼ㅡ! 어이쿠!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네, 버러지가!!”
“으악!! 제길… 젠장!!”
스팬담은 세계 제일의 흉악범이 모이는 임펠다운 간수장 마젤란이 곁에 있으니 마물이 떼로 와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고로 제 다리를 잡아 넘어트리려 한 저격왕의 손을 구둣발로 자근자근 밟으며 마음껏 조롱했다. 그는 반격할 수 없는 약자를 괴롭힐 때가 제일 즐거웠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몸소 느낄 때. 이에 심취하느라 조금 전 넘어질 뻔하면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도 몰랐음이다.
“저기… 저, 장관님…….”
“뭐야?! 방해하지 마!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자신의 약함으로 친구들에게 도움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우솝이 통한의 눈물을 토하고 있었다. 이를 위에서 즐겁게 내려다보며 남의 고통을 즐기던 스팬담은 부관이 자꾸 불러대는 소리에 신경질을 냈다. 그러다 제 엄지손이 버튼을 있는 힘껏 누르고 있는 걸 봤음이니 뒤늦게 힘을 풀어봐야 소용없음이었다.
쾅! 콰광! 때맞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옴에 블루노를 떠올린 스팬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녀석이라면 설령 코앞에서 폭탄이 터져도 피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지만 만일 잘못된다면 그는 루치에게 죽은 목숨이었다.
“으윽!”
“카쿠!”
“괜찮아! 아직 견딜만하구먼!”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은 본섬보다 차량기지가 있는 앞쪽 작은섬이었다. 역시 짐칸의 마물 팔이 오늘 일의 원인인 듯 이곳에는 가장 강한 성체들이 몰려들었다. 앞서 처리한 십여마리를 제해도 그새 늘어난 수는 오십여마리를 훌쩍 넘었다. 놈들은 뭔가에 끌리듯 마물 팔이 있는 짐칸 차량을 에워싸고 공격해 들어왔다. 카쿠를 상대적으로 안전한 열차 안에서 싸우게 한 게 독이 됐을까. 놈들은 곧 한 마리씩밖에 드나들지 못하는 출입구의 한계를 타파하려 열차의 천장을 뭉개버렸다. 이때 카쿠가 증거물을 보존하려다 놈들 중 한놈에게 손목이 물렸다. 뼈가 드러나도록 살점이 크게 떨어져나간 카쿠는 놈들에게 약체로 찍혔는데 이후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다. 상처를 처치할 새도 없이 싸우던 카쿠가 비틀거린 순간에 마물 하나가 갈고리같은 손을 뻗어 잡아채려 했다. 카쿠는 간신히 피했지만 어깨에 긴 상흔이 남았다. 그 뒤쪽에서 싸우던 루치는 고양고양 열매 모델 표범의 능력자로서 반인반수의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이로 인해 더욱 맹렬해진 위세에 놈들이 주춤하니 루치가 도약 한번으로 넓은 차량기지의 거리를 좁혔다. 루치는 이쯤에서 증거물 확보를 포기하려 했지만 카쿠가 한발 빨랐다. 일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카쿠가 루치에게 발로 차보낸 건 마물 팔이었다.
“가져가. 내가 엄호할테니.”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카쿠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임무가 우선이며 이를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 이것은 그들이 배운 전부다. 그리고 카쿠는 루치라면 증거물을 들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걸 믿고 있다. 또한 그가 오늘날 의문투성이인 마물의 행동에 대해서도 밝혀낼 것이며 이는 곧 놈들에 의한 많은 희생을 줄이는 방편이 돼주리라는 것도. 이렇듯 카쿠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저희를 이끌어준 루치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를 위한 희생은 전혀 아까울 것이 없다며. 반사적으로 마물 팔을 받아든 루치는 사방의 마물이 움찔대는 것에 위협적으로 그르릉대는 소리를 냈다. 표범을 모방한 반인반수 형상인 그는 인간일 때보다 훨씬 크고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 절대적인 위압감에 마물들이 멈칫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리라. 결국 놈들이 원하는 건 여기 있었으니.
“…….”
손에 쥔 썪은 내 나는 팔 한짝과 카쿠를 번갈아본 루치는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루치……!”
“키에엑!!”
멀리 던져버린 팔에 마물들이 홀린 듯 몰려들었다. 저게 뭐가 그리 특별한지 서로 갖겠다며 살육을 일삼던 놈들에 괴성이 난무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으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메우는 가운데 루치는 격렬한 무리의 기세에 지레 물러난 한 녀석이 카쿠의 뒤로 접근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마리 표범과 같이 뛰어오른 루치가 놈의 뒤에서 나타나 한번에 목뼈를 부러트림은 당연했다. 삼미터를 웃도는 거구가 인형처럼 무너질 때 그제야 간신히 서있던 카쿠가 크게 휘청했다. 이를 덤덤히 한 팔로 부축한 루치는 팔 하나를 두고 싸우는 놈들에게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겠나?”
“물론이구먼.”
실없는 웃음처럼 들려온 대답에 그제야 루치의 시선이 잠시 카쿠를 향했다. 못미더움이 가득한 눈빛에 카쿠가 먼저 루치의 손을 털어내고 홀로섰다. 그제야 먼저 움직이던 루치를 따라 차량기지를 벗어날 때 팔의 주인이 정해졌는지 다른 마물들이 두 사람을 주목했다. 이어 놈들이 뒤를 바짝 추격하니 본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이미 시체의 산을 이뤘다. 어둠이 가장 깊게 깔린, 동트기 전의 새벽이었다.
한조각
‘그냥 내가 해치워야 되는 놈이 누군지만 알려주면 안 돼?’
‘롤로노아야! 지금 이 수업은 언제 또 네게 닥칠지 모를 위협을 대비해서라는 걸 명심해라! 그러니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이렇듯 로우가 마리조아와 드레스로자를 중심으로 우방 국가와 대립국이 어떻게 되는지, 또 현 세계정부 산하 기관인 해군과 사이퍼 폴의 차이 및 조직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세세히 풀어나가는 동안 하품하기 바빴던 조로는 불쑥 꺼낸 말로 화를 사기도 했다. 물론 로우가 사흘 밤낮을 말해도 부족함 없는 주제를 핵심만 압축해서 한 시간만에 정리한 얘기는 귀에 쏙쏙 들어올만큼 쉽고 간결했다. 단지 학생이 배울 의지가 없을 뿐이었는데 책상머리에 앉힌 것도 수업 내내 귀곡을 만지게 해주겠다는 회유책을 쓴 덕분이었다. 귀곡 역시 요기를 지닌 검으로 충성심이 남달라서 주인 외 사람이 손대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로는 이 검의 우직함을 높이 샀기에 평상시 절대 함부로 손대는 일이 없었다. 그저 로우에게 귀곡 칭찬을 종종 했을 뿐. 귀곡이 이토록 충성하도록 만들고 요사스런 기운을 잘 갈무리한 것 또한 로우의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로우의 의지를 따라 얌전했던 귀곡은 수업 내내 조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사랑받는 귀곡에 괜한 착잡함이 밀려들던 로우는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쓸 따름이었고. 하지만 오늘에 와서 로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됐다. 그러지 않고서야 조로가 어찌 스팬담을 한눈에 알아봤을까.
“육 연속 살모사성!”
연달아 날아간 여섯개의 납 탄환의 궤적이 마치 뱀의 모습과도 같았다. 스팬담은 여전히 본섬 뒤쪽, 도개교 부근의 밀집구역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어 탄환을 피한 그가 건물을 등지고 간신히 숨을 고를 때였다. 사방의 소란스러움은 물론 머리 위를 지나는 마물의 수가 많아진 느낌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닌 듯했다. 품 안의 전보벌레도 진작부터 울어대는 게 부관이 상황 전달을 하려는 모양인데 문제는 스팬담이 받을 겨를이 없다는 거였다.
“잡았다, 요놈! 필살 끈끈이성!”
“으악! 진드기 같은 놈!”
우솝이 저격수로 우수한데는 탁월한 공간지각력도 한몫했다. 때문에 그는 눈앞에 늘어선 건물을 보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의 지리와 거리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고로 스팬담이 경계하던 반대편에서 불쑥 나타난 우솝이 접착제가 든 탄환을 투구로 날렸을 때 그것은 절대 빗나가지 않았다. 문제는 달아나는 데 재능 넘치는 상대에 있었다.
“비겁한 놈 같으니! 그만 도망치고 이 저격왕과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자!”
“웃기시네! 허억! 무기도 없는 사람을 마구 공격하면서! 정정당당이 다 얼어죽었냐?!”
얼마나 더 뛰어야 할까. 숨이 턱까지 차오른 스팬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애완 검에게 밀짚모자를 지키도록 명령했던 걸 후회했다. 만오천 병력이 지키고 선 에니에스 로비에 정말 무슨 일이 생기겠냐 느긋했던 것을 말이다. 그 진한 후회 속에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든 스팬담이 방향을 트니 그 끝이 도개교를 향하는 걸 우솝도 눈치챘음이다. 이에 속으로 쾌재를 부름은 당연했고.
‘좋았어!’
사방이 탁 트이고 일직선상인 다리 위라면 저격에 더없이 용이하다. 이번에야말로 저 날다람쥐 같은 놈을 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때 도개교에 다달은 스팬담은 제 자부심의 상징과도 같던 사법의 탑 전체가 풍성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는 걸 봐야 했다.
“뭐야 저건??!!”
충격에 발이 멈춰버린 다리 위에서 스팬담은 비명을 질렀다.
스팬담은 CP9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이 막강한 전력이라면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하고 정점에 서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남자에게 마리조아의 늙은 왕이 내민 조건이 얼마나 달콤했을까. 그러자면 한 나라의 왕족을 말살한다는 반역에 가담해야 했지만 성공하면 혁명 아니던가. 물론 대상이 악명 높은 천야차라는 건 간담이 서늘해졌으나 스팬담에게는 CP9이 있었다. 그들도 직속상관인 스팬담의 말을 얼추 들어주는 편이었고. 세계정부의 첩보기관인 사이퍼 폴 중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넘버 나인은 살인면책 특권을 가졌다. 이말인즉 이들이 하는 모든 일은 철저히 음지에서 처리된다는 것이다. 서류 한장 남는 일 없이. 그런 이유로 루치가 중심이 된 CP9의 정예멤버는 세계정부가 일찍이 싹을 보고 데려와 키운 인재라 볼 수 있었다. 살인 병기라는 이명이 붙은 루치만 봐도 고작 열셋의 나이에 인질인 척 붙잡혀 오백이나 되는 숫자를 전멸시킨 전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일은 세계정부 수뇌부에도 CP9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으니 늙은 왕 또한 눈여겨봤으리라. 어둠의 정의를 신조로 한 그들에게 적으로 간주된 이를 위한 자비는 없다는 걸. 때문에 그들은 임무로 주어진 살인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철저하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는다. 하니 지난날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코 왕좌를 찬탈한 젊은 왕을 염두에 둔 늙은 왕에게 CP9만큼 적절한 사냥개도 없을 터였다. 그들이라면 젊은 왕과 로우 왕자를 죽이지 못했을 시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추격할 게 뻔했으니까. 이어 빈 왕좌에 차를로스를 옹립한다고 했을 때 늙은 왕은 스팬담에게 은근한 언질을 줬다.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무얼 하겠나. 왕관을 씌워줘도 흥청망청이겠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위로 묘한 웃음을 짓던 늙은 왕에 머리 회전이 빠른 스팬담은 촉이 왔다. 일이 성공하면 제게 그 뒷배를 맡기겠구나라는 걸. 그도 핏줄이 다른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건 언감생심임을 안다. 하니 꼭두각시를 세우고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다른 나라도 아닌 드레스로자인데. 풍요의 땅이라 불리는 드레스로자는 마리조아와 함께 세계 경제의 한 축을 지탱했다. 스팬담이 늙은 왕이 던진 썪은 고기를 덥석 문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 발판으로 쓰일 CP9에게 공을 들이는 것 역시 같은 뜻이었고 이는 칼리파가 거품거품 열매를 먹게 된 것과 귀결된다. 최근 스팬담이 인맥과 자비를 들여 어렵게 구한 악마의 열매 2개가 CP9 멤버 중 비능력자인 칼리파와 카쿠에게 돌아갔으니까. 악마의 열매는 유명한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먹어보기 전에 어떤 능력인지 알 방법이 없다. 때문에 칼리파도 힘을 갈구하는 마음에 먹은 거였고 그 결과 몸에서 거품이 나오는 비누인간이 됐다. CP9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칼리파의 몸에서 나오는 거품은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타인의 몸에서 힘이 빠지게 만들며 능력자 본인은 이 거품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고로 칼리파는 화마를 막고자 사법의 탑 건물에 거품을 덮어씌웠고 힘을 너무써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스팬담이 도개교 너머에서 본 장면이란 이것이었다. 제 자부심이나 다름없던 고고한 탑이 거품에 휩싸여 양 머리처럼 보였으니까. 그 앞으로는 피난 나온 마젤란과 코끼리 한 마리, 부관을 비롯한 병사 일동이 거대 양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개교너머 뒤를 바짝 추격한 우솝은 스팬담이 멈춰선 찬스를 놓치지 않았고.
“필살 특용 기름 성!”
짧은 시간이었지만 쫓기고 쫓는 관계 속에서 우솝은 스팬담의 발빠름 하나는 인정했다. 도망치는 것만큼은 세계 제일이라 자부하던 우솝이었으니. 그래서 부러 큰 소리로 놀래키니 역시 돌아오는 반응도 빠르다. 하나 스팬담이 고개 돌린 순간 탄환은 빗맞았고 부족장 같은 가면을 쓴 이는 삼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섰다. 이로써 놈이 쏜 회심의 공격이 빗나갔다고 단정한 스팬담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발을 뗀 순간이었다.
“으악! 뭐야, 이건?!”
“좋았어! 필살 끈끈이성!”
빗나간 게 아니었다. 우솝은 스팬담의 발 앞에 기름이 가득 담긴 탄환을 날리며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를 끌었다. 이어 기름을 밟고 나동그라진 놈에게 접착제가 담긴 탄환을 날려 데미를 장식했으니 그는 다 잡은 놈 앞에 지체 없이 뛰어갔다. 하늘을 뒤덮는 마물의 그림자가 부쩍 가까워졌으므로 우솝은 한시라도 빨리 이 섬을 떠나고팠다. 그러나 스팬담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도개교 너머의 인원을 확인치 않은 건 실수였다.
“으악! 오지 마!! 젠장, 펑크프리드으!!!”
도개교의 길이는 약 삼백미터를 넘었으니 찰나에 너머를 확인키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스팬담도 덩치가 큰 마젤란과 애완 검만을 알아봤을 뿐이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백키로미터 너머의 빗소리도 듣는 코끼리 청각이라면 포탄 소리가 난무하는 곳에서도 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빠우ㅡ웅!!”
“으헉!”
역시나 주인의 위기 앞에서 한치 주저함 없던 코끼리검은 육중한 몸으로 달리는 동시에 채찍처럼 코를 늘렸다. 이 또한 열매를 통해 얻은 능력이니 엎어진 스팬담의 발치까지 달려온 우솝은 묵직한 채찍 한방에 낙엽처럼 휩쓸리고 말았다.
CP9에게 살인은 일의 연장선상이었다. 지난날 반정귀족을 돕고 여의치 않을 시 직접 로우 왕자를 제거하라는 비공식 임무가 들어왔을 때도 루치가 응했던 건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비공식이란 경우에 따라 거절하거나 그만둬도 되는 임무였으므로 조로의 등장에 쉽게 물러난 것이었고. 이렇듯 그들에게 임무로 내려온 살인이란 일말의 악감정도 없음이었다. 일찍이 그리하도록 훈련받아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함께해온 동료만큼은 아끼는지라 블루노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망설임 가득한 공격이란 물 먹은 솜과 마찬가지였다.
“납치범 자식!! 왜 그랬냐?! 왜 조로를 아프게 했어?!”
“내가 그런 게 아니다, 밀짚모자!”
“그럼 조로가 거짓말했다고??”
“아니, 그런ㅡ! 그건 아니지만, 윽!!”
“그럼 맞잖아, 납치범아!!”
블루노는 철괴로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해루석을 찬 루피의 단순한 주먹질에 얼굴을 맞은 그가 뒤로 밀려났다. 정식으로 CP9이 된 이래 이토록 마음이 흐트러진 적 있을까. 의식이 아찔해질 정도의 펀치를 맞은 블루노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밀짚모자의 뒤로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보이는 롤로노아가 보였다. 목에는 카쿠의 것이 분명한 손수건을 휘감고서. 블루노가 진정 흔들리는 건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처음 블루노를 공격했던 조로가 자연스레 뒤로 빠지고 루피가 이어받을 때만 해도 그는 두 사람의 합의된 공격인 줄 알았다. 골목에서 둘의 연계 전술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 하지만 블루노만이 보이는 시각에서 뒤로 물러난 조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조용히 괴로워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고 선 모습의 위태로움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급박했고 말이다. 하고 있는 꼴이 움직이는 시체 같은지라 더 극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지만 블루노는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앞서 조로의 공격을 방어했을 뿐인 그는 혹시 제가 모르고 녀석을 공격했나 싶었을 정도니. 저꼴을 보자면 기술 하나만 제대로 들어가도 바로 골로 가겠다 싶었기에 블루노는 답지 않게 속이 뜨끔했더랬다. 카쿠가 손수 둘러준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 때문에라도.
“하아, 하… 후……. 야, 루피! 이제 됐으니까 비켜! 이 자식은 내 상대야!”
그러던 중 드디어 고통이 가라앉았는지 숨을 고른 조로가 소리치며 튀어나왔다. 루피 역시 기다렸다는 듯 몸이 늘어지는 게 역시 해루석 탓이 컸다. 고문당한 몸으로 저녁도 못 먹고 해루석을 찬 채 계속 움직이려니 체력은 진작 한계점이었다. 이를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걸 잘 알고 있던 조로는 쉴 새 없이 공격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최우선 사항은 루피의 탈출이니 그러자면 당장 상대하는 놈의 발을 묶어둬야만 한다. 아무곳에나 문을 만들고 자유롭게 출입하는 녀석의 능력은 루피의 탈출에 매우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놈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현재 루피나 조로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곳이 철벽을 자랑하는 사법 섬인 이상 머리 위를 덮은 마물은 결국 진압될 것이니 상정외였고.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문제였다. 루피를 탈출시키기에는 지금의 혼란을 틈타는 게 가장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앞의 놈의 발을 잠시라도 묶어두는 게 한계라는 걸 감안한 조로는 틈을 보이는 때를 노리려 쉼없이 몰아쳤다. 그렇게 맞붙은 둘 사이로 맹렬하게 꽂힌 실 한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암반을 뚫고 들어가 날선 팽팽함을 자랑했다. 위험을 감지한 블루노와 조로가 뒤로 물러난 가운데 실을 따라 머리를 돌리니 이층 건물 위로 삼미터의 거대 홍학이 쪼그려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방금 막 뜯어낸 듯한 마물의 머리를 전리품처럼 손에 쥔 채로. 그는 피가 뚝뚝 흐르던 머리를 블루노 쪽에 던졌다. 블루노가 이를 가뿐히 쳐내니 위에서 내려다보던 이가 귀밑까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디어 찾았군. 염병할 왕세자비를.”
참으로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우솝이 가면을 쓰고 저격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건 이유가 있었다. 진실과 무관하게 루피에게 행해진 일련의 사태는 모두 법의 집행하에 있다는 것. 이로써 루피를 구출하려는 행위는 범죄에 해당되니 정체가 탄로나면 곤란하다는 게 나미의 주장이었다. 저희의 정체가 탄로난다는 건 애당초 경비 충당을 이유로 이 셋의 출장을 허락한 츠루 대참모에게도 누가 됐다. 사법 섬까지 안내해준 레이주도 마찬가지고.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판사판으로 나갈 결심은 하되 가능한 정체를 숨기자는 말을 했고 로빈, 우솝도 동의했다. 그런 이유로 가면을 쓰고 등장한 우솝은 현재 도개교 앞에서 곤죽이돼 쓰러져 있었다. 부관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끈끈이에서 해방된 스팬담은 마젤란과 칼리파를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해졌고 말이다. 그사이 코끼리 발에 축구공마냥 이리저리 채였던 우솝은 이제 그 발에 가슴이 짓눌려 옴짝달싹 못했다. 그 위로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스팬담이 으스대며 얼굴을 내밀었으니 한 손에는 정방형 버튼을 쥐고 있었다. 가로세로 손가락 한마디쯤 돼보이는 제어장치에는 원 형태의 붉은 단추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별것도 아닌 자식이 애먹이기는. 이봐, 너. 이게 뭔지 아냐? 응? 원격으로 폭탄을 터뜨릴 수 있는 제어장치다, 이게.”
스팬담은 손으로 우솝의 가면을 벗길듯 말듯 툭툭 치며 조롱했다. 그 순간에도 손을 뻗어 버튼을 빼앗으려 한 우솝에 스팬담이 얄밉게 팔을 들어올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구둣발로 우솝을 툭툭 건드리며 이죽였다.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밀짚모자는 끝이라고. 놈의 목에 찬 구속구를 봤겠지? 거기엔 반경 일미터 내에 있는 놈들까지 함께 세상 하직할만 한 폭탄이 장착돼 있다. 그러니까 내가 손 한번 까딱하면 밀짚모자랑 붙어있던 가짜 해병 놈까지 고기조각이 된다는 소리지. 알아들었냐?”
“그거 이리 내놓지 못해?! 이 겁쟁이 자식아! 혼자서는 도망밖에 칠 줄 모르는 주제에, 커헉!”
스팬담은 190이 넘는 장신이었다. 긴 다리가 옆구리를 걷어차니 묵직한 소리가 났다. 코끼리발에 눌려 꼼짝 못했던 우솝은 누운 그대로 피를 토했다. 가면 새로 흐르는 피 섞인 타액에 스팬담이 바들거리던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런 놈 때문에 꽁지 빠져라 달렸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감히 CP9을 거느린 지령장관인 자신인데.
“너무 억울해할 거 없어. 블루노가 잡아올 밀짚모자와 같이 네녀석도 임펠다운에서 사형 확정이니까. 그전에 오늘 이 난리를 부린 주모자의 면상이나 좀 볼ㅡ! 어이쿠!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네, 버러지가!!”
“으악!! 제길… 젠장!!”
스팬담은 세계 제일의 흉악범이 모이는 임펠다운 간수장 마젤란이 곁에 있으니 마물이 떼로 와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고로 제 다리를 잡아 넘어트리려 한 저격왕의 손을 구둣발로 자근자근 밟으며 마음껏 조롱했다. 그는 반격할 수 없는 약자를 괴롭힐 때가 제일 즐거웠다.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몸소 느낄 때. 이에 심취하느라 조금 전 넘어질 뻔하면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도 몰랐음이다.
“저기… 저, 장관님…….”
“뭐야?! 방해하지 마!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자신의 약함으로 친구들에게 도움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우솝이 통한의 눈물을 토하고 있었다. 이를 위에서 즐겁게 내려다보며 남의 고통을 즐기던 스팬담은 부관이 자꾸 불러대는 소리에 신경질을 냈다. 그러다 제 엄지손이 버튼을 있는 힘껏 누르고 있는 걸 봤음이니 뒤늦게 힘을 풀어봐야 소용없음이었다.
쾅! 콰광! 때맞춰 포탄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옴에 블루노를 떠올린 스팬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녀석이라면 설령 코앞에서 폭탄이 터져도 피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지만 만일 잘못된다면 그는 루치에게 죽은 목숨이었다.
“으윽!”
“카쿠!”
“괜찮아! 아직 견딜만하구먼!”
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은 본섬보다 차량기지가 있는 앞쪽 작은섬이었다. 역시 짐칸의 마물 팔이 오늘 일의 원인인 듯 이곳에는 가장 강한 성체들이 몰려들었다. 앞서 처리한 십여마리를 제해도 그새 늘어난 수는 오십여마리를 훌쩍 넘었다. 놈들은 뭔가에 끌리듯 마물 팔이 있는 짐칸 차량을 에워싸고 공격해 들어왔다. 카쿠를 상대적으로 안전한 열차 안에서 싸우게 한 게 독이 됐을까. 놈들은 곧 한 마리씩밖에 드나들지 못하는 출입구의 한계를 타파하려 열차의 천장을 뭉개버렸다. 이때 카쿠가 증거물을 보존하려다 놈들 중 한놈에게 손목이 물렸다. 뼈가 드러나도록 살점이 크게 떨어져나간 카쿠는 놈들에게 약체로 찍혔는데 이후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다. 상처를 처치할 새도 없이 싸우던 카쿠가 비틀거린 순간에 마물 하나가 갈고리같은 손을 뻗어 잡아채려 했다. 카쿠는 간신히 피했지만 어깨에 긴 상흔이 남았다. 그 뒤쪽에서 싸우던 루치는 고양고양 열매 모델 표범의 능력자로서 반인반수의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이로 인해 더욱 맹렬해진 위세에 놈들이 주춤하니 루치가 도약 한번으로 넓은 차량기지의 거리를 좁혔다. 루치는 이쯤에서 증거물 확보를 포기하려 했지만 카쿠가 한발 빨랐다. 일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카쿠가 루치에게 발로 차보낸 건 마물 팔이었다.
“가져가. 내가 엄호할테니.”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카쿠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임무가 우선이며 이를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 이것은 그들이 배운 전부다. 그리고 카쿠는 루치라면 증거물을 들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걸 믿고 있다. 또한 그가 오늘날 의문투성이인 마물의 행동에 대해서도 밝혀낼 것이며 이는 곧 놈들에 의한 많은 희생을 줄이는 방편이 돼주리라는 것도. 이렇듯 카쿠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저희를 이끌어준 루치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를 위한 희생은 전혀 아까울 것이 없다며. 반사적으로 마물 팔을 받아든 루치는 사방의 마물이 움찔대는 것에 위협적으로 그르릉대는 소리를 냈다. 표범을 모방한 반인반수 형상인 그는 인간일 때보다 훨씬 크고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 절대적인 위압감에 마물들이 멈칫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리라. 결국 놈들이 원하는 건 여기 있었으니.
“…….”
손에 쥔 썪은 내 나는 팔 한짝과 카쿠를 번갈아본 루치는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루치……!”
“키에엑!!”
멀리 던져버린 팔에 마물들이 홀린 듯 몰려들었다. 저게 뭐가 그리 특별한지 서로 갖겠다며 살육을 일삼던 놈들에 괴성이 난무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으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메우는 가운데 루치는 격렬한 무리의 기세에 지레 물러난 한 녀석이 카쿠의 뒤로 접근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마리 표범과 같이 뛰어오른 루치가 놈의 뒤에서 나타나 한번에 목뼈를 부러트림은 당연했다. 삼미터를 웃도는 거구가 인형처럼 무너질 때 그제야 간신히 서있던 카쿠가 크게 휘청했다. 이를 덤덤히 한 팔로 부축한 루치는 팔 하나를 두고 싸우는 놈들에게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겠나?”
“물론이구먼.”
실없는 웃음처럼 들려온 대답에 그제야 루치의 시선이 잠시 카쿠를 향했다. 못미더움이 가득한 눈빛에 카쿠가 먼저 루치의 손을 털어내고 홀로섰다. 그제야 먼저 움직이던 루치를 따라 차량기지를 벗어날 때 팔의 주인이 정해졌는지 다른 마물들이 두 사람을 주목했다. 이어 놈들이 뒤를 바짝 추격하니 본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이미 시체의 산을 이뤘다. 어둠이 가장 깊게 깔린, 동트기 전의 새벽이었다.
한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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